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이집트 제14왕조 : 논쟁 속의 미스터리(기원전 약 1805~1650년경)
1. 파편화된 시대의 한 조각 : 고대 이집트 제14왕조의 미스터리
고대 이집트 제14왕조(Dynasty XIV)는 흔히 이집트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 중 하나인 제2중간기(Second Intermediate Period)에 속하는 왕조이다. 기원전 약 1805년부터 기원전 약 1650년까지 75년에서 155년가량 지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왕조는 나일강 삼각주(델타 지역)를 중심으로 통치했으며, 동시대에 여러 다른 왕조들이 존재했던 복잡한 정치 지형의 일부였다. 제14왕조에 대한 기록은 매우 단편적이며, 그 연대기와 역대 통치자, 통치 범위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쟁이 남아있다. 이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가 붕괴되고 이집트가 여러 독립적인 세력으로 분열되었던 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2. 연대기 : 시기와 동시대 통치 논쟁의 중심
제14왕조는 이집트 역사에서 중왕국(Middle Kingdom)과 신왕국(New Kingdom) 사이의 제2중간기(Second Intermediate Period)에 속하는 왕조로 분류된다. 이 시기는 강력한 파라오의 통치 대신, 이집트가 여러 소국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통치자들이 지배했던 격변의 시기였다. 특히 제14왕조는 테베(Thebes)에 기반을 둔 제13왕조와 델타 지역의 또 다른 강력한 세력인 히크소스(Hyksos)의 제15왕조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동시대에 존재한 것으로 여겨진다.
제14왕조의 정확한 시작과 끝나는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크게 갈린다. 이는 이 왕조에 대한 당대 기록이 매우 부족하고, 마네토(Manetho)와 같은 후대 역사가의 기록도 오류가 많기 때문이다. 이집트학자 킴 라이홀트(Kim Ryholt, 생몰년 미상)는 제14왕조가 기원전 약 1805년, 즉 제12왕조 후반 또는 그 마지막 여왕인 소베크네페루(Sobekneferu, 재위 기원전 약 1807-1803년)의 통치 직후에 출현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가나안(Canaan) 이민자들이 동부 삼각주 지역에서 독립을 선언하며, 멤피스를 기반으로 한 제13왕조의 권위 회복 시도를 저지했다고 해석한다. 라이홀트에 따르면 제14왕조는 기원전 1805년부터 기원전 1650년 히크소스(제15왕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약 155년간 존속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맨프레드 비에탁(Manfred Bietak, 생몰년 미상), 다프나 벤 토르(Daphna Ben Tor, 생몰년 미상), 제임스와 수잔 앨런(James and Susan Allen, 생몰년 미상)과 같은 다른 학자들은 라이홀트의 이러한 광범위한 연대기 주장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들은 제14왕조가 기원전 약 1720년경, 제13왕조의 중기, 특히 강력한 파라오인 소베코테프 4세(Sobekhotep IV, 재위 기원전 약 1760년대)의 통치 이후에나 등장했을 것으로 본다. 이 학자들은 특히 제14왕조의 인장(seals)이 출토된 지층(strata)의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제14왕조는 제13왕조의 마지막 50년, 즉 기원전 1700년 이후에만 공존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또한 맨프레드 비에탁은 제14왕조의 두 번째 통치자로 간주될 수 있는 네헤시(Nehesy, 생몰년 미상)의 비문과 기념물들을 기원전 약 1700년경으로 추정하였다. 이는 라이홀트의 초기 주장과 상당한 시기적 차이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러한 논쟁은 제2중간기가 얼마나 복잡하고, 여러 세력의 부침이 동시에 일어났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네헤시의 매우 짧은 통치 이후, 대부분의 학자들은 제14왕조가 지배하던 델타 지역이 장기간의 기근과 역병으로 고통받았다는 데 동의한다. 이 재앙은 제14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근은 제13왕조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로 인해 제13왕조의 말기 50년 동안 불안정한 통치와 많은 단명 왕들이 등장하게 되었다(기원전 1700년 ~ 1650년). 양 왕조 모두가 약화된 상태였기에, 이는 기원전 1650년경 새롭게 부상하는 히크소스(Hyksos, 제15왕조)의 급속한 정복이 가능했던 원인 중 하나로 분석된다.
3. 권력의 중심지 : 크소이스에서 아바리스로 향한 여정
고대 이집트 역사가 마네토(Manetho, 생몰년 미상)의 기록에 따르면, 제14왕조는 델타 중부의 크소이스(Xois)라는 도시에서 통치했다고 한다. 그는 이 왕조에 무려 76명의 왕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대 이집트학자들은 마네토의 이 주장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킴 라이홀트는 투린 왕 목록(Turin King List)에 약 56명의 왕 이름만 기록되어 있고, 물리적으로 70명 이상의 왕을 기록할 만한 공간조차 부족함을 지적한다. 이는 마네토의 기록이 과장되었거나 부정확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오히려 라이홀트를 포함한 대부분의 이집트학자들은 아바리스(Avaris)를 제14왕조의 실제 권력 중심지로 보고 있다. 아바리스에서 진행된 고고학 발굴 조사는 제2중간기 시기에 지어진 거대한 왕궁 유적의 존재를 밝혀냈다. 특히 이곳의 한 안뜰(courtyard)에서는 실물 크기의 2배가 넘는 거대한 조각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조각상은 왕 또는 고위 관리로 추정되며, 전통적인 이집트 양식과는 다른 외래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고고학적 증거들은 아바리스가 크소이스가 아닌 제14왕조의 주요 통치 중심지였다는 견해를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아바리스는 훗날 히크소스 왕조의 수도가 되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4. 통치 범위와 대외 관계 : 국경의 모호함과 무역의 흔적
제14왕조 국가의 정확한 국경은 그들이 남긴 기념물이나 유적이 전반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왕조가 제한된 지역에서 단편적인 권력을 행사했음을 의미한다. 킴 라이홀트의 연구에 따르면, 제14왕조가 직접 지배한 영역은 주로 나일강 델타 지역으로, 서쪽은 아트리비스(Athribis), 동쪽은 부바스티스(Bubastis) 근처까지가 그 경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제14왕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인장(seals)들이 그보다 훨씬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집트 중부 및 상이집트, 즉 당시 제13왕조의 통치 지역이었던 곳에서도 제14왕조의 인장이 발견되었다. 심지어 남쪽으로는 나일강 제3나일폭포(Third Cataract)를 넘어선 동골라(Dongola, 현재 수단 지역)에서도 인장이 출토되었다. 북쪽으로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남부 레반트(Southern Levant) 지역, 현재 이스라엘 북부 레바논 국경 인근의 텔 카브리(Tel Kabri)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인장의 광범위한 발견은 제14왕조가 직접적으로 그 모든 지역을 통치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신 제13왕조, 가나안 도시 국가들, 그리고 누비아(Nubia) 사이에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졌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리홀트는 이 시기 파라오로 추정되는 셰시(Sheshi, 생몰년 미상)가 누비아의 강력한 쿠시 왕국(Kingdom of Kush)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누비아 공주인 타티(Tati)와 결혼했을 것이라고 제안하기도 한다. 이러한 증거들은 비록 제14왕조가 지배하는 영토는 제한적이었지만, 그들의 경제적, 외교적 영향력은 주변 지역으로 더 넓게 퍼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5. 역대 통치자들
1) 제14왕조 아시아계 통치자들(논쟁중)
2) 제14왕조 이집트 파라오들(논쟁이 없음)
3) 제14왕조 이집트 파라오로 추정되는 인물들(불확실)
제14왕조의 일부 통치자들은 가나안(셈족) 계통의 이름을 가졌다는 점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이프쿠(Ipqu, 서부 셈어로 '은총'이라는 뜻), 야크빔('야악-비-임', 아모리족 이름), 카레(Qareh, 서부 셈어로 '대머리'라는 뜻), 또는 야쿠브-하르(Yaqub-Har, 성경의 '야곱'과 같은 이름) 등이 있다. 또한 누비아(Nubia)와 관련된 이름도 두 차례 등장하는데, 왕 네헤시('누비아인'이라는 뜻)와 여왕 타티(Tati)가 그들이다. 이러한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가진 이름들은 제14왕조가 이집트 외부, 특히 근동과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시사하며, 이는 동부 델타에 대한 히크소스의 통제와 지배가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6. 제14왕조의 역사적 의의: 분열된 이집트의 거울이다
제14왕조는 고대 이집트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잃고 다수의 지방 권력이 난립하며 외부 세력의 영향이 증대되던 제2중간기의 복잡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비록 그 존재 자체가 다른 왕조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논란의 여지가 많고 기록이 파편적이지만, 제14왕조는 이집트가 겪었던 분열의 깊이와 이후 히크소스와 같은 외래 왕조의 등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퍼즐 조각인 것이다. 이 왕조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가 단순한 단일 왕조의 연속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다양한 외부 세력과 상호작용한 역동적인 문명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제14왕조의 미스터리는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여전히 많은 연구와 발견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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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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