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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14일 일요일

전한 14대 평제 유간(平帝 劉衎, BC. 9년 ~ AD. 6년) : 재위 BC. 1년 ~ AD. 6년)

전한 14대 평제 유간(平帝 劉衎, BC. 9~ AD. 6) : 재위 BC. 1~ AD. 6)

 

기원전 9

  • 유간(劉衎)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며, 초기 이름은 유민(劉閔)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 전한 원제(元帝)의 손자이자 중산효왕(中山孝王) 유흥(劉興)의 아들이다.
  • 어머니는 위희(衛姬)이다.
  • 출생지는 중산국(中山國)이다.
 

기원전 1

  • 전한 애제(哀帝)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기원전 17), 당시 최고 실력자였던 태황태후 왕정군(王政君)과 대사마(大司馬) 왕망(王莽)이 황위를 계승할 유력한 후보들을 검토했다.
  • 그는 유력한 황위 계승 후보 12명 중 가장 어리고 외척 세력이 미약하다는 이유로 왕망에 의해 선택되었다.
  • 기원전 11017, 9세의 어린 나이로 황제에 즉위했으며, 초기 이름 유민(劉閔)을 유간(劉衎)으로 개명했다.
  • 그의 재위 기간은 기원전 1년부터 기원후 6년까지 총 6년이다.
  • 태황태후 왕정군이 섭정(regent)을 맡았고, 왕망이 그녀의 보조자로서 사실상 모든 국정을 장악했다.
  • 연호는 원시(元始), 기원후 1년부터 기원후 5년까지 사용되었다.
 

기원전 1

  • 왕망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애제 시대에 득세했던 정씨(丁氏)와 부씨(傅氏) 일족의 세력을 제거하고, 그들을 지방으로 추방했다.
  • 평제의 어머니인 위희(衛姬)의 가문(위씨 일족)도 권력을 얻는 것을 막기 위해 중앙 정계에서 배제되고, 중산국으로 돌려보내졌다.
 

기원후 2

  • 왕망은 자신의 딸인 왕씨(王氏, 훗날 평제황후)를 황후로 책봉하여 평제와 혼인시키며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했다.
  • 황후 간택 당시 왕망은 딸을 황후 후보에서 제외하려 했으나, 형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 오히려 태황태후 왕정군의 신임을 얻었다는 주장도 있다.
 

기원후 3

  • 평제 황후가 책봉된 것을 기념하여 왕망은 평제의 외가인 위씨(衛氏) 가문에게도 일정 부분 은혜를 베풀어 지방으로 추방되었던 이들을 다시 중산국(中山國)에서 직책을 맡게 했다. 태황태후 왕정군은 이를 허락하며 왕망의 충성심을 신뢰하게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기원후 5

  • 점차 성장한 평제는 자신의 외가(위씨 가문)가 억압받는 것에 대해 왕망에게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 왕망의 아들 왕우(王宇)는 평제의 불만을 달래고 왕망이 태황태후로부터 계속 신임을 얻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왕망의 사위인 여관(呂寬)과 모의하여 주술적인 방법으로 평제의 병을 낫게 하려는 계책을 꾸몄다.
  • 이 사건이 발각되자 왕망은 왕우를 비롯한 관련자들을 처형하고, 여씨와 위씨 가문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비판적인 세력들을 대규모로 숙청하는 데 이용했다. 이로 인해 평제는 심신이 쇠약해졌다는 주장도 있다.
 

기원후 6

  • 기원후 623(양력) 또는 117(음력), 14세의 어린 나이에 미앙궁(未央宮)에서 사망했다. 사망 원인에 대한 의혹이 짙다. 많은 역사가들은 평제가 왕망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보고 있으며, 왕망이 올린 술을 마신 후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 왕망은 평제가 병으로 죽었다고 공표했다.
  • 그는 아들 없이 사망했으며, 왕망은 고조의 후손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유영(劉嬰, 유자영 孺子嬰)을 황태자로 옹립했다. 이는 왕망이 황제에 오르기 위한 중간 단계였다.
  • 능은 위릉(渭陵) 서쪽의 강릉(康陵)이다.
 

요약 정보

  • 이름 : 유간(劉衎). 초기 이름은 유민(劉閔).
  • 묘호 : 없음
  • 시호 : 효평황제(孝平皇帝) : 평제(平帝)는 줄임말
  • 출생 : 기원전 9년 / 출생지 : 중산왕국(中山國)
  • 사망 : 기원후 623(양력) (향년 14) / 사망지 : 장안(長安) 미앙궁(未央宮)
  • 부친 : 중산효왕(中山孝王) 유흥(劉興)
  • 모친 : 위희(衛姬)
  • 여동생들 :
    수의군 유알신 (修義君 劉謁臣)
    승례군 유피 (承禮君 劉皮)
    존덕군 유격자 (尊德君 劉鬲子)
  • 배우자 : 평제황후 왕씨(平帝皇后 王氏, 왕망의 딸)
  • 양자 : 유영 (孺子嬰)
  • 재위 : 기원전 11017~ 기원후 623(6년간)
  • 전임 : 전한 애제(哀帝) 유흔(劉欣)
  • 후임 : 전한 유영(劉嬰, 유자영) : 황태자
  • 전한 평제는 어린 나이에 황제로 옹립되어 태황태후와 대사마 왕망의 섭정 아래 있었다. 왕망은 평제의 재위 기간 동안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반대파를 제거하며 기반을 다졌고, 결국 어린 황제 평제를 독살한 후 전한을 찬탈하고 신() 왕조를 세우게 된다.

전한 9대 폐제 유하(廢帝 劉賀, BC. 92~59년) : 재위 BC. 74년

전한 9대 폐제 유하(廢帝 劉賀, BC. 92~59) : 재위 BC. 74

 

기원전 92

  • 유하(劉賀)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 그는 전한 무제(武帝)의 서손(庶孫)이자 창읍애왕(昌邑哀王) 유박(劉髆)의 아들이다.
 

기원전 88

  • 아버지 창읍애왕 유박이 사망했다.
 

기원전 86

  •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창읍왕에 봉해졌다. 기록상 당시 유하는 매우 어린아이(toddler)였다고 추정된다.
  • 어린 시절부터 부적절한 행동과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수도 장안의 태수(太守) 왕길(王吉)과 경위(警衛) 사령관 공수(龔遂)가 그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비판했지만, 유하는 개선하려 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은 그가 폐위된 후에 작성된 것이므로 편향되었거나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기원전 74

  • 전한 소제(昭帝)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대장군 곽광(霍光)이 황제 후보로 유하를 지목했다.
  • 그는 기원전 74718(양력)에 황제에 즉위했다.
  • 814(양력) 황제로 즉위한 지 불과 27일 만에 폐위되었다. 곽광과 대신들은 유하가 천자의 예의범절을 따르지 않고, 도를 행하지 않으며, 황음무도한 행실을 보인다는 이유로 태후에게 주청하여 폐위시켰다.
  • 한서(漢書)에는 그가 27일 재위 기간 동안 무려 1127건의 황당한 일(荒唐事)을 저질러 하루 평균 41, 시간당 1건 이상의 잘못을 저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 폐위 후에는 황제 목록에서 삭제되었고, 그의 원래 작위인 창읍왕위도 박탈되었다. 그는 폐위 후 원래 봉지로 송환되었지만, 창읍국은 산양군(山陽郡)으로 폐지되었고, 유하에게는 탕목읍(湯沐邑) 2천 호가 지급되었다. 그의 네 누이에게도 각 1천 호가 지급되었다.
 

기원전 64

  • 조정은 산양군 태수(太守) 장창(張敞)을 통해 유하의 일상생활과 교류하는 인물들에 대한 철저한 감시를 지시했다.
 

기원전 63

  • 전한 선제(宣帝)는 그를 해혼후(海昏侯)로 책봉하고(강등됨), 예장군(豫章郡) 해혼현(海昏縣, 현재 강서성江西省)으로 보내 봉토 4천 호를 주었다.
  • 이후 특정 사건으로 인해 봉토가 3천 호 삭감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 선제는 유하가 옛 봉지에서 멀리 떨어지도록 하려는 의도였다고 여겨진다.
 

기원전 59

  • 기원전 5998일 사망했다.
  • 그는 16명의 아내와 22명의 자녀를 두었다.
  • 그의 사후, 아들 유충국(劉充國)과 유봉친(劉奉親)이 잇따라 사망하면서 해혼후국은 잠시 폐지되었다. 훗날 한원제(漢元帝) 초원(初元) 3(기원전 46)에 그의 아들 유대종(劉代宗)이 해혼후 작위를 다시 물려받았다.
 

해혼후 묘(海昏侯墓) 발굴

  • 2011년부터 해혼후의 묘가 발굴되기 시작하여, 2만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 유물 중에는 300개 이상의 금 유물, 200만 개의 동전, 가장 오래된 공자(孔子)의 초상화가 그려진 거울 등이 포함되어 있다.
  • 5,200여 개의 죽간(竹簡)이 발견되어 해혼후국이 폐지된 시점 및 유하의 정확한 사망일(기원전 5998) 등 역사 기록에는 없는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 201632, 고고학자들은 옥인장, 묵서금병, 상주문 복사본 서명 등을 통해 무덤 주인이 유하임을 확인했다.
  • 그의 무덤은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추진되고 있다.
  • 유해는 치아만 남아있었고, 복부에서 멜론 씨앗이 발견되었다. 신장은 173~183cm로 추정되었다.
 

요약 정보

  • 이름 : 유하(劉賀)
  • 칭호 : 전한 폐제(廢帝), 창읍왕(昌邑王), 해혼후(海昏侯)
  • 출생 : 기원전 92년 / 출생지 : (창읍국 일대로 추정되나 명시된 기록 없음)
  • 사망 : 기원전 5998(향년 32~33) / 사망지 : 예장군 해혼현(豫章郡 海昏縣, 현재 강서성江西省 난창시 신젠구)
  • 황제 재위 : 기원전 74(27일간, 718~ 814)
    창읍왕 재위 : 기원전 86~ 기원전 74
    해혼후 재위 : 기원전 63~ 기원전 59
  • 전임 : 전한 소제(昭帝) 유불릉(劉弗陵)
  • 후임 : 전한 선제(宣帝) 유병이(劉病已)
  • 부친 : 창읍애왕(昌邑哀王) 유박(劉髆)
  • 모친 : (명시된 기록 없음)
  • 양부 : 한 소제 유불릉(漢昭帝 劉弗陵)
  • 배우자 :
    총 약 16명의 아내 및 후궁이 있었다.
    [정실] “해혼후부인(海昏侯夫人)”이라 불렸으며, 이름은 ()”로 사망 후 유하(劉賀)의 무덤 옆 묘에 함께 안장되었다.
  • 자녀
    총 약 22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대표적으로 유충국(劉充國), 유봉친(劉奉親), 유대종(劉代宗) 등이 있다.
    유대종(劉代宗) : 유하(劉賀)의 작위인 해혼후(海昏侯)를 계승하였다.
    신작 3(기원전 59), 유하가 사망하며 해혼국은 폐지되었다가 한 원제 초원 3(기원전 46), 유대종이 다시 해혼후로 봉해졌다. 유대종은 아들 유보세(劉保世)에게 작위를 물려주었고, 손자 유회원(劉會邑)으로 이어졌다. 후에 광무중흥(光武中興, 후한 초기) 시기에 다시 봉해졌다.
  • 유하는 전한의 단명한 황제이자 방탕한 인물로 기록되었으며, 그의 일생은 드라마틱한 파란을 겪었다. 그러나 최근 발굴된 해혼후 묘를 통해 당시 서한 시대를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와 함께 그의 생애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계속 밝혀지고 있다 .

2025년 8월 16일 토요일

필리피쿠스(Philippicus, AD.?~713) : 동로마 제국 제73대 황제(AD.711~713)

필리피쿠스(Philippicus, AD.?~713) : 동로마 제국 제73대 황제(AD.711~713)

 
  • Philippicus [Latin : Filepicus / Greek : Φιλιππικός / romanized : Philippikós]
  • Bardanes [Greek : Βαρδάνης / romanized : Bardánēs / Armenian : Վարդան, Vardan]
  • 출생 : 미상 / 페르가뭄(Pergamum)
  • 사망 : 713
  • 부친 : 니케포루스(Nicephorus)
  • 재위 : 711114~ 71363

필리피쿠스(Philippicus, AD.?~713) : 동로마 제국 제73대 황제(AD.711~713)
필리피쿠스(Philippicus, AD.?~713) : 동로마 제국 제73대 황제(AD.711~713)
 

8세기 동로마의 폭풍 속 짧은 빛 : 필리피쿠스 황제의 비운의 치세 (711-713)

 
8세기 초, 동로마 제국은 ‘20년 무정부 시대(Twenty Years' Anarchy)’라 불리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불안정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695년에 폐위된 후 10년 만에 기적적으로 복위했지만, 광적인 복수와 잔혹한 통치로 제국을 더욱 피폐하게 만든 유스티니아누스 2(Justinian II, 668 또는 669711)의 말년은 제국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러한 난국 속에서 반란을 통해 황제의 자리에 올라 약 19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711713) 동로마 제국을 통치한 인물이 바로 필리피쿠스(Philippicus, 사망 713) 황제이다. 그의 통치는 제국의 안정보다는 종교적 논쟁과 끊임없는 외침 속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1. 야망 있는 군인 바르다네스 : 유배지에서 황제의 꿈을 키우다

 
필리피쿠스의 본명은 바르다네스(Bardanes)’였다. 그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8세기 초의 인물로 트라키아(Thracia) 또는 아르메니아(Armenia) 혈통을 지닌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니케포루스(Nicephorus)였다. 바르다네스는 로마 제국의 군인으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2세 치세 동안 고위 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일찍이 정치적 야망을 드러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첫 번째 폐위당하고 레온티우스(Leontius, 695698)가 황위에 올랐을 때, 바르다네스는 레온티우스를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레온티우스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 3(Tiberius III, 698705)는 바르다네스의 야심을 경계했다. 티베리우스 3세는 그를 흑해 연안의 로마 도시 케르손(Cherson)으로 유배 보냈는데, 이곳은 로마 제국 황족이나 고위 인사들의 주요 유배지였다.
 
705,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기적적으로 황위에 복위하자, 바르다네스의 운명은 또다시 뒤바뀌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과거 자신에게 반역했던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으며, 바르다네스 역시 유스티니아누스 2세에게 밉보인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다시 케르손으로 재차 유배되어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된다. 이러한 유배 생활은 바르다네스에게 황실에 대한 깊은 불만과 함께 권력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2. 케르손의 반란 : 비운의 유스티니아누스 2세에 대한 최후의 일격 (711)

 
711,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잔혹한 통치는 극에 달했고, 제국 전역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다. 특히 그의 가혹한 세금 정책과 끊임없는 숙청은 백성들과 군부 모두에게 공포와 증오를 심어주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케르손이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유배자들의 온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반란의 기미를 보이던 케르손에 대규모 원정대를 파견하여 도시를 파괴하고 시민들을 학살했다.
 
그러나 이러한 폭압적인 진압은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케르손에 유배 중이던 바르다네스는 지역 유배자들, 이들을 경계하던 지역 귀족들, 그리고 당시 북쪽 초원의 강력한 유목 민족이던 하자르족(Khazars)의 지지를 얻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하자르 카간(Khagan)은 바르다네스에게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바르다네스가 이끄는 반란군은 흑해를 거쳐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당시 수도의 방어는 취약했으며, 시민들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에게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 바르다네스의 함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을 때, 시민들과 수도 수비대의 상당수는 큰 저항 없이 반란군에게 합류했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도시 밖에 나가 원정을 준비 중이었는데,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수도로 돌아오려다 도중에서 바르다네스의 병사들에게 체포당했다.
 
711127,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코메타(Kometa)에서 비참하게 처형당했다. 이로써 7세기 동로마 제국을 풍미했던 헤라클리우스 왕조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였던 티베리우스(Tiberius)도 처형당하면서, 바르다네스는 로마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등극했다. 그는 이때 황제명으로 필리피쿠스(Philippicus)’를 사용했다 .
 

3. 황제 필리피쿠스의 통치 : 종교적 논쟁과 외침 (711-713)

 
황제로 즉위한 필리피쿠스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제국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종교적 문제와 외침으로 얼룩지며 짧고 불안정한 시기가 되었다.
 

1) 종교 정책 : 단일 의지론의 부활과 교회와의 갈등

 
필리피쿠스의 가장 큰 실책은 종교 정책에서 드러났다. 그는 단일 의지론(Monothelitism)’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단일 의지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divine)과 인성(human)이 있지만, 의지(will)는 하나라는 주장이었다. 이는 680년부터 681년까지 열렸던 제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Sixth Ecumenical Council)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두 의지론(Dyothelitism)’이 정통 교리로 확립된 상태였다.
 
그러나 필리피쿠스는 제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결정을 취소하고,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던 공의회 상징물과 황궁의 공의회 그림을 제거하는 등 단일 의지론을 다시 제국의 공식 교리로 강요했다. 이로 인해 그는 정통 칼케돈 교도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특히 서방의 로마 교황 콘스탄티누스(Pope Constantine)는 그의 이러한 종교 정책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황제의 이름을 교황청 공식 문서에서 삭제하며 동서 교회 간의 심각한 분열(아카키우스 분열의 재현)을 야기했다. 그는 또한 정통파 총대주교 키루스(Cyrus)를 파면하고, 자신이 단일 의지론을 주장하며 즉위하는 것을 반대했던 요한네스(Johnnes) 수도원장을 죽였다. 이러한 조치는 제국 내 종교적 통일성을 해치고 황제에 대한 불만을 가중시켰다.
 

2) 대외 정책 : 불가르족과 아랍의 위협


필리피쿠스 치세 동안 제국은 외부의 끊임없는 위협에 직면했다.
  • 불가르족의 침략 :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동맹이었던 불가르족의 칸 테르벨(Tervel)은 필리피쿠스가 황위를 찬탈하자,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복수를 명분으로 로마 제국을 공격했다. 불가르족은 트라키아(Thrace)를 약탈하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 앞까지 진격하여 주변 지역을 유린했다. 이들은 황제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갔다.
  •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침략 : 동방의 숙적 우마이야 칼리파국은 로마 제국의 내부 혼란을 틈타 동부 국경을 침략했다. 712년에 이슬람군은 킬리키아(Cilicia)의 주요 요새 도시 티아나(Tyana)를 함락시키고 약탈했으며, 713년에는 말라티아(Malatya)와 아모리움(Amorium)까지 공격했다. 제국은 이러한 외침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이는 필리피쿠스의 군사적 무능함과 국방력 약화를 보여주었다.
 

4. 폭정의 대가 : 필리피쿠스의 몰락과 비극적인 최후 (713)

 
필리피쿠스의 독단적인 종교 정책과 계속되는 군사적 실패, 그리고 재정 악화는 제국 내부의 불만을 극대화시켰다. 황제에 대한 지지는 빠르게 약화되었고, 특히 강력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칼케돈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반 황제 세력이 형성되었다.
 
71363, 군부와 귀족 세력의 연합으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의 배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게르마누스 1(Germanus I)와 유능한 장군 아르테미우스(Artemius)가 있었다. 바르다네스를 황제로 추대했던 옵시키온 테마(thema of Opsikion) 소속 군대가 그에게 등을 돌렸다. 필리피쿠스는 취침 중에 반란군에게 급습당했고, 그 자리에서 그의 눈이 뽑히는 실명형(blinding)’을 당했다. 실명은 로마 황제에게 가해지던 일반적인 폐위 처벌이었고, 이는 황위 계승 자격을 박탈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
 
눈이 뽑힌 필리피쿠스는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이미 끝나 있었다. 그의 실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직 고위 관리였던 아르테미우스가 아나스타시우스 2(Anastasius II, 713715)’라는 황제명으로 새롭게 즉위했다. 필리피쿠스는 실명당한 지 몇 달 뒤인 713, 비참하게 사망했다. 이로써 짧고 혼란스러웠던 필리피쿠스의 치세는 막을 내렸다.
 

5. 필리피쿠스의 유산과 8세기 로마의 단면

 
필리피쿠스의 치세는 로마 제국사에서 비교적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지만, 8세기 초 제국의 불안정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 정치적 혼란의 상징 : 그의 등극과 몰락은 군사 쿠데타에 의한 황위 찬탈이 일상화되었던 ‘20년 무정부 시대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 단일 의지론의 마지막 시도 : 그는 단일 의지론을 다시 부활시키려 했던 마지막 황제였다. 그의 실패는 이단 교리에 대한 황제의 강요가 제국 내에서 더 이상 통용되기 어렵다는 것을 증명했으며, 이후 비잔티움 교회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 영토 상실과 국력 약화 : 그의 치세 동안 불가르족과 이슬람군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제국은 다시 한번 영토를 상실하고 국력이 약화되었다.
  • 비참한 말로의 반복 : 전임자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폐위하고 코를 잘라 유배 보냈던 레온티우스 황제가 결국 똑같은 운명을 겪었듯이, 필리피쿠스 또한 자신에게 승리의 기회를 주었던 군대에 의해 버려지고 눈이 뽑히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권력의 무상함을 보여주었다.
 
필리피쿠스는 혼란의 시기에 등장하여 제국의 운명을 바꿀 기회를 가졌지만, 결국 자신의 독단적인 신념과 무능함으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황제로 기억될 것이다. 그의 치세는 로마 제국이 겪었던 8세기 대혼란의 전조를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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