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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12일 일요일

모우리(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모우리(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1878

  • 미국 오하이오주 벨빌(Bellville) 근교에서 사무엘 모우리(Samuel Mowry, 1850-1939)와 메리 밀러(Mary A. Miller, 1854-1946) 사이의 63녀 중 셋째로 출생했다.
 

1902

  • 벨빌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02년 우스터대학(College of Wooster)에 입학하였다.
 

1906

  • 1906년 우스터대학(College of Wooster)을 졸업했다.
  • 대학생 때 자원봉사대에 가입하여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졸업반 때 로이드 토마스(Lois Thomas, 1885.9.22.-1975.6.26.)와 약혼했다.
  • 1906년 가을 웨스턴신학교(Western Seminary)에 입학했다. 신학교 졸업반 때 약혼자와 함께 중국선교사로 가도록 임명받았으나, 한국에서 활동하다 안식년으로 귀국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베어드(William Baird)의 권고로 한국으로 선교지를 변경했다.
 

1909

  • 신학교를 졸업하고 19095월 미국 북장로회 우스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 같은 해 9월 결혼하고, 부인과 함께 102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평양선교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 먼저 한국어를 익한 다음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와 미국 미감리회 선교회가 연합으로 운영하던 숭실대학(Union Christian College)에서 일반 생물학ㆍ유전학ㆍ세포학ㆍ지질학ㆍ일반 농학 등을 가르쳤다. 이와 함께 장로회에서 설립한 평양 숭인학교ㆍ숭덕학교 등의 교잠도 겸하였다.
  • 부인도 숭의여학교ㆍ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3

  • 장대현교회에 출석하면서 한국 최초의 성가대를 조직하였고, 1913년 숭실대학에 합창단과 음악대를 조직하여 서양음악을 보급하였다.
 

1917

  • 1917년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우스터대학교에서 생물학석사 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 그후 숭실에서 약 25년간 생물학과 과학 과목을 교수하였다.
 

1918

  • 1918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기부받은 400원과 자신이 마련한 600원을 합하여 1천 원 상당의 풍금을 구입하여 기증하였다.
 

1919

  • 191931일 평양 숭덕하교 교정에서 열린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를 동료 선교사 마펫(Samuel A. Moffett)과 함께 현장에 나가 목격하고, 경찰에 쫓기는 시위 참가 학생들을 집에서 기거하게 했다.
  • 당시 숭덕학교 교장과 숭실대학 교수, 숭실중학교 교사를 겸하고 있어 독립만세시위의 배후로 의심을 받고 있다가 44일 가택 수색을 당하고 마펫과 함께 구속되었다.
  • 마펫은 다음날 풀려났지만, 숭실중학교 제자인 길진경(吉鎭京)과 이인선(李仁善), 숭실대학교 재학생 이보식(李輔植)과 김태술(金泰述) 등을 집에 숨겨준 혐의로 기소되어 419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그날 보석으로 풀려났다.
  • 그러나 그는 평소와 같이 학생들을 손님으로 대우했을 뿐이며, ‘범인 은닉의도는 없어 무죄라고 주장하며 항소하여 51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4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 다시 상고하여 818일 고등법원에서 전 판결을 파기하고 경성복심법원에 이송한다는 판결을 받았고, 102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벌금 100원을 선고받았다.
  • 이를 다시 상고하였으나 124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 판결을 받아 형이 확정되었다.
 

1935

  • 19351114일 개최한 평남 중등학교장 회의에서 평남지사가 평양신사에 참배하고 나서 회의를 하자고 제안하자, 숭실학교 교장 매큔(George S. McCune, 尹山溫)과 숭의여학교 교장 대리 정익성(鄭益成), 순안 의명학교 교장 리(H. M. Lee, 李希滿)가 그런 일은 전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상 그 지시에 따를 수 없다고 거부하여 문제가 되었다.
 

1936

  • 매큔은 118일자로 신사참배를 자신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시킬 수 없으며, 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사직도 할 수 없다는 내용의 답변서를 도지사에게 제출하였다.
  • 매큔은 그날로 숭실학교장직과 120일 숭실전문학교장직 인가를 취소당하고, 스눅(Velma L. Snook)122일 숭의여학교장 대리직 인가를 취소당했다.
  • 각 학교의 후임 교장으로는 숭실전문학교 교장에 모우리, 부교장에 이훈구(李勳求), 숭실학교는 교장에 정두현(鄭斗鉉), 숭의여학교는 교장 사무취급으로 김승섭(金承涉)이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그해 3월에 취임하였다.
  •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소속 학교 교장들이 파면당한 북장로회 선교부는 학교 이사회를 통하여 후임 교장들을 임명하기는 하였지만, 소속 학교 폐교 여부의 최종적인 결정은 그해 정기 선교사연회로 미루고 있었다.
  • 마침내 1936625일부터 72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정기 북장로회 선교사 연회에서 71교육철수권고안을 표결에 부쳐 6916의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결의하였다. 이 권고안의 주요 내용은 설립시에 가졌던 충분한 목적과 이상을 보존하며 우리 선교 학교들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증가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선교회가 세속 교육으로부터 철수하려는 정책을 인준해 줄 것을 권고한다. 선교회는 시기와 방법에 관한 모든 구체적인 것은 실행위원회의 권한에 맡길 것을 권고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실행위원회가 이를 결정할 때는 각 지역 선교지부와 서로 협의하고, 의견이 다를 때는 전체선교회 연례회나 임시회에서 투표로 결정하며 선교본부의 승인이 요구되는 사항은 규정에 따라 선교본부에 보고하기로 하였다.
  • 이 권고안은 미국 선교본부에 보고되어 같은 해 921일 선교본부 총회에서 이를 승인하였다. 이러한 결정이 알려지자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이 방침대로 학교를 폐교하자는 측과 존속시키자는 측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유서 깊은 학교의 폐교를 안타까워하던 지역 유지들도 자금을 모아 학교를 인수하여 계속 경영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학교를 폐교하면 당장 피해를 보게 되는 학생들과 교사들도 학교를 폐교하려는 선교부의 방침에 반발하고 점차 학교를 인계ㆍ유지하려는 측에 가담하였다.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신사참배에 응하느냐 거부하느냐는 문제가 학교를 존속시키느냐 폐교시키느냐는 문제로 변질되어 의견이 대립되었고,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학교를 어떤 방식으로 인수하느냐로 의견이 갈렸다.
 

1937

  • 19379월 선교본부 회의에서는 1936년의 철수방침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하였고, 북장로회 선교부는 홀드크로프트를 비롯한 선교부 실행위원들의 의견에 따라 학교를 폐교하고 재산을 인계하지 않는 방침을 취했다. 그러나 그러한 방침은 학교 경영을 계속하기를 원하는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의 반발, 일제 당국의 방해로 그대로 관철할 수가 없었다.
  • 우여곡절 끝에 결국 평양의 숭실전문ㆍ숭실학교ㆍ숭의여학교 세 학교만 19371029일과 111일에 각각 페교원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이들 학교들의 폐교 이유가 애매하고 재학생 처리책이 막연하며 기타 서식이 불비하다는 이유로 1119일 폐교원을 학교 설립자에게 반려하였다. 일제가 폐교원을 반려한 것은 폐교를 할 경우 조선총독의 인가를 받도록 한 개정된 사립학교규칙을 적용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페교의 책임을 선교사 측에 전가하고, 폐교를 하더라도 부지ㆍ건물의 기부와 임대 등의 실리를 챙기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선교부 측도 폐교를 허락하면 건물 임대에 대해서 협상할 수 있다는 의향을 보이면서, 다시 1223숭의 폐교신청서를 평양부 학무계에 제출하여, 128일에는 도 학무과에 접수되었다.
 

1938

  • 그 후 이 문제에 대해 도 학무당국과 협상을 진행하여 19381213숭의 설립자 측 선교사들이 선교부 실행위원회를 거쳐 이러한 사실을 선교본부에 보고하여 허락을 받으면 교사(校舍)를 빌려줄 수 있다는 뜻을 보임으로써 타협이 이루어졌다.
  • 선교부 실행위원들은 학교의 직원ㆍ생도 처분에 관한 것을 도 당국이 책임지고 처리해 주며, 폐교 신청을 속히 처리해 준다면 교사를 빌려줄 수 있다는 안을 결의하여 127일 도 당국에 알리자 도 당국에서도 교사(校舍)만 차용(借用)하게 되면 직원ㆍ생도의 처리 문제와 폐교신청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함으로써 합의가 이루어졌다. 실행위원회는 이 사실을 선교부에 전보로 알리고 회신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선교본부에서도 222일 실행위원장 로스에게 교사(校舍)의 임대문제는 위원장에게 일임하니 인가해도 좋다는 뜻의 회답을 보내왔다.
  • 이로써 3승의 폐교는 확정되었고, 숭실중학은 193833, 숭실전문은 34, 숭의여학교는 311일 마지막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 19383월 말일로 폐교하려는 숭실전문을 비롯한 숭실중학교, 숭의여학교의 폐교 신청에 대한 정식 인가 지령은 1938319일 학교 설립자 대표 모우리와 라이너에게 교부되었다.
 

1940

  • 모우리는 숭실학교가 폐교된 후에도 평양에 계속 머물며 선교활동을 하다가 194011월 서울주재 미국영사관의 권고를 받아들여 귀국하였다.
 

1949

  • 해방 후 다시 내한하여 활동하다가 19491월 은퇴하고 귀국하였다.
 

1950

  • 대한민국 정부는 19503월 건국훈장독립장을 수여했다.
 

1968

  • 19683월 숭실대학교 창립 70주년 기념식에도 초대되어 방한했다.
 

1971

  • 19711017일 미국 오하이오주 컬럼버스에서 별세하여 맨스필드(Mansfield)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 존 볼링과 엘라는 모두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하였다. 레이놀즈 부부, 큰 딸 캐리, 막내딸 엘라는 모두 마운틴뷰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2025년 9월 17일 수요일

메로베크(Merovech, c.411~457) 메로빙거 왕조의 조상

메로베크(Merovech, c.411~457) 메로빙거 왕조의 조상

 
  • 살리안 프랑크족의 왕(King of the Salian Franks)
  • 통치 기간 : 450~ 457
  • 전임자 : 클로디오(Chlodio)
  • 후임자 : 힐데리히 1(Childeric I)
  • 출생 : 411
  • 사망 : 457
  • 자녀 : 힐데리히 1(Childeric I)
  • 가문 : 메로빙거 왕조(Merovingians)
  • 아버지 : 클로디오(Chlodio)로 추정됨 (?)
  • 종교 : 게르만 이교(Germanic paganism)
 

기원후 411년경

  • 기원후 411년경 출생하였다.
  • 메로베크(프랑스어: Mérovée, Merowig; 라틴어: Meroveus; 411457)는 메로빙거 왕조의 조상이자 창시자인 클로비스 1세의 할아버지이다. 그는 살리안 프랑크족의 왕이었다고 전해지지만, 그의 존재 기록은 전설과 신화가 섞여 있다.
  • 가장 중요한 기록 소스인 투르의 그레고리(Gregory of Tours)는 메로베크가 클로디오(Chlodio)의 후손이라고 기록했다. 클로디오는 현대 벨기에 중부의 실바 카르보나리아(Silva Carbonaria)에서 현재 프랑스의 파리 북쪽에 있는 솜(Somme) 강까지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한, 거의 동시대의 프랑크족 전쟁 군주이다.
  • 메로베크(Merovech)라는 이름은 마르빅(Marwig)과 관련이 있으며, 문자 그대로 명성 있는 싸움을 의미한다.
 

출생의 비밀ㆍ바다와의 관계

  • 프레데가르 연대기(Chronicle of Fredegar)는 메로베크가 클로디오의 아내가 바다에서 목욕하다 바다 생물과 마주친 후 태어났다고 기록한다. 프레데가르에 따르면, 메로베크의 아버지가 그 바다 생물이었는지 클로디오였는지는 불분명하다고 한다. 또 다른 이론은 이 전설이 서유럽에서 빠르게 부상하는 프랑크족의 통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필요한 신화적인 과거를 창조한 것이라고 본다.
  • 게오르그 바이트(Georg Waitz)와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메로베크가 신화적 인물일 수 있으며, 프랑크족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 그들이 숭배했던 신 또는 반신을 암시하는 바다의 아들(프랑크어로 mari)로 이론화된다고 주장한다.
  • 또 다른 주장은 메로베크가 메르웨데(Merwede) 강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의견이다. 이 강은 일부 로마 역사가에 따르면 살리안 프랑크족이 살던 지역과 초기 경로가 일치한다. 그러나 어원학 연구는 이 이론을 반박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원후 448


클로디오는 448년 아르투아의 비쿠스 헬레나(Vicus Helena)에서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Flavius Aëtius)에게 패배했다고 전해진다. 이안 S. 우드(Ian S. Wood)는 따라서 그의 아들이 5세기 후반 어딘가에 존재했을 것이라고 본다.
 

로마 역사가 프리스쿠스의 언급

  • 그는 451년 골(Gaul)의 카탈라우눔 평원 전투에서 아틸라 휘하의 훈족에 맞서 로마 장군 아에티우스와 힘을 합친 여러 야만족 전쟁 군주 및 왕 중 한 명이었을 수 있다.
  • 동시대 로마 역사가인 프리스쿠스(Priscus)는 로마에서 "아직 뺨에 솜털도 나지 않았고 긴 금발 머리가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청년"을 목격했으며, 아에티우스가 그를 양아들로 삼았다고 기록한다. 프리스쿠스는 아틸라(Attila)가 프랑크족과의 전쟁을 벌인 구실이 그들의 왕의 죽음과 왕위 계승을 둘러싼 자녀들의 불화였으며, 큰아들은 아틸라와 동맹을 맺고 작은아들은 아에티우스와 동맹을 맺었다고 기술한다. 클로디오가 아틸라의 침공 직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이는 메로베크가 실제로 클로디오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메로베크가 프리스쿠스의 기록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중 한 명인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나뉜다:
    • 에리히 죄너(Erich Zöllner)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라인 프랑크족의 왕국이 살리안 프랑크족의 왕국과는 달리 아틸라의 침공 경로에 있었으므로, 이 기록이 라인 프랑크족의 왕들과 관련 있다고 본다.
    • 에밀리엔느 드무조(Émilienne Demougeot)와 같은 다른 학자들은 메로베크가 451년에 사망한 왕이고, 그의 아들 킬데리크가 아에티우스의 양아들이라고 믿는다.
    • 마지막으로, 크리스티안 세티파니(Christian Settipani)는 이 단편이 살리안 프랑크족에 적용된다고 가정한다면, 연대기적으로 클로디오가 451년에 사망한 왕이고 메로베크가 로마와 동맹을 맺은 아들이라고 본다. 그는 이것이 확실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프리스쿠스가 언급한 프랑크족 왕자 중 한 명이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메로베크는 갈리아 벨기카(Gallia Belgica), 브라반트(Brabant) 지역에 정착하여 투르네(Tournai)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장군 아에티우스와 싸움

 
로마 제국과의 조약(foedus)에 묶여 살리안 프랑크족이 451년 카탈라우눔 평원 전투(샬롱--샹파뉴와 트루아 근처 평원)에서 로마 장군 아에티우스와 함께 싸웠다는 것은 받아들여지는 사실이다. 그러나 출처들은 누가 그들을 전투로 이끌었는지는 명시하지 않는다. 프랑크족은 게피드(Gepids)와의 예비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다음날 전투에서 전사한 비시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 1(Theodoric I)의 죽음을 기록한 것과는 달리, 역사는 이 부분에 대해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메로베크와 가계도

 
역사가 에티엔 르나르(Étienne Renard)9세기와 10세기의 두 왕실 가계도를 새롭게 해석하여, 메로베크가 제닐디스(Genildis)의 할아버지라기보다는 가문의 시조 창시자일 수 있다고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메로베크는 어떤 전쟁 행위나 역사적 사건과도 연관되지 않은, 존재감이 희미한 인물이다.
 
  • 메로베크의 존재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 629년에서 639년 사이에 작성된 아우스트라시아 가계도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클로이오(Chloio)는 프랑크족의 첫 왕이다. 클로이오는 글로드보데(Glodobode)를 낳았다. 글로드베두스(Ghlodobedus)는 메레베오(Mereveo)를 낳았다. 메레베우스(Mereveus)는 힐브리코(Hilbricco)를 낳았다. 힐데브리쿠스(Hildebricus)는 제니오도(Genniodo)를 낳았다. 제니오두스(Genniodus)는 힐데리코(Hilderico)를 낳았다. 킬데리쿠스(Childericus)는 클로도베오(Chlodoveo)를 낳았다.
  • 계보학자 크리스티안 세티파니는 이것이 살리안 왕들의 목록이며, 계보가 그 구성 이후에 확립된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 계보는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 클로디오(Chlodion)는 클로드보드(Chlodebaude)와 메로베크(Merovee)를 낳았다. 메로베크는 킬데리크(Childeric)를 낳았다.
  • 그러나 역사가 장-피에르 폴리(Jean-Pierre Poly)는 만약 메로베크(Merow'ih)435년에 결혼한 클로드보드(Hl'udbead)의 아들이라면, 그가 456년경에 왕이었던 킬데리크(Hildrih)를 아들로 두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는 메로베크(Merow'ih)가 클로디오(Hl'udio)의 아들인 클로드보드(Hl'udbead)의 별명이라고 추론한다 .
 

대중문화 속의 메로베크

 
메로베크의 탄생에 대한 전설은 1982년 마이클 베이전트(Michael Baigent), 리처드 레이(Richard Leigh), 헨리 링컨(Henry Lincoln)이 그들의 책 성혈과 성배(The Holy Blood and the Holy Grail)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의 씨앗으로 각색되었다. 그들은 "물고기에서 태어났다"는 이 전설이 실제로는 메로빙거 혈통이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과 결혼했음을 의미한다고 가설을 세웠다. 초기 기독교인의 상징 또한 물고기였기 때문이다. 이 이론은 저자들의 가설 외에는 다른 근거가 없지만, 2003년 댄 브라운(Dan Brown)의 베스트셀러 소설 다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를 통해 더욱 대중화되었다 . 그러나 메로베크가 예수의 후손이라는 이 주장에 대한 증거는 없었다.
메로베크의 정체성과 역사성은 로버트 안톤 윌슨(Robert Anton Wilson)역사적 일루미나투스 연대기(The Historical Illuminatus Chronicles)의 두 번째 책 과부의 아들(The Widow’s Son)에서 중요한 미스터리 중 하나이다. 이 책은 초기 메로빙거 왕조를 끔찍한 물고기 생명체로 나타나는 환상을 통해 독자에게 물고기 전설을 처음 소개한다. 윌슨은 더 나아가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를 기독교 장미십자회의 연금술적 결혼(The Alchemical Marriage of Christian Rosycross)의 신랑과 신부로, 그리고 메로베크를 프리메이슨 전설 속 표제어인 '과부의 아들'로 설정하여, 전체 혈통이 외계인-인간 혼혈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모우리(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모우리 (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 ( 牟義理 )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   【 1878 년 】 미국 오하이오주 벨빌 (Bellville) 근교에서 사무엘 모우리 (Samuel Mowry, 1850-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