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집트 제31왕조
1) 페르시아 제국의 두 번째 이집트 통치
이집트 제31왕조(표기는 Dynasty XXXI, 또는 31st Dynasty, Dynasty 31)는 ‘제2 이집트 사트라피’로도 알려져 있으며, 기원전 343년부터 기원전 332년까지 사실상 아케메네스 제국의 사트라피였다. 이 왕조는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이집트를 재정복한 뒤 파라오로 즉위하면서 성립했으며,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집트 정복으로 소멸했다.
2) 제2 이집트 사트라피
제31왕조 시기는 페르시아계 파라오가 이집트를 통치한 두 번째 시기로, 이 때문에 ‘제2 이집트 사트라피’라 부른다. 제31왕조 성립 이전에는 이집트가 잠시 독립을 유지했고, 그 동안 토착 왕조인 제28ㆍ제29ㆍ제30왕조가 차례로 통치했다. 그보다 앞선 시기는 ‘제1 이집트 사트라피’ 또는 제27왕조(기원전 525–404년)로 알려져 있다.
2. 페르시아의 이집트 점령
1)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첫 번째 이집트 원정
기원전 351년경,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부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치하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집트를 수복하기 위한 원정을 시작한다. 같은 시기 소아시아에서도 반란이 일어났고, 테베의 지원을 받아 심각한 위협으로 번질 조짐을 보였다. 대군을 소집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로 진군해 넥타네보 2세와 교전했다. 1년에 걸친 전투 끝에, 그리스 장군 디오판토스와 라미오스가 이끄는 용병들의 지원을 받은 이집트 파라오 넥타네보가 페르시아군에 결정적 패배를 안겼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퇴각을 강요받았고 이집트 재정복 계획을 연기해야 했다.
2)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두 번째 이집트 원정
기원전 343년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페르시아군 33만에 더해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제공한 그리스군 8천을 확보했다. 구성은 이집트에서 테네스를 지원하러 왔던 병력을 포함한 멘토르 휘하 4천, 아르고스에서 파견된 3천, 테베에서 온 1천이었다. 그는 이 병력을 세 개 부대로 나누고 각 부대의 지휘부를 페르시아인과 그리스인 한 명씩 배치했다. 그리스 측 지휘관은 테베의 라크라테스, 로도스의 멘토르, 아르고스의 니코스트라토스였고, 페르시아 측 지휘관은 로사케스, 아리스타자네스, 고자(환관장 바고아스)였다. 넥타네보 2세는 10만의 군대로 저항했는데, 그중 2만은 그리스 용병이었다. 그는 대규모 함대를 동원해 나일강과 그 여러 지류를 점거했다. 수많은 운하로 갈라지고 견고하게 요새화된 도시들로 가득한 지형적 특성은 그의 편이었고, 최소한 장기 저항, 어쩌면 성공적인 방어까지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유능한 장수를 결여했고 자신의 지휘 능력을 지나치게 신뢰한 나머지, 펠루시온 근처에서 페르시아 연합군에게 기동전에서 뒤처져 패배했다.
3) 넥타네보, 에티오피아로 도주하다
넥타네보는 패배 후 서둘러 멤피스로 도주하면서 요새화된 도시들의 방어를 주둔군에 맡겼다. 이 주둔군은 부분적으로 그리스군, 부분적으로 이집트군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페르시아 측 지휘관들은 양측 사이에 질시와 의심을 쉽게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페르시아군은 하(下) 이집트 전역의 수많은 도시를 빠르게 함락했고, 멤피스로 진격하던 중 네크탄네보가 나라를 떠나 남쪽 에티오피아로 도주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페르시아군은 이집트군을 완전히 격파하고 나일강 하류 삼각주를 점령했다. 넥타네보가 에티오피아로 달아난 뒤, 이집트 전역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게 복속했다. 이집트에 있던 유대인들은 바빌론이나 카스피해 남안으로 이송되었는데, 이는 이전에 페니키아의 유대인들이 보내졌던 곳과 같은 지역이었다고 전해진다.
4)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이집트를 장악하다
이집트에 대한 승리 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도시 성벽을 파괴하고 공포 정치를 시작했으며, 모든 신전을 약탈하기에 착수했다. 페르시아는 이 약탈을 통해 상당한 부를 취득했다. 그는 또한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이집트가 다시는 페르시아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약화시키려 했다.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지배한 10년 동안 토착 종교의 신자들은 박해를 받았고 성서(신성한 책)들이 도난당했다.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는 페렌다레스(Pherendares)를 이집트의 사트라프로 임명했다. 이집트 재정복으로 얻은 부를 통해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의 용병들을 넉넉히 보상할 수 있었고, 침공과 점령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수도로 돌아갔다.
3. 이집트의 사트라프 통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이후 누가 사트라프로 재임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페렌다테스 2세가 초기 사트라프로 기록된다. 다리우스 3세(기원전 336–330) 치세에는 이수스 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한 사바케스가 있었고, 그 뒤를 마사케스가 이었다. 이집트인들도 이수스 전투에 참전했는데, 예컨대 헤라클레오폴리스의 귀족 솜투테프네헤트는 “나폴리 비문”에서 그리스와의 전투 중 어떻게 도망쳤는지, 그리고 자신의 도시의 신 아르사페스가 자신을 보호해 귀환하게 했는지를 서술했다.
기원전 332년에 마사케스는 싸움 없이 이집트를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넘겼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종말을 맞았고, 한동안 이집트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사트라피로 편입되었다. 나우크라티스의 클레오메네스는 사트라프 칭호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집트의 세수를 다른 속주로 이관하는 일을 감독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프톨레마이오스가 정식으로 사트라프로 임명되었고, 이어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수립했다. 이후 로마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대체했고, 이집트를 아우구스투스와 후계 황제들의 사유지로 유지하며 현지 총독을 통해 통치했다.
4. 이집트 제31왕조의 문화
이집트인들은 때때로 외국식 복장과 장신구를 착용했다. 이집트 밖의 패션에 대한 선호는 먼 궁정들과의 광범위한 교역이나 외교 접촉이 있었던 시기, 혹은 이집트가 외세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나타났다. 서아시아의 본토에서 나일 계곡을 세 차례 침공한 페르시아인들은 기원전 525–404년(제27왕조), 기원전 342–332년(제31왕조), 그리고 서기 619–628년(사산 왕조 시대의 이집트) 동안 이집트를 지배했다. 이 조각상은 이집트에 대한 페르시아 지배의 후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브루클린 미술관에 따르면, “이 조각상의 몸을 감싸 상의 가장자리에 끼워 고정한 긴 치마는 전형적인 페르시아식이다. 토크(torque)라고 불리는 목걸이는 아이벡스(산염소)의 형상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민첩함과 성적 능력의 상징이었다. 이 관리가 페르시아 복장을 한 모습으로 묘사된 것은 새로운 지배자들에게 충성을 표현하려는 시도였을 수 있다.”
5. 제31왕조 파라오 목록
파라오 | 통치 | 즉위명 | 비고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Artaxerxes III | 343–338 BC | | 이집트를 두 번째로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두었다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 Artaxerxes IV | 338–336 BC | | 하(下) 이집트에서만 통치했다 |
카바바쉬 Khababash | 338–335 BC | Senen-setepu-ni-ptah | 상(上) 이집트에서 페르시아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를 파라오로 선언했다 |
다리우스 3세 Darius III | 336–332 BC | | 기원전 335년에 상이집트는 다시 페르시아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