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이집트 신왕국 시대(제18~20왕조) : 제국 탄생과 영광, 그리고 몰락의 기록
고대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강력했던 시기 중 하나로 꼽히는 신왕국 시대(New Kingdom of Egypt, 기원전 1550년경-1077년경)는 제18왕조부터 제20왕조에 이르는 약 500년간의 역사를 아우른다. 이 시기는 이집트가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하여 지중해 동부와 근동 지역에 광대한 영토를 확장하고, 역사상 유례없는 번영과 문화적 황금기를 누렸던 때이다. 그러나 모든 제국이 그러하듯, 신왕국 역시 내부의 갈등과 외부의 위협 속에서 점차 쇠퇴하여 결국 몰락에 이르는 복합적인 과정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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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5세기경 이집트 신왕국 |
1. 신왕국의 서막 : 부활과 제국 건설의 꿈
신왕국의 탄생은 약 100년간 이집트를 통치했던 셈족 계열의 힉소스(Hyksos) 왕조를 몰아내려는 투쟁에서 시작된다. 제2중간기(Second Intermediate Period)의 혼란 속에서 남부 테베(Thebes) 지역의 이집트인 통치자들은 힉소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이 저항의 중심에는 아흐모세 1세(Ahmose I, 재위 B.C. 1550-1525경)가 있었다. 그는 힉소스의 마지막 거점인 아바리스(Avaris)를 함락시키고 힉소스 세력을 완전히 이집트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한다. 아흐모세 1세는 이집트를 재통일하고, 국경을 안정화하며 신왕국의 초석을 다졌다. 그는 더 이상 이집트가 외부 세력에게 침략당하지 않도록 국경 방어를 강화하고, 나아가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과 누비아(Nubia)로의 군사 원정을 통해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뒤를 이은 아멘호테프 1세(Amenhotep I, 재위 B.C. 1525-1504경)와 투트모세 1세(Thutmose I, 재위 B.C. 1504-1492경)는 아흐모세 1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이집트의 영향력을 더욱 확장했다. 투트모세 1세는 유프라테스 강까지 진출하여 당시 최강국 중 하나였던 미탄니(Mitanni) 왕국과 직접 대면했고, 남쪽으로는 나일 강 제3폭포까지 정복하여 이집트의 영토를 넓혔다. 이집트의 지배계층은 이제 방어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확장주의 정책을 펼치며 '제국'의 개념을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제18왕조 초기에는 하트셉수트(Hatshepsut, 재위 B.C. 1479-1458경) 여왕의 통치도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남성 파라오의 복장을 하고 통치했지만, 군사적 정복보다는 대규모 건축 사업과 평화적인 무역 원정을 통해 이집트의 부와 명성을 높였다. 특히 '푼트 원정'은 그녀의 통치기에 이집트가 얼마나 강력한 해상 무역 능력을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녀는 자신을 파라오의 합법적인 계승자로 확고히 하려 했고, 이는 후계자인 투트모세 3세와의 미묘한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2. 제국의 황금기 : 군사적 확장과 문화적 번영
하트셉수트 사후,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 재위 B.C. 1479-1425경)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적 정복자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그는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전술가이자 전략가였다. 즉위 초 미탄니의 지원을 받은 카데시(Kadesh) 왕국이 일으킨 반란을 메기도 전투(Battle of Megiddo)에서 대승을 거두며 진압했다. 이후 투트모세 3세는 근동 지역에 17차례의 원정을 감행하여 이집트의 지배권을 확고히 했다. 그는 또한 남쪽의 누비아 지역도 정복하여 이집트 국경을 나일 강 제4폭포까지 확장했다.
투트모세 3세에 의해 완성된 광대한 제국은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 III, 재위 B.C. 1386-1349경)의 시대에 최고조의 번영을 누린다. 그는 군사적 정복보다는 외교와 무역을 통해 제국의 평화와 부를 유지했다. 당대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이집트는 '팍스 이집티아카(Pax Aegyptiaca)'라 불리는 평화와 안정의 시기를 맞이했다. 아멘호테프 3세는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룩소르 신전(Luxor Temple)과 자신의 거대한 장례 신전(현재 멤논의 거상만 남아있다) 등 대규모 건축 사업을 추진하며 예술과 건축을 크게 발전시켰다. 외교 서한인 아마르나 서한(Amarna Letters)을 통해 이 시기 이집트가 근동의 모든 국가들에게 외교적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종교 혁명과 혼란의 시대 : 아마르나와 내전의 그림자
신왕국의 황금기는 아멘호테프 3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아케나텐(Akhenaten, 재위 B.C. 1352-1336경)의 통치기에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는 파라오 역사상 전례 없는 종교 개혁을 시도했다. 전통적인 다신교 신앙을 부정하고 태양신 아텐(Aten)만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아텐주의(Atenism)'를 강요했다. 그는 수도를 테베에서 새로운 도시인 아케타텐(Akhetaten, 현 아마르나)으로 옮기고, 자신을 아텐의 유일한 사자로 선언했다.
아케나텐의 종교 개혁은 이집트 사회에 엄청난 혼란을 초래했다. 아문(Amun) 신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강력한 신관 세력은 권력을 잃었고, 이는 사회 전반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종교 개혁에 몰두한 아케나텐은 외교와 군사 문제에는 소홀했고, 이로 인해 이집트 제국의 해외 영토에서 반란과 이탈이 발생하며 제국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통치기는 '아마르나 시대(Amarna Period)'라고 불리며, 이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 논란이 많은 시기이다.
아케나텐 사후, 혼란에 빠진 이집트는 어린 투탕카멘(Tutankhamun, 재위 B.C. 1332-1323경)이 파라오가 되면서 변화를 겪는다. 그는 종교 개혁 이전의 전통적인 아문 신앙으로 회귀하고, 수도를 다시 테베로 옮겼다. 하지만 그의 짧은 통치기는 어린 나이에 사망하면서 마무리된다.
투탕카멘 사후 권력을 잡은 것은 군부였다. 특히 강력한 군사 지도자였던 호렘헤브(Horemheb, 재위 B.C. 1319-1292경)는 아케나텐 시대의 종교 개혁의 흔적을 지우고, 사회 질서를 재건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아케나텐의 이름을 모든 기록에서 삭제하고, 그의 신전들을 파괴했으며, 전통적인 질서를 복구하여 제19왕조로의 전환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그는 군사적 질서를 통해 흔들리는 제국을 다시 안정화시켰다.
4. 람세스 시대 : 제국의 재도약과 최후의 영광
제19왕조는 람세스 가문이 통치하며 신왕국 재도약의 시대를 연다. 람세스 1세(Ramesses I, 재위 B.C. 1292-1290경)와 세티 1세(Seti I, 재위 B.C. 1290-1279경)는 호렘헤브의 뒤를 이어 혼란을 수습하고, 대외 원정을 통해 이집트의 위상을 다시금 높이려 했다.
그리고 신왕국의 마지막 위대한 파라오로 불리는 람세스 2세(Ramesses II, 재위 B.C. 1279-1213경)가 등장한다. 그는 66년이라는 긴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 제국의 번영을 다시 한번 이끌었다. 람세스 2세는 막대한 건축 사업을 벌여 아부 심벨(Abu Simbel) 신전과 람세움(Ramesseum)을 비롯한 수많은 거대한 신전들을 건설했다. 또한, 그는 당시 서아시아의 신흥 강대국이었던 히타이트(Hittite) 제국과 카데시 전투(Battle of Kadesh)를 벌였고, 비록 무승부였지만 이 전투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국제 평화 조약인 카데시 조약으로 이어졌다. 이 조약은 두 강대국이 대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영토와 평화를 존중하기로 합의한 역사적인 문서이다. 람세스 2세의 통치기는 신왕국의 마지막 황금기로 기록된다.
람세스 2세의 후계자들, 특히 메렌프타(Merenptah, 재위 B.C. 1213-1203경)는 '바다 민족(Sea Peoples)'이라 불리는 미지의 침략자들의 위협에 맞서 싸웠다. 이들은 지중해 동부의 해상 민족들로, 이집트를 비롯한 당대 지중해 문명을 혼란에 빠뜨렸다. 메렌프타는 이들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으나, 이는 이집트의 국력을 크게 소모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5. 제국의 몰락 : 경제적 혼란과 정치적 분열
제20왕조의 파라오 람세스 3세(Ramesses III, 재위 B.C. 1186-1155경)는 신왕국의 마지막 위대한 파라오로 평가받는다. 그는 다시금 바다 민족과 리비아인들의 침공을 격퇴하며 이집트를 보호했다. 특히 바다 민족과의 전투는 막대한 희생과 재정 소모를 동반했다. 비록 그는 승리했지만, 이러한 연속된 전쟁은 이집트의 국고를 고갈시키고 사회 기반을 약화시켰다.
람세스 3세 사후, 이집트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걷는다. 그의 후계자들은 모두 '람세스'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그들의 통치권은 점차 약화되었다.
- 경제적 혼란 : 지속적인 전쟁과 가뭄, 나일 강의 주기적인 범람 부족으로 인해 경제는 위축되고 물가는 급등했다. 심지어 파라오의 무덤 건설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이 임금과 식량 부족으로 파업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는 당시 이집트 경제의 심각한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 지방 세력의 부상 :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노멘(nomes)들이나, 특히 테베의 아문 대사제들(High Priests of Amun)은 막대한 재산과 군사력을 확보하며 사실상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아문 대사제들은 종교적 권위를 넘어 세속적인 통치자처럼 행동하며 상이집트(Upper Egypt)를 지배했다.
- 묘 도굴과 혼란 : 왕실의 권위가 떨어지자, 수천 년간 안전하게 보존되어 온 파라오와 고위 관료들의 묘실이 조직적으로 도굴되기 시작했다. 이는 왕권의 상징적 권위마저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 영토 상실 : 이집트는 점차 누비아와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과거의 광대한 제국은 서서히 본토 이집트로 축소되었다.
제20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람세스 11세(Ramesses XI, 재위 B.C. 1099-1070경)의 통치 시기는 극심한 혼란과 무질서로 점철되었다. 그는 사실상 상이집트의 아문 대사제 헤리호르(Herihor)와 하이집트(Lower Egypt)의 타니스(Tanis) 총독 스멘데스(Smendes)에 의해 실권을 잃었다. 람세스 11세가 사망하자, 고대 이집트를 통치했던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제국 시대는 막을 내리고 이집트는 다시 분열과 외세 지배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 시기를 제3중간기(Third Intermediate Period)라고 부른다.
신왕국 시대는 이집트의 황금기였지만, 동시에 제국의 탄생, 번영, 그리고 쇠퇴라는 역사의 순환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찬란한 문화유산과 건축물은 고대 이집트 문명의 위대함을 증명하며,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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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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