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보암(Rehoboam, BC. 972~913년경) : 분열의 씨앗을 뿌리다(BC. 931~913년경)
- 르호보암(Rehoboam) Hebrew : רְחַבְעָם, Rəḥaḇʿām, “an enlarged people” / Greek : Ροβοάμ, Roboam / Latin : Roboam
- 부친 : 솔로몬(Solomon)
- 모친 : 나아마(Naamah)
- 배우자 :
마할랏(Mahalath) : 성경 속 인물, 르호보암의 아내 중 한 명
마아가(Maacah) : 르호보암의 아내이자 아비야의 어머니
아비하일(Abihail) : 르호보암의 또 다른 아내
그 밖의 16명의 아내와 후궁 60명(역대하 11:18-21) - 자녀들 :
아비야(Abijah) : 르호보암과 마아가(Maacah)의 아들
여우스(Jeush) : 르호보암의 아들
스마랴(Shemariah) : 르호보암의 아들
사함(Zaham) : 르호보암의 아들
그 밖에 28명의 아들과 60명의 딸을 낳았다(역대하 11:21) - 재위 : 기원전 931년 ~ 기원전 913년
- 전임 : 솔로몬(Solomon)
- 후임 : 아비야(Abijah)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르호보암(Rehoboam, 재위 B.C. 931/930-914/913경)은 그 이름만으로도 비극적인 분열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는 이스라엘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지혜의 왕 솔로몬(Solomon, 재위 B.C. 970-931경)의 아들이자 후계자였지만, 그의 통치기에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두 개의 독립적인 국가, 즉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으로 나뉘는 돌이킬 수 없는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의 이야기는 리더의 현명하지 못한 결정 하나가 한 국가의 운명을 어떻게 뒤바꿀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 된다.
1. 르호보암의 배경 : 솔로몬 시대의 그림자 속에서
르호보암은 솔로몬 왕과 암몬(Ammon) 여인 나아마(Naamah)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 솔로몬이 살아 있을 때까지는 후계자로서 큰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솔로몬은 지혜와 부를 바탕으로 광대한 건축 사업을 벌였고, 이는 백성들에게 막대한 노동력과 세금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불만이 쌓여가던 시기에 르호보암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성경은 그가 왕이 될 때 41세였으며, 17년간 예루살렘에서 통치했다고 기록한다.
2. 르호보암의 통치 : 현명하지 못한 결정들이 부른 결과
1) 왕위 계승과 민심의 요구
솔로몬의 죽음 이후, 르호보암은 세겜(Shechem)으로 가서 이스라엘 전체 백성에게 왕으로 인정받는 대관식을 치르려 했다. 이때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은 여로보암(Jeroboam)을 중심으로 르호보암에게 찾아와 간청했다. 여로보암은 과거 솔로몬에게 반역을 꾀했다가 이집트(Egypt)로 망명했던 인물이었다. 백성들은 솔로몬 시대의 가혹한 노동과 무거운 세금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며, 르호보암에게 이러한 짐을 덜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의 요구는 합리적이었고, 왕이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절호의 기회였다.
2) 백성들의 요구와 현명하지 못한 결정
르호보암은 백성들의 요구에 즉답하지 않고 3일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는 먼저 아버지 솔로몬을 섬겼던 나이 많고 현명한 원로들과 의논했다. 원로들은 백성의 요구를 들어주어 그들의 종이 되겠다고 말하면, 백성들은 영원히 르호보암의 충실한 신하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는 백성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현명한 조언이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원로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자신과 함께 성장한 젊은 친구들과 의논했다. 젊은 친구들은 왕의 권위를 내세워 백성들에게 더욱 강경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내 새끼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다. 내 아버지가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 것이다. 내 아버지는 너희를 채찍으로 징벌하였으나, 나는 너희를 전갈 채찍으로 징벌할 것이다.”라고 백성에게 말하라고 조언했다.
3) 왕국의 분열
3일 후, 백성이 다시 르호보암에게 오자, 그는 젊은 친구들의 조언을 따라 백성의 요구를 거절하고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말은 백성들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백성들은 “다윗과 우리에게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새의 아들에게서 얻을 유업이 없다!”고 외치며 르호보암을 거부했다. 결국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열 지파는 르호보암에게서 돌아서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 르호보암은 징세 책임자인 아도람(Adoram)을 보내 그들을 달래려 했으나, 백성들은 그를 돌로 쳐 죽였다. 르호보암은 서둘러 전차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이로써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남유다 왕국(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과 북이스라엘 왕국(나머지 열 지파)으로 분열되었다. 르호보암은 남유다 왕국의 첫 왕이 되었고,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첫 왕이 되었다. 르호보암은 분열된 열 지파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모았으나, 하나님은 예언자 스마야(Shemaiah)를 통해 그 싸움을 멈추게 하셨다.
4) 이집트의 침공과 성전 약탈
르호보암의 통치 5년째 되던 해, 이집트의 시삭 1세(Shishak I, 재위 B.C. 945-924경) 파라오가 예루살렘을 침공했다. 성경은 이 침공이 솔로몬과 르호보암의 죄, 즉 하나님을 떠난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다고 설명한다. 시삭 1세는 병거 1,200대와 기병 60,000명,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남유다의 요새화된 성읍들을 점령한 후 예루살렘까지 진격했다.
르호보암과 유다의 방백들은 시삭의 침략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들의 죄를 인정했다. 결국 시삭 1세는 예루살렘을 파괴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성전과 왕궁의 모든 보물을 약탈했다. 솔로몬이 만들었던 모든 금방패들도 빼앗아갔다. 르호보암은 이를 대신하여 놋쇠 방패를 만들어 왕궁 문을 지키는 호위병들에게 주었다. 이 사건은 르호보암 통치의 나약함과 통일 왕국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비극이었다.
5) 통치 말기와 계승
르호보암은 예루살렘에서 17년간 통치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유다 백성은 산당과 우상들을 세우고 음란한 행위를 하는 등 하나님의 눈에 악한 일을 행했다. 그의 어머니 나아마는 암몬 여인이었으며, 이는 그의 통치 말기에 우상 숭배가 더욱 심해진 배경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르호보암은 18명의 아내와 60명의 첩을 두었으며, 28명의 아들과 60명의 딸을 두었다. 그는 아들 아비야(Abijah)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었으며, 예루살렘에 장사되었다.
3. 르호보암의 역사성
르호보암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입증하는 고고학적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통치했던 시삭 1세의 이집트 침공에 대해서는 고고학적인 뒷받침이 있다. 이집트 카르낙(Karnak) 신전의 부바스티스 문(Bubastite Portal)에는 시삭 1세가 가나안(Canaan) 지역을 침공하여 점령한 도시들의 목록이 새겨져 있다. 이 목록에는 성경에 언급된 유다의 성읍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시삭 1세의 유다 침공이 역사적 사실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이는 르호보암 시대에 실제로 이스라엘과 유다 지역에 외부의 군사적 압력이 있었다는 성경 기록의 신뢰성을 높여준다.
4. 랍비 문헌 속 르호보암 : 죄와 결과의 연속
랍비 문헌과 미드라시(Midrash)는 르호보암의 분열된 통치를 솔로몬의 죄와 연관 짓는다. 솔로몬이 말년에 수많은 이방인 아내들을 맞아들이고 우상 숭배를 허용한 것에 대한 징벌로 왕국이 분열되었다고 본다. 랍비들은 르호보암의 실패한 리더십이 단순히 그의 어리석음 때문이 아니라, 그 이전에 솔로몬이 쌓아 올린 죄의 대가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르호보암의 고집과 무지는 백성을 떠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적되며, 리더가 백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주는 경고의 메시지로 전달된다.
5. 기독교 관점에서의 르호보암 : 구속사의 한 부분
기독교에서 르호보암은 마태복음(Matthew) 1:7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포함되는 인물로 등장한다. 비록 그의 통치가 실패했고 왕국을 분열시켰지만, 그는 다윗(David)의 혈통을 이어받은 유다 왕국의 왕으로서 메시아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한 부분으로 인정된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인간의 실수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기독교적 믿음을 보여준다. 르호보암의 불완전한 통치는 인간 역사의 한계와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동시에 드러내는 장치로 이해되기도 한다.
르호보암의 이야기는 지도자의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과거의 유산이 다음 세대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의 짧고도 혼란스러운 통치는 한때 강력했던 통일 왕국의 영광이 어떻게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지를 증명하며,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 역사의 비극적인 분열의 서막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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