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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4일 목요일

르호보암(Rehoboam, BC. 972~913년경) : 분열의 씨앗을 뿌리다(BC. 931~913년경) - 이스라엘 제4대 / 유다 제1대 왕

르호보암(Rehoboam, BC. 972~913년경) : 분열의 씨앗을 뿌리다(BC. 931~913년경)

 
  • 르호보암(Rehoboam) Hebrew : רְחַבְעָם, Rəḥaḇʿām, “an enlarged people” / Greek : Ροβοάμ, Roboam / Latin : Roboam
  • 부친 : 솔로몬(Solomon)
  • 모친 : 나아마(Naamah)
  • 배우자 :
    마할랏(Mahalath) : 성경 속 인물, 르호보암의 아내 중 한 명
    마아가(Maacah) : 르호보암의 아내이자 아비야의 어머니
    아비하일(Abihail) : 르호보암의 또 다른 아내
    그 밖의 16명의 아내와 후궁 60(역대하 11:18-21)
  • 자녀들 :
    아비야(Abijah) : 르호보암과 마아가(Maacah)의 아들
    여우스(Jeush) : 르호보암의 아들
    스마랴(Shemariah) : 르호보암의 아들
    사함(Zaham) : 르호보암의 아들
    그 밖에 28명의 아들과 60명의 딸을 낳았다(역대하 11:21)
  • 재위 : 기원전 931~ 기원전 913
  • 전임 : 솔로몬(Solomon)
  • 후임 : 아비야(Abijah)

화가 한스 홀바인이 스위스 바젤 시청 회의실에 그린 벽화의 일부에 르호보암 왕이 묘사되어 있다
화가 한스 홀바인이 스위스 바젤 시청 회의실에 그린 벽화의 일부에 르호보암 왕이 묘사되어 있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르호보암(Rehoboam, 재위 B.C. 931/930-914/913)은 그 이름만으로도 비극적인 분열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는 이스라엘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지혜의 왕 솔로몬(Solomon, 재위 B.C. 970-931)의 아들이자 후계자였지만, 그의 통치기에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두 개의 독립적인 국가, 즉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으로 나뉘는 돌이킬 수 없는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의 이야기는 리더의 현명하지 못한 결정 하나가 한 국가의 운명을 어떻게 뒤바꿀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 된다.
 

1. 르호보암의 배경 : 솔로몬 시대의 그림자 속에서

 
르호보암은 솔로몬 왕과 암몬(Ammon) 여인 나아마(Naamah)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 솔로몬이 살아 있을 때까지는 후계자로서 큰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솔로몬은 지혜와 부를 바탕으로 광대한 건축 사업을 벌였고, 이는 백성들에게 막대한 노동력과 세금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불만이 쌓여가던 시기에 르호보암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성경은 그가 왕이 될 때 41세였으며, 17년간 예루살렘에서 통치했다고 기록한다.
 

2. 르호보암의 통치 : 현명하지 못한 결정들이 부른 결과

 

1) 왕위 계승과 민심의 요구

 
솔로몬의 죽음 이후, 르호보암은 세겜(Shechem)으로 가서 이스라엘 전체 백성에게 왕으로 인정받는 대관식을 치르려 했다. 이때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은 여로보암(Jeroboam)을 중심으로 르호보암에게 찾아와 간청했다. 여로보암은 과거 솔로몬에게 반역을 꾀했다가 이집트(Egypt)로 망명했던 인물이었다. 백성들은 솔로몬 시대의 가혹한 노동과 무거운 세금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며, 르호보암에게 이러한 짐을 덜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의 요구는 합리적이었고, 왕이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절호의 기회였다.
 

2) 백성들의 요구와 현명하지 못한 결정

 
르호보암은 백성들의 요구에 즉답하지 않고 3일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는 먼저 아버지 솔로몬을 섬겼던 나이 많고 현명한 원로들과 의논했다. 원로들은 백성의 요구를 들어주어 그들의 종이 되겠다고 말하면, 백성들은 영원히 르호보암의 충실한 신하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는 백성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현명한 조언이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원로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자신과 함께 성장한 젊은 친구들과 의논했다. 젊은 친구들은 왕의 권위를 내세워 백성들에게 더욱 강경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내 새끼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다. 내 아버지가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 것이다. 내 아버지는 너희를 채찍으로 징벌하였으나, 나는 너희를 전갈 채찍으로 징벌할 것이다.”라고 백성에게 말하라고 조언했다.
 

3) 왕국의 분열

 
3일 후, 백성이 다시 르호보암에게 오자, 그는 젊은 친구들의 조언을 따라 백성의 요구를 거절하고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말은 백성들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백성들은 다윗과 우리에게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새의 아들에게서 얻을 유업이 없다!”고 외치며 르호보암을 거부했다. 결국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열 지파는 르호보암에게서 돌아서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 르호보암은 징세 책임자인 아도람(Adoram)을 보내 그들을 달래려 했으나, 백성들은 그를 돌로 쳐 죽였다. 르호보암은 서둘러 전차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이로써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남유다 왕국(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과 북이스라엘 왕국(나머지 열 지파)으로 분열되었다. 르호보암은 남유다 왕국의 첫 왕이 되었고,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첫 왕이 되었다. 르호보암은 분열된 열 지파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모았으나, 하나님은 예언자 스마야(Shemaiah)를 통해 그 싸움을 멈추게 하셨다.
 

4) 이집트의 침공과 성전 약탈

 
르호보암의 통치 5년째 되던 해, 이집트의 시삭 1(Shishak I, 재위 B.C. 945-924) 파라오가 예루살렘을 침공했다. 성경은 이 침공이 솔로몬과 르호보암의 죄, 즉 하나님을 떠난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다고 설명한다. 시삭 1세는 병거 1,200대와 기병 60,000,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남유다의 요새화된 성읍들을 점령한 후 예루살렘까지 진격했다.
 
르호보암과 유다의 방백들은 시삭의 침략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들의 죄를 인정했다. 결국 시삭 1세는 예루살렘을 파괴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성전과 왕궁의 모든 보물을 약탈했다. 솔로몬이 만들었던 모든 금방패들도 빼앗아갔다. 르호보암은 이를 대신하여 놋쇠 방패를 만들어 왕궁 문을 지키는 호위병들에게 주었다. 이 사건은 르호보암 통치의 나약함과 통일 왕국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비극이었다.
 

5) 통치 말기와 계승

 
르호보암은 예루살렘에서 17년간 통치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유다 백성은 산당과 우상들을 세우고 음란한 행위를 하는 등 하나님의 눈에 악한 일을 행했다. 그의 어머니 나아마는 암몬 여인이었으며, 이는 그의 통치 말기에 우상 숭배가 더욱 심해진 배경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르호보암은 18명의 아내와 60명의 첩을 두었으며, 28명의 아들과 60명의 딸을 두었다. 그는 아들 아비야(Abijah)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었으며, 예루살렘에 장사되었다.
 

3. 르호보암의 역사성

 
르호보암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입증하는 고고학적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통치했던 시삭 1세의 이집트 침공에 대해서는 고고학적인 뒷받침이 있다. 이집트 카르낙(Karnak) 신전의 부바스티스 문(Bubastite Portal)에는 시삭 1세가 가나안(Canaan) 지역을 침공하여 점령한 도시들의 목록이 새겨져 있다. 이 목록에는 성경에 언급된 유다의 성읍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시삭 1세의 유다 침공이 역사적 사실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이는 르호보암 시대에 실제로 이스라엘과 유다 지역에 외부의 군사적 압력이 있었다는 성경 기록의 신뢰성을 높여준다.
 

4. 랍비 문헌 속 르호보암 : 죄와 결과의 연속

 
랍비 문헌과 미드라시(Midrash)는 르호보암의 분열된 통치를 솔로몬의 죄와 연관 짓는다. 솔로몬이 말년에 수많은 이방인 아내들을 맞아들이고 우상 숭배를 허용한 것에 대한 징벌로 왕국이 분열되었다고 본다. 랍비들은 르호보암의 실패한 리더십이 단순히 그의 어리석음 때문이 아니라, 그 이전에 솔로몬이 쌓아 올린 죄의 대가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르호보암의 고집과 무지는 백성을 떠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적되며, 리더가 백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주는 경고의 메시지로 전달된다.
 

5. 기독교 관점에서의 르호보암 : 구속사의 한 부분

 
기독교에서 르호보암은 마태복음(Matthew) 1:7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포함되는 인물로 등장한다. 비록 그의 통치가 실패했고 왕국을 분열시켰지만, 그는 다윗(David)의 혈통을 이어받은 유다 왕국의 왕으로서 메시아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한 부분으로 인정된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인간의 실수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기독교적 믿음을 보여준다. 르호보암의 불완전한 통치는 인간 역사의 한계와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동시에 드러내는 장치로 이해되기도 한다.
 
르호보암의 이야기는 지도자의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과거의 유산이 다음 세대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의 짧고도 혼란스러운 통치는 한때 강력했던 통일 왕국의 영광이 어떻게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지를 증명하며,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 역사의 비극적인 분열의 서막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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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2025년 8월 21일 목요일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Lucius Tarquinius Superbus, BC.?~495) : 폭정으로 막을 내린 로마 왕정(BC.c.534~c.509)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Lucius Tarquinius Superbus, BC.?~495) : 폭정으로 막을 내린 로마 왕정(BC.c.534~c.509)

 
  •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Lucius Tarquinius Superbus)
  • 출생 : 로마
  • 사망 : 기원전 495년경 / 쿠마이(Cumae)
  • 부친 : Lucius Tarquinius Priscus (possibly grandfather)
  • 모친 : Tanaquil
  • 배우자 : Tullia Major, Tullia Minor
  • 자녀 : Titus Tarquinius, Arruns Tarquinius, Sextus Tarquinius
  • 재위 : 기원전 534년경 ~ 509년경
  • 전임 :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 후임(집정관) :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Lucius Junius Brutus),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Lucius Tarquinius Collatinus)
 
기욤 루이예가 1553년에 펴낸 『저명 인물 초상집』에 수록된 초상화
기욤 루이예가 1553년에 펴낸 저명 인물 초상집에 수록된 초상화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Lucius Tarquinius Superbus, 라틴어로 "오만한 타르퀴니우스"라는 뜻, 기원전 534년경~기원전 509년경 재위, 사망 기원전 495)는 고대 로마의 전설적인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왕이다. 그의 25년간의 통치는 폭정으로 특징지어지며, 이는 결국 로마 왕정을 폐지하고 로마 공화정(Roman Republic)이 수립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의 통치 방식은 잔혹한 권력 쟁취와 끊임없는 독재로 점철되었고, 이는 로마 역사에서 왕정 시대의 종말을 상징하는 비극적인 사건들을 낳았다.
 

1. 출생과 잔혹한 왕위 계승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로마의 다섯 번째 왕이었던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Lucius Tarquinius Priscus, 기원전 616년경~기원전 579년경 재위)의 아들이거나 손자였다. 고대 문헌에서는 그를 프리스쿠스의 아들로 기록했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연대기적으로 그의 손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그의 어머니는 타나퀼(Tanaquil)로 전해진다.
 
그의 왕위 계승 과정은 피로 물들었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Servius Tullius, 기원전 578년경~기원전 535년경 재위) 왕은 왕위 계승으로 인한 갈등을 막기 위해 자신의 딸들인 툴리아 마이오르(Tullia Major)와 툴리아 미노르(Tullia Minor)를 각각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와 그의 형제 아룬스 타르퀴니우스(Arruns Tarquinius)에게 결혼시켰다. 그러나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자신의 아내와 형을 살해하는 잔혹한 방법으로 권력을 쟁취하려 했다.
 
그리고 기원전 535년경, 그는 자신의 장인이자 선대 왕인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를 암살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러한 방식은 이후 그의 폭정을 예고하는 서곡과도 같았다.
 

2. 오만과 폭정의 통치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재위 기간은 그의 별칭 '수페르부스(Superbus)'처럼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했다. 그는 원로원(Senate)의 권한을 무시하고, 백성들에게 강제 노동과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며 로마를 독재적으로 통치했다. 그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로마 왕정 폐지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주요한 근거가 되었다.
 
  • 군사적 성과 : 그는 이웃 국가들과의 전쟁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아에퀴족(Aequi)과 평화 조약을 맺고, 에트루리아족(Etruscans)과의 조약도 갱신했다. 사비니족(Sabines)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시그니아(Signia)와 키르케이(Circeii)에 로마 식민지를 건설하며 로마의 영토를 확장했다.
  • 대규모 건축 사업 : 타르퀴니우스는 로마의 웅장함을 과시하기 위한 대규모 건축 사업에 매달렸다. 그는 카피톨리노 언덕(Capitoline Hill)에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Temple of Jupiter Optimus Maximus)을 짓기 위해 타르페이아 바위(Tarpeian Rock) 꼭대기를 평평하게 하고 고대 사비니 신사들을 제거했다. 또한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에 관중석을 건설하고, 로마의 거대한 하수도인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의 굴착을 명령하는 등 대규모 공사를 추진했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로마의 발전에 기여했지만, 그 과정에서 백성들에게는 막대한 노동력과 재정적 부담을 안겨주었다.
  • 시빌린 북스(Sibylline Books) 일화 : 고대 로마 전승에 따르면, 타르퀴니우스는 쿠마이의 시빌(Cumaean Sibyl)로부터 예언서 아홉 권을 엄청난 가격에 제안받았다. 그는 두 번이나 거절했지만, 시빌은 매번 세 권씩 태우면서도 남은 예언서의 가격은 낮추지 않았다. 결국 타르퀴니우스는 남은 세 권의 예언서를 원래 아홉 권의 가격에 구매했는데, 이 책들이 바로 로마의 운명을 점치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시빌린 북스이다. 이 일화는 그의 고집스러움과 뒤늦은 후회를 보여준다.
 

3. 몰락의 서곡 : 루크레티아 사건

 
기원전 509, 타르퀴니우스의 폭정과 끊임없는 건설 프로젝트로 로마인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 시기 타르퀴니우스는 부유한 루툴리(Rutuli) 부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그들의 수도 아르데아(Ardea)를 포위했다.
 
아르데아를 공성하던 중,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Sextus Tarquinius)는 자신의 사촌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Lucius Tarquinius Collatinus)의 아내 루크레티아(Lucretia)의 아름다움과 미덕에 반해 그녀를 강간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루크레티아는 가족들에게 모든 사실을 폭로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은 로마인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루크레티아의 남편 콜라티누스와 그의 친구이자 타르퀴니우스의 조카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Lucius Junius Brutus)는 루크레티아의 시신을 로마 광장에 내걸고 타르퀴니우스 왕과 그의 폭정에 대항하는 봉기를 선동했다.
 

4. 왕정의 종말과 망명 생활

 
봉기 소식을 들은 타르퀴니우스는 아르데아를 포기하고 에트루리아의 동맹 세력인 베이(Veii)와 타르퀴니이(Tarquinii)의 지원을 받아 로마로 돌아오려 했다. 그러나 브루투스는 군대를 이끌고 타르퀴니우스 군과 맞섰다. 왕정 폐지 후 로마 공화정이 수립되었으며, 브루투스와 콜라티누스가 초대 집정관(Consuls)으로 선출되었다.
 
타르퀴니우스는 로마에 머물던 측근들을 통해 로마 지배층을 전복하려 했으나, 이 음모가 발각되면서 브루투스는 자신의 두 아들(티투스와 티베리우스)까지 사형에 처하는 결단력을 보여주며 반역 세력을 진압했다.
 
타르퀴니우스는 왕위를 되찾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다.
 
  • 실바 아르시아 전투(Battle of Silva Arsia) : 로마는 에트루리아 동맹군과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브루투스는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아룬스 타르퀴니우스와 일대일로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 라르스 포르세나(Lars Porsena)의 개입 : 타르퀴니우스는 클루시움(Clusium)의 왕 라르스 포르세나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포르세나는 로마를 포위했다. 이 시기에 호라티우스(Horatius)와 가이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Gaius Mucius Scaevola)와 같은 로마 영웅들의 전설적인 저항이 펼쳐졌다. 비록 포르세나가 잠시 로마를 점령했다는 설도 있지만, 결국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타르퀴니우스의 왕위 복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 레길루스 호수 전투(Battle of Lake Regillus) : 기원전 499년 또는 496, 타르퀴니우스는 사위인 투스쿨룸(Tusculum)의 독재관 옥타비우스 마밀리우스(Octavius Mamilius)를 설득하여 라틴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타르퀴니우스의 마지막 아들 티투스 타르퀴니우스(Titus Tarquinius)도 참전했지만,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큰 피해를 안겼고, 마밀리우스는 전사했으며, 결국 라틴 동맹군은 후퇴했다.
 

5. 비극적인 최후와 역사적 의미

 
왕위 복귀를 위한 모든 시도가 좌절된 후,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쿠마이(Cumae)의 아리스토데무스(Aristodemus of Cumae)의 궁정으로 망명했다. 그는 기원전 495년에 그곳에서 사망했으며, 이는 왕정 폐지 후 약 14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통치와 그가 야기한 사건들은 로마 왕정의 종말을 고하고 공화정이 시작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의 폭정은 로마인들에게 ''이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불신을 심어주었으며, 이후 공화정 시대에 '(rex)'이라는 칭호는 독재와 폭력의 상징으로 여겨져 금기시되었다. 그는 로마의 역사에서 가장 오만하고 잔인한 왕으로 기억되며, 로마 공화정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촉발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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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Lucius Tarquinius Priscus, BC.?~c.579) : 로마에 에트루리아의 문명을 심은 왕(BC.c.616~c.579)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Lucius Tarquinius Priscus, BC.?~c.579) : 로마에 에트루리아의 문명을 심은 왕(BC.c.616~c.579)

 
  •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Lucius Tarquinius Priscus)
  • 출생 : 미상
  • 사망 : 기원전 578년경
  • 부친 : Demaratus of Corinth
  • 배우자 : Tanaquil
  • 자녀 : Tarquinia, Lucius Tarquinius, Arruns Tarquinius
  • 재위 : 기원전 616년경 ~ 기원전 578년경
  • 전임 : 안쿠스 마르키우스(Ancus Marcius)
  • 후임 : 세르비우스 툴리우스(Servius Tullius)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Lucius Tarquinius Priscus)는 기원전 616년경부터 기원전 579년경까지 로마를 통치했던 전설적인 다섯 번째 왕이자, 로마 최초의 에트루리아계 왕조를 연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38년간의 재위 기간 동안 군사적 정복을 통해 로마의 세력을 확장하고, 웅장한 건축 사업들을 통해 로마의 도시적 면모를 크게 발전시켰다. 그의 통치는 로마의 정치, 사회, 그리고 문화적 기반을 한 단계 격상시키는 중요한 시기였다.
 
기욤 루이예가 1553년에 펴낸 『저명 인물 초상집』에 실린 초상화
기욤 루이예가 1553년에 펴낸 저명 인물 초상집에 실린 초상화
 

1. 에트루리아 출신 이민자의 등장 : 타르퀴니우스의 로마 입성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에트루리아(Etruria)의 도시 타르퀴니이(Tarquinii) 출신이었다. 그의 원래 에트루리아 이름은 루쿠모(Lucumo)’였는데, 이는 에트루리아어로 을 의미하는 라우쿠메(lauchume)’의 라틴어화된 형태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과 칭호가 혼동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의 아버지 데마라투스(Demaratus of Corinth, 생몰년 미상)는 코린토스(Corinth) 출신의 그리스 상인이자 망명자였다. 데마라투스의 외국인 혈통 때문에 루키우스는 타르퀴니이에서 정치적 지위를 얻는 것이 불가능했다. 당시 에트루리아 사회는 혈통과 가문의 배경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현명한 아내 타나퀼(Tanaquil, 생몰년 미상)의 조언은 그의 인생 항로를 바꾼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타나퀼은 재능 있는 자에게 더 개방적인 로마로 이주할 것을 권유했다. 그들이 마차를 타고 로마에 도착했을 때, 독수리가 그의 모자를 가져갔다가 다시 머리에 씌워주는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났다. 예언에 능했던 타나퀼은 이를 남편의 위대한 미래를 예고하는 길조로 해석했다.
 
로마에서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그의 예의 바른 태도를 통해 빠르게 존경을 얻었다. 당시 로마의 왕이었던 안쿠스 마르키우스(Ancus Marcius, 기원전 642년경~기원전 617년경 재위)는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자신의 아들들의 후견인으로 임명하며 그를 왕실에 들이게 된다. 이는 그가 로마의 최고 권력층에 접근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 왕위 계승 : 로마 왕정의 새로운 전통을 열다

 
안쿠스 마르키우스는 제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Numa Pompilius)의 손자였지만, 당시 로마에서는 아직 왕위가 세습되는 전통이 확고히 자리 잡지 않았다. 초기 세 명의 왕 중 누구도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으며, 모든 왕은 시민들의 추대로 선출되었다.
 
안쿠스 마르키우스가 사망하자,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원로원(Senate)과 민회(Comitia Curiata)에 직접 나서 자신이 왕위에 오를 것을 설득했다. 그는 안쿠스 마르키우스의 아들들이 아직 어리고 미숙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자신의 능력과 경험을 내세워 지지를 얻었다. 일부 전승에 따르면, 안쿠스 마르키우스의 아들들은 당시 사냥을 나가 있어 민회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고도 한다.
 
결국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로마 역사상 최초로 스스로 적극적인 로비를 통해 왕위에 오른 인물이 되었다. 그의 즉위는 로마의 전통적인 왕위 계승 방식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3.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통치 : 로마의 군사적 확장과 도시의 발전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의 국력 강화와 도시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 정치적 개혁

 
  • 원로원 확대 : 그는 원로원의 의원 수를 100명 추가하여 전체 원로원 의원 수를 300명으로 늘렸다. 새롭게 추가된 의원들은 기존 귀족 가문보다 낮은 신분의 가문들(minores gentes) 출신이었다. 이는 새로운 엘리트 계층을 정치 시스템에 편입시켜 왕권의 지지 기반을 확대하려는 시도였다.
  • 기사 계급 증대 : 그는 로마의 기사 계급(equites)을 두 배로 늘렸다. 기사 계급은 로마 군대의 핵심 병력으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의 군사력이 더욱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2) 군사적 정복

 
  • 라틴인 정복 : 그는 로마의 이웃이었던 라틴 부족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아피올라(Apiolae)를 점령하는 등 상당한 승리를 거두고 막대한 전리품을 확보했다.
  • 사비니족 격파 : 사비니족과의 전쟁에서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아니오 강(Anio River)에 큰 다리를 건설하여 사비니족 영토를 장악하고 결국 승리했다. 이 승리는 로마의 북동쪽 국경을 안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에트루리아 도시들의 복종 : 프리스쿠스는 자신의 출신지이기도 한 에트루리아 도시 국가들과도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로마의 왕이 에트루리아인들을 상대로 개선식을 거행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이는 로마가 에트루리아에 대한 패권을 확립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3) 웅장한 건축 사업 


프리스쿠스는 로마를 작은 도시에서 벗어나 위대한 제국의 수도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대규모 토목 공사와 건축 사업들을 시작했다.
 
  •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 건설 : 팔라티노 언덕(Palatine Hill)과 아벤티노 언덕(Aventine Hill) 사이에 전차 경주를 위한 거대한 경기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 건설을 시작했다. 이는 로마인들의 오락 문화를 발전시키고 도시의 위상을 높이는 상징적인 건축물이었다.
  •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Temple of Jupiter Optimus Maximus) 착공 : 카피톨리움 언덕(Capitoline Hill)에 로마의 최고신인 유피테르를 위한 웅장한 신전 건설을 시작했다. 이 신전은 로마의 종교적 중심이자 국가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되었다.
  •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 개선 : 도시 중심의 광장인 포룸 로마눔에 상점과 회랑(porticos)을 건설하여 도시의 상업 및 공공 활동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 도시 성벽 건설 : 도시 주변에 성벽을 건설하여 로마의 방어력을 강화했다. (일부에서는 이후 왕인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완공했다고도 한다.)
  •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 건설 : 로마 시내의 습지대를 배수하기 위한 거대한 하수도 시스템인 클로아카 막시마 건설을 시작했다. 이 공학적 걸작은 로마의 위생 상태를 개선하고 도시에 더 많은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 로마 경기(Ludi Romani) 창설 : 로마인들을 위한 주요 축제와 오락 행사인 로마 경기를 제정하여 시민들의 결속을 다졌다.
 
프리스쿠스의 이러한 건축 사업들은 로마의 도시적 면모를 크게 개선하고, 에트루리아의 발달된 건축 기술과 공학적 역량을 로마에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죽음과 권력 승계의 비극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38년간의 재위 기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 마지막은 비극적으로 끝났다. 전임 왕 안쿠스 마르키우스의 아들들은 자신들이 왕위를 계승했어야 한다고 믿었고, 타르퀴니우스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폭동으로 위장하여 타르퀴니우스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결국 타르퀴니우스는 폭동 중에 도끼로 머리를 맞아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황후 타나퀼은 남편의 죽음을 감지했지만, 이를 외부에 알리지 않고 기지를 발휘했다. 그녀는 타르퀴니우스가 단순히 부상을 입었을 뿐이라고 선포하고, 자신들이 신임하던 사위 세르비우스 툴리우스(Servius Tullius, 기원전 578년경~기원전 535년경 재위)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타나퀼은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비범함을 일찍이 알아보고 그를 양자로 삼았으며, 자신의 딸 타르퀴니아(Tarquinia, 생몰년 미상)와 결혼시켰다. 타르퀴니우스의 사망이 확인된 후,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타르퀴니우스의 아들들과 안쿠스 마르키우스의 아들들을 제치고 로마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안쿠스의 아들들에게도 복수가 아니었으며, 결국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두 딸이 타르퀴니우스의 아들들(혹은 손자들)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Lucius Tarquinius Superbus, 기원전 535년경~기원전 510년경 재위)와 아룬스 타르퀴니우스(Arruns Tarquinius, 생몰년 미상)와 결혼하며 왕실의 복잡한 권력 관계가 이어졌다.
 
대부분의 고대 역사가들은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프리스쿠스의 아들이라고 보았으나, 일부는 그가 프리스쿠스의 손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기원전 496년경 사망했는데, 이는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보다 80년 이상 뒤의 일이었으므로, 손자라는 설이 연대기적으로 더 합리적이다.
 

5.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유산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로마 왕정 시대의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이었다. 그는 로마를 에트루리아 문명과 기술의 영향을 받아들이게 했고, 이는 로마의 발전과 문명화에 큰 기여를 했다. 그의 대규모 건축 사업들은 로마를 단순한 정착지에서 벗어나 하나의 도시로서의 위상과 기능을 갖추게 했다.
 
또한 그는 군사적 성공을 통해 로마의 영토를 확장하고, 정치적 개혁을 통해 왕권과 국가 시스템을 강화했다. 비록 그의 삶이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그는 로마가 이후 공화정과 제정 시대로 발전할 수 있는 굳건한 기반을 다진 왕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에트루리아의 문명을 로마에 심고, 로마를 위대한 미래로 이끌 첫걸음을 놓은 진정한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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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우리 (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 ( 牟義理 )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   【 1878 년 】 미국 오하이오주 벨빌 (Bellville) 근교에서 사무엘 모우리 (Samuel Mowry, 1850-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