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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1일 금요일

토머스 그레셤 [Thomas Gresham, 1518/19~1579.11.21.]

토머스 그레셤 [Thomas Gresham, 1518/19~1579.11.21.]

 

1518/19

  • 런던에서 리처드 그레셤 경의 아들로 태어났다.
  • 리처드 그레셤 경은 유서 깊은 노퍽 가문으로 저명한 상인(머서)이자 런던 시장이었으며, 외국 상인들과 우호적인 대출을 협상하여 헨리 8세 국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 그레셤은 세인트 폴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다.
  • 그 후, 그의 아버지는 토마스가 상인이 되기를 원했으며, 먼저 그를 케임브리지 대학의 곤빌 앤 카이우스 칼리지에 보냈다.
  • 그는 케임브리지에 있는 동안에도 상인 회사(Mercers' Company)에서 그레셤 스쿨의 설립자인 그의 삼촌 존 그레셤 경의 도제로 일했다.
 

1543

  • 1543, 24세의 그레셤은 머서스 컴퍼니(Mercers' Company)에 정회원으로 가입했으며, 그해 말 잉글랜드를 떠나 네덜란드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사업으로든, 아버지나 삼촌의 사업으로든 상인으로서 활동하는 동시에 헨리 8세 국왕의 대리인으로서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
 

1544

  • 그는 1544년 윌리엄 펀리(William Ferneley)와 애그니스 돈디(Agnes Daundy)의 딸인 앤 펀리(Anne Ferneley)와 결혼했다. 앤은 런던 상인 윌리엄 리드(Sir William Read) 경의 미망인이었고, 그와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그레셤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 리처드(Richard) 한 명만을 두었으나, 리처드는 부모보다 먼저 사망했다. 그레셤에게는 또한 사생아 딸(이름도 앤)이 있었는데, 그녀는 아마도 네덜란드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 그는 주로 네덜란드에 거주하며 현재 벨기에(당시 스페인령 네덜란드) 안트베르펜에 본부를 두었다. 그곳에서 그는 능숙한 시장 운용으로 명성을 얻었다.
 

1551

  • 1551, 네덜란드 주재 왕실 상인이었던 윌리엄 담셀(Sir William Damsell) 경의 잘못된 관리로 인해 영국 정부가 심각한 재정난에 처했을 때, 당국은 그레셤에게 자문을 구했고, 이후 그의 제안을 따랐다. 그레셤은 안트베르펜 증권 거래소에서 파운드 스털링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매우 독창적이지만 상당히 자의적이고 불공평한 다양한 방법을 제안했는데, 이는 너무나 성공적이어서 불과 몇 년 만에 에드워드 6세 국왕이 거의 모든 빚을 갚을 수 있었다. 정부는 모든 재정적 어려움에 대해 그레셤에게 조언을 구했으며, 또한 다양한 외교 임무에도 그를 자주 고용했다. 그는 명시된 봉급은 없었지만, 그의 봉사에 대한 보상으로 에드워드 국왕으로부터 여러 토지 수여를 받았으며, 당시 그 가치는 연간 약 400파운드에 달했다.
 

1553

  • 1553년 메리 여왕이 즉위했을 때, 그레셤은 잠시 동안 궁정에서 외면당했고 올더맨 윌리엄 돈시(Alderman William Dauntsey)가 그를 대신했다. 그러나 돈시의 재정 운영은 실패로 끝났고 그레셤은 곧 복직되었다. 그는 여왕을 섬기고자 하는 열렬한 열망을 표명했고, 대출 협상과 돈, 무기 및 외국 물품 밀수 모두에서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그리하여 그의 봉사는 여왕의 통치 기간(15531558) 내내 유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당 20실링의 봉급 외에 연간 200파운드 가치의 교회 토지 수여도 받았다.
 

1558

  •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기간(15581603) 동안 그레셤은 왕실의 재정 대리인으로서의 직위를 유지하는 것 외에, 네덜란드 총독인 파르마 공작 부인 마가렛 궁정에 대한 전권 대사로 활동하였다.
 

1559

  • 1559년 출국 전에 기사 학위를 받았다.
 

1565

  • 1565, 그레셤은 런던 시 참사회에 자신의 비용으로 증권 거래소(이후 왕립 증권 거래소가 됨)를 건설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이 거래소는 안트베르펜 증권 거래소를 본떠 모델링되었으며, 시 당국이 적절한 부지를 제공하는 조건이었다. 이 제안에서 그는 런던 상인들의 공공의 이익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적 이익에 대해서도 훌륭한 안목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 상층부의 상점에서 연간 700파운드의 임대료를 받아 그의 수고와 비용에 비해 충분한 수익을 얻었기 때문이다.
  • 왕립 증권 거래소의 설립은 토마스 헤이우드(Thomas Heywood)의 연극 나를 모른다면 아무도 모른다 2(If You Know Not Me, You Know Nobody part 2)’의 배경이 된다. 이 연극에서 한 귀족은 이렇게 훌륭한 건물을 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건물의 웅장함을 칭찬한다.
    “살면서 본 적 없습니다. 베니스에 가본 적은 있지만요그곳 리알토의 성 마르코 광장은 이곳에 비하면 그저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이곳과 가장 흡사하고 가장 가까운 곳은 안트베르펜의 큰 거래소인데, 높이나 넓이, 훌륭한 지하실, 또는 위층의 멋진 상점 등 어느 면에서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오 영주 시장님, 이 그레셤이 당신의 런던 시에 많은 영광을 주었습니다. 그의 명성은 그보다 오래 지속될 것입니다.”
 

1567

  • 네덜란드 반란 이전의 불안정한 시기는 그에게 1567310일 안트베르펜을 떠나게 했지만, 남은 생애를 런던에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해왔던 방식으로 상인이자 정부 재정 대리인으로서 사업을 계속했다.
 

1569

  • 메리 그레이 부인(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자매)의 간수로 활동하였다. 메리 그레이 부인은 하사관 토마스 키즈(Thomas Keyes)와 결혼한 죄로 15696월부터 1572년 말까지 그의 집에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1579

  • 그레셤은 15791121일 갑자기 뇌졸중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사망했으며, 런던 시에 있는 비숍스게이트의 세인트 헬렌 교회에 매장되었다.
 

그래셤 칼리지 설립

  • 다양한 자선단체에 기부된 소액을 제외하고, 그레셤은 자신의 재산 대부분(런던과 잉글랜드 전역의 부동산으로 구성되어 연간 2,300파운드 이상의 수입을 올리던 것)을 미망인과 그 상속인에게 물려주었다. , 미망인 사망 후에는 비숍스게이트 거리의 그의 집과 왕립 증권 거래소의 임대료를 런던 시청과 머서스 컴퍼니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는 7명의 교수가 일주일에 하루씩 천문학, 기하학, 물리학, 법학, 신학, 수사학, 음악 분야에서 강의하는 학교를 설립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런던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인 그레셤 칼리지가 1597년에 설립되었다.
 

그레셤의 법칙

  • 악화(惡貨)는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토마스 그레셤 경이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영국의 가치가 하락한 화폐를 복구할 것을 촉구했기 때문이다(물론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를 포함한 다른 이들도 수년 전부터 이 개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토마스 경은 헨리 더닝 맥클라우드(Henry Dunning Macleod)라는 경제학자가 1857년에 만들어낸 그레셤의 법칙과 같은 것을 결코 공식화하지 않았는데, 그는 쓰여지지 않은 것을 텍스트에서 읽어내는 재주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레셤의 메뚜기

  • 그레셤 가문의 문장(크레스트)녹색 언덕 위에 금색 메뚜기이다. 그가 설립한 그레셤 칼리지와 1565년에 그가 세운 런던 시의 왕립 증권 거래소 풍향계에도 이 문장이 새겨져 있다. 매사추세츠 보스턴의 패뉴얼 홀(Faneuil Hall)도 이 문장을 차용했다. 그레셤 가문의 문장 방패 문양은 은색 바탕에 3개의 검은색 관통된 육각별 사이에 에르미누스 무늬의 셰브런이다.
  • 고대 전설에 따르면, 이 가문의 창시자인 로저 드 그레셤(Roger de Gresham)13세기 노퍽 지방의 긴 풀밭에 신생아로 버려진 고아였으며, 메뚜기 소리에 이끌린 한 여인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이야기이지만, ‘grassh-’‘Gresh-’라는 소리를 이용한 언어유희적 문장(canting heraldic crest)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레셤 가문은 ‘Fiat Voluntas Tua’(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좌우명을 사용한다.

2025년 9월 21일 일요일

관우(關羽, AD. 160~220년)

관우(關羽, AD. 160~220)

 

기원후 160년경

  • 약 동한 환제(桓帝) 연희(延熹) 연간 : 관우(關羽)가 출생하다.
  • ()는 운장(雲長), 본자(本字)는 장생(長生)이다.
  • 어린 시절 살인죄를 저지르고 도망쳐 탁군(涿郡)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기원후 184중평(中平) 원년

  • 유비(劉備)가 상인 장세평(張世平)과 소쌍(蘇雙)의 지원을 받아 황건적의 난에 대항할 의병을 모집하자, 장비(張飛)와 함께 합류하여 유비의 심복이 되었다. 이때부터 세 사람은 의형제처럼 지냈다.
 

기원후 190

  • 관동(關東) 각 주군(州郡)이 동탁(董卓) 토벌을 위해 군사를 일으킬 때, 유비는 공손찬(公孫瓚)에게 의탁했다. 공손찬의 명으로 유비는 전해(田楷)와 함께 청주(青州)로 파견되어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되었다.
 

기원후 191

  • 유비가 공을 세워 평원상(平原相)에 임명되자, 관우와 장비는 별부사마를 맡아 유비의 부대 지휘를 보좌했다.
 

기원후 194

  • 조조(曹操)가 서주(徐州)의 도겸(陶謙)을 공격하자, 유비는 전해와 함께 구원하러 갔다. 도겸의 양보로 유비는 예주자사(豫州刺史) 직위를 얻었고, 도겸 사망 후 서주목(徐州牧)을 계승했다. 이후 원술(袁術)과 여포(呂布)의 공격을 받아 유비는 패배했고, 관우는 하비(下邳)를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기원후 196건안(建安) 원년

  • 여포의 재차 공격으로 유비가 패하자, 관우는 유비와 함께 조조에게 의탁했다. 조조는 유비를 예주목으로 추대했다.
 

기원후 198

  • 조조를 따라 하비에서 여포를 사로잡아 죽였다. 이후 조조를 따라 허도(許都)로 돌아가 유비와 함께 조조의 대우를 받았다. 유비는 좌장군(左將軍)이 되었다.
 

기원후 199

  • 유비가 원술을 저지하기 위해 서주로 갔다가, 조조의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습격하여 죽이고 서주를 점령하며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때 관우에게 하비 수비를 맡겼다.
 

기원후 200건안 5

  • 정월 : 조조의 공격으로 유비가 패주하여 원소(袁紹)에게 몸을 의탁했고, 관우는 하비를 지키다 조조에게 포로가 되거나 자진 항복했다. 조조는 관우를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극진히 대우했다. 관우는 몸은 조조 진영에 있으나 마음은 한나라에 있다고 밝혔고, 조조는 그 충의에 감탄했다.
  • 2: 원소군의 선봉 안량(顔良)이 백마(白馬)를 공격하자, 관우는 조조를 따라 백마로 출진했다. 단기 필마로 적진에 뛰어들어 안량을 참살하여 백마의 포위를 해제했다. 이 공으로 관우는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봉해졌다.
  • 2월 이후 : 조조가 더 많은 상을 내려 관우를 만류했으나, 관우는 모든 상을 거절하고 편지를 남겨 조조를 떠났다. 조조는 관우가 유비에게 돌아가는 것을 묵인했다. 유비는 원소 진영을 떠나 여남(汝南)에서 조조의 후방을 교란하고 있었고, 관우는 그곳으로 가 유비와 합류했다.
 

기원후 201

  • 유비와 함께 형주목 유표에게 의탁하여 신야(新野)에 주둔하며 형주 북부 변경의 수비를 책임졌다.
 

기원후 208건안 13

  • 9: 조조의 남하로 유비군이 당양(當陽) 장판(長坂)에서 조조군에게 패주했으나, 관우의 수군 선단이 한진(漢津)에 때맞춰 도착하여 유비군을 하구(夏口)로 무사히 철수시켰다.
  • 겨울 : 손권-유비 연합군의 일원으로 오림(烏林) 전투에서 조조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기원후 209

  • 유비를 도와 강릉(江陵) 포위전에 참여하여 조조군의 조인(曹仁)을 철수시켰다. 유비가 형주 강남 4개 군을 점령한 후 형주목으로 추대되었다.
 

기원후 210

  • 주유(周瑜) 사후, 유비는 손권과의 협상으로 남군(南郡)을 빌리고, 관우를 양양태수(襄陽太守), 탕구장군(蕩寇將軍)으로 임명하여 강북을 진수하게 했다.
 

기원후 211

  • 유비가 유장(劉璋)의 초청을 받아 입촉(入蜀)할 때 형주 수비 임무를 맡았다. 이 기간 동안 조위 장수 악진(樂進)과 문빙(文聘) 등과 교전했다.
 

기원후 214

  • 유비가 익주(益州)를 점령한 후, 관우를 독 형주사(督荊州事)’로 임명하여 형주를 총괄하게 했다.
 

기원후 215

  • 손권이 형주 3(장사, 계양, 영릉)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유비가 거절했다. 손권이 관리를 파견하여 3군을 접수하려 하자 관우가 이들을 축출했다.
  • 이로 인해 손권과 군사적으로 대치했으나, 유비가 한중(漢中) 문제로 조조와 대립하자 형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손유 간에 상강(湘江)을 경계로 하는 형주 분할 협정이 맺어졌다(관우는 강하, 장사, 계양을 손권에게 양보하고 강릉, 무릉, 영릉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 이때 황충(黃忠)이 후장군(後將軍)에 제수되자, “대장부가 늙은 병사와 같은 열에 설 수 없다며 불만을 표했지만, 제갈량과 비시(費詩)의 설득으로 받아들였다.
 

기원후 217

  • 노숙(魯肅) 사망 후, 손권은 여몽(呂蒙)을 형주 상류의 군사 통수관으로 임명하여 육구(陸口)에 주둔시켰다. 여몽은 관우의 야심을 경계하며 형주를 빼앗을 계획을 세웠다.
 

기원후 219건안 24

  • 7: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을 칭했다. 관우는 유비로부터 전장군(前將軍), 가절월(假節鉞) 직위를 받았다. 강릉에서 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조조군의 조인(曹仁)이 지키는 번성(樊城)을 공격하는 양번전역(襄樊戰役)을 시작했다. 미방(糜芳)과 사인(士仁)에게 강릉과 공안(公安) 수비를 맡겼다.
  • 8: 연이은 폭우로 한수(漢水)가 범람하여 수공(水攻)으로 조조군의 우금(于禁)이 지휘하던 칠군(七軍)을 수장시키고 우금을 포로로 잡았다. 부장 방덕(龐德)을 참살하여 위진화하(威震華夏)”의 명성을 떨쳤다. 이로 인해 조조는 천도까지 고려할 정도였다. 여몽(呂蒙)은 병을 핑계로 후임에 육손(陸遜)을 앉혀 관우의 경계를 허물게 했고, 관우는 방어 병력 일부를 번성으로 돌렸다.
  • 10: 손권의 사주를 받은 여몽이 미방과 사인의 투항을 받아내며 강릉과 공안을 기습 점령했다. 후방이 끊긴 관우는 번성 포위를 풀고 남쪽으로 철군하기 시작했다.
  • 12: 강릉으로 회군하던 도중, 여몽의 심리전(가족들의 소식 전달)으로 병사들이 대거 이탈했다. 당양(當陽)의 맥성(麥城)에서 패주하다가 오나라 장수 마충(馬忠)에게 사로잡혀 살해당했다.
 

기원후 220

  • 손권은 그의 수급을 조조에게 보냈고, 시신은 당양에 제후의 예로 안장했다(관릉).
 

기원후 221

  • 7: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명분으로 동오를 정벌할 때, 당양의 관우 대왕총(大王冢)을 찾아 제사를 지내고 옥천산(玉泉山)에 관우 사당을 지었다.
 

기원후 260

  • 촉한 후주 유선(劉禪)으로부터 장목후(壯繆侯)”라는 시호를 추증받았다. “자가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후대 학자들 사이에서 해석이 분분했다.
  • 사후 : 그의 수급은 낙양 관림(關林), 시신은 당양 관릉(關陵), 혼은 고향 해주(解州) 관제묘(關帝廟)에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머리는 낙양에 베개하고, 몸은 당양에 누웠으며, 혼은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말이 생겼다.
  • 관우는 민간에서 충의와 용맹의 상징으로 신격화되어 관공, 관성제군, 무성 등으로 숭배되며, 오늘날까지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관우의 가계

 
  • 선조
    • 증조부 관씨(關氏) : 청나라 때 광소왕(光昭王)” 추봉
    • 조부 관심(關審) : “유창왕(裕昌王)” 추봉
    • 아버지 관의(關毅) : “성충왕(成忠王)” 추봉
  • 아내와 첩
    • 부인 호월(胡玥) : 관평(關平)의 어머니, 민간에서 전해짐
    • 부인 두씨(杜氏) : 진의(秦宜禄)의 아내, 화양국지언급
    • (설화) 초선(貂蟬) : 민간 설화에만 등장 (정사 기록 없음)
  • 자녀
    • 장남 관평(關平) : 관우와 함께 전사, 삼국지연의에선 의자
    • 차남 관흥(關興) : 제갈량의 신임 받음, 젊은 나이에 요직
    • 딸 관은병(關銀屏) : 민간 설화에 전해짐, 정사에 이름 없음
    • 삼남 관색(關索) : 민간 이야기와 화관색전등장, 정사에 없음
  • 손자
    • 관흥의 아들 / 관통(關統) : 공주와 결혼, 자식 없이 사망
    • 관흥의 서자 / 관이(關彝) : 관통 사망 후 작위 계승
  • 후손 (전설, 기록 등)
    • 관회(關會) : 팽덕의 아들, 관씨 일족 보복설에 등장 (신뢰도 낮음)
    • 관박(關播) : 당나라 때 재상, 신당서에 관흥 후손으로 기록
    • 관월(關樾) : 전설상의 인물, 관평의 장자라 전해짐
    • 관조태(關朝泰) : 관우 52세손, 청나라 시기 오경박사로 세습 허락

아서 에딩턴 [Arthur Stanley Eddington, 1882.12.28.~1944.11.22]

아서 에딩턴 [Arthur Stanley Eddington, 1882.12.28.~1944.11.22]   【 1882 년 】 에딩턴은 1882 년 영국 잉글랜드 북서단에 위치하는 컴브리아주의 켄덜 (Kendal) 에서 퀘이커 교도 부모 , 아서 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