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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16일 화요일

남궁혁(南宮爀, 1882~1950년, 남북) 장로교 목사. 신학자.

남궁혁(南宮爀, 1882~1950, 남북) 장로교 목사. 신학자.

 
남궁혁 목사는 한국인 최초의 신학박사요 최초의 신학교 교수로서, 해방 이후에는 한국기독교교회연합회(KNCC) 총무로 재직하고 있다가 625사변 때 공산군에게 납북되어 그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882

  • 그는 188271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그의 가문은 한말(韓末)의 애국지사 가문이었으며 그의 외조부 임씨(任氏)는 승지(承旨)와 평양감사를 지낸 고관이었다.
  • 임오군란이 일어나는 등 정계가 어지러워지자, 그의 집은 경기도 용인(龍仁)으로 피난가게 되어 세 살 때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 그리고 외조부가 평양감사로 부임하게 되자 평양으로 따라가 일곱 살 때까지 평양 감영(監營)에서 성장하였다. 총명함과 재질이 뛰어나 평양으로부터 용인에 돌아와서는 한문을 익혀 백일장에 등과하기도 했다.
 

1896

  • 1896년에는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 졸업후 인천세관을 거쳐 목포세관 등 공직에 1901년까지 재직했다.
 

1908

  • 그가 목포세관에 있을 때 목포에 주재하고 있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그의 총명과 재질을 간파하여 교회로 인도하기 위하여 무척 노력하였다. 선교사들은 서울 정신여학교 교장에게 부탁하여 그에게 배필될 만한 신앙의 여성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여, 그는 황해도 솔내(松川)의 명문 출신인 김함라(金涵羅)를 만나게 되었고 1908년 게일(J. S. Gale; 奇一) 선교사의 주례로 결혼하였다.
  • 선교사들은 목포 영흥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그를 광주 숭일중학교로 옮기게 했다. 그의 영어 실력은 뛰어나 강습을 받기 위해 수많은 청년들이 모여들었고 후일 한국 사회의 명사가 된 김성수ㆍ김병로 그리고 장면의 부친 등이 모두 그에게 배웠다. 부인은 선교사들이 기대한 그대로 자신의 남편을 훌륭한 신앙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1917

  • 그의 신앙은 날로 자라 드디어 191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1921

  • 1921년 제15회로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다.
  • 첫 목회지는 광주 양림(揚林)교회였다.
 

1922

  • 1922년에는 미국으로의 유학길이 열려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의 박사학위 과정에 진학하였다.
 

1925

  • 1925년에 박사학위 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 그는 귀국하여 1925년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그는 교수직의 수행과 함께 성서 번역사업, 성서의 주석 발간 및 신학교 교우지인 신학지남(神學指南)의 편집까지 맡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일을 도운 인물로서 김인서(金麟瑞)ㆍ강흥수(姜興秀)ㆍ김재준(金在俊) 등이 있었다. 그는 후배를 극히 사랑한 도량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박형룡(朴亨龍) 목사가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왔을 때 신학교수의 길을 열어 주었고, 김재준 박사의 생계를 위해서도 염려하였으며, 이성휘(李聖徽)ㆍ송창근(宋昌根) 박사 등 후배의 진로를 후원해줌으로써 한국교회를 활기띠게 하는 데 공헌하였다.
 

1927

  • 학위논문은 귀국한 후 제출되었고 1927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2

  • 그는 193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 노회장이 되었고 그해에 또한 총회장에 선임되었다.
 

1938

  • 1938920, 장로회신학교는 일본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사실상 폐교되었다.
  • 신사참배에 동의할 마음이 없었던 그는 중국 상해로 망명해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945

  • 조국의 해방으로 귀국한 그는 곧 미군정청 장관의 요청으로 적산관리처장으로 취임하였으며 그후에 다시 재무부 세관국장을 역임했다.
 

1948

  • 그러나 부패한 정치정세 속에 더 이상 몸을 담고 싶지 아니하여 1948년에 관리생활을 청산했다.
  • 194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후신이라 하여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개교하려는 무렵에 박형룡 목사가 그를 찾아와 교장으로 취임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내가 한국교회의 분열을 책임질 만한 인물이 되지 못하니 사양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미 그는 그때에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 일찍이 애국지사 이승만(李承晩)이 일제와 싸우다가 망명길로 떠나면서 그의 집에 들러 신세지고 간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이 된 이 박사의 신세를 지려고 하지 않았다.
  • 그에게는 곧은 기질이 있었는가 하면 부정을 미워하는 청결한 성품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남궁 목사는 교회 연합사업에 뜻이 있어 한국기독교교회연합회(KNCC)의 총무직을 수락하여 열심히 헌신하였다.
 

1950

  • 한국전쟁 때 그는 서울을 떠나 남하할 기회를 찾지 못했다. 어느 날 그의 집에 들이닥친 공산군들을 가택수색을 하여 그를 체포했으며 그는 823일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이번에는 세 번째로 평양을 향해 돌아오지 못하는 길로 강제 납북되었다.
  • 그는 감금생활 중에 있어서도 신앙의 지조를 굳게 지켰으며 공산당에게 협조하지 아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북괴 정치보위부로부터 기독교 대표로 남한을 향해 방송을 하면 자유를 주겠다고 하는 감언이설의 유혹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남궁 목사의 최후는, 금식을 계속하면서 기도하다가 기운이 없어져 쓰러진 체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갔다고 전해진다.

2025년 8월 21일 목요일

누마 폼필리우스(Numa Pompilius, BC.c.753~672) : 로마의 종교적 기초를 다진 제2대 왕(BC.715~672)

누마 폼필리우스(Numa Pompilius, BC.c.753~672) : 로마의 종교적 기초를 다진 제2대 왕(BC.715~672)

 
  • 누마 폼필리우스(Numa Pompilius)
  • 출생 : 기원전 753년경
  • 사망 : 기원전 672
  • 부친 : 폼포니우스(Pomponius)
  • 배우자 : 타티아(Tatia)
  • 자녀 : 폼필리아(Pompillia)
  • 재위 : 기원전 715~ 672
  • 전임 : 로물루스(Romulus)
  • 후임 : 툴루스 호스틸리우스(Tullus Hostilius)
 
누마 폼필리우스(Numa Pompilius)는 로물루스(Romulus)에 이어 로마의 제2대 왕으로, 기원전 715년부터 기원전 672년까지 통치했다. 그는 로마의 가장 중요한 종교적, 정치적 제도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며, 로마력(Roman calendar), 베스타 여신의 성녀들(Vestal Virgins), 마르스 신앙, 주피터 신앙, 로물루스 신앙, 그리고 대제사장(pontifex maximus) 직위 등을 제정했다고 전해진다. 로물루스가 로마의 군사적 기반을 다졌다면, 누마는 로마의 종교적, 법적 기초를 확립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누마 폼필리우스의 조각상
누마 폼필리우스의 조각상루브르 박물관 소장
장 기욤 무아트 작품
 

1. 출생과 계보

 
플루타르코스(Plutarch)에 따르면, 누마는 폼포니우스(Pomponius)의 네 아들 중 막내로, 로마가 건국된 날(전통적으로 기원전 753421)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사비니(Sabine) 출신으로, 엄격한 규율과 검소한 생활을 추구했으며, 모든 사치를 배척했다고 알려져 있다. 로물루스의 동료였던 사비니족의 왕 티투스 타티우스(Titus Tatius)는 자신의 외동딸 타티아(Tatia)를 누마와 결혼시켰다. 13년간의 결혼 생활 후 타티아가 사망하자, 누마는 시골로 은퇴했다. 리비우스(Livy)에 따르면, 누마는 왕으로 선출되기 직전 쿠레스(Cures)에 거주했다고 한다.
 
티투스 리비우스(Titus Livius)와 플루타르코스는 누마가 피타고라스(Pythagoras)에게서 철학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언급하지만, 시간적, 지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이를 부정한다. 실제로 피타고라스는 누마보다 약 200년 후에 살았던 인물이다.
 

2. 왕위 계승과 통치 초기

 
로물루스의 사망 후, 로마는 1년간의 공위기(interregnum)를 거쳤다. 이 기간 동안 원로원(Senate)은 번갈아가며 통치했다. 결국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은 누마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누마는 처음에 이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평화롭고 조용한 삶을 살아왔기에 전쟁과 확장에 집중했던 로물루스의 뒤를 이어 통치하는 것을 꺼렸다. 하지만 로마인들과 그의 고향 사비니인들의 간청에 결국 왕위를 수락했다.
 
누마의 통치는 로물루스의 군사적 확장 정책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는 평화를 추구하고, 로마의 내적 발전과 사회적 통합에 중점을 두었다. 특히 종교적 제도와 의식을 확립함으로써 로마인들에게 신성한 법칙과 도덕적 기준을 제공하고자 했다.
 

3. 종교적 개혁과 제도 확립

 
누마 폼필리우스의 가장 큰 업적은 로마의 종교적 기반을 확립한 것이다. 그는 여러 신전을 건립하고, 사제직을 제정하며, 다양한 종교 의식을 도입했다. 그의 주요 종교적 개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로마력(Roman Calendar) 제정 : 누마는 10개월이었던 로물루스의 달력에 1(January)2(February)을 추가하여 12개월 달력을 완성했다. 또한 그는 종교적 축제일과 공휴일을 지정하고, 어떤 날이 종교적 의식을 행하기에 적합한지(dies fasti), 적합하지 않은지(dies nefasti)를 구분했다.
  • 베스타 여신의 성녀들(Vestal Virgins) 제도 : 누마는 로마의 수호신인 베스타(Vesta) 여신을 섬기는 성녀 제도를 확립했다. 이들은 로마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들로, 30년 동안 순결을 지키며 베스타 신전의 신성한 불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 대제사장(Pontifex Maximus) 직위 창설 : 로마의 모든 종교적 의식을 총괄하는 대제사장 직위를 만들었다. 이 직위는 후에 로마 공화정과 제국 시대를 거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에도 유지되었다.
  • 야누스(Janus) 신전 건립 : 누마는 전쟁과 평화의 상징인 야누스 신전을 건립했다. 이 신전의 문은 로마가 전쟁 중일 때는 열려 있고, 평화로울 때는 닫혀 있었다. 누마의 평화로운 통치 기간 동안 이 문은 계속해서 닫혀 있었다고 전해진다.
  • 사제단 조직 : 누마는 플라멘(Flamens), 살리이(Salii)와 같은 다양한 사제단을 조직했다. 플라멘은 특정 신을 섬기는 사제들이었고, 살리이는 군신 마르스(Mars)를 숭배하며 의례적인 춤과 노래를 수행하는 사제단이었다. 이 외에도 피에탈레스(Fetiales)라는 사제단을 만들어 전쟁 선포와 평화 협상 시 신성한 의례를 주관하도록 했다. 이는 로마의 군사적 행위에도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 큐리누스(Quirinus) 신앙 통합 : 로물루스의 신격화된 형태인 큐리누스를 로마 신화에 통합하여, 로마 건국자의 신성성을 공고히 했다.
  • 에게리아(Egeria) 여신과의 교류 : 누마는 심신이 맑아질 때마다 아리치아(Aricia) 근처의 숲에 있는 동굴에서 샘의 여신 에게리아를 만났다고 전해진다. 에게리아는 그에게 신성한 법률과 지혜를 가르쳐주었고, 누마는 이를 바탕으로 로마의 법과 종교 체계를 정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누마의 지혜와 종교적 권위에 신성함을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종교적 제도들은 로마인들에게 신성한 법칙과 도덕적 기준을 제공했으며, 도시의 안정과 사회적 통합에 기여했다. 누마는 신들의 이름으로 자신의 법률을 정당화함으로써 로마 사회에 규율과 질서를 가져왔다.
 

4. 평화로운 통치와 사회 개혁

 
누마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는 거의 전쟁을 하지 않았다. 그의 주요 목표는 로마인들의 삶을 문명화하고, 폭력적이었던 초기 로마의 분위기를 평화롭고 경건하게 바꾸는 것이었다. 그는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아 평화의 시대를 상징했으며, 이는 그의 통치 철학을 잘 보여준다.
 
그는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개혁을 추진했다.
 
  • 시민들 조직화 : 로물루스 시대에는 부족에 따라 나뉘었던 로마 시민들을 직업과 기술에 따라 길드(guilds) 또는 조합으로 조직했다. 이는 직업 간의 평등을 강조하고 사회적 화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피리 연주자, 금세공인, 목수, 염색공, 제혁공, 구리세공인, 도예공 등 다양한 직업군이 독립적인 조직을 형성했다.
  • 토지 재분배 : 로물루스가 정복한 토지를 시민들에게 공정하게 분배하여 재산 불균형으로 인한 갈등을 줄이고 시민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했다.
  • 종교적 정화 : 그는 사치와 무절제한 생활을 금하고, 신에 대한 경외심과 겸손을 강조하며 로마인들의 도덕성을 고양시키려 했다.
 
이러한 개혁들은 로마 사회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질서를 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누마의 통치는 로마가 단순히 군사적 강국을 넘어, 체계적인 사회 시스템을 갖춘 문명 국가로 발전하는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5. 죽음과 유산

 
누마 폼필리우스는 43년간의 평화롭고 현명한 통치를 마치고 평온하게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시신은 야니쿨룸 언덕(Janiculum Hill) 기슭에 있는 돌로 만든 관 두 개에 안치되었다. 한 관에는 그의 시신이, 다른 관에는 그의 저서들이 보관되었다고 한다. 이 저서들에는 철학적 성찰, 종교적 의례에 대한 설명 등이 담겨 있었는데, 후대에 발견되어 종교적 파장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파괴되기도 했다.
 
누마의 죽음은 로마 시민들에게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고, 그가 로마에 가져다준 평화와 질서에 대한 존경심은 매우 컸다. 그의 유산은 로마의 역사와 문화에 깊이 뿌리내렸다. 로마인들은 그를 단순한 왕이 아니라, 신성한 지혜를 바탕으로 로마 문명을 창조한 현인으로 기억했다.
 
후대의 동로마 제국(Eastern Roman Empire) 시대에도 누마 폼필리우스는 긍정적으로 기억되었다. 6세기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Justinian I)는 그의 법전을 편찬하면서 로물루스와 누마를 로마 건국의 두 축으로 보았으며, 누마를 로마를 법률로 조직하고 발전시킨인물로 묘사했다. 11세기 학자 미카일 프셀로스(Michael Psellos)는 로마의 7대 왕을 평가하면서 누마를 경건하고 평화로우며 정신적 미덕을 갖추고 모든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고 극찬했다. 이러한 평가는 누마 폼필리우스가 로마의 단순한 초기 통치자를 넘어, 현명하고 경건한 지도자의 전형으로서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누마의 통치는 로마가 단순한 무력 국가가 아니라, 법과 종교, 도덕을 바탕으로 한 문명 국가로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평화주의적이고 지혜로운 리더십은 로마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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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나람-신(Naram-Sin, BC.?~c.2218) : 아카드 제국 최전성기를 이끈 신격화된 왕(BC.c.2255~c.2218)

나람-(Naram-Sin, BC.?~c.2218) : 아카드 제국 최전성기를 이끈 신격화된 왕(BC.c.2255~c.2218)

 
  • 이름 : Naram-Sin, Narām-Sîn, Naram-Suen
  • [Akkadian : 𒀭𒈾𒊏𒄠𒀭𒂗𒍪 : DNa-ra-am DSîn]
  • 출생 : 미상
  • 사망 : 기원전 2218년경
  • 부친 : 마니슈투슈(Manishtushu)
  • 자녀 : Shar-Kali-Sharri, Bin-kali-sharri, Lipit-ili, Nabi-Ulmash, Ukkin-Ulmash, Enmenanna, Simat-Ulmash, Shumshani, Tutar-napshum
  • 재위 : 기원전 2255년경 ~ 기원전 2218년경
  • 전임 : 마니슈투슈(Manishtushu)
  • 후임 : 샤르칼리샤리(Shar-Kali-Sharri)
 
나람-(Naram-Sin, 아카드어: Narām-Sîn 또는 Naram-Suen ; 의미 : “달 신 신(Sîn)의 사랑받는 자”, 사망 기원전 2218년경)은 아카드 제국(Akkadian Empire)의 통치자로, 기원전 2255년경부터 2218년경까지(중간 연대기 기준) 재위했다. 그는 아카드 제국의 창시자인 사르곤(Sargon of Akkad)의 손자이자 세 번째 계승자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아카드 왕국은 최대 영토를 확장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나람-신은 메소포타미아 역사상 최초로 자신을 신으로 선포하고 아카드의 신(God of Akkad)’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왕으로 기억된다.
 

1. 가계와 황위 계승 : 아카드 왕실의 후예

 
나람-신은 아카드 사르곤의 손자이자 마니슈투슈(Manishtushu) 왕의 아들이었다. 그는 삼촌인 리무시(Rimush) 왕의 조카이기도 하며, 세계 최초의 작가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엔헤두안나(Enheduanna)는 그의 고모였다. 수메르 왕 목록(Sumerian King List)에 따르면 그는 마니슈투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Old Akkadian으로는 그의 이름이 Naram-Suyin (또는 /narām-tsuyin/) 또는 Naram-Suʾin (또는 /narām-tsuʾin/)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2. 아카드 제국의 최대 확장과 사계절의 왕

 
나람-신은 군사적으로 강력한 왕이었다. 그는 반란들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왕국을 현재의 튀르키예(Turkey)와 이란(Iran) 지역까지 확장하며 아카드 제국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로 이끌었다. 그는 자신을 아카드의 신으로 칭했을 뿐만 아니라, ‘사계절의 왕(King of the Four Quarters)’이라는 칭호까지 사용하여 자신의 광대한 지배력을 과시했다. 그의 치세에 아카드는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압도적인 패권을 행사했다.
 
나람신은 동쪽의 엘람에서 서쪽의 에블라와 아르마눔까지 원정을 했다
나람신은 동쪽의 엘람에서 서쪽의 에블라와 아르마눔까지 원정을 했다

그는 아카드 도시의 수호신이 되었으며, 과거 니푸르(Nippur)의 수호신이었던 엔릴(Enlil)의 위치와 비견될 정도였다.
 

3. 엘람 통제 : 동방으로의 영향력 확대

 
엘람(Elam)은 사르곤 시대부터 아카드의 지배를 받았지만, 끊임없이 불안정한 지역이었다. 리무시 왕은 엘람 지역에 군사 원정을 단행했으며, 마니슈투슈 왕은 엘람의 주요 도시인 안샨(Anshan)과 파시메(Pashime)를 정복하고 그곳에 아카드의 총독을 파견했다.
 
나람-신은 파라프숨(Parahshum)에 이르는 엘람 땅 전역의 지휘관이라는 칭호를 자신의 왕실 칭호에 추가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일리-이시마니(Ili-ishmani)나 에피르무피(Epirmupi)와 같이 전형적인 아카드 이름을 가진 엘람 국가의 군정관(shakkanakkus)’이 임명되었는데, 이는 엘람 총독들이 아카드 제국의 관리였음을 시사한다. 나람-신은 재위 기간 동안 수사(Susa)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사원들을 건축하고 자신의 이름을 새긴 비문들을 남겼다. 또한 아카드어가 공식 문서에서 엘람어를 대체할 정도로 수사에 대한 그의 통제는 확고했다.
 

4. 신격화 : 승리 석비와 신성한 왕권

 
나람-신은 자신을 신으로 선포한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왕이었다. 그의 신격화는 군사적 승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의 대표적인 유물인 나람-신 승리 석비(Victory Stele of Naram-Sin)’는 이러한 신격화와 권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승리 석비는 기원전 2230년경의 작품으로, 그가 자그로스 산맥(Zagros Mountains)의 룰루비(Lullibi) 부족과 그들의 왕 사투니(Satuni)를 격파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석비 속 나람-신은 적들을 짓밟고 창으로 찌르는 모습으로, 자신의 병사들보다 두 배나 큰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그의 압도적인 권위와 신성함을 강조한다.
 
나람-신은 자신의 치세에 자신뿐만 아니라 사르곤과 마니슈투슈를 사후에 신격화했다. 그러나 삼촌 리무시는 신격화하지 않았다. 그의 신격화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왕권과 신성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후대 왕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5. 대규모 반란과 문학적 기록

 
나람-신의 통치는 모든 것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아카드와 우르의 신성한 통치자에 따르면, 그는 네 구역 전체가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아스타르 여신(Astar)이 그에게 보여준 사랑 덕분에 그는 1년 안에 아홉 번의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반란들은 후대 수메르 문학에서도 다루어졌다. ‘나람-신에 대한 대규모 반란(Great Revolt against Naram-Sin)’, ‘나람-신과 적대적인 군대(Naram-Sin and the Enemy Hordes)’, 그리고 굴라-AN과 나람-신에 대항하는 17명의 왕들(Gula-AN and the Seventeen Kings against Naram-Sin)’과 같은 서사시들은 나람-신의 통치 기간 동안 발생했던 대규모 반란과 그에 대한 그의 승리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그의 통치가 얼마나 격동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6. 나람-신의 유산 : 메소포타미아 역사에 미친 영향

 
나람-신의 치세는 아카드 제국의 정점이자, 메소포타미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시기였다. 그의 신격화와 세계 사방의 왕이라는 칭호는 후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통치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제국개념의 확립에 기여했다. 그의 이름을 딴 후대 통치자들, 예를 들어 에쉬눈나(Eshnunna)의 나람-신이나 아시리아(Assyria)의 나람-, 그리고 우루크(Uruk)의 나람-신이 존재한다는 점은 그의 오래 지속되는 영향력을 보여준다.
 
나람-신은 군사적 정복자이자 동시에 종교적, 정치적 혁신가로서 아카드 제국의 황금기를 열었다. 비록 그의 신격화가 후대에 비극적인 전설로 연결되기도 했지만, 그는 메소포타미아 역사에 가장 강력하고 상징적인 왕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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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모우리(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모우리 (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 ( 牟義理 )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   【 1878 년 】 미국 오하이오주 벨빌 (Bellville) 근교에서 사무엘 모우리 (Samuel Mowry, 1850-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