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5일 금요일

[고대 이집트] 중왕국 시대 : 제11-13왕조(기원전 약 2055~1650년경)

[고대 이집트] 중왕국 시대 : 11-13왕조(기원전 약 2055~1650년경)

 

1. 다시 하나가 된 영광 : 고대 이집트 중왕국 시대의 찬란한 기록

 
고대 이집트 역사에서 '중왕국(Middle Kingdom)'은 기원전 약 2055년부터 기원전 약 1650년까지의 시기를 일컫는다. 이 시기는 오랜 분열과 혼란으로 점철된 제1중간기(First Intermediate Period)를 마감하고, 이집트가 다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며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번영을 누렸던 때이다. 독일의 이집트학자 남작 폰 분젠(Baron von Bunsen, 18051860)1845년에 이 시기를 이집트의 세 가지 황금 시대 중 하나로 정의했으며, 이후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며 그 정의가 더욱 발전했다. 이 시기는 고대 이집트 문명이 다시 한번 위대한 면모를 보여준 중요한 전환점인 것이다.
 

2. 정치사 : 분열을 넘어 통일된 이집트

 
중왕국 시대의 서막은 제1중간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종식시키면서 열렸다. 고왕국(Old Kingdom) 시대의 강력한 파라오 중심 체제가 무너진 후, 이집트는 수많은 지방 총독들(노마르크)이 각자의 지역에서 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극심한 분열 상태에 놓였다. 북쪽에서는 헤라클레오폴리스 마그나(Heracleopolis Magna)를 기반으로 한 제9왕조와 제10왕조가 세력을 형성하여 중이집트를 지배했다. 한편, 남부 상이집트에서는 테베(Thebes) 지역의 지방 총독들이 점차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이 두 세력은 이집트의 패권을 놓고 오랫동안 대립했으며, 이는 이집트를 내전 상태로 몰고 갔다.
 

중왕국의 시작은 테베를 기반으로 한 제11왕조의 등장과 함께한다. 테베의 지방 총독이었던 인테프(Intef) 가문은 점차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여 북쪽의 헤라클레오폴리스 왕조에 도전했다. 이 오랜 대결의 마침표를 찍은 인물이 바로 멘투호텝 2(Mentuhotep II, 재위 기원전 약 2055-2004)이다. 그는 51년간 통치하면서 재위 39년경에 마침내 헤라클레오폴리스의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고 이집트를 재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한다. 이로써 이집트는 다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멘투호텝 2세는 새로운 시대를 연 '재통일자'로 추앙받는다. 그의 치세는 제11왕조의 최전성기이자 중왕국 시대의 진정한 시작점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그는 수도를 상이집트의 테베에 두었으며, 이는 중왕국 시대 동안 테베가 정치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도시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멘투호텝 2세의 후계자들(멘투호텝 3, 멘투호텝 4)의 통치는 비교적 짧았고, 11왕조는 멘투호텝 4세 통치 말기 권력 불안정을 겪게 된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제12왕조의 창건자인 아메넴핫 1(Amenemhat I, 재위 기원전 약 1991-1962)가 등장한다. 그는 멘투호텝 4세의 재상이었던 인물로, 아마도 궁정 쿠데타를 통해 왕위에 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메넴핫 1세는 왕조의 안정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중요한 정치적 개혁을 단행한다. 그는 수도를 상이집트 테베에서 나일강 삼각주와 파이윰 분지 사이의 이티타위(Itjtawy)로 옮겼다. 이는 하이집트와 상이집트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전략적인 조치였다. 또한 아들인 세누스레트 1(Senusret I, 재위 기원전 약 1971-1926)를 공동 통치자(Co-regent)로 임명하여 안정적인 왕위 계승을 보장하는 시스템을 도입한다. 이 시스템은 후대의 왕들 사이에서도 이어지며 왕조의 정치적 안정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2왕조의 파라오들은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더욱 공고히 했다. 그들은 제1중간기에 비대해졌던 지방 총독들(노마르크)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파라오에게 직접 충성하는 관료들을 중앙에서 파견하여 전국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특히 세누스레트 3(Senusret III, 재위 기원전 약 1878-1839)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파라오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지방 총독 제도를 개편하고, 중앙 관료제를 강화하며 지방 세력의 독립성을 완전히 억압했다. 이로써 파라오의 권위는 다시금 절대적인 위치를 회복하게 되었다. 군사적으로도 제12왕조는 남쪽의 누비아(Nubia) 지역으로 반복적인 원정을 단행하여 이집트의 남부 국경을 확장하고, 금 광산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2. 행정 : 효율적인 중앙집권 체제

 
중왕국 시대는 특히 행정 시스템의 정비와 효율성 증대가 두드러진다. 12왕조 파라오들은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지방 세력의 분열을 막기 위한 여러 행정 개혁을 추진했다.
 
  • 지방 총독(노마르크) 권한 약화 : 1중간기에 독자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노마르크들의 힘을 억제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세누스레트 3세는 특히 이들을 견제하고 중앙 정부에 예속시키기 위한 강력한 정책을 펼쳤다. 그는 노마르크의 세습권을 박탈하고, 그들의 영지를 중앙 정부 직할령으로 편입시키는 등 체계적으로 권력을 약화시켰다.
  • 중앙 관료제의 강화 : 파라오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재상(Vizier)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관료 시스템이 더욱 조직화되었다. 농업, 재정, 사법, 군사 등 각 분야를 전담하는 부서들이 확립되었고, 숙련된 관료들이 파라오의 지시를 전국으로 전달하고 실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 관개 시스템 관리 : 이집트의 생명줄인 나일강 범람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대규모 관개 시스템이 정부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운영되었다. 이는 농업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국가의 부를 증진시키는 핵심 요소였다.
  • 국경 방어 시스템 : 누비아 등 외곽 지역에는 강력한 요새들이 건설되어 중앙 정부의 통제 하에 효율적으로 운영되었다. 이들 요새는 군사적 목적 외에도 무역로를 통제하고 자원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행정 개혁은 파라오의 절대적인 권위를 재확립하고, 이집트 전체를 하나의 유기체처럼 기능하게 만들었다.
 

3. 농업과 기후 : 나일강의 축복과 통치자의 지혜

 
고대 이집트의 농업은 언제나 나일강의 연례 범람에 크게 의존했다. 나일강의 범람은 비옥한 퇴적물을 운반하여 농경지를 풍요롭게 만들었고, 이는 식량 생산의 핵심이었다. 1중간기 당시에는 낮은 범람 수위로 인해 기근이 발생하고 고왕국 붕괴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중왕국 초기에 나일강의 수위는 상대적으로 높았고, 이 시기에 멘투호텝 3(Amenemhat III, 재위 기원전 약 1860-1815)와 같은 파라오의 지혜로운 통치가 어우러지면서 농업은 크게 번성했다. 특히 아메넴핫 3세는 파이윰(Faiyum) 분지 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감행했다. 그는 메리다 호수(Lake Moeris) 프로젝트와 같은 대규모 관개 사업을 통해 나일강의 범람을 조절하고 광대한 농경지를 확보하여 이집트의 식량 생산량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당시 문학 작품에도 이러한 풍요로움이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아메넴핫의 가르침(Instructions of Amenemhat)에는 아메넴핫 3세의 치세에 농업이 번성했다고 언급된다. 파라오들은 나일강의 변덕스러운 범람을 관리하고 백성들에게 충분한 식량을 보장함으로써 통치자의 정당성을 확립했다. 이는 왕의 신성한 역할 중 하나이자, 백성들의 안녕을 책임지는 중요한 통치 지표였다.
 

4. 예술 : 인간적 심오함과 역동적인 표현

 
중왕국 시대는 이집트 예술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다. 고왕국 시대의 이상적이고 정형화된 표현에서 벗어나, 더욱 현실적이고 심오하며 인간적인 감정을 담아내는 경향을 보였다.
 
  • 왕실 조각상의 변화 : 중왕국의 왕실 조각상들은 이전 시대의 완벽한 이상형을 표현하기보다는, 파라오의 책임감과 통치로 인한 피로, 내면의 심오함 등을 드러내는 현실적인 특징을 보인다. 특히 세누스레트 3세의 조각상에서는 이러한 면모가 두드러진다. 그의 얼굴에는 나이 듦과 함께 통치의 고뇌가 새겨져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 스핑크스의 발전 : 중왕국 시기에 스핑크스는 인간의 얼굴과 사자의 몸을 가진 형태로 발전했으며, 두 개가 쌍으로 나타나거나 사자의 갈기와 귀를 가진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세누스레트 3세의 디오라이트 스핑크스가 대표적인 예이다.
  • 블록 조각상(Block Statue)의 등장 : 이 시기에 등장한 중요한 조각 양식 중 하나는 블록 조각상이다. 남성이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올려 웅크리고 앉은 자세에서 몸을 넓은 망토로 감싸 마치 단순한 블록처럼 보이게 만든 형태이다. 옷의 표면은 상형문자 비문을 새기기에 충분한 공간을 제공했으며, 대부분의 세부 묘사는 인물의 머리에 집중되었다. 이 양식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시대까지 약 2,000년 동안 지속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 인물 비례의 변화 : 후기 제12왕조에 이르러 인체 비례에 변화가 나타났다. 남성 인물은 몸에 비해 머리가 작아지고, 어깨와 허리가 좁아졌으며, 근육질의 팔다리 묘사가 줄어들었다. 여성 인물은 남성보다 이러한 특징이 더욱 극단적으로 적용되어 남녀 간의 비례적 구별을 명확히 했다.
 
중왕국 예술은 기존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양식과 표현 방식을 탐구하여, 이집트 예술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켰다.
 

5. 기술 : 금속 가공과 정밀함의 시대

 
중왕국 시대는 고대 이집트의 기술 발전에도 중요한 진보를 보였다. 특히 금속 가공 분야에서 두드러진 변화가 있었다.
 
  • 비소 청동(Arsenical Bronze)의 사용 : 이 시기에 사용된 주요 금속 합금은 비소 청동(arsenical bronze)이었다. 이는 구리와 비소의 합금으로, 독일 라이프치히 박물관과 벨기에 브뤼셀 박물관에 소장된 이집트와 누비아의 금속 유물에서 확인된다.
  • 주석 청동(Tin Bronze)으로의 전환 : 점차 실용적인 물건에서는 비소 청동이 주석 청동(tin bronze)으로 대체되는 경향을 보였다. 주석 청동은 비소 청동보다 더 단단하고 주조하기 쉬웠다.
  • 제조 기술의 발전 : 엘레판틴(Elephantine) 섬의 고고학 발굴을 통해 중왕국 시대의 중요한 기술적 증거가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의도적인 비소 청동 생산, 도가니 내부에서 구리와 스페이스(speiss, 구리 정련 시 생기는 금속 부산물)를 결합하는 시멘테이션 합금 공정, 그리고 스페이스 조각이 확인되었다. 이는 당시 이집트인들이 금속 합금 기술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술적 발전은 무기, 도구, 장신구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집트 사회의 생산력 향상에 기여했다.
 

6. 문학 : 고전 이집트어의 황금기

 
중왕국 시대는 고대 이집트 문학의 진정한 황금기로 평가받는다. 이 시기에 '고전 이집트어(Middle Egyptian)'가 완성되었고, 서기관 교육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뛰어난 문학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었다. 이 작품들은 후대에도 모범이 되었으며, 이집트인의 사고방식과 도덕률,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주요 문학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시누헤 이야기(The Story of Sinuhe) : 가장 유명한 이집트 문학 작품 중 하나이다. 아메넴핫 1세 암살 후 이집트를 떠나 이국에서 모험을 겪고 영웅이 된 시누헤가 결국 고향으로 돌아와 파라오의 은혜를 입는다는 내용이다. 이는 왕조에 대한 충성과 고국에 대한 향수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 수사슴의 교훈(The Eloquent Peasant) : 불의를 당한 농부가 관리에게 정의로운 판결을 호소하는 아홉 편의 연설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당시 이집트 사회의 정의와 법에 대한 이상을 보여주며, 사회 정의에 대한 심오한 사색을 담고 있다.
  • 아메넴핫의 가르침(The Instruction of Amenemhat) : 아메넴핫 1세가 아들 세누스레트 1세에게 남긴 유언 형식의 교훈집이다. 이 작품은 자신의 암살을 언급하며 세상의 배신과 왕의 외로움을 경고하고, 아들에게 현명한 통치자가 될 것을 당부한다. 이는 왕권 강화와 정치적 선전의 목적으로도 활용되었다.
  • 네페르티의 예언(Prophecy of Neferti) : 고왕국 말기의 혼란을 묘사하고, 아메넴핫 1세와 같은 '이상적인 왕'이 나타나 이집트를 재건할 것이라는 예언을 담고 있다. 이는 아메넴핫 1세의 통치에 신성한 정통성을 부여하고, 그의 개혁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문학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중왕국 시대의 지식인들이 복잡한 사상을 정교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문학들은 왕권의 신성함과 중요성, 그리고 이상적인 통치자의 모습을 강조함으로써 왕조의 안정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7. 중왕국의 종말 : 13왕조의 불안정

 
12왕조의 강력한 통치는 아메넴핫 3(Amenemhat III, 재위 기원전 약 1860-1815)까지 이어진다. 그는 선왕들의 업적을 계승하여 왕조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끌었지만, 그의 후계자인 아메넴핫 4(Amenemhat IV, 재위 기원전 약 1815-1807)와 여왕 소베크네페루(Sobekneferu, 재위 기원전 약 1807-1803)의 짧은 통치를 끝으로 왕조는 점진적인 쇠퇴기에 접어든다. 남성 후계자의 부재와 함께 왕권은 서서히 약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12왕조의 막이 내린 후, 13왕조가 그 뒤를 잇는다. 13왕조(기원전 약 1803-1649)는 여전히 중왕국의 일부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이전의 안정된 시대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 시기에는 왕위 계승이 불안정해지고 파라오들의 통치 기간이 짧아지는 등 중앙집권 체제가 다시금 약화되는 조짐을 보였다. 투린 왕 목록(Turin Canon)에 따르면 이 왕조에는 많은 수의 파라오들이 매우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네페르호테프 1(Neferhotep I, 재위 기원전 약 1760년대)나 소베코테프 4(Sobekhotep IV, 재위 기원전 약 1760년대)처럼 잠시 강력한 통치를 했던 파라오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왕조의 힘은 계속해서 분산되었다.
 
 
13왕조의 통치는 주로 멤피스(Memphis)를 중심으로 한 상이집트에 국한되었으며, 델타 지역에서는 이미 독립적인 세력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결국 이들의 통치는 약 1650년경에 끝나고 이집트는 힉소스(Hyksos)와 같은 외부 세력이 지배하는 '2중간기(Second Intermediate Period)'라는 또 다른 분열과 혼란의 시대로 진입하게 된다.
 
중왕국은 이처럼 분열의 시대를 넘어 강력한 통일을 이루고 번영을 구가했던 이집트 역사상 중요한 시기이다. 멘투호텝 2세의 재통일과 제12왕조의 효율적인 정치 시스템은 후대의 이집트 왕조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고대 이집트 문명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비록 제13왕조에 이르러 점진적인 쇠퇴를 겪었지만, 이 시기 이집트는 여전히 문화적, 기술적으로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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