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8일 월요일

[고대 이집트] 이집트 제21왕조 : 분열과 재정비의 ‘타니테’ 시대(기원전 1077~943년경)

[고대 이집트] 이집트 제21왕조 : 분열과 재정비의 타니테시대(기원전 1077~943년경)

 
고대 이집트 제21왕조(Twenty-first Dynasty of Egypt, 기원전 1077년경-943년경)는 이집트 역사에서 '3중간기(Third Intermediate Period)'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시기이다. 130년간 지속된 이 왕조는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던 신왕국 시대(New Kingdom)와는 다른, 복합적이고 분열된 통치 양상을 보였다. 수도를 타니스(Tanis)에 두었기 때문에 흔히 '타니테 왕조(Tanite Dynasty)'라고도 불린다. 이 시기는 이집트의 정치적 통일성이 약화되고, 실질적인 권력이 파라오와 테베(Thebes)의 아문(Amun) 대사제들 사이에 분할된 독특한 이중 통치 체제가 특징이다.
 

1. 신왕국의 종언과 제3중간기의 서막

 
20왕조의 파라오 람세스 3(Ramesses III) 이후, 이집트의 왕권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지속적인 전쟁, 경제적 위기, 그리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 상실은 왕조의 쇠퇴를 가속화했다. 특히 람세스 시대가 끝날 무렵에는 파라오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수도 테베를 중심으로 한 아문 대사제들의 종교적, 경제적, 군사적 권력이 급성장하는 추세였다. 람세스 11(Ramesses XI)의 통치기에는 이미 테베의 아문 대사제 헤리호르(Herihor, BC. ?~1074)가 상이집트(Upper Egypt)에서 사실상의 통치자 역할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람세스 11세의 죽음과 함께 제20왕조는 막을 내렸고, 이집트는 다시 통일되지 못한 채 분열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 시기, 이집트의 심장부였던 나일 삼각주 동북부에 위치한 타니스라는 새로운 도시가 정치적 중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2. 21왕조의 건국과 이중 통치 체제

 
21왕조의 창건자는 스멘데스 1(Smendes I, 재위 기원전 1077-1051년경)이다. 그는 람세스 11세의 신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하이집트(Lower Egypt)에서 군사적 기반을 다져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스멘데스는 타니스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이곳에서 하이집트 전역을 통치했다.
 
그러나 이집트 전역에 대한 통치권은 스멘데스에게 완전히 주어지지 않았다. 상이집트, 특히 종교의 중심지였던 테베는 아문 대사제들이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대사제들은 종교적 수장으로서의 권위를 넘어 광대한 토지와 재산을 소유하고, 자신들만의 군대와 행정 체계를 구축하며 세속적인 권력까지 장악했다. 이들은 파라오를 '명목상' 인정했지만, 자신들이 직접 세금 징수와 사법권을 행사하는 등 거의 독립적인 통치를 이어갔다. 스멘데스 역시 테베의 대사제들과 어느 정도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이집트를 분할 통치하는 이중적인 체제가 확립된 것이다. 이러한 분열된 권력 구조는 제3중간기 전체의 특징으로 나타난다.
 

3. 주요 파라오들의 통치와 역할

 
21왕조는 타니스에서 총 7명의 파라오가 통치했다. 그들은 대체로 하이집트 통치에 집중했으며, 상이집트는 아문 대사제들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 스멘데스 1(Smendes I, 재위 기원전 1077-1051년경) : 21왕조의 창건자이다. 그는 람세스 시대의 잔재를 정리하고, 타니스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며 혼란한 이집트에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그의 권력은 주로 하이집트에 국한되었다.
  • 아멘엠니수(Amenemnisu, 재위 기원전 1051-1047년경) : 짧게 통치한 파라오로, 그의 재위 기간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많지 않다.
  • 프수센네스 1(Psusennes I, 재위 기원전 1047-1001년경) : 21왕조의 가장 중요하고 강력했던 파라오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40년 이상 통치하며 타니스의 중요성을 확립했다. 그의 장례실은 타니스에서 온전하게 발굴된 유일한 왕실 묘로, 이집트 고고학에서 중요한 발견으로 꼽힌다. 이집트의 전통적인 장례 풍습을 따랐으며, 상당한 양의 황금과 귀중품이 함께 묻혀 있었다.
  • 아멘엠오페(Amenemope, 재위 기원전 1001-992년경) : 마네토(Manetho)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9년간 통치했다. 그 역시 타니스에 묻혔다.
  • 오소르콘 1세(Osorkon the Elder, 재위 기원전 992-986년경) : 그는 리비아계의 파라오였으며, 6년간 통치했다. 그의 통치는 이집트 역사에 리비아계의 영향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 시아문(Siamun, 재위 기원전 986-967년경) : 그는 비교적 활발한 통치를 펼친 파라오이다. 특히 성경에 솔로몬과 연관된 파라오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는 카르낙(Karnak)에 건설 사업을 진행하고, 대외 관계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 프수센네스 2(Psusennes II, 재위 기원전 967-943년경) : 21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이다. 그의 통치는 리비아계 왕조인 제22왕조로 부드럽게 이행되는 시기였다. 그는 상이집트의 아문 대사제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파라오 프수센네스 1세의 금으로 된 장례용 가면
파라오 프수센네스 1세의 금으로 된 장례용 가면
 

4. 테베 아문 대사제들의 권력

 
21왕조 동안 테베를 다스리던 아문 대사제들은 종교 지도자이자 상이집트의 실질적인 군주였다. 이들은 엄청난 재산과 영향력을 가지고 파라오와는 별개의 행정 및 재정 시스템을 운영했다. 심지어 자신들의 이름을 카르투시(cartouche) 안에 쓰는 등 파라오와 유사한 대우를 받았다. 이는 신왕국 시대의 강력했던 왕권과 비교할 때 이집트의 정치적 분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대사제들은 파라오의 권위가 약화된 틈을 타 신전의 재산을 늘리고,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며 자신들의 권위를 확고히 했다. 그들은 파라오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 비문이나 기념물을 세웠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자신들의 손아귀에 있었다.
 

5. 타니스 : 21왕조의 새로운 중심지

 
타니스(현 산 엘-하가르)는 나일 삼각주 동쪽에 위치한 중요한 도시였다. 21왕조의 파라오들은 이곳을 수도로 삼고 웅장한 신전과 왕실 묘역을 건설했다. 타니스는 제21왕조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다. 이곳에서 발견된 파라오들의 무덤은 도굴되지 않고 보존되어 당시 왕조의 예술성과 장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특히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은 '이집트의 투탕카멘'으로 불릴 만큼 중요한 발견이었다. 이 왕조의 파라오들은 과거 람세스 시대의 건축물에서 가져온 석재들을 재활용하여 자신들의 기념물을 만들기도 했다. 이는 자원의 부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거의 영광을 계승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6. 21왕조의 특징과 역사적 의의

 
21왕조는 제3중간기의 서막을 열며 이집트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 분열된 통치 : 상하 이집트가 각각 파라오와 아문 대사제에 의해 분할 통치된 시기이다. 이는 이집트의 중앙집권적 힘이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 해상 무역의 중요성 : 타니스가 수도로 부상하면서 해상 무역의 중요성이 커졌다. 이집트는 여전히 근동 지역과의 무역 관계를 유지하며 경제적 활동을 이어갔다.
  • 군사적 약화 : 신왕국 시대와 같은 대규모 정복 전쟁은 드물었다. 이집트는 대외적으로 팽창하기보다 내정의 안정에 집중했으며, 점차 주변 강대국들의 영향력 아래 놓이기 시작했다.
  • 리비아인의 영향 : 오소르콘 장로의 등장에서 보듯이 리비아계 이민자들의 이집트 사회 내에서의 영향력이 증대되기 시작했고, 이는 다음 왕조인 제22왕조의 기반이 된다.
 
21왕조는 신왕국 시대의 영광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이미 이집트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단일하고 강력한 제국이 아니었다. 이 시기는 이집트가 국제 질서에서 서서히 중심의 위치를 잃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앞으로 다가올 이집트의 정치적 혼란과 외세 지배의 시대를 예고하는 중요한 연결 고리이다. 이 시기의 안정 노력과 권력 분할은 이후 이집트 역사의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모우리(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모우리 (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 ( 牟義理 )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   【 1878 년 】 미국 오하이오주 벨빌 (Bellville) 근교에서 사무엘 모우리 (Samuel Mowry, 1850-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