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영흥학교(永興學校) : 장로교계 학교로 목포시 상동에 소재.
【1903년】
- 1903년 목포주재 남장로회 선교사이던 벨(E. Bell; 배유지)와 임성옥(任成玉)ㆍ유내춘(柳來春) 등의 발기로 양동 86번지에 있던 벨 선교사의 사택 사랑채에서 기독교 신앙을 전도하고 민족혼을 깨우칠 목적으로 10명 미만의 학생을 보아 처음 개교하였다.
- 학교이름 ‘영흥’은 영원토록 온누리에 생명의 빛을 발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1905년】
- 1905년에 영흥소학교로 개편하였다.
- 이어 프레스톤(J.F. Preston) 선교사가 목포에 도착하면서 학교 사업은 활기를 띠었고 1905년 8월 프레스톤 선교사가 교장에 취임하였다.
【1906년】
- 1906년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08년】
- 1908년 10월에 중등과를 신설했으며 미국인 독지가 왓킨스(John Watkins)의 회사로 학교시설을 확장하는 한편 이것을 기념하여 교명을 존 왓킨스학교로 불렀다.
【1909년】
- 1909년에 중학교를 병설하였다.
- 또한 1909년 10월에 미국 남 캐롤라이나주 스페턴버그 제일장로교회의 지원으로 기념 석조건물을 지어 낙성하였다.
【1910년】
- 1910년 해리슨(W. B. Harrison) 선교사가 교장에 부임하였다.
【1911년】
- 1911년 3월에는 제1회 중학교 졸업생 방춘원(方春元)ㆍ박덕진(朴德珍)ㆍ윤봉언(尹奉彦)ㆍ이경석(李敬錫)을 배출하였다.
- 1911년 8월에는 매칼리(H. D. McCallie) 선교사가 새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1914년】
- 1914년 6월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던 니스벳(J. S. Nisbet) 선교사가 교장에 취임, 학교의 기틀을 잡았다. 그해 사립 목포영흥학교로 교명을 확정하고 보통과와 중등과의 편제도 정비하였다.
【1919년】
- 1919년 3ㆍ1운동 당시에는 졸업생 양일석(梁一錫)의 지도로 만세운동을 준비하여 태극기를 대량 제작하고 3월 21일 오전 대규모 만세운동을 벌였다. 김옥남(金玉南)의 비상종 타종 신호와 양일석의 지휘로 시가행진에 돌입, 정명여학교 학생, 양동교회 교인들과 합세함으로 대규모 시위대가 이루어지고 이에 많은 시민들도 합세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무력 해산시켰고 영흥학교의 양일석ㆍ김옥남ㆍ김상원ㆍ안병선ㆍ윤두황 등 선두지휘자를 비롯 양동교회 교인, 정명여학교 학생 등 200여명이 체포되고 그중 100여명은 목포형무소에 수감, 옥고를 치렀다.
【1920년】
- 1920년 1월 커밍(D. J. Comming; 김아각) 선교사가 교장에 취임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919년에 취임하였다고 본다]
- 학생수가 300여 명에 이르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921년으로 본다]
【1922년】
- 1922년 2월 일제의 신교육령에 의해 보통과 6년, 고등과 5년으로 수업연한을 개정하였고 곧 학생수가 500여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석조 2층 174평의 새 교사를 건축하고 운동장 확장, 강당 신축 등의 시설학장을 기하였다.
【1937년】
- 그러나 발전일로에 있던 영흥학교는 1937년부터 강화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휘말려 곤경에 직면하였다.
【1939년】
- 마침내 1939년 다른 대부분의 장로교계 학교와 마찬가지로 폐교되는 비운(9월 20일)을 겪고 당시 재학생은 모두 목포시내 공립학교로 전학 조치하였다. 그리고 학교 건물과 부지는 일제가 접수하여 목포 문태(文泰)중학교를 설립, 해방 이후까지 운영하였다.
【1952년】
- 해방 이후 교계지도자와 동문들 사이에 영흥학교의 재건 움직임이 전개되었고 마침내 6ㆍ25사변 중인 1952년 5월 8일 목포노회는 학교재건을 결정, 설립대표자에 이남규(李南圭) 목사를 선임하였다. 그러나 이때 한국장로교는 예장ㆍ기장 분열의 와중에 있었고 영흥학교의 재건도 이 문제와 연관되었다. 학교의 운영권이 기장측에 이양되자 학교재산의 소유권자이던 남장로회 선교부측은 기장측과 자매관계에 놓여 있던 캐나다연합교회 선교부측에 5천달러를 받고 학교시설 일체를 이양하였다.
【1953년】
- 또한 학교 시설을 이용하던 문태중학교는 시내 용당동으로 이거함으로 1953년 6월 5일 노경수(盧京洙) 목사를 재건 초대 교장으로 선임하고 학교를 재개교하였다.
【1954년】
- 8월에는 이성학(李聖學) 장로가 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 중학교와 분리, 영신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
【1962년】
- 이어서 이중호(李仲浩)ㆍ조승제(趙昇濟) 목사가 각각 교장으로 부임했다가 1962년 4월 이남규 목사가 제5대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1963년】
- 1963년에 목포영흥고등학교로 개칭하였다.
【1964년】
- 1964년에 설립자 재단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남노회 유지재단을 학교법인 기독교장로회 전남노회 육영원으로 변경하였다.
【1966년】
- 1966년에 고등학교를 개교, 영흥중ㆍ고등학교가 되었다.
【1969년】
- 1969년에 12학급으로 증설하였다
【1973년】
- 1973년 3월 장하원(張河源) 목사가 제6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1980년】
- 그렇지만 학교를 운영하던 기장 전남노회측은 운영난으로 인하여 학교 경영을 포기하고 1980년 6월 3일 기장 목포중앙교회 홍순기(洪舜基) 장로에게 이양하였다. 홍 장로는 학교를 인수하자 곧 학교법인 유집학원(裕集學園)을 설립하였고 제7대 교장에는 나금주(羅金柱) 교장이 부임, 현재까지 봉직하고 있다. 이후 학교를 목포 시내 양동에서 외곽지역인 상동으로 이전하고 학교의 제반 시설과 기강을 강화하였으며 전통적인 기독교적 교육풍토를 계승,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현재 교사 50여 명이 재직하고, 고등학교 15학급 877명, 중학교 13학급 876명이 재학하고 있다.
【1999년】
- 1999년 3월부터 남녀공학을 실시하였다.
【2003년】
- 2003년 10월 18일 개교 100주년이 되었다.
【2008년】
- 2008년 2월 12일 : 홍의식 이사장 취임
【2024년】
- 2024년 3월 1일 : 이용만 교장 취임
【2025년】
- 2025년 2월 13일 : 영흥고등학교 제67회 졸업(총 졸업 학생수 15,784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