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현 [金大鉉, 1873-1940] 장로. 교육자.
【1873년】
- 1873년 5월 7일, 당시 진사였던 김재린의 다섯 아들 중 막내 아들로 경북 영일군 신광면 상읍리에서 출생하였다.
- 유교가정에서 한학을 배웠다.
【1889년】
- 17세에 이성모 씨의 장녀 이시윤씨와 결혼하였다.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으나, 2남 1녀만 살아남았고 다른 세 아들은 어린 나이에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다.
【1901년】
- 1901년 구한국정부 관립의학교를 수료했으며 동년에 대한민국정부 숭령전참봉에 피임되었다.
- 그후 흥해면협의원ㆍ흥해공립보통학교 교무위원ㆍ흥해명신학교 학감 등 교육활동에 주력하였다.
【1913년】
-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1918년】
- 1918년 6월, 흥해교회(현 흥해제일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되었다.
【1921년】
- 1921년 12월 서울로 이주하여 종로구 인사동 승동교회에 적을 두었다.
【1923년】
- 1923년 승동교회 장로로 장립되었다.
【1930년】
- 1930년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사재를 들여 가옥을 구입해 교회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1936년】
- 5월 회갑을 기념하여 창신교회(현재는 서울 서초동에 소재)를 설립하여 금필헌 정신을 실천하였다.
【1939년】
- 1939년 3월,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표 13명이 서울에서 조선신학교설립위원회를 조직하여 학교설립추진작업을 송창근 박사에게 일임하고 있었을 때 이 학교의 재단 설정을 위하여 거액의 재산을 기부하기로 약속, 그 일을 가능케 했다. 그는 부동산 소개업을 통하여 얻은 수입의 십일조를 별도로 저축하고, 그 통장의 저축인 이름을 금필헌(金必獻)이라고 명명했다. 그 이유는 그 저금통장의 돈은 반드시 하나님에게 바친다는 약속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그전에도 이미 여러 개척교회들의 전도비를 헌금으로 보조하기도 했는데 그가 조선신학교 설립재단과 운영비를 위하여 바친 액수는 그 당시 50만원, 미화로 환산하면 30만불이었다. 이는 부동산과 현금을 합한 것이었다.
- 그런데 서울에서 설립하려던 조선신학교는 당시 휴교되었던 평양신학교가 조선신학교의 설립을 저지할 목적으로 그곳의 교회지도자들과 평남지사의 협력을 얻어 다시 문을 열게 됨으로써 본래의 계획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설립위원장 채필근 목사가 평양신학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장로회 총회는 평양신학교만을 총회지정신학교로 지정했으며 조선신학교는 총독부의 인가도 받지 못하였다.
【1940년】
- 겨우 경기도지사가 준 사설강습소 인가를 얻어 조선신학원이라는 이름으로 1940년 4월 개원하였다. 신학원이 개원되었으나 송창근 박사가 일경의 강압으로 신학원 일을 볼 수 없게 되자 김장로가 초대원장으로 피임되었다. 그런데 그에게도 교회 안팎으로 억압과 위협이 뒤따랐다. 첫째 교회 안에서는 조선신학원 설립이 외래 선교사들의 그 동안의 공헌을 무시하는 의리적 반역이며, 심지어는 신앙적 배교행위라고까지 위협한 목사들이 있었는데 주로 서신을 통한 비판이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김익두 목사였다. 그러나 김장로는 그러한 서신에 회답하면서 전도서 3장 구절을 인용하여 “날 때가 있으며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며 심은 것을 거둘 때가 있고, 헐 때가 있으며 세울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의 역사의식의 표명이었다. 한편 교회 밖으로는 일본 관헌의 압제가 계속되었다. 조선신학원의페쇄를 희망한 일부 교계지도자들의 요청을 들어 일본관헌들은 김장로에게 강요하여 조선신학원 경영에서 손을 떼도록 압력을 가했고, 해마다 갱신해야 하는 경기도지사의 인가를 받지 못하게 방해하였다.
- 그러나 그는 이러한 억압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그가 숙환으로 1940년 9월 15일 별세할 때까지 신학원을 지켰다. 바로 이 무렵 서울시 일대에 걸쳐 교계인사들을 일경이 연행해 가던 때였는데 김장로 사택에 일경이 수색하러 왔다가 그가 별세한 것을 알고 돌아갔다.
- 그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었으나 함태영ㆍ송창근ㆍ김재준 등의 신학교육사업의 이상에 적극 호응하여 그의 재산을 희사하고 그리고 친히 신학원을 경영하였다. 그의 이러한 의지와 행동은 비록 평신도였지만 한국교회 신학교육의 새로운 발전에 대한 강한 신념의 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