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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18일 목요일

카리베르트 1세(Charibert I, AD. 517~567년) : 재위 : 561~567년

카리베르트 1(Charibert I, AD. 517~567) : 재위 : 561~567

 
  • 파리의 왕(King of Paris)
    재위 : 561~ 567
    전임자 : 클로타르 1
    후임자 : 왕국 분할
  • 출생 : 517
  • 사망 : 56712(50)
  • 매장지 : 블라비아 성 (Blavia castellum), 트락타투스 아르모리카니(Tractatus Armoricani)
  • 배우자 :
    잉고베르가 (Ingoberga)
    테우데킬트 (Theudechild, 566년에 결혼)
  • 자녀 :
    쾰른의 블리티드 (Blithide of Cologne)
    켄트의 베르타 (Bertha of Kent)
    헤스바예의 카리베르트(Charibert of Hesbaye) 
    클리토리스(Clithorice)
    클로타르(Chlothar)
  • 왕조 : 메로빙거 왕조
  • 아버지 : 클로타르 1
  • 어머니 : 잉군트 (Ingund)
  • 종교 : 칼케돈 기독교 (훗날 파문됨)
 

기원후 517

  • 카리베르트 1(프랑스어: Caribert; 라틴어: Charibertus; 51756712)는 파리의 메로빙거 왕이자, 클로타르 1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 잉군드(Ingund)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형인 군타르(Gunthar)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기원후 556

  • 556, 클로타르는 반란을 일으킨 의붓어머니 훈나(Chunna)”와 의붓동생 크람(Chramn)”에 맞서 아들 카리베르트와 군트람(막내)을 보냈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크람은 리무쟁의 블랙 마운틴에 숨어 있었다. 협상이 결렬되자 양측 군대는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나 천둥번개로 인해 교전이 불가능했고, 크람은 (블랙 마운틴에 숨어 있다가) 위조된 편지를 형제들(카리베르트와 군트람)에게 보내 그들의 아버지(클로타르)가 사망했다는 거짓 정보를 알렸다. 카리베르트와 군트람은 즉시 부르군디로 돌아가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 했다.
 

기원후 561

  • 그는 561년 아버지의 사망 이후 이루어진 프랑크 왕국 분할에서 참여하여, 옛 킬데베르트 1세의 왕국을 받았고, 파리를 수도로 삼았다.
  • 카리베르트는 파리를 수도로 하는 네우스트리아(솜과 루아르 사이의 지역), 아키텐, 노벰포풀라나를 받았다. 그의 다른 주요 도시로는 루앙, 투르, 푸아티에, 리모주, 보르도, 툴루즈, 카오르, 알비가 있었다. 군트람은 부르군디를 받았다. 시제베르트는 메츠를 수도로 하는 아우스트라시아(랭스 포함)를 받았고, 막내 동생 킬페릭은 수아송을 수도로 하는 작은 왕국을 받았다.
 

결혼 생활

  • 카리베르트는 잉고베르가(Ingoberga)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
    • 쾰른의 블리티드(Blithide) (538603), 아마도 갈로-로마 원로원 의원 안스베르투스와 결혼했을 것이다.
    • 헤스바예의 카리베르트(Charibert of Hesbaye) (d. 636)
    • 클리토리스(Clithorice) (541569)
    • 베르타(Bertha), 켄트의 애설버트와 결혼
    • 클로타르(Chlothar) (542)
  • 카리베르트의 딸 베르타는 이교도였던 켄트의 애설버트(Æthelberht) 왕과 결혼했다. 그녀는 리우드하르트(Liudhard) 주교를 자신의 개인 고해 신부로 동반했다. 켄트 궁정에서 그녀의 영향력은 597년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of Canterbury) 선교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최초의 앵글로색슨 통치자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기원후 567파문과 죽음

 
  • 카리베르트는 언변이 뛰어나고 법률에 능통했지만, 투르의 그레고리는 그를 초기 메로빙거 왕들 중 가장 방탕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보았다.
  • 그는 동시에 네 명의 아내를 두었고, 그 중 두 명은 자매였다. 이로 인해 그는 게르마누스에게 파문당했다. 이는 메로빙거 왕으로는 최초의 파문이었다. 그 결과, 그는 트락투스 아르모리카누스(Tractus Armoricanus)에 있는 요새 블라비아 카스텔룸(Blavia castellum)에서 불명예스럽게 묻혔다.
  • 그가 죽자 그의 형제들은 그의 왕국을 그들 사이에 분할하기로 합의했으며, 처음에는 파리를 공동으로 소유하기로 했다.
  • 그의 살아남은 왕비(네 명 중 한 명)인 테우데킬드(Theudechild)는 군트람과의 결혼을 제안했지만, 557년 파리에서 열린 공의회는 그러한 결합을 근친상간으로 금지했다. 군트람은 마지못해 그녀를 아를의 수녀원에 더 안전하게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 그의 사생아인 헤스바예의 카리베르트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 카리베르트의 생애에 대한 주요 자료는 투르의 그레고리가 쓴 프랑크족의 역사(43,16,22,26장 및 제926)와 영국 관점에서 베다의 앵글로색슨인의 교회사이다.

킬데베르트 1세(Childebert I, AD. 496~558년) : 재위 AD. 511~558년

킬데베르트 1(Childebert I, AD. 496~558) : 재위 AD. 511~558

 
  • 파리의 왕(King of Paris)
    재위 : 511~ 558
    전임자 : 클로비스 1
    후임자 : 클로타르 1
  • 오를레앙의 왕(King of Orléans)
    재위 : 524~ 558
    전임자 : 클로도메르
    후임자 : 클로타르 1
  • 출생 : 496, 랭스
  • 사망 : 5581213(향년 약 61~62)
  • 배우자 : 울트라고타(Ultragotha)
  • 자녀 : 크로도베르주(Chrodoberge), 크로데신데(Chrodesinde)
  • 왕조 : 메로빙거 왕조
  • 부친 : 클로비스 1
  • 모친 : 클로틸드
  • 종교 : 칼케돈 기독교(Chalcedonian Christianity)
 

기원후 496

 
  • 킬데베르트 1(496- 5581213)는 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족 왕으로, 클로비스 1세와 성녀 클로틸드의 아들 중 하나로 랭스에서 태어났다.
 

기원후 511

 
  • 511년 아버지 클로비스 1세의 사망으로 영토가 분할되었을 때, 킬데베르트는 파리 마을과 북쪽으로는 솜 강까지, 서쪽으로는 영국 해협까지, 그리고 아르모리카 반도(현대 브리타니)를 자신의 몫으로 받았다.
  • 그의 형제들은 각기 다른 땅을 다스렸다 : 테우데리크 1세는 메츠에서, 클로도메르는 오를레앙에서, 클로타르 1세는 수아송에서 통치했다.
 

기원후 523

 
  • 523, 킬데베르트는 형제들과 함께 부르군디의 고도마르에 대한 전쟁에 참여했다.
 

기원후 524

 
  • 킬데베르트의 형제 중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클로도메르는 524년 베제롱스 전투에서 사망했다.
  • 이후, 클로도메르의 세 아들이 오를레앙 왕국을 상속받을 것을 우려한 클로타르와 킬데베르트는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공모했다. 그들은 어머니 클로틸드에게 대표자를 보냈다. 이 대표자는 가위와 칼을 제시하며, 세 어린 소년들의 머리카락을 자르거나(긴 머리카락은 왕권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들을 죽이는 선택지를 제시했다. 그녀는 유명하게도 그들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다면, 머리카락이 잘린 것보다 죽는 것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더 낫다고 대답했다. 클로도메르의 두 명의 맏아들이 살해된 후(막내 클로도알트는 수도원 생활로 도피했다), 킬데베르트는 샤르트르와 오를레앙 도시들을 합병했다.
 

기원후 531

 
  • 531, 그는 비시고트족의 왕 아말라릭의 아내인 자매 크로틸다의 호소를 받았다. 크로틸다는 히스파니아의 아리우스파 왕이 가톨릭 신자인 자신을 심하게 학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킬데베르트는 군대를 이끌고 내려가 고트족 왕을 물리쳤다. 아말라릭은 바르셀로나로 퇴각했으나 그곳에서 암살당했다. 크로틸다는 파리로 돌아오는 여정 중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사망했다.
 

기원후 532

 
  • 그는 이후 부르군디 왕국에 대한 여러 원정에 참여했다. 532년에는 오튱을 포위했다.
 

기원후 534

 
  • 534년에는 형제 클로타르 및 테우데리크의 아들 테우데베르트 1세와 함께 왕국을 정복한 후, 전리품으로 마콩, 제네바, 리옹 마을들을 차지했다.
 

기원후 535

 
  • 535년 동고트족의 왕 비티게스가 프로방스를 프랑크족에게 양도했을 때, 아를과 마르세유의 소유권은 형제들에 의해 킬데베르트에게 보장되었다. 이 지방의 합병은 클로타르의 도움으로 536-537년 겨울에 완료되었다.
 

기원후 542

 
  • 킬데베르트는 비시고트족에 대한 다른 원정도 수행했다. 542, 그는 형제 클로타르의 도움으로 팜플로나를 점령하고 사라고사를 포위했지만,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원정에서 그는 성 빈센트의 튜닉이라는 소중한 성유물을 파리로 가져왔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파리 문에 유명한 생트-크루아---뱅상 수도원을 건립했다. 이 수도원은 후에 생-제르맹--프레로 알려지게 되었다.
 

기원후 558

 
  • 그는 5581213일에 사망했으며, 자신이 설립한 수도원에 묻혔고 그곳에서 그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 -제르맹--프레는 675년까지 네우스트리아 왕들의 왕실 묘지가 되었다. 그는 아내 울트라고타와의 사이에서 크로도베르게와 크로데신데라는 두 딸을 남겼다.
  • 킬데베르트는 영토 확장에 열정적인 군주였다. 그는 형제들 중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은 해외 전쟁에서 자신의 영토를 확장했으며, 부르군디(여러 차례), 스페인(여러 차례), 프로방스, 그리고 골의 다른 지역에서 싸웠다. 동시대 네우스트리아인 투르의 그레고리는 킬데베르트가 나는 그토록 즐거운 은총으로 빛난다고 하는 오베르뉴 리마뉴를 눈으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인용한다.
  • 킬데베르트는 또한 클로비스의 아들들 중 더 종교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다양한 전쟁에서 형제들과 협력했고, 가톨릭 신앙 때문에 학대받았다고 주장하는 누이를 구했으며, 성 빈센트의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유명한 수도원을 건설했다. 물론 그의 유해와 네우스트리아 왕들의 왕실 묘지도 이곳에 안치되었다.

클로도메르(Chlodomer, AD. 495~524년) : 재위 AD. 511~524년

클로도메르(Chlodomer, AD. 495~524) : 재위 AD. 511~524

 
  • 오를레앙의 왕(King of Orléans)
  • 재위 : 서기 511~ 524
  • 전임자 : 클로비스 1(Clovis I)
  • 후임자 : 클로타르 1(Chlothar I)
  • 인물 정보
  • 출생 : 495년경
  • 사망 : 524, 베제롱스 전투(Battle of Vézeronce) 중 전사
  • 배우자 : 군테우크(Guntheuc)
  • 자녀 :
    테오데발트(Theodebald)
    군타르(Gunthar)
    클로도알드(Clodoald) : 성인으로 추앙됨
  • 왕조 : 메로빙거 왕조 (Merovingian)
  • 아버지 : 클로비스 1(Clovis I)
  • 어머니 : 클로틸드(Clotilde)
 
클로도메르(Chlodomer)는 클로도미르(Clodomir) 또는 클로도메르(Clodomer)로 표기되며,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 1세의 네 아들 중 두 번째였다.
 

기원후 495

 
클로도메르는 클로비스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어머니는 클로틸드였다. 클로비스와 클로틸드와의 사이에서는 첫째 아들이다.
 

기원후 511

 
  • 511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는 세 형제인 테우데리크 1, 킬데베르트 1, 클로타르 1세와 함께 프랑크족의 왕국을 분할했다.
  • 클로도메르는 오를레앙에서 프랑크족의 왕이 되었다. 이 왕국은 가장 주목할 만하게 투르, 푸아티에, 오를레앙의 주교구들을 포함했다.
  • 클로도메르는 군테우크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 테오데발트, 군타르, 클로도알트.
 

기원후 523

 
  • 523-24, 클로도메르와 그의 형제들은 부르군디를 침공했는데, 아마도 어머니 클로틸드의 선동에 의한 것일 수 있다. 클로틸드는 삼촌 군도바드(부르군디의 시기스문트의 아버지)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그녀의 부모의 죽음에 복수하기를 열망했다. 6세기부터 클로비스와 클로틸드의 결혼은 서사시적 이야기의 주제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원래 사실들이 크게 변형되어 다양한 버전이 여러 프랑크족 연대기 작가들의 작품에 등장했다. 클로틸드의 복수 이야기는 투르의 그레고리에 의해 다루어졌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진위가 의심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도메르는 형제들과 함께 부르군디족에 대한 원정에 참가했다. 시기스문트를 생포한 후, 클로도메르는 오를레앙으로 돌아왔다.
 

기원후 524

 
  • 클로도메르는 5245월에 시기스문트와 그의 아들들인 지살드와 곤데바우드를 암살했다.
클로도미르가 부르고뉴의 지기스문트를 처형하는 것을 감독하다
클로도미르가 부르고뉴의 지기스문트를 처형하는 것을 감독하다
 

기원후 524사망과 왕국의 분할

 
  • 시기스문트의 형제 곤도마르는 동맹인 동고트족 왕 테오도릭 대왕이 보낸 군대를 이끌고 부르군디로 승리의 귀환을 했다. 그곳에서 그는 프랑크족이 남겨둔 수비대를 학살했다.
  • 이에 클로도메르는 부르군디족에 대한 두 번째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같은 해 6, 베제롱스 전투에서 이 원정 중에 사망했다. 테우데리크는 시기스문트의 딸 수아베고타와 결혼했다
  • 클로도메르의 왕국은 클로타르 1세가 투렌과 푸아투를 받고, 킬데베르트 1세가 오를레앙과 함께 루아르 강 양안의 영토를 받는 방식으로 분할되었다.
 

가족의 비극

 
그의 미망인이 클로타르 1세와 결혼했을 때, 클로도메르의 세 아들은 파리로 데려가져 할머니 클로틸드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클로타르는 그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유산을 나눠주고 싶지 않아 열 살 테오데발트와 일곱 살 군타르를 살해했다. 오직 막내인 클로도알트만이 몇몇 충신들의 충성심으로 구출되었다. 생 클루로 더 잘 알려진 그는 프랑크족 왕실의 상징인 머리카락을 포기하는 대신 목숨을 구하고 나중에 노젠트의 수도원장이 되었다.

아서 에딩턴 [Arthur Stanley Eddington, 1882.12.28.~1944.11.22]

아서 에딩턴 [Arthur Stanley Eddington, 1882.12.28.~1944.11.22]   【 1882 년 】 에딩턴은 1882 년 영국 잉글랜드 북서단에 위치하는 컴브리아주의 켄덜 (Kendal) 에서 퀘이커 교도 부모 , 아서 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