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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18일 목요일

시제베르트 1세(Sigebert I, AD. 535~575년) : 재위 AD. 561~575년

시제베르트 1(Sigebert I, AD. 535~575) : 재위 AD. 561~575

 
  • 아우스트라시아 왕
    통치 기간 : 561575
    전임자 : 클로타르 1
    후임자 : 킬데베르트 2
  • 출생 : 535
  • 사망 : 575(39~40)
  • 사망지 : 비트리앙아르투아 (Vitry-en-Artois)
  • 배우자 : 브룬힐다 (Brunhilda of Austrasia)
  • 자녀 : 잉군트 (Ingund), 클로도신드 (Chlodosind), 킬데베르트 2(Childebert II)
  • 왕조 : 메로빙거 왕조
  • 아버지 : 클로타르 1
  • 어머니 : 잉군트 (Ingund)
 

기원후 535

  • 시제베르트 1세는 약 535년에 클로타르 1세와 잉군드(Ingonde)의 아들로 태어났다.
  • 그의 이름은 고대 프랑크어(vieux-francique)승리의 빛나는 자라는 의미이다.
 

기원후 561

  • 클로타르 1세는 클로비스 1세의 프랑크 왕국을 어렵게 재통일했지만, 561년에 사망하기 전에 왕국을 분할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들은 그를 수아송의 생트 마리 성당에 안장했는데, 이곳은 그가 성 메다르의 무덤 위에 건설을 시작했던 곳이다. 그들은 그 후 왕국을 나누었다: 파리의 카리베르트, 수아송의 킬페릭, 오를레앙의 곤트란, 그리고 랭스의 시제베르트.
  • 561년 왕국 분할 시, 그는 랭스와 라옹을 포함하는 동부 왕국을 받았는데, 이 영토는 후에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e)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또한 오베르뉴와 프로방스의 일부가 그의 영토에 추가되었다.
 

기원후 562

  • 562, 훈족과 관련된 아바르족이 튀링기아를 침략했다. 시제베르트는 수도를 랭스에서 메츠로 옮겨야 했고, 침략자들을 라인강 너머로 물리쳤다. 킬페릭 1세는 형제의 부재를 이용하여 랭스와 아우스트라시아의 다른 도시들을 점령했다. 시제베르트는 반격을 시작하여 킬페릭 1세를 물리쳤다.
 

기원후 566

  • 566, 그는 비시고트 왕 아타나길드의 딸 브룬하우트와 결혼했다
  • 투르의 그레고리에 따르면, 시제베르트는 형제들의 아내들이 그들의 지위에 걸맞지 않다고 여겼고, 오직 왕의 딸만이 아우스트라시아의 왕비 칭호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제베르트와 성직자들의 영향으로 브룬하우트는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했다.
    “이제 시제베르트 왕은 자신의 형제들이 그들에게 걸맞지 않은 아내들을 맞이하고, 수치스럽게도 실제로 노예 여성들과 결혼하는 것을 보고, 스페인으로 사절단을 보내 많은 선물과 함께 아타나길드 왕의 딸 브룬힐다를 요청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처녀로, 보기에 사랑스럽고, 덕이 있으며 행실이 바르고, 분별력과 상냥한 말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거절하지 않고 그녀를 내가 언급한 왕에게 큰 보물과 함께 보냈다. 그리고 왕은 그의 주요 신하들을 모으고, 잔치를 준비하여 큰 기쁨과 환희 속에서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녀가 아리우스파의 추종자였지만 주교들의 설교와 왕 자신의 권고로 개종하여 하나님 안에서의 삼위일체를 고백하고 믿어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톨릭 신자로 남아있다.”
 

기원후 567

  • 567, 형제 카리베르트 1세의 죽음으로 그는 아키텐의 일부를 얻었다.
  • 프로방스 분할을 둘러싸고 갈등이 발생했다. 시제베르트는 카리베르트 1세의 왕국 분할 시 회수하고자 했던 곤트란의 소유지인 아를 도시를 기습 공격하게 했다. 부르군디의 총독 켈수스는 아비뇽을 점령하고 시제베르트의 부하들로부터 아를을 탈환했다. 곤트란은 그에게 아비뇽을 돌려주어 이 전쟁을 종식시켰다.
 

기원후 568

  • 568, 브룬하우트의 자매인 갈스윈테는 킬페릭 1세와 결혼한 직후 암살당했다(침대에서 목 졸려 살해됨). 아마도 킬페릭의 첩이자 미래의 아내인 프레데군드의 명령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 브룬하우트의 영향을 받은 시제베르트는 처형의 원수를 갚기로 결심했다 : 이것이 네우스트리아와 아우스트라시아 사이의 전쟁의 시작이었고, 이 전쟁은 매우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 심지어 프레데군드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부르군디의 왕 곤트란은 중재를 시도했고, 시제베르트는 처형 살해에 대한 보상으로 아키텐의 다섯 도시를 받는 것에 동의했다.
  • 아바르족은 다시 튀링기아를 침공했다. 첫 침공 때보다 운이 없었던 시제베르트는 포로로 잡혔지만, 적들은 차간(카간)에게 제공된 선물과 교환으로 그를 즉시 풀어주었다. 그들은 평생 비침략 조약을 체결했다.
  • 킬페릭 1세는 아우도베르의 막내아들 클로비스를 시제베르트에게 대항하게 보냈고, 클로비스는 투렌과 푸아투를 점령했다. 곤트란은 시제베르트의 군대에 병력을 합류시키고 뭄몰을 파견하여 작전을 지휘하게 했고, 뭄몰은 투르와 푸아티에에서 킬페릭의 군대를 패주하게 했다. 클로비스는 보르도로 퇴각했지만 시제베르트의 장교 시굴프의 공격을 받았다. 그는 사슴 사냥 때처럼 나팔 소리 속에서 도주했다 .
  • 시제베르트는 샤르트르 교구에 속하며 곤트란의 소유였던 샤토됭에 자신의 왕국 내에 주교구를 세우려 하여 곤트란과 의견 충돌을 겪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리에서 공의회가 열렸지만, 별다른 결론을 내지 못했다 .
 

기원후 573

  • 573, 킬페릭은 갈스윈테 살해에 대한 논쟁을 다시 부추겼고, 형제의 영토인 아키텐의 일부를 황폐화시켰다. 그는 자신의 장남 티베르트를 보냈는데, 티베르트는 이전에 시제베르트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다시는 공격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풀려난 상태였으므로, 이로써 맹세를 어기게 되었다. 티베르트는 투르를 점령하고 푸아티에까지 진군하여 공작 곤데보와 대치했으며, 그의 군대는 학살당했다. 티베르트는 투렌의 일부를 불태웠다. 그는 리모주와 카오르를 공격하여 온 나라를 황폐화시키고 성직자들까지 공격했다. 이듬해, 시제베르트는 라인강 너머의 야만족들을 불러들여 이복형제 킬페릭과 싸우게 했다. 그는 야만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킬페릭 1세와 상호 원조 조약을 맺은 곤트란을 협박하며, 자신을 통과시키지 않으면 전쟁을 벌이겠다고 위협했다. 시제베르트는 알뤼에까지 킬페릭을 추격했고, 그곳에서 평화 조약을 맺었다. 조건은 킬페릭이 티베르트가 점령한 모든 도시를 반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제베르트의 동맹 야만족들이 파리 근교를 약탈했고, 시제베르트는 그들을 설득하여 진정시켜야 했다.
  • 킬페릭은 그 후 평화 협정을 깨고 곤트란과 동맹을 맺어 랭스까지 아우스트라시아를 공격했다. 시제베르트는 라인강 너머의 병력을 다시 불러야 했다. 그는 두 명의 지휘관, 고데기실과 곤트란을 투르와 샤토됭으로 급파하여 티베르트와 맞서게 했다. 티베르트는 병사들에게 버림받고 몇몇 충신들과 저항을 시도하다 살해되었다. 아르눌프라는 이름의 시종이 왕자의 시신을 회수하여 앙굴렘에 안장했다.
 

기원후 575

  • 시제베르트는 세느강 계곡을, 특히 루앙을 정복했고, 그의 형제는 575년 투르네로 피신했다.
  • 그는 파리로 돌아와 브룬하우트 왕비와 자녀들을 만났다. 파리 왕국의 프랑크족들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대표단을 보내 킬페릭을 폐위시켰다.
  • 그가 투르네로 진격하려 할 때, 파리의 주교 제르맹이 그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만약 당신이 형제의 생명을 해치려는 의도 없이 간다면, 당신은 살아 돌아와 승리할 것입니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죽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입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 형제를 위해 구덩이를 판 자는 스스로 그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 비트리앙아르투아에서 킬페릭의 군대는 그를 네우스트리아의 왕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그가 왕으로서 성유식을 치르러 가려 할 때, 프레데군드의 시종들이 양쪽 옆구리를 스크라마삭스로 찔러 살해했다. 도망치려던 두 시종은 왕의 두 시종장인 샤레실을 죽이고 시길라를 부상시켰지만, 결국 자신들도 죽음을 맞이했다.
  • 킬페릭은 투르네에서 나와 시제베르트를 람브레--두에에 매장하게 한 다음, 그를 수아송의 생 메다르 수도원으로 이장하여 클로타르 1세 옆에 묻히게 했다.
  • 시제베르트는 14년간의 통치 끝에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그의 아들인 5세의 킬데베르트 2세는 메츠에서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 시제베르트의 통치 기간 동안 궁재(maire du palais) 직책이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 시제베르트 1세는 람브레--두에의 거인이다.
 

가족 관계

  • 아버지 : 클로타르 1
  • 어머니 : 인군트, 서고트 왕 아타나길드의 딸
    • : 카리베르투스 1
    • 동생 : 군트람
  • 이모(이자 계모) : 아레군트
    • 이복 동생 킬페리쿠스 1
  • 서모 : 쿤시아
    • 이복 형제 : 크롬
    • 이복 형제 : 군도발트
  • 왕후 : 브룬힐트
    • 아들 : 킬데베르투스 2
    • : 인군트 2
      사위 : 헤르메네길두스, 서고트 왕 레오비길드의 아들, 가톨릭 성인
    • : 클로도신드 2(Clodoswintha, Princess of Austrasia)
      사위 : 레카르드 2(Reccared I, 서고트의 왕)
  • 장인 : 아타나길드, 서고트 왕국의 왕
  • 처삼촌 : 레오비길드, 서고트 왕국의 왕

카리베르트 1세(Charibert I, AD. 517~567년) : 재위 : 561~567년

카리베르트 1(Charibert I, AD. 517~567) : 재위 : 561~567

 
  • 파리의 왕(King of Paris)
    재위 : 561~ 567
    전임자 : 클로타르 1
    후임자 : 왕국 분할
  • 출생 : 517
  • 사망 : 56712(50)
  • 매장지 : 블라비아 성 (Blavia castellum), 트락타투스 아르모리카니(Tractatus Armoricani)
  • 배우자 :
    잉고베르가 (Ingoberga)
    테우데킬트 (Theudechild, 566년에 결혼)
  • 자녀 :
    쾰른의 블리티드 (Blithide of Cologne)
    켄트의 베르타 (Bertha of Kent)
    헤스바예의 카리베르트(Charibert of Hesbaye) 
    클리토리스(Clithorice)
    클로타르(Chlothar)
  • 왕조 : 메로빙거 왕조
  • 아버지 : 클로타르 1
  • 어머니 : 잉군트 (Ingund)
  • 종교 : 칼케돈 기독교 (훗날 파문됨)
 

기원후 517

  • 카리베르트 1(프랑스어: Caribert; 라틴어: Charibertus; 51756712)는 파리의 메로빙거 왕이자, 클로타르 1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 잉군드(Ingund)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형인 군타르(Gunthar)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기원후 556

  • 556, 클로타르는 반란을 일으킨 의붓어머니 훈나(Chunna)”와 의붓동생 크람(Chramn)”에 맞서 아들 카리베르트와 군트람(막내)을 보냈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크람은 리무쟁의 블랙 마운틴에 숨어 있었다. 협상이 결렬되자 양측 군대는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나 천둥번개로 인해 교전이 불가능했고, 크람은 (블랙 마운틴에 숨어 있다가) 위조된 편지를 형제들(카리베르트와 군트람)에게 보내 그들의 아버지(클로타르)가 사망했다는 거짓 정보를 알렸다. 카리베르트와 군트람은 즉시 부르군디로 돌아가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 했다.
 

기원후 561

  • 그는 561년 아버지의 사망 이후 이루어진 프랑크 왕국 분할에서 참여하여, 옛 킬데베르트 1세의 왕국을 받았고, 파리를 수도로 삼았다.
  • 카리베르트는 파리를 수도로 하는 네우스트리아(솜과 루아르 사이의 지역), 아키텐, 노벰포풀라나를 받았다. 그의 다른 주요 도시로는 루앙, 투르, 푸아티에, 리모주, 보르도, 툴루즈, 카오르, 알비가 있었다. 군트람은 부르군디를 받았다. 시제베르트는 메츠를 수도로 하는 아우스트라시아(랭스 포함)를 받았고, 막내 동생 킬페릭은 수아송을 수도로 하는 작은 왕국을 받았다.
 

결혼 생활

  • 카리베르트는 잉고베르가(Ingoberga)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
    • 쾰른의 블리티드(Blithide) (538603), 아마도 갈로-로마 원로원 의원 안스베르투스와 결혼했을 것이다.
    • 헤스바예의 카리베르트(Charibert of Hesbaye) (d. 636)
    • 클리토리스(Clithorice) (541569)
    • 베르타(Bertha), 켄트의 애설버트와 결혼
    • 클로타르(Chlothar) (542)
  • 카리베르트의 딸 베르타는 이교도였던 켄트의 애설버트(Æthelberht) 왕과 결혼했다. 그녀는 리우드하르트(Liudhard) 주교를 자신의 개인 고해 신부로 동반했다. 켄트 궁정에서 그녀의 영향력은 597년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of Canterbury) 선교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최초의 앵글로색슨 통치자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기원후 567파문과 죽음

 
  • 카리베르트는 언변이 뛰어나고 법률에 능통했지만, 투르의 그레고리는 그를 초기 메로빙거 왕들 중 가장 방탕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보았다.
  • 그는 동시에 네 명의 아내를 두었고, 그 중 두 명은 자매였다. 이로 인해 그는 게르마누스에게 파문당했다. 이는 메로빙거 왕으로는 최초의 파문이었다. 그 결과, 그는 트락투스 아르모리카누스(Tractus Armoricanus)에 있는 요새 블라비아 카스텔룸(Blavia castellum)에서 불명예스럽게 묻혔다.
  • 그가 죽자 그의 형제들은 그의 왕국을 그들 사이에 분할하기로 합의했으며, 처음에는 파리를 공동으로 소유하기로 했다.
  • 그의 살아남은 왕비(네 명 중 한 명)인 테우데킬드(Theudechild)는 군트람과의 결혼을 제안했지만, 557년 파리에서 열린 공의회는 그러한 결합을 근친상간으로 금지했다. 군트람은 마지못해 그녀를 아를의 수녀원에 더 안전하게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 그의 사생아인 헤스바예의 카리베르트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 카리베르트의 생애에 대한 주요 자료는 투르의 그레고리가 쓴 프랑크족의 역사(43,16,22,26장 및 제926)와 영국 관점에서 베다의 앵글로색슨인의 교회사이다.

킬데베르트 1세(Childebert I, AD. 496~558년) : 재위 AD. 511~558년

킬데베르트 1(Childebert I, AD. 496~558) : 재위 AD. 511~558

 
  • 파리의 왕(King of Paris)
    재위 : 511~ 558
    전임자 : 클로비스 1
    후임자 : 클로타르 1
  • 오를레앙의 왕(King of Orléans)
    재위 : 524~ 558
    전임자 : 클로도메르
    후임자 : 클로타르 1
  • 출생 : 496, 랭스
  • 사망 : 5581213(향년 약 61~62)
  • 배우자 : 울트라고타(Ultragotha)
  • 자녀 : 크로도베르주(Chrodoberge), 크로데신데(Chrodesinde)
  • 왕조 : 메로빙거 왕조
  • 부친 : 클로비스 1
  • 모친 : 클로틸드
  • 종교 : 칼케돈 기독교(Chalcedonian Christianity)
 

기원후 496

 
  • 킬데베르트 1(496- 5581213)는 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족 왕으로, 클로비스 1세와 성녀 클로틸드의 아들 중 하나로 랭스에서 태어났다.
 

기원후 511

 
  • 511년 아버지 클로비스 1세의 사망으로 영토가 분할되었을 때, 킬데베르트는 파리 마을과 북쪽으로는 솜 강까지, 서쪽으로는 영국 해협까지, 그리고 아르모리카 반도(현대 브리타니)를 자신의 몫으로 받았다.
  • 그의 형제들은 각기 다른 땅을 다스렸다 : 테우데리크 1세는 메츠에서, 클로도메르는 오를레앙에서, 클로타르 1세는 수아송에서 통치했다.
 

기원후 523

 
  • 523, 킬데베르트는 형제들과 함께 부르군디의 고도마르에 대한 전쟁에 참여했다.
 

기원후 524

 
  • 킬데베르트의 형제 중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클로도메르는 524년 베제롱스 전투에서 사망했다.
  • 이후, 클로도메르의 세 아들이 오를레앙 왕국을 상속받을 것을 우려한 클로타르와 킬데베르트는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공모했다. 그들은 어머니 클로틸드에게 대표자를 보냈다. 이 대표자는 가위와 칼을 제시하며, 세 어린 소년들의 머리카락을 자르거나(긴 머리카락은 왕권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들을 죽이는 선택지를 제시했다. 그녀는 유명하게도 그들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다면, 머리카락이 잘린 것보다 죽는 것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더 낫다고 대답했다. 클로도메르의 두 명의 맏아들이 살해된 후(막내 클로도알트는 수도원 생활로 도피했다), 킬데베르트는 샤르트르와 오를레앙 도시들을 합병했다.
 

기원후 531

 
  • 531, 그는 비시고트족의 왕 아말라릭의 아내인 자매 크로틸다의 호소를 받았다. 크로틸다는 히스파니아의 아리우스파 왕이 가톨릭 신자인 자신을 심하게 학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킬데베르트는 군대를 이끌고 내려가 고트족 왕을 물리쳤다. 아말라릭은 바르셀로나로 퇴각했으나 그곳에서 암살당했다. 크로틸다는 파리로 돌아오는 여정 중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사망했다.
 

기원후 532

 
  • 그는 이후 부르군디 왕국에 대한 여러 원정에 참여했다. 532년에는 오튱을 포위했다.
 

기원후 534

 
  • 534년에는 형제 클로타르 및 테우데리크의 아들 테우데베르트 1세와 함께 왕국을 정복한 후, 전리품으로 마콩, 제네바, 리옹 마을들을 차지했다.
 

기원후 535

 
  • 535년 동고트족의 왕 비티게스가 프로방스를 프랑크족에게 양도했을 때, 아를과 마르세유의 소유권은 형제들에 의해 킬데베르트에게 보장되었다. 이 지방의 합병은 클로타르의 도움으로 536-537년 겨울에 완료되었다.
 

기원후 542

 
  • 킬데베르트는 비시고트족에 대한 다른 원정도 수행했다. 542, 그는 형제 클로타르의 도움으로 팜플로나를 점령하고 사라고사를 포위했지만,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원정에서 그는 성 빈센트의 튜닉이라는 소중한 성유물을 파리로 가져왔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파리 문에 유명한 생트-크루아---뱅상 수도원을 건립했다. 이 수도원은 후에 생-제르맹--프레로 알려지게 되었다.
 

기원후 558

 
  • 그는 5581213일에 사망했으며, 자신이 설립한 수도원에 묻혔고 그곳에서 그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 -제르맹--프레는 675년까지 네우스트리아 왕들의 왕실 묘지가 되었다. 그는 아내 울트라고타와의 사이에서 크로도베르게와 크로데신데라는 두 딸을 남겼다.
  • 킬데베르트는 영토 확장에 열정적인 군주였다. 그는 형제들 중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은 해외 전쟁에서 자신의 영토를 확장했으며, 부르군디(여러 차례), 스페인(여러 차례), 프로방스, 그리고 골의 다른 지역에서 싸웠다. 동시대 네우스트리아인 투르의 그레고리는 킬데베르트가 나는 그토록 즐거운 은총으로 빛난다고 하는 오베르뉴 리마뉴를 눈으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인용한다.
  • 킬데베르트는 또한 클로비스의 아들들 중 더 종교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다양한 전쟁에서 형제들과 협력했고, 가톨릭 신앙 때문에 학대받았다고 주장하는 누이를 구했으며, 성 빈센트의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유명한 수도원을 건설했다. 물론 그의 유해와 네우스트리아 왕들의 왕실 묘지도 이곳에 안치되었다.

모우리(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모우리 (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 ( 牟義理 )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   【 1878 년 】 미국 오하이오주 벨빌 (Bellville) 근교에서 사무엘 모우리 (Samuel Mowry, 1850-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