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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11일 목요일

[고대 이집트] 이집트 제27왕조 : 페르시아 제국에 편입되다(기원전 525~404년)

[고대 이집트] 이집트 제27왕조 : 페르시아 제국에 편입되다(기원전 525~404)

 

1. 이집트 제27왕조의 개요

 
이집트 제27왕조(Dynasty XXVII, 27th Dynasty)1차 이집트 사트라피(고대 페르시아어: 𐎸𐎭𐎼𐎠𐎹, 전사: Mudrāya)’로도 알려져 있으며, 기원전 525년부터 404년까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하나의 사트라피(행정 주)였다. 이 왕조는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 2(Cambyses II)가 펠루시움 전투(기원전 525)와 이어진 아케메네스의 이집트 정복 후 이집트의 파라오로 즉위하면서 성립되었다. 이 체제는 아미르타이오스(Amyrtaeus)가 반란을 일으켜 파라오로 즉위하면서 소멸되었다. 한편 이집트에 대한 페르시아의 두 번째 지배 시기는 이집트 제31왕조(기원전 343332)에 해당한다.
 

2. 캄비세스 2(Cambyses II)

 
이집트 제26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프삼티크 3(Psamtik III)는 기원전 5255월 나일 동쪽 삼각주의 펠루시움 전투에서 캄비세스 2(Cambyses II)에게 패배했다. 캄비세스는 그해 여름 늦어도 그때까지는 파라오로 즉위했으며, 이로써 이집트에 대한 최초의 페르시아 지배기, 곧 제27왕조가 시작되었다. 이후 이집트는 키프로스와 페니키아와 함께 아케메네스 제국의 제6 사트라피로 편제되었고, 현지 사트라프(총독)으로 아리안데스(Aryandes)가 임명되었다.
 
이집트의 파라오로서 캄비세스의 통치 기간 동안, 전통적 이집트 신전들의 재정 자원은 크게 축소되었다. 데모티크(민중문자)로 작성된 한 칙령은 멤피스(Memphis), 헬리오폴리스(Heliopolis), 웽켐(Wenkhem, 아부시르 인근)을 제외한 모든 이집트 신전에 대한 자원 제한을 명했다.
 

3. 바르디야(Bardiya)

 
캄비세스는 기원전 522년 초 어느 시점에 이집트를 떠나 페르시아로 가는 도중 사망했으며, 형식상 잠시 그의 동생 바르디야(Bardiya)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동시대 역사가들은 바르디야가 사실은 가짜인 가우마타(Gaumata)였고, 진짜 바르디야는 몇 해 전 캄비세스에게 질투를 이유로 살해당했다고 전한다. 다리우스 1(Darius I)는 이 가장을 의심하고 그해 9바르디야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전복했으며, 다음 날 왕이자 파라오로 즉위했다.
 

4. 다리우스 1(Darius I)

 
새 페르시아 왕이 된 다리우스는 제국 전역의 반란 진압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기원전 522년 말 또는 521년 초 어느 시점에, 한 이집트 토착 귀족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파라오 페투바스티스 3(Petubastis III)라 칭했다. 반란의 주된 원인은 불확실하나, 고대 그리스의 군사 역사가 폴리아이노스(Polyaenus)는 사트라프 아리안데스가 부과한 가혹한 조세가 원인이었다고 기록한다. 폴리아이노스는 또 다리우스가 직접 이집트로 진군했으며, 때마침 프타(Phthah) 신의 성우(聖牛) ‘헤럴드(Herald of Ptah)’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간에 도착했다고 전한다. 다리우스는 다음 성우를 찾아내는 자에게 100 탈란트의 상금을 내리겠다고 공포했고, 이 경건함에 감명받은 이집트인들이 대거 그에게 귀부하여 반란이 종식되었다고 한다.
 
다리우스(Darius)는 캄비세스(Cambyses)보다 이집트의 내정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이집트의 법을 성문화한 것으로 전해지며, 특히 수에즈의 운하 체계 굴착을 완공하여 비터 호수(Bitter Lakes)에서 홍해까지의 통항을 가능케 했다. 이는 고된 사막 육상로에 비해 훨씬 선호되는 경로였다.
 
이 업적 덕분에 다리우스는 숙련된 이집트 노동자와 장인을 페르시아로 들여와 자신의 궁전을 건설하게 했다. 그 결과 이집트에서는 이러한 숙련 인력의 유출로 인해 소규모의 두뇌 유출이 발생했고, 이 시기 이집트 건축과 예술의 품질이 눈에 띄게 하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다리우스는 캄비세스보다 이집트 신전을 더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해당 지역에서 종교적 관용으로 명성을 얻었다.
 
기원전 497년에 다리우스가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아리안데스(Aryandes)는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그 이유는 대부분 그가 독자적 주화 발행을 시도해, 이집트를 페르시아 제국의 나머지 지역과 분리하려는 가시적 시도를 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5. 크세르크세스 1(Xerxes I)

 
다리우스는 기원전 486년에 사망했고, 크세르크세스 1(Xerxes I)가 뒤를 이었다.
 
크세르크세스(Xerxes)가 즉위하자 이집트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번에는 프삼티크 4(Psamtik IV) 주도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사료마다 견해가 엇갈린다. 크세르크세스는 반란을 신속히 진압하고 자신의 형제 아케메네스(Achaemenes)를 사트라프(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다리우스(Darius) 치하에서 이집트가 누리던 특권적 지위를 종료하고, 그리스 침공 자금 조달을 위해 이집트의 공납·공급 요구를 증대시켰다. 더 나아가 크세르크세스는 조로아스터교의 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를 장려하는 한편 전통 이집트 신들을 희생시켰고, 이집트 기념물에 대한 재정 지원을 영구 중단했다. 그는 기원전 465년에 아르타바누스(Artabanus)에게 암살되었고, 이어진 왕위 다툼 끝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Artaxerxes I)가 차기 왕이자 파라오로 즉위했다.
 

6.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Artaxerxes I)

 
기원전 460년에 또 다른 대규모 이집트 반란이 일어났는데, 리비아계 추장 이나로스 2(Inaros II)가 주도했고 그리스의 아테네가 크게 지원했다. 이나로스는 아케메네스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면서 총독을 전사시켰고, 멤피스(Memphis)를 장악하여 결국 이집트의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했다. 그러나 기원전 454년에 메가뷔조스(Megabyzus) 장군이 이끄는 페르시아 군대에 패퇴했다. 메가뷔조스는 항복 시 이나로스와 추종자들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이나로스는 그 조건을 수락했다. 그럼에도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결국 이나로스를 처형했으며, 정확한 시기와 방식은 논쟁적이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기원전 424년에 사망했다.
 

7. 크세르크세스 2(Xerxes II)와 소그디아누스(Sogdianus)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2(Xerxes II)45일만 통치하다 형제 소그디아누스(Sogdianus)에게 살해되었다. 소그디아누스도 또 다른 형제 오쿠스(Ochus)에게 살해되었고, 오쿠스가 다리우스 2(Darius II)가 되었다.
 

8. 다리우스 2(Darius II)

 
다리우스 2세는 기원전 423404년에 통치했으며, 말년에 아미르타이오스(Amyrtaeus)가 주도한 반란이 일어났고, 이 반란은 이르면 기원전 411년에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기원전 405년에 아미르타이오스는 크레타 용병의 도움으로 멤피스에서 페르시아 세력을 축출했고, 이듬해 스스로 파라오를 칭하여 제27왕조를 종식시켰다.

9. 제27왕조 파라오 목록


파라오 이름통치즉위명비고
캄비세스 2세
Cambyses II
525–522 BCMesutire기원전 525년 펠루시움 전투에서 프삼티크 3세를 패배시킴
바르디야/가우마타
Bardiya/ Gaumata
522 BC사칭자였을 가능성 있음
페투바스티스 3세
Petubastis III
522/521–520 BCSeheruibre아케메네스 왕조의 파라오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킴
다리우스 1세 대왕
Darius I the Great
522–486 BCSeteture
프삼티크 4세
Psamtik IV
480s BC아케메네스 왕조의 파라오들에 대항한 것으로 추정되는 반란자
크세르크세스 1세 대왕
Xerxes I the Great
486–465 BC
아르타바누스
Artabanus
465–464 BC크세르크세스 1세를 암살했고, 이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살해됨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Artaxerxes I
465–424 BC
크세르크세스 2세
Xerxes II
425–424 BC왕위 계승을 주장한 인물
소그디아누스
Sogdianus
424–423 BC왕위 계승을 주장한 인물
다리우스 2세
Darius II
423–404 BC제27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10.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Artaxerxes II)와 독립 기간

 
다리우스 2세의 뒤를 이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Artaxerxes II)는 이집트 재정복 원정을 추진하려 했으나, 동생 키루스 2(, Cyrus the Younger)’와의 정치적 난관으로 계획을 포기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기원전 401년까지도 이집트 일부 지역에서 정통 파라오로 인정받았으나, 그의 둔한 대응으로 이집트는 독립을 공고화할 수 있었다.
 
독립 기간 동안 토착 왕조가 세 차례 존속했는데, 282930왕조가 그것이다. 이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Artaxerxes III, 기원전 358년 즉위)가 기원전 343년에 이집트를 재정복하여 짧은 제2차 페르시아 통치기를 열었고, 이를 이집트 제31왕조로 부른다.
 
H. P. 콜번(H. P. Colburn, 2019)의 분석은, 이 시기 아케메네스 제국의 유산이 이집트에 상당했고 이집트인들이 다양한 경험 스펙트럼을 겪었음을 시사한다.

2025년 9월 10일 수요일

아케메네스 제국(페르시아 제국)의 흥망성쇠와 통치자들 : 기원전 550~330년

아케메네스 제국(페르시아 제국)의 흥망성쇠(기원전 550~330년)

 
아케메네스 제국은 키루스 대왕(전통적으로 키루스 2’)이 기원전 550년에 수립한 이란계 제국으로, 발칸과 이집트에서 인더스 계곡까지 55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최대 규모의 영토를 거느렸던 고대 세계사의 핵심 제국이다. 중앙집권적 관료제, 다언어·다문화 정책, 왕의 길과 역참 제도로 대표되는 교통·우편 인프라, 전문 상비군과 조세체계를 통해 제국 경영의 표준을 제시하였으며, 이러한 통치 모델은 헬레니즘 및 후대 이슬람·유라시아 제국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1. 아케메네스 왕조의 기원

 
  • 어원과 가계 : ‘아케메네스(Achaemenes)’는 아케메네스 왕가의 시조로 전해지는 인물이며, 그의 이름에서 아케메네스계라는 왕조명이 유래한다. 고페르시아어 하크사마니쉬(Haxāmaniš)’친우의 마음을 지닌 자라는 의미의 바후브리히 합성어로 해석된다. 아케메네스는 남서 이란의 안샨 소왕으로 아시리아의 봉신으로 활동한 것으로 전한다.
  • 기원과 정체성 : 페르시아인 집단은 기원전 7세기 무렵 이란 고원의 남서부 페르시스 지역에 정착하여 엘람인 등 토착 세력과 공존·경쟁하였다.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고페르시아어 파르사(Pārsa)’에 대한 그리스·라틴식 호칭에서 유래한다.
  • 왕통 형성 : 아케메네스 후손으로 전해지는 테이스페스(Teispes, 생몰년 미상)와 안샨의 왕들이 계보를 이었고, 마침내 키루스 2(키루스 대왕, Cyrus II/Cyrus the Great, 기원전 600?530)가 메디아를 전복하고 리디아와 신바빌로니아를 차례로 무너뜨리며 제국의 토대를 닦았다.
 

2. 제국의 형성과 팽창

 

1) 제국의 형성

 
  • 메디아 정복 : 키루스 2(Cyrus II, 기원전 600?530)는 기원전 553년에 봉기하여 기원전 550년에 메디아의 아스티아게스(Astyages, 생몰년 미상)를 격파하고 에크바타나를 장악하여 메디아의 영토와 정치적 유산을 승계하였다.
  • 리디아 전쟁 : 리디아의 크로이소스(Croesus, 기원전 595?546?)가 소아시아에서 세력 확대를 시도하자 키루스는 반격하여 기원전 546년에 사르디스를 함락시키고 리디아를 병합하였다.
  • 신바빌로니아 함락 : 기원전 539년 오피스 전투 승리 후 키루스는 바빌론을 점령하고 포로정책을 완화하며 예후드(유다)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허용하는 등 정복지 통합 정책을 전개하였다.
 

2) 제국의 팽창

 
  • 기원전 550년대 : 기원전 553550년의 메디아 전쟁과 기원전 546년 리디아 왕국 붕괴가 핵심이다. 키루스는 기존 패권의 권력 공백과 경계 갈등을 활용하여 서아시아의 힘의 지도를 재편하였다.
  • 기원전 540년대 : 크로이소스의 동원에 맞선 키루스의 사르디스 공략과 소아시아 도시 질서 재편이 진행되었다. 반란 세력 진압과 조공 체계 안정화에 약 4년이 소요되었다.
  • 기원전 530년대 : 중앙아시아 전선에서 박트리아와 사카 등 유목·오아시스 세력에 대한 작전이 이어졌고, 키루스는 치안과 보급을 위해 주둔도시를 설치하였다. 기원전 539년 바빌론 함락으로 메소포타미아의 정치·종교 질서를 재정렬하였다.
  • 기원전 520년대 : 다리우스 1(Darius I, 기원전 550486)가 반란 진압과 행정 재편을 추진하며 사트라피 체계를 정비하고, 수사·페르세폴리스 등에서 건축과 기록 체계를 확립하였다. 왕의 길과 역참망의 정비가 제국 통합을 가속하였다.
  • 기원전 510년대 : 제국 변방의 반란과 조세·병역 체계의 표준화가 병행되었으며, 공식 언어로 제국 아람어의 광범위한 사용이 정착되어 행정 효율성이 강화되었다. 이 시기 제국의 재정·물류 기반이 장거리 통치에 최적화되었다.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1(Xerxes I, 기원전 519465) 치세를 중심으로 사트라피(속주) 체계가 안정화되었고, 대규모 토목과 관개, 도로망, 궁전 단지가 구축되었다. ‘왕의 길은 역참(차파르)과 함께 군사·행정·상업 통신을 신속화하여 제국 경제를 통합하였다.

기원전 500년경 아케메네스 제국
기원전 500년경 아케메네스 제국
 
문화적으로는 다언어·다민족 구조 위에서 엘람어·아람어·고페르시아어가 병용되며, 지역 자치와 전통의 보호가 제국 질서와 병존하였다. 이러한 제국적 다원주의는 후대 제국 모델의 전범이 되었다.
 

3) 페르시아 전쟁

 
  • 배경과 전개 : 이오니아 반란 이후 아케메네스 제국과 그리스 연합 사이에 페르시아 전쟁이 전개되었다. 마라톤, 살라미스, 플라타이아이 등의 전투가 결정적 국면을 만들었고, 해상·보급의 제약이 대규모 원정의 병목으로 작용하였다.
  • 결과와 의미 : 제국은 서방 전선을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했으나, 소아시아·레반트·이집트 등 핵심 속주를 유지하며 장기적으로 행정·재정의 체력을 보전하였다. 그리스 세계는 폴리스 간 역학이 재편되어 아테네·스파르타 경쟁과 델로스 동맹·펠로폰네소스 동맹 구도로 수렴하였다. 아케메네스 입장에서는 서방 전선이 제국 역량을 분산시키는 구조적 부담으로 남았다.
 

4) 문화와 조로아스터교

 
  • 문화 :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1세 시기, 페르세폴리스ㆍ수사ㆍ파사르가다이 등에서의 궁전 예술과 비문 전통은 왕권의 보편성과 신적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이 시기 제국은 다언어 정책과 각 지역의 종교ㆍ법ㆍ관습을 존중하는 포섭 전략을 통해 내부 다원성을 제도화하였다.
  • 조로아스터교 : 국가 이데올로기와 종교의 관계는 복합적이다. 아후라 마즈다 숭배와 왕권의 신적 정당화가 결합하고, 거짓과 무질서에 대한 응징이라는 윤리ㆍ법적 담론이 통치 언어로 편입되었다. 비문과 행정 문서에서 보이는 규범·정의 담론은 제국의 합법성과 질서 유지에 기여하였다. 후대 이란ㆍ이슬람 세계의 행정ㆍ법문화 형성에 이 유산이 간접적 기반이 되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5) 이집트 재정복

 
  • 재정복의 맥락 : 30왕조 토착 왕조의 저항 이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Artaxerxes III, 기원전 425?338)는 기원전 343년에 이집트를 재정복하여 제31왕조(‘2 이집트 사트라피’)를 수립하였다. 이로써 나일 델타의 전략 자원과 동지중해 항로의 거점이 다시 제국의 통제권 아래 들어갔다.
  • 통치와 정책 : 사트라프 임명, 조세 재편, 성곽 파괴 및 반란 억제 조치 등 강경한 치안·재정 정책이 병행되었다. 이집트의 사제단·신전 네트워크에 대한 통제 강화는 재정 확보와 정치적 충성 확보라는 이중 목적을 지녔다. 이 재정복은 알렉산드로스의 등장 직전까지 제국의 남서 전선을 안정화시키는 효과를 냈다.
 

3. 제국의 몰락, 그 이후

 

1)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침공과 제국의 해체

 
  • 침공과 붕괴 : 알렉산드로스 3(알렉산드로스 대왕, Alexander III, 기원전 356323)는 기원전 334년 이집트ㆍ레반트·메소포타미아로 진입하여 기원전 330년경 아케메네스 왕조를 붕괴시켰다. 다리우스 3(Darius III, 본명 아르타샤타/코도만누스, 기원전 380?330)는 이수스ㆍ가우가멜라에서 연패하였고, 왕실과 보급선, 사트라프 간 결속이 해체되었다. 제국은 장거리 보급, 다원적 지휘 체계, 변방 반란, 서방ㆍ동방 동시 전선이라는 구조적 약점이 노출되었다.
  • 헬레니즘 전환 : 알렉산드로스 사후, 아케메네스의 광대한 영토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과 셀레우코스 제국 등의 분할 지배 하에 놓였고, 이 시기 문화ㆍ행정의 상호 영향이 가속화되었다. 왕의 길ㆍ사트라피ㆍ관료제 모델은 헬레니즘 세계의 주·행정 체계와 혼융되었다.
 

2) 파르티아ㆍ사산조 페르시아

 
  • 파르티아의 복권 : 이란 고원 중앙의 귀족ㆍ전사 엘리트는 파르티아 제국을 통해 패권을 회복하였고, 사트라피 전통과 지방 엘리트 네트워크를 변주하여 장기 지배를 구현하였다.
  • 사산 제국의 재건 : 사산 제국은 아케메네스의 제국적 상상력을 재해석하며 조로아스터교의 제도화, 중앙집권 관료제, 궁정 의례를 고도로 체계화하였다. 아케메네스기의 거시 인프라와 다언어ㆍ다민족 통치 경험은 사산기의 제국 경영 논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4. 아케메네스 제국의 유산

 
아케메네스 제국은 중앙집권 관료제, 다언어 행정, 도로ㆍ우편망, 종교ㆍ법의 포섭적 운영으로 후대 제국 통치의 템플릿을 제시하였다. 헤겔과 듀랑 등 근대 사상가·사가들은 이 제국을 다민족 질서의 모델”, “문명 교통의 대동맥으로 해석하며 그 역사적 위상을 강조하였다.
 

1) 행정ㆍ군사ㆍ문화의 특징 요약

 
  • 관료제와 공식 언어 : 제국 아람어를 포함한 다언어 행정의 표준화를 통해 사트라피 간 문서 소통을 효율화하였다.
  • 사트라피와 조세 : 속주 총독에게 재정·사법·군사 권한을 나누어 위임하면서도 왕의 감찰로 균형을 유지하였다.
  • 도로·우편망 : 왕의 길과 역참(차파르)은 군사 동원과 정보 전달의 속도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 종교ㆍ법ㆍ관습 : 각 지역의 신전·사제·법을 인정하면서 왕권의 보편적 정당성을 비문과 예술로 천명하였다.
  • 군사 : 다민족 군구성과 용병의 활용, 공병·보급 체계의 중시가 특징이다. 서방 해상 전선의 취약은 전략적 한계로 작용하였다.
 

2) 아케메네스 제국의 유산

 
아케메네스 제국은 건국 초기의 전격적 정복, 5세기의 서방 전선 대응, 4세기의 이집트 재정복과 내부 재정비를 거쳐, 결국 마케도니아의 공세로 해체되었다. 그럼에도 이 제국은 중앙집권 관료제와 다중 중심의 문화 통합, 장거리 인프라, 포용적 종교·법 운영으로 고대 세계의 통치 기술을 정초하였고, 헬레니즘ㆍ파르티아ㆍ사산에 이르는 이란·지중해 문명권의 정치 문법을 규정하였다.
 

5. 아케메네스 제국의 통치자들


이름년도비고
아케메네스
Achaemenes
705 BC아케메네스 왕국의 첫 번째 통치자이자 왕조의 창건자. 베히스툰 비문에 의해서만 입증됨.
테이스페스
Teispes
640 BC아케메네스의 아들. 베히스툰 비문에 의해서만 입증됨.
키루스 1세
Cyrus I
580 BC테이스페스의 아들로, 기록상 존재가 확인되는 최초의 아케메네스 왕조 통치자.
캄비세스 1세
Cambyses I
550 BC키루스 1세의 아들이며 키루스 2세(대왕)의 아버지. 그의 치세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음.
키루스 2세
Cyrus II
560–530 BC왕조를 제국으로 탈바꿈시킨 인물; ‘세상의 네 모퉁이의 왕’으로 불림.
캄비세스 2세
Cambyses II
530–522 BC페르시아의 왕이자 동시에 이집트의 파라오.
가우마타
Gaumata
522 BC페르시아의 왕. 일반적으로 ‘가짜 바르디야(바르디야 사칭자)’ 가우마타라고 여겨짐.
다리우스 1세
Darius I
522–486 BC페르시아의 왕이자 이집트의 파라오. 캄비세스 2세와 바르디야의 사촌.
크세르크세스 1세
Xerxes I
486–465 BC페르시아의 왕이자 이집트의 파라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Artaxerxes I
465–424 BC페르시아의 왕이자 이집트의 파라오.
크세르크세스 2세
Xerxes II
424 BC (45 days)페르시아의 왕이자 이집트의 파라오. 이복형제이자 후계자인 소그디아누스에게 암살당함.
소그디아누스
Sogdianus
424–423 BC페르시아의 왕이자 이집트의 파라오.
다리우스 2세
Darius II
423–405 BC페르시아의 왕이자 이집트의 파라오. 본명은 오쿠스(Ochus).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Artaxerxes II
405–358 BC페르시아의 왕. 47년간 통치했으며, 아케메네스 왕조에서 가장 오래 재위한 왕. 본명은 아르세스(Arses).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Artaxerxes III
358–338 BC페르시아의 왕이자 이집트의 파라오. 아르탁세르크세스 2세의 통치 중 상실했던 이집트를 재정복함. 본명은 오쿠스(Ochus).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
Artaxerxes IV
338–336 BC페르시아의 왕이자 이집트의 파라오. 본명은 아르세스(Arses).
다리우스 3세
Darius III
336–330 BC페르시아의 왕이자 이집트의 파라오이며, 아케메네스 제국의 마지막 통치자. 본명은 아르타샤타(Artashata) 또는 코도마누스(Codomannus)로 전해짐.
 
 

모우리(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모우리 (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 ( 牟義理 )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   【 1878 년 】 미국 오하이오주 벨빌 (Bellville) 근교에서 사무엘 모우리 (Samuel Mowry, 1850-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