레이블이 [고대 이집트 역사]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고대 이집트 역사]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5년 9월 12일 금요일

고대 이집트 3000년의 역사 살펴보기 : [제1왕조에서 제31왕조까지]

고대 이집트 3000년의 역사 살펴보기 : [1왕조에서 제31왕조까지]

 
시대와 왕조를 클릭하면 보다 자세한 내용을 접할 수 있다.

이집트의 상징 피라미드
이집트의 상징 피라미드

0. 원왕조 시대


1. 초기왕조 시대

 

[고대 이집트] 후기 시대(Late Period, 제26~31왕조) : 독립을 위한 투쟁과 좌절(기원전 664~332년)

[고대 이집트] 후기 시대(Late Period, 26~31왕조) : 독립을 위한 투쟁과 좌절(기원전 664~332)

 

1. 후기 시대 개요

 
고대 이집트 후기 시대(Late Period)는 제3중간기 이후, 사이트 왕조 제26왕조를 세운 프삼티크 1(Psamtik I)가 시작한 고대 이집트 토착 통치자의 마지막 전성기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다만 이 시기에는 기원전 525년에 캄비세스 2(Cambyses II)에게 정복된 뒤 이어진 아케메네스 제국의 이집트 지배 기간도 포함된다. 후기 시대의 연대는 기원전 664년부터 기원전 332년까지이며, 그 앞에는 누비아계 제25왕조의 외래 지배가 있었고, 시작은 신아시리아의 패권하에서 프삼티크 1세가 초기에는 봉신으로 통치하던 짧은 시기로부터 출발한다. 이 시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아케메네스 제국이 붕괴하고, 그의 장군이자 마케도니아계 헬레니즘 디아도코이 중 한 사람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Ptolemy I Soter)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세우면서 끝난다. 기원전 4세기 후반 마케도니아 그리스의 정복으로 헬레니즘 이집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2. 이집트 제26왕조(사이트 왕조) : 기원전 672~525


 
26왕조는 권력 중심지 사이스(Sais)의 이름을 따 사이트 왕조로도 불리며, 기원전 672525년에 통치했고 여섯 명의 파라오로 구성되었다. 시초는 기원전 663년 아시리아의 테베 약탈의 직접적 결과로서, 기원전 656년경 프삼티크 1(Psamtik I)에 의한 이집트 통일에서 비롯되었다. 나일강에서 홍해로 이어지는 운하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 초반 이집트는 근동으로 세력을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655년경 아슈돗(Ashdod) 도시를 정복했으며, 7세기 말 레반트 전역에서 출토된 다양한 고고학 자료는 이집트의 점령과 통제를 보여 준다. 여기에는 여러 유적에서 발견된 이집트 유물, 조공/조세 체계를 보여 주는 오스트라카와 문서, 메차드 하샤바야후(Mezad Hashavyahu) 요새에서 나온 증거가 포함된다. 이집트의 영향은 키무후(Kimuhu)와 쿠라마티(Quramati) 같은 지역을 거쳐 유프라테스 일대까지 미쳤다. 이후 카르케미시(Carchemish) 패배로 밀려났으나, 그 이후에도 근동 개입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시스 2(Amasis II)는 새로운 정책을 추진해 관심을 그리스 세계로 돌렸다. 그는 재위 중 키프로스(Cyprus)를 병합했다. 남쪽에서는 프삼티크 2(Psamtik II)가 대규모 원정을 지휘하여 상()누비아 깊숙이 진출해 그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아호모세 2(Ahmose II) 치세의 파피루스는 누비아로의 소규모 원정을 기술하지만, 그 성격은 명확하지 않다. 사이트 시대 하()누비아 도르기나르티(Dorginarti)에 이집트 주둔군이 있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
 
고대 이집트 후기 시대의 주요 공헌 가운데 하나는 브루클린 파피루스(Brooklyn Papyrus)이다. 이는 뱀의 종류 또는 증상에 따라 뱀에 물린 피해자를 위한 의학적ㆍ주술적 처방을 모은 의학 파피루스였다.
 
이 시기의 미술은 동물 숭배와 동물 미라를 대표 주제로 삼았다. 예시로, 파타이코스(Pataikos) 신이 머리에 스카라브(풍뎅이)를 이고, 어깨에는 사람 머리를 한 새 둘을 받치고, 양손에는 뱀을 들고, 악어 위에 서 있는 모습이 있다.
 

3. 이집트 제27왕조(1차 아케메네스 시기) : 기원전525~404


 
1차 아케메네스 시기(기원전 525404)는 펠루시온 전투로 시작되며, 이 전투에서 캄비세스(Cambyses, 생몰년 불명) 휘하의 팽창적 아케메네스 제국이 이집트(고페르시아어: 𐎸𐎭𐎼𐎠𐎹, Mudrāya)를 정복하여 이집트를 사트라피로 편입하게 된다. 페르시아는 이집트를 지배하게 되었지만, 반란 이후인 기원전 485년에 이집트가 페르시아의 속주로 공식화되기 전까지는 일정한 자율성을 유지했다. 이집트 제27왕조는 파라오로 이집트를 통치한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들캄비세스(Cambyses), 크세르크세스 1(Xerxes I, 기원전 519465), 다리우스 1(Darius the Great, 기원전 550486)과 더불어, 페르시아 당국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이집트인 페투바스티스 3(Petubastis III, 기원전 522520), 존재가 논쟁적인 프삼티쿠스 4(Psammetichus IV, 생몰년 불명)가 포함된다.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 전쟁의 일환으로 지원한 이나로스 2(Inaros II, 생몰년 불명)의 기원전 460454년 반란도 같은 목표를 지향했지만 실패했다. 당시 이집트의 페르시아 사트라프는 아리안데스(Aryandes, 기원전 525522; 518496), 그의 통치는 반란 파라오 페투바스티스 3세에 의해 중단되었고, 이어 페렌다테스(Pherendates, 약 기원전 496486), 크세르크세스 1세의 형제 아케메네스(Achaemenes, 약 기원전 486459), 아르사메스(Arsames, 약 기원전 454406)가 역임했다.
 

4. 이집트 제28왕조 ~ 30왕조 : 기원전 404~343

 

1) 이집트 제28왕조 : 기원전 404~398


 
28왕조는 사이스의 왕자 아미르타이오스(Amyrtaeus)가 단독으로 이루었던 왕조이다. 그는 페르시아에 맞선 반란에 성공하여 토착 군주들 아래에서 이집트의 마지막 의미 있는 독립 국면을 열었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물은 남기지 않았다. 이 왕조는 기원전 404년부터 기원전 398년까지 6년간 통치했다.
 

2) 이집트 제29왕조 : 기원전 398~380


 
29왕조는 멘데스(Mendes)에서 통치했으며 기간은 기원전 398년부터 기원전 380년까지이다. 이 왕조의 왕 하코르(Hakor)는 재위 중 벌어진 페르시아의 침공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3) 이집트 제30왕조 : 기원전 380~343

 

30왕조는 예술 양식을 제26왕조로부터 이어받았다. 세 명의 파라오가 기원전 380년부터 기원전 343년까지 연이어 통치했다. 왕조의 첫 군주 넥타네보 1(Nectanebo I)는 기원전 373년에 페르시아의 침공을 격퇴했다. 후계자 테오스(Teos)는 이어 근동에서 아케메네스 제국을 상대로 원정을 이끌었다. 이 원정은 초기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고, 별다른 문제 없이 페니키아(Phoenicia)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테오스의 형제 트자헤피무(Tjahapimu)가 그를 모반하고 있었다. 트자헤피무는 자신의 아들 넥타네보 2(Nectanebo II)에게 테오스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 파라오가 되라고 부추겼다. 계획은 성공했고 배신당한 테오스는 달리 선택지가 없어 도주했으며, 원정군은 와해되었다. 이 왕조의 최종 통치자이자 이집트의 마지막 토착 통치자는 넥타네보 2세였고, 그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아케메네스 제국에 의한 재병합으로 이어졌다.
 

5. 이집트 제31왕조(2차 아케메네스 시기) : 기원전 343~332


 
2차 아케메네스 시기에는 제31왕조(기원전 343332) 통치 아래 이집트가 페르시아 제국의 사트라피로 재편입되었다. 이 왕조는 파라오로 통치한 세 페르시아 황제아르타크세르크세스 3(Artaxerxes III, 기원전 343338),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Artaxerxes IV, 기원전 338336), 다리우스 3(Darius III, 기원전 336332)로 구성되었고, 그 사이 아케메네스 계통이 아닌 하바바시(Khababash, 기원전 338335)의 반란으로 통치가 일시 중단되었다.
 
페르시아의 이집트 지배는 기원전 332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케메네스 제국을 격파하고 이집트의 페르시아 사트라프 마사케스(Mazaces)의 항복을 받아들이면서 끝났다. 이는 이집트에서 헬레니즘 통치의 시작을 의미하며, 알렉산드로스는 나우크라티스의 클레오메네스(Cleomenes of Naucratis)를 감독관(사트라프 칭호를 가졌을 가능성 있음)으로 임명했다. 클레오메네스의 감독은 알렉산드로스의 사망 때까지 이어졌고, 이후 짧은 공백을 거쳐 일반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국(Ptolemaic Kingdom)으로 알려진 제33왕조가 시작되었다.

[고대 이집트] 이집트 제31왕조 : 페르시아의 두 번째 통치(기원전 343~332년)

[고대 이집트] 이집트 제31왕조 : 페르시아의 두 번째 통치(기원전 343~332)

 

1. 이집트 제31왕조

 

1) 페르시아 제국의 두 번째 이집트 통치

 
이집트 제31왕조(표기는 Dynasty XXXI, 또는 31st Dynasty, Dynasty 31)2 이집트 사트라피로도 알려져 있으며, 기원전 343년부터 기원전 332년까지 사실상 아케메네스 제국의 사트라피였다. 이 왕조는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이집트를 재정복한 뒤 파라오로 즉위하면서 성립했으며,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집트 정복으로 소멸했다.
 

2) 2 이집트 사트라피

 
31왕조 시기는 페르시아계 파라오가 이집트를 통치한 두 번째 시기로, 이 때문에 2 이집트 사트라피라 부른다. 31왕조 성립 이전에는 이집트가 잠시 독립을 유지했고, 그 동안 토착 왕조인 제28ㆍ제29ㆍ제30왕조가 차례로 통치했다. 그보다 앞선 시기는 1 이집트 사트라피또는 제27왕조(기원전 525404)로 알려져 있다.
 

2. 페르시아의 이집트 점령

 

1)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첫 번째 이집트 원정

 
기원전 351년경,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부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치하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집트를 수복하기 위한 원정을 시작한다. 같은 시기 소아시아에서도 반란이 일어났고, 테베의 지원을 받아 심각한 위협으로 번질 조짐을 보였다. 대군을 소집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로 진군해 넥타네보 2세와 교전했다. 1년에 걸친 전투 끝에, 그리스 장군 디오판토스와 라미오스가 이끄는 용병들의 지원을 받은 이집트 파라오 넥타네보가 페르시아군에 결정적 패배를 안겼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퇴각을 강요받았고 이집트 재정복 계획을 연기해야 했다.
 

2)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두 번째 이집트 원정

 
기원전 343년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페르시아군 33만에 더해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제공한 그리스군 8천을 확보했다. 구성은 이집트에서 테네스를 지원하러 왔던 병력을 포함한 멘토르 휘하 4, 아르고스에서 파견된 3, 테베에서 온 1천이었다. 그는 이 병력을 세 개 부대로 나누고 각 부대의 지휘부를 페르시아인과 그리스인 한 명씩 배치했다. 그리스 측 지휘관은 테베의 라크라테스, 로도스의 멘토르, 아르고스의 니코스트라토스였고, 페르시아 측 지휘관은 로사케스, 아리스타자네스, 고자(환관장 바고아스)였다. 넥타네보 2세는 10만의 군대로 저항했는데, 그중 2만은 그리스 용병이었다. 그는 대규모 함대를 동원해 나일강과 그 여러 지류를 점거했다. 수많은 운하로 갈라지고 견고하게 요새화된 도시들로 가득한 지형적 특성은 그의 편이었고, 최소한 장기 저항, 어쩌면 성공적인 방어까지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유능한 장수를 결여했고 자신의 지휘 능력을 지나치게 신뢰한 나머지, 펠루시온 근처에서 페르시아 연합군에게 기동전에서 뒤처져 패배했다.
 

3) 넥타네보, 에티오피아로 도주하다

 
넥타네보는 패배 후 서둘러 멤피스로 도주하면서 요새화된 도시들의 방어를 주둔군에 맡겼다. 이 주둔군은 부분적으로 그리스군, 부분적으로 이집트군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페르시아 측 지휘관들은 양측 사이에 질시와 의심을 쉽게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페르시아군은 하() 이집트 전역의 수많은 도시를 빠르게 함락했고, 멤피스로 진격하던 중 네크탄네보가 나라를 떠나 남쪽 에티오피아로 도주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페르시아군은 이집트군을 완전히 격파하고 나일강 하류 삼각주를 점령했다. 넥타네보가 에티오피아로 달아난 뒤, 이집트 전역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게 복속했다. 이집트에 있던 유대인들은 바빌론이나 카스피해 남안으로 이송되었는데, 이는 이전에 페니키아의 유대인들이 보내졌던 곳과 같은 지역이었다고 전해진다.
 

4)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이집트를 장악하다

 
이집트에 대한 승리 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도시 성벽을 파괴하고 공포 정치를 시작했으며, 모든 신전을 약탈하기에 착수했다. 페르시아는 이 약탈을 통해 상당한 부를 취득했다. 그는 또한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이집트가 다시는 페르시아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약화시키려 했다.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지배한 10년 동안 토착 종교의 신자들은 박해를 받았고 성서(신성한 책)들이 도난당했다.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는 페렌다레스(Pherendares)를 이집트의 사트라프로 임명했다. 이집트 재정복으로 얻은 부를 통해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의 용병들을 넉넉히 보상할 수 있었고, 침공과 점령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수도로 돌아갔다.
 

3. 이집트의 사트라프 통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이후 누가 사트라프로 재임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페렌다테스 2세가 초기 사트라프로 기록된다. 다리우스 3(기원전 336330) 치세에는 이수스 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한 사바케스가 있었고, 그 뒤를 마사케스가 이었다. 이집트인들도 이수스 전투에 참전했는데, 예컨대 헤라클레오폴리스의 귀족 솜투테프네헤트는 나폴리 비문에서 그리스와의 전투 중 어떻게 도망쳤는지, 그리고 자신의 도시의 신 아르사페스가 자신을 보호해 귀환하게 했는지를 서술했다.
 
기원전 332년에 마사케스는 싸움 없이 이집트를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넘겼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종말을 맞았고, 한동안 이집트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사트라피로 편입되었다. 나우크라티스의 클레오메네스는 사트라프 칭호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집트의 세수를 다른 속주로 이관하는 일을 감독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프톨레마이오스가 정식으로 사트라프로 임명되었고, 이어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수립했다. 이후 로마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대체했고, 이집트를 아우구스투스와 후계 황제들의 사유지로 유지하며 현지 총독을 통해 통치했다.
 

4. 이집트 제31왕조의 문화

 
이집트인들은 때때로 외국식 복장과 장신구를 착용했다. 이집트 밖의 패션에 대한 선호는 먼 궁정들과의 광범위한 교역이나 외교 접촉이 있었던 시기, 혹은 이집트가 외세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나타났다. 서아시아의 본토에서 나일 계곡을 세 차례 침공한 페르시아인들은 기원전 525404(27왕조), 기원전 342332(31왕조), 그리고 서기 619628(사산 왕조 시대의 이집트) 동안 이집트를 지배했다. 이 조각상은 이집트에 대한 페르시아 지배의 후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브루클린 미술관에 따르면, “이 조각상의 몸을 감싸 상의 가장자리에 끼워 고정한 긴 치마는 전형적인 페르시아식이다. 토크(torque)라고 불리는 목걸이는 아이벡스(산염소)의 형상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민첩함과 성적 능력의 상징이었다. 이 관리가 페르시아 복장을 한 모습으로 묘사된 것은 새로운 지배자들에게 충성을 표현하려는 시도였을 수 있다.”
 

5. 31왕조 파라오 목록


파라오통치즉위명비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Artaxerxes III
343–338 BC이집트를 두 번째로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두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
Artaxerxes IV
338–336 BC하(下) 이집트에서만 통치했다
카바바쉬
Khababash
338–335 BCSenen-setepu-ni-ptah상(上) 이집트에서 페르시아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를 파라오로 선언했다
다리우스 3세
Darius III
336–332 BC기원전 335년에 상이집트는 다시 페르시아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모우리(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모우리 (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 ( 牟義理 )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   【 1878 년 】 미국 오하이오주 벨빌 (Bellville) 근교에서 사무엘 모우리 (Samuel Mowry, 1850-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