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이집트 제20왕조 : 혼란과 몰락 속 위대한 방어(기원전 1189~1077년경)
고대 이집트 제20왕조(Twentieth Dynasty of Egypt)는 기원전 1189년부터 1077년까지 지속된 신왕국 시대의 마지막 왕조이다. 제19왕조와 함께 ‘람세스 시대(Ramesside period)’로 불리는데, 이는 ‘람세스’라는 이름을 가진 통치자들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이집트 제국이 번영을 구가하던 시대를 지나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전환기로 평가된다. 제20왕조는 해양 민족(Sea Peoples)의 침략이라는 거대한 위기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지만, 내부적으로는 기후 변화, 왕실 내 분쟁, 그리고 사제들과 귀족들의 권력 신장으로 인해 점차 혼란에 빠져들었다. 수도는 피-람세스(Pi-Ramesses)였다.
1. 제19왕조의 배경
제19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타우스레트(Twosret, c.1191–1189 BC) 여왕이 사망한 후, 이집트는 내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역사 기록의 소실로 내전의 정확한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엘레판티네 비문(Elephantine stela)에 세트나크테(Setnakhte)에 의해 세워진 기록으로 내전의 존재가 확인된다. 이 내전은 제20왕조를 창건한 세트나크테(Setnakhte)가 왕위에 오르면서 종결되었다. 투스레트의 사망 경위는 불확실하며, 평화롭게 사망했거나 당시 이미 중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세트나크테에 의해 축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2. 제20왕조
- 세트나크테(Setnakhte, c.1189–1186 BC) : 세트나크테는 제19왕조 말기의 혼란스러운 내전을 종식시키고 제20왕조를 개창한 파라오이다. 그의 통치 기간은 짧았지만, 그는 이집트를 다시 안정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치세부터 그의 아들 람세스 3세(Ramesses III)의 통치에 이르기까지 이집트는 해양 민족의 침략으로 인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 람세스 3세(Ramesses III, c.1186–1155 BC) : 람세스 3세는 제20왕조의 가장 중요한 파라오 중 한 명이자, 이집트 역사상 마지막 위대한 파라오로 평가된다. 그는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나 람세스 2세(Ramesses II)와 같은 선대 파라오들의 위대함을 본받으려 노력하였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는 해양 민족의 대규모 침략에 직면하였고, 람세스 3세는 이들을 상대로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이집트를 방어하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 제8년차에 발발한 자히(Djahy) 전투와 삼각주 전투(Battle of the Delta)에서 해양 민족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며, 다른 청동기 시대 문명들이 붕괴하는 와중에도 이집트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또한 이집트의 강력한 힘을 과시하기 위해 많은 신전을 건축하였다. 하지만 그의 치세에 사제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파라오를 능가할 정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 람세스 4세(Ramesses IV, c.1155–1149 BC) : 람세스 3세의 뒤를 이은 람세스 4세는 그의 아들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이집트의 번영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이미 제국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한 상태였다. 그는 건축 프로젝트를 통해 파라오의 권위를 세우려 하였으나, 이전 시대와 같은 대규모 사업을 지속하기는 어려웠다.
- 람세스 5세(Ramesses V, c.1149–1145 BC) : 람세스 5세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에는 기근과 내부 혼란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파라오의 중앙 통제력이 약화되고 지방 권력자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경향을 보였다.
- 람세스 6세(Ramesses VI, c.1145–1137 BC) : 람세스 6세는 비교적 긴 기간 동안 통치했지만, 제국의 쇠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이집트의 아시아 지배는 거의 상실되었으며, 이집트의 국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 람세스 7세(Ramesses VII, c.1137–1130 BC) : 람세스 7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의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파라오의 권위는 계속해서 하락하였다.
- 람세스 8세(Ramesses VIII, c.1130–1129 BC) : 람세스 8세는 단명한 파라오 중 한 명이다. 그의 짧은 통치에 대한 기록은 매우 드물다.
- 람세스 9세(Ramesses IX, c.1129–1111 BC) : 람세스 9세의 재위 기간에는 왕실 묘지 도굴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얼마나 약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파라오의 신성한 권위와 제국의 안보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었다.
- 람세스 10세(Ramesses X, c.1111–1107 BC) : 람세스 10세의 통치 기간 동안에도 이집트의 쇠퇴는 지속되었고, 국가적인 혼란은 심화되었다.
- 람세스 11세(Ramesses XI, c.1107–1077 BC) : 람세스 11세는 제20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이다. 그의 통치 말기에는 국가가 거의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혼란에 빠졌으며, 결국 그의 사망 후 제3중간기(Third Intermediate Period)라는 혼란스러운 시기가 도래하였다. 그의 사후 이집트 귀족이었던 스멘데스(Smendes)가 제21왕조를 개창하며 혼란을 종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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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6호 무덤에서 발견된 람세스 9세의 초상화 |
3. 제20왕조의 쇠퇴
제20왕조는 급격한 기후 변화, 왕실 내 분쟁, 그리고 사제들과 귀족들의 권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기후 변화는 농업 생산에 영향을 미쳐 기근을 초래하고 사회적 불안을 야기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다툼과 암투는 중앙 정부의 결속력을 약화시켰다. 특히 테베의 아문 신전 사제들과 같은 종교 엘리트들의 부와 영향력이 커지면서 파라오의 정치적 권위는 더욱 축소되었다. 이는 결국 이집트의 정치적 분열과 경제적 약화로 이어졌고, 외부 세력의 침입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4. 해양 민족(Sea Peoples)의 침략과 이집트
해양 민족의 침략은 제20왕조 시대, 특히 람세스 3세 재위 기간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다. 이 침략은 많은 지중해 문명에서 발생한 일련의 연쇄 위기의 일부였다. 이들은 종종 ‘청동기 시대 붕괴(Late Bronze Age collapse)’라고 불리는 대변동의 주역 중 하나이다.
해양 민족은 ‘하티(Hatti, 히타이트 제국)’, ‘코데’, ‘카르케미시’, ‘아르자와’, ‘알라시야’와 같은 수많은 육상 국가를 파괴하며 이집트로 진격했다. 한 비문에는 “한꺼번에 모든 땅들이 제거되고 전투에서 흩어졌다. 하티, 코데, 카르케미시, 아르자와, 알라시야로부터 어떠한 땅도 그들의 무기에 저항할 수 없었다. 아모르에 야영지가 설치되었다. 그들은 그곳 사람들을 황폐화시켰고 그 땅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되었다. 그들은 이집트를 향해 나아오고 있었고, 불꽃이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람세스 3세는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해양 민족에 맞섰다. 그의 통치 8년째에 발생한 자히 전투와 삼각주 전투에서 이집트는 해양 민족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이집트는 다른 청동기 시대 문명들이 파괴되는 와중에도 자국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비록 이집트가 직접적인 멸망은 피했으나, 해양 민족과의 전쟁은 이집트의 국력을 소모시키고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켰다. 이로 인해 이집트는 대외적으로 팽창 정책을 중단하고 수비적인 태세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제국의 점진적인 쇠퇴에 기여하였다.
5. 제20왕조의 파라오들
제20왕조는 이집트의 힘이 서서히 약화되고 여러 위기에 직면했던 시기였지만, 람세스 3세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외부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이집트 문명의 지속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 시기는 신왕국 시대의 종말이자 이집트가 국제 질서에서 그 영향력을 점차 잃어가는 전환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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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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