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關羽, AD. 160~220년)
【기원후 160년경】
- 약 동한 환제(桓帝) 연희(延熹) 연간 : 관우(關羽)가 출생하다.
- 자(字)는 운장(雲長), 본자(本字)는 장생(長生)이다.
- 어린 시절 살인죄를 저지르고 도망쳐 탁군(涿郡)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기원후 184년】 중평(中平) 원년
- 유비(劉備)가 상인 장세평(張世平)과 소쌍(蘇雙)의 지원을 받아 황건적의 난에 대항할 의병을 모집하자, 장비(張飛)와 함께 합류하여 유비의 심복이 되었다. 이때부터 세 사람은 의형제처럼 지냈다.
【기원후 190년】
- 관동(關東) 각 주군(州郡)이 동탁(董卓) 토벌을 위해 군사를 일으킬 때, 유비는 공손찬(公孫瓚)에게 의탁했다. 공손찬의 명으로 유비는 전해(田楷)와 함께 청주(青州)로 파견되어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되었다.
【기원후 191년】
- 유비가 공을 세워 평원상(平原相)에 임명되자, 관우와 장비는 별부사마를 맡아 유비의 부대 지휘를 보좌했다.
【기원후 194년】
- 조조(曹操)가 서주(徐州)의 도겸(陶謙)을 공격하자, 유비는 전해와 함께 구원하러 갔다. 도겸의 양보로 유비는 예주자사(豫州刺史) 직위를 얻었고, 도겸 사망 후 서주목(徐州牧)을 계승했다. 이후 원술(袁術)과 여포(呂布)의 공격을 받아 유비는 패배했고, 관우는 하비(下邳)를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기원후 196년】 건안(建安) 원년
- 여포의 재차 공격으로 유비가 패하자, 관우는 유비와 함께 조조에게 의탁했다. 조조는 유비를 예주목으로 추대했다.
【기원후 198년】
- 조조를 따라 하비에서 여포를 사로잡아 죽였다. 이후 조조를 따라 허도(許都)로 돌아가 유비와 함께 조조의 대우를 받았다. 유비는 좌장군(左將軍)이 되었다.
【기원후 199년】
- 유비가 원술을 저지하기 위해 서주로 갔다가, 조조의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습격하여 죽이고 서주를 점령하며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때 관우에게 하비 수비를 맡겼다.
【기원후 200년】 건안 5년
- 정월 : 조조의 공격으로 유비가 패주하여 원소(袁紹)에게 몸을 의탁했고, 관우는 하비를 지키다 조조에게 포로가 되거나 자진 항복했다. 조조는 관우를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극진히 대우했다. 관우는 “몸은 조조 진영에 있으나 마음은 한나라에 있다”고 밝혔고, 조조는 그 충의에 감탄했다.
- 2월 : 원소군의 선봉 안량(顔良)이 백마(白馬)를 공격하자, 관우는 조조를 따라 백마로 출진했다. 단기 필마로 적진에 뛰어들어 안량을 참살하여 백마의 포위를 해제했다. 이 공으로 관우는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봉해졌다.
- 2월 이후 : 조조가 더 많은 상을 내려 관우를 만류했으나, 관우는 모든 상을 거절하고 편지를 남겨 조조를 떠났다. 조조는 관우가 유비에게 돌아가는 것을 묵인했다. 유비는 원소 진영을 떠나 여남(汝南)에서 조조의 후방을 교란하고 있었고, 관우는 그곳으로 가 유비와 합류했다.
【기원후 201년】
- 유비와 함께 형주목 유표에게 의탁하여 신야(新野)에 주둔하며 형주 북부 변경의 수비를 책임졌다.
【기원후 208년】 건안 13년
- 9월 : 조조의 남하로 유비군이 당양(當陽) 장판(長坂)에서 조조군에게 패주했으나, 관우의 수군 선단이 한진(漢津)에 때맞춰 도착하여 유비군을 하구(夏口)로 무사히 철수시켰다.
- 겨울 : 손권-유비 연합군의 일원으로 오림(烏林) 전투에서 조조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기원후 209년】
- 유비를 도와 강릉(江陵) 포위전에 참여하여 조조군의 조인(曹仁)을 철수시켰다. 유비가 형주 강남 4개 군을 점령한 후 형주목으로 추대되었다.
【기원후 210년】
- 주유(周瑜) 사후, 유비는 손권과의 협상으로 남군(南郡)을 빌리고, 관우를 양양태수(襄陽太守), 탕구장군(蕩寇將軍)으로 임명하여 강북을 진수하게 했다.
【기원후 211년】
- 유비가 유장(劉璋)의 초청을 받아 입촉(入蜀)할 때 형주 수비 임무를 맡았다. 이 기간 동안 조위 장수 악진(樂進)과 문빙(文聘) 등과 교전했다.
【기원후 214년】
- 유비가 익주(益州)를 점령한 후, 관우를 ‘독 형주사(督荊州事)’로 임명하여 형주를 총괄하게 했다.
【기원후 215년】
- 손권이 형주 3군(장사, 계양, 영릉)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유비가 거절했다. 손권이 관리를 파견하여 3군을 접수하려 하자 관우가 이들을 축출했다.
- 이로 인해 손권과 군사적으로 대치했으나, 유비가 한중(漢中) 문제로 조조와 대립하자 형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손유 간에 상강(湘江)을 경계로 하는 형주 분할 협정이 맺어졌다(관우는 강하, 장사, 계양을 손권에게 양보하고 강릉, 무릉, 영릉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 이때 황충(黃忠)이 후장군(後將軍)에 제수되자, “대장부가 늙은 병사와 같은 열에 설 수 없다”며 불만을 표했지만, 제갈량과 비시(費詩)의 설득으로 받아들였다.
【기원후 217년】
- 노숙(魯肅) 사망 후, 손권은 여몽(呂蒙)을 형주 상류의 군사 통수관으로 임명하여 육구(陸口)에 주둔시켰다. 여몽은 관우의 야심을 경계하며 형주를 빼앗을 계획을 세웠다.
【기원후 219년】 건안 24년
- 7월 :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을 칭했다. 관우는 유비로부터 전장군(前將軍), 가절월(假節鉞) 직위를 받았다. 강릉에서 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조조군의 조인(曹仁)이 지키는 번성(樊城)을 공격하는 양번전역(襄樊戰役)을 시작했다. 미방(糜芳)과 사인(士仁)에게 강릉과 공안(公安) 수비를 맡겼다.
- 8월 : 연이은 폭우로 한수(漢水)가 범람하여 수공(水攻)으로 조조군의 우금(于禁)이 지휘하던 칠군(七軍)을 수장시키고 우금을 포로로 잡았다. 부장 방덕(龐德)을 참살하여 “위진화하(威震華夏)”의 명성을 떨쳤다. 이로 인해 조조는 천도까지 고려할 정도였다. 여몽(呂蒙)은 병을 핑계로 후임에 육손(陸遜)을 앉혀 관우의 경계를 허물게 했고, 관우는 방어 병력 일부를 번성으로 돌렸다.
- 10월 : 손권의 사주를 받은 여몽이 미방과 사인의 투항을 받아내며 강릉과 공안을 기습 점령했다. 후방이 끊긴 관우는 번성 포위를 풀고 남쪽으로 철군하기 시작했다.
- 12월 : 강릉으로 회군하던 도중, 여몽의 심리전(가족들의 소식 전달)으로 병사들이 대거 이탈했다. 당양(當陽)의 맥성(麥城)에서 패주하다가 오나라 장수 마충(馬忠)에게 사로잡혀 살해당했다.
【기원후 220년】
- 손권은 그의 수급을 조조에게 보냈고, 시신은 당양에 제후의 예로 안장했다(관릉).
【기원후 221년】
- 7월 :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명분으로 동오를 정벌할 때, 당양의 관우 대왕총(大王冢)을 찾아 제사를 지내고 옥천산(玉泉山)에 관우 사당을 지었다.
【기원후 260년】
- 촉한 후주 유선(劉禪)으로부터 “장목후(壯繆侯)”라는 시호를 추증받았다. “繆”자가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후대 학자들 사이에서 해석이 분분했다.
- 사후 : 그의 수급은 낙양 관림(關林)에, 시신은 당양 관릉(關陵)에, 혼은 고향 해주(解州) 관제묘(關帝廟)에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머리는 낙양에 베개하고, 몸은 당양에 누웠으며, 혼은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말이 생겼다.
- 관우는 민간에서 충의와 용맹의 상징으로 신격화되어 관공, 관성제군, 무성 등으로 숭배되며, 오늘날까지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관우의 가계】
- 선조
- 증조부 관씨(關氏) : 청나라 때 “광소왕(光昭王)” 추봉
- 조부 관심(關審) : “유창왕(裕昌王)” 추봉
- 아버지 관의(關毅) : “성충왕(成忠王)” 추봉
- 아내와 첩
- 부인 호월(胡玥) : 관평(關平)의 어머니, 민간에서 전해짐
- 부인 두씨(杜氏) : 진의(秦宜禄)의 아내, 《화양국지》 언급
- 첩(설화) 초선(貂蟬) : 민간 설화에만 등장 (정사 기록 없음)
- 자녀
- 장남 관평(關平) : 관우와 함께 전사, 《삼국지연의》에선 의자
- 차남 관흥(關興) : 제갈량의 신임 받음, 젊은 나이에 요직
- 딸 관은병(關銀屏) : 민간 설화에 전해짐, 정사에 이름 없음
- 삼남 관색(關索) : 민간 이야기와 《화관색전》 등장, 정사에 없음
- 손자
- 관흥의 아들 / 관통(關統) : 공주와 결혼, 자식 없이 사망
- 관흥의 서자 / 관이(關彝) : 관통 사망 후 작위 계승
- 후손 (전설, 기록 등)
- 관회(關會) : 팽덕의 아들, 관씨 일족 보복설에 등장 (신뢰도 낮음)
- 관박(關播) : 당나라 때 재상, 《신당서》에 관흥 후손으로 기록
- 관월(關樾) : 전설상의 인물, 관평의 장자라 전해짐
- 관조태(關朝泰) : 관우 52세손, 청나라 시기 오경박사로 세습 허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