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이집트 제27왕조 : 페르시아 제국에 편입되다(기원전 525~404년)
1. 이집트 제27왕조의 개요
이집트 제27왕조(Dynasty XXVII, 27th Dynasty)는 ‘제1차 이집트 사트라피(고대 페르시아어: 𐎸𐎭𐎼𐎠𐎹, 전사: Mudrāya)’로도 알려져 있으며, 기원전 525년부터 404년까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하나의 사트라피(행정 주)였다. 이 왕조는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 2세(Cambyses II)가 펠루시움 전투(기원전 525년)와 이어진 아케메네스의 이집트 정복 후 이집트의 파라오로 즉위하면서 성립되었다. 이 체제는 아미르타이오스(Amyrtaeus)가 반란을 일으켜 파라오로 즉위하면서 소멸되었다. 한편 이집트에 대한 페르시아의 두 번째 지배 시기는 이집트 제31왕조(기원전 343–332년)에 해당한다.
2. 캄비세스 2세(Cambyses II)
이집트 제26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프삼티크 3세(Psamtik III)는 기원전 525년 5월 나일 동쪽 삼각주의 펠루시움 전투에서 캄비세스 2세(Cambyses II)에게 패배했다. 캄비세스는 그해 여름 늦어도 그때까지는 파라오로 즉위했으며, 이로써 이집트에 대한 최초의 페르시아 지배기, 곧 제27왕조가 시작되었다. 이후 이집트는 키프로스와 페니키아와 함께 아케메네스 제국의 제6 사트라피로 편제되었고, 현지 사트라프(총독)으로 아리안데스(Aryandes)가 임명되었다.
이집트의 파라오로서 캄비세스의 통치 기간 동안, 전통적 이집트 신전들의 재정 자원은 크게 축소되었다. 데모티크(민중문자)로 작성된 한 칙령은 멤피스(Memphis), 헬리오폴리스(Heliopolis), 웽켐(Wenkhem, 아부시르 인근)을 제외한 모든 이집트 신전에 대한 자원 제한을 명했다.
3. 바르디야(Bardiya)
캄비세스는 기원전 522년 초 어느 시점에 이집트를 떠나 페르시아로 가는 도중 사망했으며, 형식상 잠시 그의 동생 바르디야(Bardiya)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동시대 역사가들은 바르디야가 사실은 가짜인 가우마타(Gaumata)였고, 진짜 바르디야는 몇 해 전 캄비세스에게 질투를 이유로 살해당했다고 전한다. 다리우스 1세(Darius I)는 이 가장을 의심하고 그해 9월 ‘바르디야’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전복했으며, 다음 날 왕이자 파라오로 즉위했다.
4. 다리우스 1세(Darius I)
새 페르시아 왕이 된 다리우스는 제국 전역의 반란 진압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기원전 522년 말 또는 521년 초 어느 시점에, 한 이집트 토착 귀족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파라오 페투바스티스 3세(Petubastis III)라 칭했다. 반란의 주된 원인은 불확실하나, 고대 그리스의 군사 역사가 폴리아이노스(Polyaenus)는 사트라프 아리안데스가 부과한 가혹한 조세가 원인이었다고 기록한다. 폴리아이노스는 또 다리우스가 직접 이집트로 진군했으며, 때마침 프타(Phthah) 신의 성우(聖牛) ‘헤럴드(Herald of Ptah)’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간에 도착했다고 전한다. 다리우스는 다음 성우를 찾아내는 자에게 100 탈란트의 상금을 내리겠다고 공포했고, 이 경건함에 감명받은 이집트인들이 대거 그에게 귀부하여 반란이 종식되었다고 한다.
다리우스(Darius)는 캄비세스(Cambyses)보다 이집트의 내정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이집트의 법을 성문화한 것으로 전해지며, 특히 수에즈의 운하 체계 굴착을 완공하여 비터 호수(Bitter Lakes)에서 홍해까지의 통항을 가능케 했다. 이는 고된 사막 육상로에 비해 훨씬 선호되는 경로였다.
이 업적 덕분에 다리우스는 숙련된 이집트 노동자와 장인을 페르시아로 들여와 자신의 궁전을 건설하게 했다. 그 결과 이집트에서는 이러한 숙련 인력의 유출로 인해 소규모의 ‘두뇌 유출’이 발생했고, 이 시기 이집트 건축과 예술의 품질이 눈에 띄게 하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다리우스는 캄비세스보다 이집트 신전을 더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해당 지역에서 종교적 관용으로 명성을 얻었다.
기원전 497년에 다리우스가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아리안데스(Aryandes)는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그 이유는 대부분 그가 독자적 주화 발행을 시도해, 이집트를 페르시아 제국의 나머지 지역과 분리하려는 가시적 시도를 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5.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
다리우스는 기원전 486년에 사망했고,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가 뒤를 이었다.
크세르크세스(Xerxes)가 즉위하자 이집트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번에는 프삼티크 4세(Psamtik IV) 주도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사료마다 견해가 엇갈린다. 크세르크세스는 반란을 신속히 진압하고 자신의 형제 아케메네스(Achaemenes)를 사트라프(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다리우스(Darius) 치하에서 이집트가 누리던 특권적 지위를 종료하고, 그리스 침공 자금 조달을 위해 이집트의 공납·공급 요구를 증대시켰다. 더 나아가 크세르크세스는 조로아스터교의 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를 장려하는 한편 전통 이집트 신들을 희생시켰고, 이집트 기념물에 대한 재정 지원을 영구 중단했다. 그는 기원전 465년에 아르타바누스(Artabanus)에게 암살되었고, 이어진 왕위 다툼 끝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Artaxerxes I)가 차기 왕이자 파라오로 즉위했다.
6.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Artaxerxes I)
기원전 460년에 또 다른 대규모 이집트 반란이 일어났는데, 리비아계 추장 이나로스 2세(Inaros II)가 주도했고 그리스의 아테네가 크게 지원했다. 이나로스는 아케메네스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면서 총독을 전사시켰고, 멤피스(Memphis)를 장악하여 결국 이집트의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했다. 그러나 기원전 454년에 메가뷔조스(Megabyzus) 장군이 이끄는 페르시아 군대에 패퇴했다. 메가뷔조스는 항복 시 이나로스와 추종자들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이나로스는 그 조건을 수락했다. 그럼에도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결국 이나로스를 처형했으며, 정확한 시기와 방식은 논쟁적이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기원전 424년에 사망했다.
7. 크세르크세스 2세(Xerxes II)와 소그디아누스(Sogdianus)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2세(Xerxes II)는 45일만 통치하다 형제 소그디아누스(Sogdianus)에게 살해되었다. 소그디아누스도 또 다른 형제 오쿠스(Ochus)에게 살해되었고, 오쿠스가 다리우스 2세(Darius II)가 되었다.
8. 다리우스 2세(Darius II)
다리우스 2세는 기원전 423–404년에 통치했으며, 말년에 아미르타이오스(Amyrtaeus)가 주도한 반란이 일어났고, 이 반란은 이르면 기원전 411년에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기원전 405년에 아미르타이오스는 크레타 용병의 도움으로 멤피스에서 페르시아 세력을 축출했고, 이듬해 스스로 파라오를 칭하여 제27왕조를 종식시켰다.
9. 제27왕조 파라오 목록
10.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Artaxerxes II)와 독립 기간
다리우스 2세의 뒤를 이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Artaxerxes II)는 이집트 재정복 원정을 추진하려 했으나, 동생 ‘키루스 2세(영, Cyrus the Younger)’와의 정치적 난관으로 계획을 포기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기원전 401년까지도 이집트 일부 지역에서 정통 파라오로 인정받았으나, 그의 둔한 대응으로 이집트는 독립을 공고화할 수 있었다.
독립 기간 동안 토착 왕조가 세 차례 존속했는데, 제28ㆍ29ㆍ30왕조가 그것이다. 이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Artaxerxes III, 기원전 358년 즉위)가 기원전 343년에 이집트를 재정복하여 짧은 제2차 페르시아 통치기를 열었고, 이를 이집트 제31왕조로 부른다.
H. P. 콜번(H. P. Colburn, 2019)의 분석은, 이 시기 아케메네스 제국의 유산이 이집트에 상당했고 이집트인들이 다양한 경험 스펙트럼을 겪었음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