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3일 수요일

[고대 이집트] 이집트 제9왕조 : 기원전 약 2160~2130년경

[고대 이집트] 이집트 제9왕조 : 기원전 약 2160~2130년경

 

1. 고대 이집트 제9왕조 : 혼돈 속 피어난 헤라클레오폴리스의 그림자

 
고대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불안정하고 파편화된 시기 중 하나로 꼽히는 제1중간기(First Intermediate Period)는 고왕국(Old Kingdom)의 붕괴 이후 약 한 세기 반 동안 이어진 혼란의 시대이다. 이 시기, 중앙 집권적인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 세력들이 독자적인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집트 제9왕조(Ninth Dynasty of Egypt)는 바로 이 제1중간기 동안, 멤피스(Memphis) 왕실의 영향력이 쇠퇴한 후 중이집트의 헤라클레오폴리스 마그나(Herakleopolis Magna)를 기반으로 하여 등장한 왕조이다. 비록 그들의 통치가 전체 이집트를 아우르지는 못했지만, 이들은 혼란한 시기 속에서 이집트의 특정 지역에 안정과 질서의 최소한을 유지하려 노력한 세력이었다.
 

2. 왕조의 탄생 : 혼란을 틈타 나타난 새로운 권력

 
9왕조의 시작은 마네토(Manetho)가 기록한 '아크토에스(Achthoes)'라는 인물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다. 그는 만행을 저지르며 선왕들보다 더 공포스러운 존재였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당시 이집트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힘으로 권력을 장악한 인물의 등장을 암시한다. 많은 학자들은 이 아크토에스를 제9왕조의 실제 창시자이자 첫 파라오인 메리이브레 케티 1(Meryibre Khety I)로 본다. 그는 헤라클레오폴리스의 노마르크(Nomarch, 지방 통치자) 출신으로, 약화된 중앙 왕권의 빈틈을 이용해 스스로 파라오를 칭하며 새로운 왕조를 세운 것이다.
 
이 시기 이집트는 통일된 국가가 아니었다. 멤피스에는 여전히 명목상의 제8왕조가 존재했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극도로 미약했다. 9왕조는 사실상 중이집트 지역을 장악하고 새로운 정치적 중심지로서 헤라클레오폴리스의 위상을 높였다. 그러나 그들의 통치 또한 불안정했으며, 왕위는 단명하거나 불분명한 방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3. 9왕조 연구의 난점 : 파편화된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

 
9왕조에 대한 정보는 다른 번성했던 왕조들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며, 상당 부분 불확실성을 안고 있다. 이는 당시의 혼란한 정치 상황과 기록 보존의 미비함 때문이다.
 
  • 토리노 파피루스(Turin Canon) : 이 파피루스 왕 목록은 제9왕조에 속하는 18명의 왕을 나열하고 있지만, 많은 이름들이 손상되거나 아예 유실되어 누구인지 식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명확한 계보를 확정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 고고학적 증거 : 9왕조의 존재를 확실히 입증하는 고고학적 발굴은 매우 드물다. 특히 피라미드나 대규모 사원과 같은 왕실 건축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당시 왕실의 경제적,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음을 시사한다. 유일하게 확실하게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왕은 메리이브레 케티(Meryibre Khety, ?~?)와 네브카우레 케티(Nebkaure Khety, ?~?) 정도이다.
 
이러한 제한적인 자료로 인해, 학자들마다 제9왕조의 왕 목록이나 통치 순서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이집트학자 윌리엄 C. 헤이즈(William C. Hayes)의 연구는 제9왕조의 통치자 목록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4. 9왕조의 주요 통치자들 (윌리엄 C. 헤이즈에 의한 목록)

 
9왕조의 통치자 목록은 대부분 토리노 파피루스에 기반하며, 그 이름과 통치 시기는 불확실한 경우가 많다. 이 시기의 왕들은 멤피스 왕실의 권위에 도전하며 지방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세력을 대표한다.
 
  • 메리이브레 케티 1(Meryibre Khety I) : 마네토의 아크토에스로 여겨지는 왕이다. 노마르크 출신으로 스스로 파라오를 칭했다.
  • [이름 유실]
  • 네페르카레 7(Neferkare VII) : 노마르크 안크티피(Ankhtifi)의 무덤에서 '카네페레(Kaneferre)'로 언급될 수 있다.
  • 네브카우레 케티 2(Nebkaure Khety II) : 문학 작품 웅변하는 농부(The Eloquent Peasant)에서도 언급된다. 고고학적 증거로 확실히 알려진 왕 중 한 명이다.
  • 세투트 (Setut)
  • [이름 유실]
  • Mery[...]
  • Shed[...]
  • H[...]
  • [세 명의 이름 유실]
  • User(?)[...]
  • 임호텝(Imhotep) : 9왕조의 단명한 통치자로 추정된다. 와디 하마마트(Wadi Hammamat)의 두 암각화에서만 알려져 있으며, 그의 정확한 연대기적 위치는 불분명하다.
 
이 목록에서 볼 수 있듯이, 많은 왕들의 이름이 불분명하거나 유실되어 있다. 심지어 생몰년 정보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 이는 당시 이집트의 극심한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왕실의 안정성이 크게 떨어졌으며, 중앙 기록 보존 체계가 붕괴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혼돈 속의 왕조, 그리고 제10왕조로의 전환

 
9왕조가 통치했던 헤라클레오폴리스는 비록 전체 이집트를 재통일하지는 못했지만, 멤피스가 아닌 지역에서 발생한 첫 번째 의미 있는 왕조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이집트 권력의 중심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9왕조와 동시대에는 상이집트(Upper Egypt)의 테베(Thebes) 지역에서도 강력한 세력이 부상하고 있었다.
 
9왕조는 곧이어 제10왕조(Tenth Dynasty of Egypt)로 계승되었다. 이 두 왕조는 모두 헤라클레오폴리스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종종 '헤라클레오폴리스 왕조'라고 묶어서 불리기도 한다. 이들은 약 100여 년 동안 중이집트를 통치하며, 테베의 세력과 대립하는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최종적으로는 남쪽의 테베를 기반으로 한 멘투호테프 2(Mentuhotep II)가 이집트를 재통일하면서 제1 중간기는 막을 내리고, 중왕국 시대가 시작된다.
 
결론적으로, 고대 이집트 제9왕조는 통일 왕국으로서의 이집트가 분열과 혼란에 직면했던 제1 중간기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왕조이다. 비록 단편적인 기록과 유물로 인해 그들의 역사를 온전히 재구성하기는 어렵지만, 이들은 고왕국의 붕괴 이후 지방 세력의 부상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흐름을 대변하며 이집트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과도기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덧없고 혼란스러웠지만, 결국은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는 과정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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