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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11일 토요일

김대현 [金大鉉, 1873-1940] 장로. 교육자.

김대현 [金大鉉, 1873-1940] 장로. 교육자.


 

1873

  • 187357, 당시 진사였던 김재린의 다섯 아들 중 막내 아들로 경북 영일군 신광면 상읍리에서 출생하였다.
  • 유교가정에서 한학을 배웠다.
 

1889

  • 17세에 이성모 씨의 장녀 이시윤씨와 결혼하였다. 슬하에 51녀를 두었으나, 21녀만 살아남았고 다른 세 아들은 어린 나이에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다.
 

1901

  • 1901년 구한국정부 관립의학교를 수료했으며 동년에 대한민국정부 숭령전참봉에 피임되었다.
  • 그후 흥해면협의원ㆍ흥해공립보통학교 교무위원ㆍ흥해명신학교 학감 등 교육활동에 주력하였다.
 

1913

  •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1918

  • 19186, 흥해교회(현 흥해제일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되었다.
 

1921

  • 192112월 서울로 이주하여 종로구 인사동 승동교회에 적을 두었다.
 

1923

  • 1923년 승동교회 장로로 장립되었다.
 

1930

  • 1930년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사재를 들여 가옥을 구입해 교회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1936

  • 5월 회갑을 기념하여 창신교회(현재는 서울 서초동에 소재)를 설립하여 금필헌 정신을 실천하였다.
 

1939

  • 19393,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표 13명이 서울에서 조선신학교설립위원회를 조직하여 학교설립추진작업을 송창근 박사에게 일임하고 있었을 때 이 학교의 재단 설정을 위하여 거액의 재산을 기부하기로 약속, 그 일을 가능케 했다. 그는 부동산 소개업을 통하여 얻은 수입의 십일조를 별도로 저축하고, 그 통장의 저축인 이름을 금필헌(金必獻)이라고 명명했다. 그 이유는 그 저금통장의 돈은 반드시 하나님에게 바친다는 약속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그전에도 이미 여러 개척교회들의 전도비를 헌금으로 보조하기도 했는데 그가 조선신학교 설립재단과 운영비를 위하여 바친 액수는 그 당시 50만원, 미화로 환산하면 30만불이었다. 이는 부동산과 현금을 합한 것이었다.
  • 그런데 서울에서 설립하려던 조선신학교는 당시 휴교되었던 평양신학교가 조선신학교의 설립을 저지할 목적으로 그곳의 교회지도자들과 평남지사의 협력을 얻어 다시 문을 열게 됨으로써 본래의 계획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설립위원장 채필근 목사가 평양신학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장로회 총회는 평양신학교만을 총회지정신학교로 지정했으며 조선신학교는 총독부의 인가도 받지 못하였다.
 

1940

  • 겨우 경기도지사가 준 사설강습소 인가를 얻어 조선신학원이라는 이름으로 19404월 개원하였다. 신학원이 개원되었으나 송창근 박사가 일경의 강압으로 신학원 일을 볼 수 없게 되자 김장로가 초대원장으로 피임되었다. 그런데 그에게도 교회 안팎으로 억압과 위협이 뒤따랐다. 첫째 교회 안에서는 조선신학원 설립이 외래 선교사들의 그 동안의 공헌을 무시하는 의리적 반역이며, 심지어는 신앙적 배교행위라고까지 위협한 목사들이 있었는데 주로 서신을 통한 비판이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김익두 목사였다. 그러나 김장로는 그러한 서신에 회답하면서 전도서 3장 구절을 인용하여 날 때가 있으며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며 심은 것을 거둘 때가 있고, 헐 때가 있으며 세울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의 역사의식의 표명이었다. 한편 교회 밖으로는 일본 관헌의 압제가 계속되었다. 조선신학원의페쇄를 희망한 일부 교계지도자들의 요청을 들어 일본관헌들은 김장로에게 강요하여 조선신학원 경영에서 손을 떼도록 압력을 가했고, 해마다 갱신해야 하는 경기도지사의 인가를 받지 못하게 방해하였다.
  • 그러나 그는 이러한 억압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그가 숙환으로 1940915일 별세할 때까지 신학원을 지켰다. 바로 이 무렵 서울시 일대에 걸쳐 교계인사들을 일경이 연행해 가던 때였는데 김장로 사택에 일경이 수색하러 왔다가 그가 별세한 것을 알고 돌아갔다.
  • 그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었으나 함태영ㆍ송창근ㆍ김재준 등의 신학교육사업의 이상에 적극 호응하여 그의 재산을 희사하고 그리고 친히 신학원을 경영하였다. 그의 이러한 의지와 행동은 비록 평신도였지만 한국교회 신학교육의 새로운 발전에 대한 강한 신념의 표현이었다.

이재형 [李載馨, 1871-1949] 장로교 목사.

이재형 [李載馨, 1871-1949] 장로교 목사.


 

1871

  • 18711216일 출생초명은 재남. 생부는 이필웅(李必應)이다.
 

1884

  • 14세 때 경평군 이세보(李世輔)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선조의 3남 의안군의 9대손인 경평군은 벼슬이 정1품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이르렀고 안동김씨 세도에 밀려 전라도 신지도에서 3(1860-1863)동안 유배생활을 겪은 학자이자 시조시인이었다. 이같이 왕가(王家)를 배경으로 출생하여 궁궐에서 교육을 받았다.
 

1896

  • 26세 때에는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의 관직은 세마직(洗馬職)과 풍기군수에 이르렀다.
 

1905

  • 을사늑약(1905)이 체결되고 일본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되자 관직을 버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1907

  • 일정한 직업없이 방황하던 중에 기독교에 접하게 되었다. 그가 기독교인이 된 동기는 몇 가지 이설이 있다.
    1. 우선 그는 비록 방랑하는 선비 신세로 지냈지만 1년에 2차 충주(忠州)에 있는 선영을 꼭 찾아 보았는데 이때 그를 모신 마부 엄귀현(嚴貴鉉)이 그에게 전도하였다는 설이 있다. 엄귀현은 평생을 마부로 지내며 전도에 열심을 다한 봉우재교회(현 경동제일교회) 교인으로 후에 이재형이 교인이 되어 승동교회에서 개최된 도사경회에 참석했을 때 만나 감격의 눈물을 흘린 인물이다.
    2. 둘째로는 이재형의 부인 정씨(鄭氏, 1870-1923)가 전도하였다는 설이다. 남편이 집을 나가 방랑하고 있는 사이 정씨는 승동교회 교인이 되었고 몇 년 후 돌아온 남편에게 전도하였다. 승동교회 교인들도 합세하여 전도한 결과 기독교인이 되었다.
    3. 마지막으로는 이재형 자신이 선교사(성명미상)을 찾아가 기독교에 대해 문답을 나누고자 할 때 선교사가 성경을 일독한 후에 오라고 하여 집에 돌아와 성경을 읽는 중에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 이러한 여러 동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마침내 그가 왕손으로서는 최초로 기독교인이 되었으니 1907년 그의 나이 38세였다.
  • 이 해는 평양대부흥이 일어난 해이고 서울에서는 이상재ㆍ이원긍ㆍ박승봉ㆍ김정식ㆍ유성준ㆍ윤치호 등 소위 양반계층이 일거 기독교에 입신하던 그 무렵이었다. 이들 양반들의 기독교 입신이 그의 기독교 입신에도 적잖은 영향력을 발휘하였을 것이다. 그는 이로써 승동교회 교인이 되었다.
 

1914

  • 1914년에는 승동교회 장로가 되었다
  • 이에 그치지 않고 1914년에는 조사가 되어 경기도 지방 교역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8

  •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11)하였다.
  • 졸업한 그해 경충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양평읍ㆍ고읍ㆍ상심리ㆍ묘곡 등 4처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1920

  • 1920년 남대문교회 2대 목사로 부임하였으며 그해 12월 경충노회 노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21

  • 그러나 남대문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장로들과의 사이가 원활치 못해 고심하던 중 1921년 사임하고 말았다.
 

1922

  • 1922년 하교(下橋)교회에 부임하였다.
 

1924

  • 1924년에는 승동교회에 부임하여 김영구(金永耈) 목사와 동사목사로 시무하였다.
 

1928

  • 그러나 김영구 목사가 1928년 별세하고 후임으로 박용희(朴容羲) 목사가 동사목사로 부임하여 시무하면서부터 이재형 목사와의 사이가 껄끄러워지기 시작하였다.
 

1933

  • 박용희 목사와의 관계는 노회와 총회 정치문제로까지 비화하여 193311월 경성노회는 이재형ㆍ박용희 양인을 성경에 위반됨과 덕을 세움에 부족함으로 1년간 목사 시무 정지를 명하였다. 이로써 이재형은 일선 목회를 떠나 인사동 집에 칩거하였다.
 

1949

  • 194989일 별세하기 직전 박용희 목사를 불러 화해를 청하고 자신의 장례식 주례를 부탁하였다.
  • 비록 목회자로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왕손으로 기독교 목사가 되어 사회의 주목을 받았으며 평생을 무보수로 목회하였고 어려운 형편에 처한 학생들을 후원하는데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이덕흥(李德興) 목사가 그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을 하였고 김재준(金在俊) 목사도 미국 유학할 때 재정보증인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는 快莫快於與人 憫莫憫於乞人”(남에게 주면서 사는 것처럼 통쾌한 일이 어디 있으며 남에게 받으며 사는 것처럼 불쌍한 일이 어디 있으랴?)의 정신으로 평생을 살았다.

레이놀즈 [William Davis Reynolds Jr., 1867~1951]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이눌서(李訥瑞)

레이놀즈 [William Davis Reynolds Jr., 1867~1951]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이눌서(李訥瑞)

 

1867

  • 11월 12일, 미국 버지니아주의 항구도시 노퍽(Norfolk)에서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와 캐리 머베인의 다섯 자녀 중 넷째로 출생했다
  • 아버지는 목화 중개사업을 하는 사업가이자 교회의 장로였고, 어머니와 다른 형제도 모두 교회와 학교에서 장로, 집사, 교사로 봉사할만큼 경건한 가정이었다.
 

1884

  • 어린 시절 레이놀즈는 지역 학교와 교회에서 만능 스포츠맨으로 유명했지만 중ㆍ고등학교 시절부터 언어에 큰 매력을 느끼고 집중공부했다. 이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 후 1884년 남부의 장로교계 사립명문 햄든-시드니칼리지(Hampden-Sydney College) 2학년으로 입학했다.
 

1887

  • 18876, 최우등으로 졸업할 당시 학사 학위를 두 개(B.A./B.Lit.) 받았고,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독일어 과정도 이수했다. 동시에 대학 최고의 운동선수로 선정될 만큼 운동 실력도 출중했다.
  • 언어 재능이 워낙 뛰어났던 그는 존스홉킨스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해 고대언어를 공부한 후 대학교수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1년 만에 학업을 중단하였다.
  • 그러나 이 시기에 학교 관계자의 목회 권유, YMCA 전도집회 참여, 해외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약혼녀 팻시 볼링(Patsy Bolling, 1867-1962)의 영향으로 목회와 해외선교로 진로를 변경했다.
 

1890

  • 18909, 레이놀즈는 미국 리치먼드에 있는 미국 남장로교회의 교단 신학교인 유니온 신학교에 진학했다.
  • 버지니아 유니언신학교에 입학한 후 3년 과정을 2년만에 이수하고 졸업했다.
 

1891

  • 그가 한국을 선교지로 선택한 계기는 189110월에 테네시주 내슈빌 소재 밴더빌트대학에서 열린 전국신학교선교연맹(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의 선교집회에 참석한 일이었다. 그는 당시 안식년 중이던 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밴더빌트를 졸업한 후 에모리대학에 진학한 한국인 윤치호의 연설을 들었다. 신학교로 복귀한 후 동료 윌리엄 전킨에게 함께 한국으로 가자고 설득했다. 집회 현장에서 시카고 매코믹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윌리엄 테이트도 만났다.
  • 매코믹의 테이트와 유니언의 레이놀즈, 전킨이 각각 총회 해외선교상임위원회에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으나 재정 문제로 반려되었다. 그러나 언더우드 선교사와 타자기 사업자였던 그의 형 존 언더우드의 재정 후원 약속에 힘입어 ‘7인의 개척자들’, 즉 레이놀즈 부부, 전킨 부부, 테이트 남매(윌리엄과 매티), 여선교사 리니 데이비스가 남장로회의 한국선교를 개척할 수 있게 되었다.
 

1892

  • 55, 약혼녀 팻시 볼링(Patsy Bolling, 1867-1962)과 결혼 후 리치몬드의 이스트 하노버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 97,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센트럴 그랜드 에비뉴 장로교회들로부터 선교파송예배
  • 1(데이비스)18921018, 2(나머지 6)114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1893

  • 128일에 북장로회와 연합하여 설립한 장로교선교공의회에서 레이놀즈는 초대 회장에 선임되었다. 이 회의에서 남장로교 선교회의 선교구역으로 호남지역이 확정되었다.
  • 1893년 서울에서 첫 아들(William Davis Reynolds III)이 태어났으나 같은 해에 사망하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1894

  • 3, 호남지역 5개 도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 선교답사 및 전도 활동
  • 1894820일 아들 존 볼링(John Bolling)이 태어났다.
 

1895

  • 레이놀즈를 비롯한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1895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전주를 중심으로 선교부 개설을 위해 정탐과 부지확보를 위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으로 이들이 실제 호남에 정착한 것은 1895년 말부터였다.
  • 테이트 남매가 전주, 전킨 부부가 군산에 정착하고 있었던 반면, 레이놀즈의 호남 정착은 한글 성경번역 및 개정 활동 때문에 지체되었다.
  • 레이놀즈는 공인번역자위원회에 189510월부터 참여해서 한국에서 은퇴한 1937년까지 위원으로 지내며, 오늘날 한국교회의 대표 성경인 구역과 개역성경의 구약성경 대부분을 번역했다.
 

1897

  • 레이놀즈 가족은 1897615일에 전주로 이사했다
  • 호남의 첫 교회인 전주서문교회에서 레이놀즈의 집례로 첫 세례교인 7명이 탄생했다.
 

1899

  • 전주로 이사했어도 성서번역 일이 워낙 과중했기에 그는 1899년 가을 이후 주로 서울에 머물렀다.
  • 1899810일 딸 캐리 머베인(Carey Mebane)이 태어났다.
 

1900

  • 190099일 전주 서문외 완산 북림 기슭에 있는 이눌서의 집 사랑방에서 하리슨 선교사(W. B. Harrison)가 만 16세의 김창국을 대상으로 근대식 교육을 시작하였다.
 

1902

  • 1902년 목포선교부로 전근된 레이놀즈는 몇 달 머물지 않고 다시 9월에 서울로 이사했다.
  • 190210월 밀러 선교사의 지방 순회로 공석이된 승동교회의 임시 당회장으로 부임했다.
  • 19021211일 막내 딸 엘라 틴슬리(Ella Tinsley)가 출생하였다.
 

1904

  • 중간에 안식년 1년을 다녀왔고, 1904년까지 서문교회 담임목사로 이름이 올라있었으나 여전히 1년의 4분의 1은 서울에 머물렀다.
 

1906

  • 이미 이전부터 서울에서 성경번역을 하면서 전주교회도 돌아보았지만, 1906년부터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남장로회 파견 교수요원으로 가서 신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 19063월 제임스 게일 목사의 안식년으로 자리를 비운 연동교회의 강단에서 목사로서 직무를 담당했다(19078월까지)
 

1907

  • 1907년 한국인 번역조사 이창직, 김정삼과 레이놀즈 선교사가 구약성경 번역을 위한 번역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 YMCA 낙성식에서 설교를 했다.
 

1908

  • 19081월까지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전킨(William M. Junkin)이 급성폐렴으로 사망하자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전주로 내려갔다. 그러나 전주에 있었어도, 여전히 그의 주업은 성경번역과 개정이었다. 이 시기는 그의 사역 공간 범위가 여럿으로 중첩된 시기였다. 레이놀즈는 전주에 내려간 1908년부터 학기 중에는 내내 평양에 머물렀다.
  • 햄튼 시드니 대학 명예신학박사(D.D)
 

1910

  • 42일 구약성서 전체 번역을 마쳤다.
  • 5월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갔다 복귀하여 191110'전주교회'로 돌아왔다.
 

1911

  • 1911년 독노회 회장을 역임했다.
 

1912

  • 1912년에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레이놀즈를 조직신학 전임교수로 임명했다.
 

1924

  • 전주와 평양을 오가던 생활은 안식년 후 1924년에 종결되었다.
  • 햄튼 시드니 대학 법학박사(LL.D)
  • 한국 복귀 후 1937년 은퇴할 때까지 평양에 상주했다.
 

1929

  • 지리산 노고단과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내에 9홀 골프장을 설계해서 만들었다
 

1937

  • 1906년부터 1937년까지 평양에서 레이놀즈가 가르친 학생은 총 743명이었다. 1901년 사숙 형태로 시작된 평양장로회신학교가 1904년부터 커리큘럼에 따라 체계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고,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1938년에 문을 닫았으므로 사실상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존재한 전 기간에 교리와 조직신학을 전담하여 가르친 이가 바로 레이놀즈였다. 따라서 사실상 레이놀즈는 한국장로교회에 교리를 가져다 준 교회의 선생이었다.
  • 레이놀즈와 부인 팻시는 1937년에 한국선교현장에서 은퇴한 후, 캘리포니아 오클랜드를 거쳐 남장로회 은퇴선교사촌이 있는 노스캐롤라이나 몬트리트에서 살았다.
 

1951

  • 레이놀즈는 1951년에 83세로 별세하여 블랙 마운틴의 마운틴 뷰(Mountain View) 공원묘지에 묻혔다.
  • 팻시는 얼마간 은퇴촌에 더 머무르다 막내딸 엘라의 집에서 딸 부부와 함께 살던 중 1962년에 93세로 사망했다

모우리(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모우리 (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 ( 牟義理 )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   【 1878 년 】 미국 오하이오주 벨빌 (Bellville) 근교에서 사무엘 모우리 (Samuel Mowry, 1850-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