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인물 - 차]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인물 - 차]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5년 9월 15일 월요일

후한 9대 충제 유병(沖帝 劉炳, AD. 143~145년) : 재위 AD. 144~145년

후한 9대 충제 유병(沖帝 劉炳, AD. 143~145) : 재위 AD. 144~145

 

기원후 143

  • 유병(劉炳)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 아버지는 후한 순제(順帝) 유보(劉保)이며, 어머니는 우미인(虞美人)이다.
  • 그는 순제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기원후 144

  • 63(양력), 아버지 순제가 병들자 황태자(皇太子)로 책봉되었다.
  • 920(양력), 아버지 순제가 붕어하자, 한 살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하여 후한의 제9대 황제가 되었다.
  • 이 시기는 건강(建康) 원년에 해당한다.
  •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순제의 황후이자 그의 양어머니였던 양태후(梁太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며 국정을 총괄했다. 양태후의 오빠인 양기(梁冀)가 사실상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기원후 144~145

  • 영희(永憙) 또는 영가(永嘉) : 기원후 145년에 이 연호가 사용되었다.
  • 그의 재위는 약 6개월간 이어졌다.
  • 이 시기에는 이미 순제 대부터 이어진 농민 봉기가 더욱 심화되었으며, 심지어 순제의 능까지 도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 양태후는 공명정대했지만, 부패한 오빠 양기를 지나치게 신뢰하여 정국을 혼란에 빠뜨렸다.
 

기원후 145

  • 215(양력), 2세 또는 3(동아시아 나이 계산법)의 어린 나이로 사망했다.
  • 양태후는 충제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려 했으나, 대사마(大司馬) 이고(李固)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 양기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나이가 어린 황족인 유찬(劉纘, 훗날 질제)을 옹립했으며, 연장자로서 더 적합했던 유찬의 삼촌 유산(劉蒜)은 배제되었다.
  • 충제는 비용 절감을 위해 아버지 순제의 능원에 합장되었다.
 

기원후 175

  • 충제의 모친인 우미인은 충제가 사망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기원후 175, 영제(靈帝)에 의해 귀인(貴人)으로 추봉되었다 .
 

요약 정보

  • 이름 : 유병(劉炳)
  • 묘호 : 없음
  • 시호 : 효충황제(孝沖皇帝) : 충제(沖帝)는 줄임말
  • 출생 : 기원후 143
  • 출생지 : (명확한 기록 없음, 아마 낙양 궁궐 내)
  • 사망 : 기원후 145215(향년 2세 또는 3)
  • 사망지 : (낙양 궁궐 내로 추정)
  • 부친 : 후한 순제(順帝) 유보(劉保)
  • 모친 : 우미인(虞美人)
  • 배우자 : 없음 (어린 나이에 사망)
  • 자녀 : 없음 (어린 나이에 사망)
  • 재위 : 기원후 144920~ 기원후 145215(6개월)
  • 전임 : 후한 순제(順帝) 유보(劉保)
  • 후임 : 후한 질제(質帝) 유찬(劉纘)
  • 후한 충제 유병은 순제의 유일한 아들로 태어났으나, 한 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겨우 6개월 만에 병사한 비운의 황제이다. 그의 재위 기간은 사실상 양태후와 그녀의 오빠 양기(梁冀)의 수렴청정 아래 있었으며, 양기는 충제의 죽음을 이용해 어린 질제를 옹립하여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

2025년 9월 11일 목요일

최병헌(崔炳憲) 1858~1927. 감리교 목사. 호는 탁사(濯斯).

최병헌(崔炳憲) 1858~1927. 감리교 목사. 호는 탁사(濯斯).

 

1858

  • 16일 충북 제천군 현좌면 실월리에서 부친 최영래(崔永來)와 모친 곽씨(郭氏)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 몰락한 양반가문의 빈한한 가세 때문에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으나 향학렬만은 남달라 동냥공부라고 불리는 청강, 독학 등으로 한학에 열중, 과거시험에 대비했다.
 

1867

  • 돌림병으로 모친과 조부가 별세하였다.
 

1878

  • 보은군에 있던 친척 최직래(崔稷來)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1880

  • 양부모와 함께 상경하여 남대문 근처인 상동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는 계속 과거준비를 하였고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개화서적인 瀛環志略(영환지략)등을 탐독하였다.
 

1881

  • 상경한 지 1년만인 1881년 8월에 양부친이 사망하자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1882

  • 1882년의 임오군란 이후에는 청군의 횡포를 피해 다시 충북 보은군 사막리 속리산 아래로 이사, 은거했다.
 

1888

  • 1888년 다시 상경하여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는데, 이는 실력부족보다는 당시 과거제도의 문란과 타락에 기인된 것으로 이를 깨달은 그는 크게 실망하고 과거공부를 중단했다.
  • 18881013, 사회악 제거와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전전하던 중에 윤치호의 소개로 미감리회선교사 존스(G. H. Jones ; 趙元時)의 어학선생이 되면서 감리교 선교사들과 교분을 가지기 시작했다.
 

1889

  • 배재학당의 한문선생으로 일하게 되고 여러 개화서적을 통해 새로운 문물 연구에 몰입했으며 한문성서를 가지고 성서연구에도 혼신을 다했다. 그가 당시 읽은 책으로는 萬國通鑑, 泰西新史, 西政叢書, 地理略解, 格物探原, 天道溯源, 心靈學, 自西担東등이 대표적이다. 이로써 기독교에 대한 관심도 커졌고 선교사들로부터 그 진리에 대한 가르침도 받았다.
 

1893

  • 189328일 조지 존스 목사에게 세례(洗禮)를 받고 정동제일교회(貞洞第一敎會)의 전도사로 활동하는 한편, 성서번역위원과 독립협회(獨立協會) 간부, 제국신문(帝國新聞)과 황성신문(皇城新聞) 주필(主筆), 신학월보(神學月報) 편집인 등으로 활약하였다.
  • 그는 기독교 입교로 인해 가문과 친지들로부터 많은 비난과 핍박을 받은 바도 있었다. 그의 입교는 외부로부터의 전도라기보다는 4년여동안 그 스스로 성서를 읽고 결단한 자발적인 복음수용이었다.
    그가 입교 후 명기해 놓았던 성서적 좌우명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 사랑함 : 부모와 처자보다 쥬를 더 사랑할 것.
    2. 남을 의론(판단)치 말 것 : 남의 적은 허물을 의론하는 자는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집호라기를 말함.
    3. 무상으로(항상) 긔도함 : 셩신이 임하신 듯 공공헌하며 무형무샹한 그 가운데 존엄하신 보좌압헤 뫼셔 있으며 요요젹젹하며 무셩뮈취한 가운뎨서 공중에 높으신 소리를 듯는 듯하야 믁믁히 셔로 교통함으로 희락이 충만함
  • 189398일 선교연회에서 전도사 칙접을 받고 정동제일교회에 소속되어 목회생활을 시작하였다.
 

1896

  • 1896년부터 시작된 독립협회의 자강ㆍ민권운동의 주도회원(主導會員)으로 활약한바 그는 정동교회 청년회와 배재학당의 협성회 조직에 밀접하여 그 회원동원에 있어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 1896년부터 1898년까지 농상공부(農商工部) 주사가 되어 관리로서의 일과 전도사의 일을 겸업하였다. 이때 대한제국의 태동과 정부의 움직임을 체험하면서 역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고 정부의 외교와 정치적 일을 개인적으로 세세히 기록하여 자신의 약전(略傳)에 소상히 한문으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1897

  • 189722일에 한국 최초의 기독교 신문인 조선크리스도인 회보를 아펜젤러와 공동 창간하였다.
 

1900

  • 19009월 정동교회 담임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2차 안식년으로 1년동안 귀국한 후 최병헌은 정동교회를 단독으로 맡아 시무하였다.
  • 190012월에는 한국 최초의 신학잡지인 신학월보를 존스 선교사와 함께 간행하였다. 이들은 최병헌의 실무적 편집작업과 집필 등에 거의 의존했는데, 특히 신학월보의 간행은 한국신학의 시작과 그 맥을 같이할 정도였다.
 

1901

  • 1901년 최병헌은 신학월보죄의 도리라는 신학논문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또 한국인이 쓴 최초의 신학논문이었다.
 

1902

  • 1900년에 정동교회 담임으로 시무하던 때 그의 교역능력이 선교회에 인정되어 19025월에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 1902년 목사안수를 받은 그는 스크랜톤목사의 안식년 귀국으로 상동교회를 1년 동안 담임했다.
 

1903

  • 그는 아펜젤러의 순직으로 정동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발탁되는 광영을 입었으며 이후 11년동안(1903~1914) 착실한 목회공적을 쌓아올렸다.
  • 최우익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 교수는 1후손들의 증언과 일부 사료를 봤을 때 최병헌 목사가 작사했던 불변가(不變歌)’가 애국가의 원곡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최병헌의 증손자로 지난해 말 그간 연구성과를 모아 탁사 최병헌의 개화사상과 민족운동이란 책을 냈다.
    이 때 이승만, 김규식 등 배재학당 출신들과 친목회를 결성했고, 이들이 해외로 떠날 때 불변가를 지어 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후손들은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과 서리에도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라는 애국가 2절 가사가 최병헌이 옛 정동교회 목사 사택에서 바라본 남산 풍경이라고 해석했다. 최 교수는 당시 사택에서 남산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보였고, 이 소나무들처럼 독립과 애국을 기원하는 마음은 변치 말자는 취지로 불변가를 지었다그가 남긴 책과 기록들에서도 소나무의 기상을 언급한 부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기사 바로가기]
  • 1903년 월남 이상재 등과 함께 ‘YMCA’ 창립에 참여하였다.
 

1904

  •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의법학교몽양원을 설립하였다.
 

1906

  • 1906년에는 일반신문인 대한매일신보4회에 걸쳐 정치와 종교의 관계(政治與宗敎之關係)라는 논문을 기고했는데 여기서 세 가지의 정치 체제의 서술설명, 종교와 정치의 밀접성, 서양의 기독교 융성과 국가부강의 실례를 역설하고 당시 기독교에 대한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의 입장을 공격했으며 부정을 일삼는 탐관오리들에게 날카로운 비판을 퍼부었다. 이 논문은 그가 YMCA에서 행한 공개강연의 요지를 신문에 발표한 것으로 당시 큰 파문을 남겼다. 특히 그의 YMCA활동도 활발해 YMCA 종교부 위원장, 전국대회 위원장 등을 지내면서 청년운동에도 주력하였다.
 

1907

  • 1907년부터 신학월보셩산유람기라는 논문을 연재했다.
  • 1907년에 대한제국 순종(純宗) 황제로부터 부여받은 선유사(宣諭使)로 활동하였다. 1895, 명성황후 시해 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으로 야기된 항일의병은 을사년(1905)을 거쳐 정미년(1907)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이에 순종 황제와 이완용(李完鎔) 어용 정부는 선유사란 이름으로, 항일의병들을 선무(宣撫) 해산케 할 목적으로 정부 관리를 2차례에 걸쳐 파견하였다. 하지만 선유사로 파견된 관리들은 의병(義兵)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오히려 반발심만 증폭시키는 결과만 낳았다. 이에 정부는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백성들로부터 지명도(知名度)가 있거나 신망(信望)이 두터운, 기독교 지도자를 선유사로 임명하여 지방을 순회하며 의병의 실태를 파악하고 해산을 종용케 하고자 하였다. 지명된 대표적 인물이 장로교(長老敎)의 길선주(吉善宙), 서상륜(徐相崙)과 감리교의 최병헌, 송기용 등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활동한 이는 길선주를 제외한 세 사람이었다.
  • 최병헌의 선유활동은 19071225일에 서울에서 출발하여 충청남도 일대에서 전개되었다. 그의 주요 행적은 조치원(,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지역)연기군(燕岐郡)공주군(, 공주시)회덕군(,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 지역)진잠군(, 대전광역시 유성구 지역)연산군계룡(鷄龍)논산(論山)석성군(, 충청남도 부여 지역)부여군(扶餘郡)정산군(, 충청남도 청양 지역)청양군(靑陽郡)대흥군(, 충청남도 예산 지역)예산군(禮山郡)온양군(, 충청남도 아산 지역) 등으로 충청남도의 각 군을 순회하며 선유하였다주21. 그리고 그 외 목천(, 충청남도 천안 지역), 직산(, 충청남도 천안 지역), 평택(平澤), 아산(牙山), 임천(, 충청남도 부여 지역), 흥산, 한산(, 충청남도 서천 지역), 서천(舒川), 비인(, 충청남도 서천 지역), 남포(, 충청남도 보령 지역), 보령(保寧), 오천, 결성(, 충청남도 홍성 지역), 전산, 홍주(, 충청남도 홍성 지역), 면천(, 충청남도 당진 지역), 당진(唐津), 해미(, 충청남도 서산 지역), 덕산(, 충청남도 예산 지역), 서산(瑞山), 태안(泰安), 전의(, 세종특별자치시 지역), 천안(天安)을 거치거나 사정을 확인하여 고시문을 통지하였다.
 

1909

  • 1909년부터 신학월보四敎考略(사교고략)을 연재하였다.
 

1911

  • 그는 목사안수를 받고 정동교회에 시무중이던 때에 정식으로 신학교육을 받아 191112월에 협성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1912

  • 1912년에 신학월보셩산유람기라는 논문을 연재했던 것을 모아서 聖山明鏡(성산명경)이란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이는 문학적 형태를 지닌 비교종교론적 변증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설파하는 내용이다.
 

1914

  • 1914년부터 1922년까지 인천 · 서울 지방의 한국인 최초 감리사(監理師)로서 교회 행정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 한편 최병헌 목사는 1914년부터 3년동안은 인천지방 감리사, 이후 5년 간은 서울지방 감리사로 재임하면서 목사직에 대한 인사권 등 지방행정권을 행사했다. 당시는 대부분 선교사들이 이 직책을 수행할 때였으나 그는 가장 중심된 인천과 서울 지방에서 유감없는 행정력을 발휘하였다. 이 시기 서울과 인천지방 교회들이 크게 성장하였고 그는 각 지역 교회를 순회하면서 맡은 직무를 수행하였다.
 

1916

  • 1916년에 창간된 본격적인 신학월간지 신학세계편집진의 한 사람으로 창간호부터 종교변증론이란 제목으로 5년동안 논문을 연재하였다.
 

1922

  • 1922년에 이를 모아 萬宗一臠(만종일련)이라는 단행본을 펴냈다. 이 책은 최병헌의 신학사상이 압축되어 나타났는데 한국교회 초기의 대표적인 비교종교학적 선교신학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동양의 제종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동양종교와 기독교와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타나기까지는 세계의 모든 종교는 그 역사적인 사명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긍정한다. 그는 유교를 비롯한 동양사상에 깊은 애정을 가진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나타난 이후부터는 그 의미가 변하였다. 타종교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인도자)으로 보았다. 즉 그는 모든 종교를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 안에 있는 문화현상으로 보았는데 이에 비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종교의 도달점이며 완성이라고 보았다. 요컨대 동양의 성현들이 구하던 진리가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점이다.
    若便孔夫子基督하셨더면 必也信從이시오 釋迦氏損己利人善果하였더면 若行林中六年風霜虛勞치아니실지라.”
    그러나 그는 전통적인 서구신학에서처럼 타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이며 독선적인 태도를 취하지않았고 그렇다고 객관적 입장의 종교학에서처럼 상대주의를 취하지도 않았다. 그는 역사적 기독교도 하나의 상대적 종교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역사적 기독교와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복음진리와를 구별하여 이 복음에 나타난 진리만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1922년 목회에서 은퇴하고 1년 동안 요양한 후 협성신학교 교수로 취임, 후진양성에 나섰다.이로써 모교인 협성신학교에서 비교종교학과 한국문화를 강의한 바 교재는 성산명경, 만종일련등 그의 저서를 활용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신학세계古今時代 進化등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또 많은 한시(漢詩)를 써서 시인으로서도 명성을 날렸다. 주요 작품으로 漢濱餓春(한강변에서 봄을 보내며), 秋感, 白雪이 좋고나등을 들 수 있다.
 

1927

  • 192753일 지병인 간()이상 증상이 악화, 별세하였다.
  • 정동교회는 그의 공로를 기려 예배당 동쪽벽에 추모기념 비문을 새겨 놓았다.

모우리(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모우리 (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 ( 牟義理 )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   【 1878 년 】 미국 오하이오주 벨빌 (Bellville) 근교에서 사무엘 모우리 (Samuel Mowry, 1850-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