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이집트 제17왕조 : 힉소스에 맞선 테베의 저항과 이집트 재통일의 서막(기원전 약 1580~1550년경)
1. 왕조 개요 소개
고대 이집트 제17왕조(Seventeenth Dynasty)는 제2중간기(Second Intermediate Period) 후반부, 대략 기원전 1580년부터 1550년까지 상부 이집트를 통치했던 파라오들의 계보를 말한다. 이 시기는 이집트가 외세의 지배와 내분으로 혼란스러웠던 때로, 제17왕조는 하부 이집트를 점령하고 아바리스(Avaris)에 수도를 둔 힉소스(Hyksos)의 제15왕조와 동시대에 존재했다.
제17왕조의 파라오들은 테베(Thebes)를 기반으로 하여 이집트의 정통성을 수호하고, 힉소스의 지배에 저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왕조는 앞선 테베 기반의 제16왕조를 계승했으며, 그 마지막 왕들은 힉소스를 이집트에서 몰아내는 전쟁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결국 제17왕조의 마지막 왕 카모세(Kamose)의 뒤를 이은 그의 동생 아흐모세 1세(Ahmose I)가 힉소스를 완전히 축출하고 이집트를 재통일하여 번영의 신왕국(New Kingdom) 시대를 열게 된다. 제17왕조는 짧지만 이집트의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 외세에 대한 저항 정신을 이어받아 이집트 역사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한 왕조로 평가받는다.
2. 역사적 배경 및 전개
제17왕조는 제2중간기라는 혼란의 시기에, 상부 이집트의 테베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 이집트는 북부를 장악한 힉소스(제15왕조)와 남부를 통치하던 제16왕조, 그리고 다른 소규모 세력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제17왕조는 바로 이 테베를 기반으로 한 이집트인들의 저항 세력의 최전선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 힉소스와의 대치와 저항의 시작
처음에는 제17왕조의 통치자들도 힉소스의 권위를 어느 정도 인정했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테베의 왕들은 힉소스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고, 점차 군사력을 강화하며 독립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제17왕조 후반기의 파라오들은 힉소스에 대한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다.
2) 세케넨레 타오(Seqenenre Tao)와 카모세(Kamose)의 활약
이 저항의 정점에는 세케넨레 타오(Seqenenre Tao)와 그의 아들 카모세(Kamose)가 있었다. 세케넨레 타오(Seqenenre Tao, 기원전 1560년경 통치)는 힉소스와의 전쟁을 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미라에서는 힉소스와의 전투 중 심각한 부상을 입은 흔적이 발견되어, 그가 직접 전쟁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이 점은 그가 단순한 통치자를 넘어 전사로서 힉소스에 대항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카모세(Kamose, 기원전 1555-1550년경 통치)는 힉소스와의 전쟁을 더욱 확대했다. 그는 힉소스의 수도 아바리스(Avaris)까지 진격하며 큰 승리를 거두었고, 자신의 비석에 힉소스의 약점과 자신의 승리를 기록하게 했다. 카모세(Kamose)의 원정은 힉소스를 이집트에서 몰아낼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고, 테베의 지배자로서 이집트 재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그는 힉소스를 완전히 축출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3) 아흐모세 1세(Ahmose I)와 신왕국의 시작
카모세(Kamose)의 죽음 이후, 그의 동생 아흐모세 1세(Ahmose I)가 왕위를 계승했다. 아흐모세 1세는 힉소스를 최종적으로 이집트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고, 나일강 전역에 걸친 통치권을 확립하여 이집트 역사상 가장 번성했던 시기인 신왕국(New Kingdom)의 시작을 알렸다. 따라서 제17왕조는 혼란스러운 제2중간기의 막을 내리고 이집트의 재도약을 이끈 결정적인 왕조였다고 볼 수 있다.
4) 누비아 혈통에 대한 논쟁
일부 학자들은 제17왕조가 누비아(Nubian) 혈통을 가졌을 수 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이집트에 누비아인의 존재가 확대되었고, 특히 세케넨레 타오(Seqenenre Tao)의 두개골 엑스레이 검사 결과 현대 누비아인과 강한 유사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도널드 레드포드(Donald Redford)와 같은 학자들은 역사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제17왕조 시대에 이집트와 누비아 사이에 '이해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아직 확정적인 증거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대부분의 학자들은 제17왕조를 이집트 토착 왕조로 간주한다.
3. 주요 파라오 소개
제17왕조의 정확한 연대와 왕위 계승 순서는 아직 불확실한 부분이 많지만, 알려진 주요 파라오들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모두 테베(Thebes)를 기반으로 힉소스와 대치했다.
4. 왕조의 역사적 의의
제17왕조는 이집트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한 왕조로 평가받는다. 그 의의는 다음과 같다:
- 재통일의 선구자 : 제17왕조는 힉소스의 지배하에 있던 하부 이집트에 맞서 상부 이집트의 유일한 '진정한' 이집트 왕조였다. 이들은 힉소스를 몰아내고 이집트를 재통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비록 제17왕조 자체는 이집트 전체를 재통일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마지막 왕인 카모세(Kamose)의 노력이 신왕국을 여는 아흐모세 1세(Ahmose I)에게 직접적으로 이어졌다.
- 민족주의 부흥의 상징 : 제17왕조의 파라오들은 외국 지배자에 맞서 이집트의 자주권을 되찾으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들의 투쟁은 이집트인들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주고, 단결하여 외부의 위협에 맞서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신왕국 시대로의 교두보 : 제17왕조는 제2중간기의 끝과 신왕국의 시작을 잇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했다. 이들의 군사적, 정치적 역량 강화는 이후 아흐모세 1세(Ahmose I)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기반을 제공했다. 힉소스 축출이라는 큰 업적은 이집트가 고대 세계의 강대국으로 다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제17왕조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혼란의 시기에 이집트의 정체성을 수호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왕조라고 할 수 있다.
5. 왕조 관련 흥미로운 사실 (Trivia)
- 가장 불확실한 연대기 : 제17왕조의 연대기는 이집트 왕조 중에서도 특히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당시 자료 부족과 힉소스와의 지속적인 충돌로 인해 기록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 테베가 중심 : 이 왕조는 상부 이집트의 도시 테베(Thebes)를 중심으로 통치했다. 테베는 이집트 종교의 중심지이자 상부 이집트의 정치적 요충지였다.
- 생존 당시의 이름 발견 : 2012년 3월, 카르나크(Karnak)의 아문-레 신전(Precinct of Amun-Re)에서 석회암 문에 새겨진 세나크텐레(Senakhtenre)의 이름이 발견되었다. 이는 생존 당시의 유물에서 이 왕의 이름이 직접 확인된 첫 번째 사례여서, 고고학적으로 의미가 크다.
- 전사 파라오들의 미라 : 제17왕조의 마지막 왕인 세케넨레 타오(Seqenenre Tao)의 미라에서는 그의 사망 원인이 힉소스와의 전투 중 입은 심각한 머리 부상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발견되어 충격을 주었다. 이는 그가 왕좌에 앉아 지시만 내린 것이 아니라, 직접 전장에 뛰어든 전사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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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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