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이집트 제4왕조 : 기원전 약 2613~2498년
1. 이집트 제4왕조 : 피라미드의 황금 시대를 열다
고대 이집트의 제4왕조는 고왕국 시대의 찬란한 “황금기”로 특징지어지는 시기이다. 기원전 약 2613년부터 2498년경까지 약 115년간 지속된 이 시기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물인 피라미드 건설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다. 평화와 번영이 지속되었으며, 다른 국가들과의 공식적인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있다. 제4왕조는 이전 제3왕조의 안정된 기반 위에서 이집트의 문화적, 경제적, 기술적 역량이 총집결된 시대였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건축과 예술, 그리고 국가 운영 시스템의 발전은 후대 이집트 문명의 모델이 되었다.
2. 제4왕조의 통치자들(Rulers)
제4왕조의 파라오들은 강력한 통치력과 막대한 자원을 바탕으로 이집트의 위상을 드높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거대한 피라미드 건축을 통해 자신들의 권위를 확립하고 신성한 지위를 과시하였다.
1) 스네프루(Sneferu, c.2613–c.2589 BC) : Nebma'at(호루스 이름)
- 스네프루(Sneferu)는 “아름다움을 가져온 자(Bringer of Beauty)”, “모든 정의의 주인(Master of All Justice)”, “상하 이집트의 지배자(Ruler of Lower and Upper Nile)”라는 칭호로 칭송받았으며, 제4왕조의 첫 번째 파라오였다.
- 그는 헤르모폴리스(Hermopolis) 근처, 이집트 중부 지역의 한 가문 출신으로, 왕가의 상속녀와의 결혼을 통해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이 크다.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논쟁 중인데, 일반적으로는 후니(Huni)로 여겨지지만, 왕조가 바뀌면서 기록이 단절되어 확정할 수는 없다. 그의 어머니 메레상크 1세(Meresankh I)는 후니의 아내 혹은 후궁으로 추정된다.
- 스네프루 이전까지의 이집트 왕들은 호루스(Horus)의 지상 화신으로 여겨졌고, 죽은 뒤에만 완전한 신격화가 이루어진다고 믿어졌다. 하지만 스네프루는 자신이 태양신 라(Ra)의 화신임을 처음으로 주장한 왕이었다.
- 스네프루는 조세르(Djoser)의 무덤을 모방하여, 약 150년 뒤에 ‘굽은 피라미드(Bent Pyramid)’를 건설했다. 그가 지은 ‘붉은 피라미드(Red Pyramid)’는 진정한 형태의 최초의 피라미드로 평가되며, 석회암의 붉은색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는 제3왕조의 마지막 왕 후니(Huni)를 위해 지은 것으로 보이는 메이둠(Meidum)의 피라미드 건설에도 관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스네프루가 셀리아(Selia)에 지어진 여러 피라미드의 건설자였을 가능성도 있으나, 그가 직접 지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는 없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만 해도 총 세 개의 피라미드를 건설한 것이 확인된다.
- 스네프루는 다른 나라들로의 원정도 자주 실시했는데, 그 목적은 노예를 통한 대규모 노동력 확보와 건축 자재의 안정적인 수급이었다. 그는 자주 누비아(Nubia)와 리비아(Libya)로 원정을 떠났으며, 이러한 원정을 통해 거대한 노동력을 확보했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식량 자원이 필요했다.
2) 쿠푸(Khufu, c.2589–c.2566 BC) : Medjedu(호루스 이름)
- 쿠푸(Khufu)는 고대 그리스에서는 케옵스(Cheops)로 알려져 있으며, 스네프루(Sneferu)의 후계자였다. 하지만 그가 스네프루의 친아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 쿠푸는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널리 알려진 파라오로, 오늘날에도 영화, 소설, TV 프로그램 등 다양한 매체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의 명성은 기자(Giza) 북동쪽 고원에 지어진 피라미드, 즉 자신이 묻힌 대피라미드에서 비롯된다. 그의 장제 사원(사후 제사 지내는 사원)은 피라미드의 북쪽 끝에 지어졌지만, 도굴꾼들에 의해 심하게 훼손되어 현재는 출입이 불가능하다.
- 현재까지 남아 있는 쿠푸 관련 유물은 입체적인 부조(조각)뿐이며, 이에는 석회암 흉상과 점토 인형 등이 있다.
- 쿠푸의 이집트 내외 활동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며, 건축과 관련된 업적을 제외하면 잘 알려진 바가 없다. 고대 그리스 문헌은 쿠푸에 대해 기록한 몇 안 되는 문헌 중 하나이며, 그리스인들은 그를 잔인하고 사악한 자로 묘사했다. 그는 신들을 모욕하고, 백성들을 노예처럼 부려 피라미드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쿠푸는 스네프루의 사생아(서자)로 여겨졌고, 따라서 왕위에 오를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설령 그가 정당한 친자였다 해도, 아버지인 스네프루처럼 이집트 영토를 확장하지 못했고, 국가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지 못한 왕으로 평가된다.
3) 제데프레(Djedefre, c.2566–c.2558 BC) : Kheper(호루스 이름)
- 제데프레(Djedefre)는 약 8년간 통치한 것으로 역사학자들에 의해 평가되며, 그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혈통 또한 불분명하여, 그는 쿠푸(Khufu)의 아들이었을 가능성도 있고, 혹은 쿠푸의 형제였을 가능성도 있다. 많은 학자들은 제데프레가 하위 왕비의 아들이며, 정통 왕위 계승자이자 이복형제였던 카와브(Kawab)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 제데프레는 기자(Giza)에서 수 킬로미터 북쪽 떨어진 곳에 피라미드를 건설했는데, 이로 인해 학계에서는 그가 가족 간 불화로 인해 쿠푸의 무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선택했다는 추측이 제기되었다. 보다 긍정적인 해석은, 태양신 라(Ra)의 숭배 중심지였던 이우누(Iunu, 훗날 헬리오폴리스) 근처에 묻히고자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그의 피라미드에는 아내 헤테페레스 2세(Hetepheres II)의 조각상이 스핑크스 형태로 세워져 있었으며, 이것이 가장 이른 시기의 스핑크스로 간주되기도 한다. 헤테페레스 2세는 쿠푸의 딸이자, 원래는 카와브의 아내였으며, 이후 제데프레와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제4왕조에서 가장 오래 생존한 왕족으로, 셉세스카프(Shepseskaf)의 통치기까지 생존했다.
4) 카프레(Khafre, c.2558–c.2532 BC) : Userib(호루스 이름)
- 카프레(Khafre)는 쿠푸(Khufu)의 아들로, 짧은 통치를 마친 이복형제 제데프레(Djedefre)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피라미드를 아버지 쿠푸의 피라미드 가까이에 건설했으며, 양식 또한 유사하고 규모도 거의 비슷하다. 그의 피라미드 참도(causeway) 앞에는 카프라레 얼굴을 본뜬 것으로 알려진 ‘대(大)스핑크스(Great Sphinx)’가 위치해 있다. 하지만 이 스핑크스가 제데프레의 스핑크스보다 먼저 세워졌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있다.
- 카프레의 스핑크스는 백성들에게 더 가까이 위치해 있었고, 당시 기록은 편향된 정보가 많았기 때문에 어느 쪽이 먼저 건설되었는지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 카프레 제4왕조에서 가장 많은 조각상을 남긴 파라오로, 약 25년간의 통치 기록에 대한 물증이 가장 많다. 하지만 그는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의 조각상 중 일부는 태양신 라(Ra)가 아닌, 매의 신 호루스(Horus)와의 관계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묘사는 당시 점점 강화되고 있던 라 중심의 신앙 체계와 충돌하는 것이었다.
5) 멘카우레(Menkaure, c.2532–c.2503 BC) : Kakhet(호루스 이름)
- 멘카우레(Menkaure)는 아버지 카프라(Khafre)의 뒤를 이어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었다. 멘카우레는 조각상에서 신들과 노움(nomes, 고대 이집트의 행정 구역)의 의인화된 존재들과 함께 묘사되는 모습이 일관되게 나타난다.
- 그가 건설한 피라미드는 기자(Giza) 피라미드 단지 내 세 번째이자 가장 작은 피라미드로, “멘카우레는 신이다”라는 뜻의 넷제르-에르-멘카우레(Netjer-er-Menkaure)로 알려져 있다.
- 이 피라미드 내부에서는 길이 약 8피트(약 2.4m), 높이 3피트(약 0.9m) 크기의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석관(관)이 발견되었다.
6) 솁세스카프(Shepseskaf, c.2503–c.2498 BC) : Shepsesket(호루스 이름)
- 셉세스카프(Shepseskaf)는 일반적으로 제4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 받아들여지며, 멘카우레(Menkaure)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어머니가 누구인지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하위 왕비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아내가 누구였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으며, 멘카우레와의 관계 또한 불확실하다. 즉, 그가 멘카우레의 아들이었는지, 형제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 셉세스카프는 이전 다섯 명의 왕들이 이어오던 피라미드 건설 전통을 끊고, 피라미드 대신 ‘마스타바(mastaba)’를 건설했다. 이 구조물은 직사각형 모양의 무덤으로, 일반적으로 ‘파라오의 벤치(Mastabat al-Fir’aun)’라고 불린다.
3. 다른 주목할 만한 개인들
제4왕조의 파라오들 외에도 왕실의 주요 여성들과 고위 관료들은 이 시기 이집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의 존재는 당시 왕실의 복잡한 구조와 권력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 헤테페레스 1세(Hetepheres I) : 스네프루의 왕비이자 쿠푸의 어머니이다. 그녀의 무덤은 기자 피라미드 단지 근처에서 발견되었으며, 왕족 여성으로서의 높은 지위와 풍요로운 삶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부장품들이 출토되었다. 그녀의 유해는 비록 온전하지 않았지만, 무덤 자체와 부장품들은 고왕국 초기의 왕실 장례 의례와 생활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 메레상크 3세(Meresankh III) : 카프레의 왕비이자 제데프레의 딸이다. 그녀는 기자의 피라미드 단지 내에 잘 보존된 마스타바 무덤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고위 왕족 여성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무덤의 벽화와 조각들은 그녀의 삶과 가족, 그리고 당시의 일상생활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 바카(Baka) : 바카의 정체는 여전히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여러 고대의 왕 목록들이 전해지고 있지만, 서로 일치하지 않으며, 어느 것도 완전한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투린 왕 목록(Turin King List)에는 카프라(Khafre)와 멘카우레(Menkaure) 사이에 한 명의 왕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공백(lacuna)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왕의 이름과 통치 기간은 완전히 손실되어 알 수 없다. 사카라 석판(Saqqara Tablet) 역시 카프라와 멘카우레 사이의 왕을 언급하고 있지만, 여기서도 이름은 사라져 전해지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이름 없는 왕을 마네토(Manetho)의 목록에 나오는 비케리스(Bikheris)와 동일 인물로 보며, 비케리스는 고대 이집트어 이름인 바카(Baka) 또는 바카레(Bakare)에 해당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 켄트카우스 1세(Khentkaus I) : 켄티카웨스(Khentykawes)로도 알려진 그녀는 제4왕조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녀는 멘카우레(Menkaure)의 딸이며, 그녀의 무덤은 멘카우레 피라미드 참도(causeway) 근처에 지어졌다. 그녀는 직접 파라오로 통치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녀의 무덤은 큰 마스타바(mastaba) 형태이며, 그 위에 또 하나의 마스타바가 비대칭으로 겹쳐져 있다. 두 번째 마스타바가 중앙에 놓이지 못한 이유는, 아래층 내부에 지지 구조가 없는 빈 공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무덤 입구로 이어지는 화강암 문에는, 켄트카우스 1세의 칭호가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
“상하 이집트 두 왕의 어머니”, 또는 “상하 이집트 왕의 어머니이자 상하 이집트의 왕”, 또는 한 학자의 해석에 따르면, “상하 이집트의 왕이며 상하 이집트 두 왕의 어머니”로 읽힐 수 있다.
게다가, 그녀는 이 문 입구에 새겨진 부조에서 왕의 모든 상징들을 갖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여기에는 파라오의 가짜 수염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묘사와 칭호는 일부 이집트 학자들로 하여금 그녀가 제4왕조 말기에 실제로 파라오로 즉위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무덤은 특유의 ‘벽감(niche)’ 양식으로 마감되었으나, 이 벽감들은 나중에 매끈한 석회암 외벽으로 덮어 마무리되었다.
4. 제4왕조의 변화
제4왕조는 단순히 거대한 건축물을 남긴 것뿐만 아니라, 이집트 사회와 종교, 통치 이념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를 겪은 시기이다.
- 평화와 번영의 지속 : 이 시기는 이집트가 내부적으로 안정되고 외부의 위협이 적었던 평화로운 시기였다. 이는 대규모 인력과 자원을 동원하여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 프로젝트에 집중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 경제적으로도 매우 부유했던 시기로, 이웃 국가들과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다양한 자원이 유입되었다.
- 태양신 라 숭배의 부상 : 제데프레 파라오가 자신의 이름에 태양신 라의 이름을 포함시키기 시작하면서, 라 신앙은 점차 이집트 국교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왕권과 태양신 숭배의 결합은 파라오의 신성한 지위를 더욱 강화하고, 왕을 태양신의 아들로 묘사하며 그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는 다음 왕조인 제5왕조에서 라 신앙이 절정에 달하는 배경이 된다.
- 파라오 절대권력의 미묘한 변화 : 비록 피라미드의 거대함이 파라오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지만, 제4왕조 말기에 솁세스카프가 전통적인 피라미드 대신 마스타바 무덤을 선택한 것은 파라오의 지위나 종교적 초점이 미묘하게 변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파라오 개인에 대한 숭배가 태양신과 같은 우주적 존재로 확장되고, 점차 신관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제5왕조의 경향과 연결될 수 있다.
5. 피라미드의 시대
제4왕조는 그야말로 피라미드 건축의 황금 시대였다. 제3왕조 조세르의 계단 피라미드가 선구적인 역할을 했지만, 스네프루에 의해 본격적인 대형 피라미드 건설이 시작되었고, 그의 후계자들은 이를 계승하여 세계에서 가장 인상 깊은 건축물들을 남겼다.
피라미드 건축은 단순히 왕의 무덤을 짓는 것을 넘어, 당시 이집트의 사회적, 경제적, 기술적 역량을 총동원한 국가적 프로젝트였다. 거대한 석재를 채석하고 운반하며 정확하게 쌓아 올리는 과정은 정교한 계획, 엄청난 인력 동원, 그리고 발달된 공학 기술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피라미드들은 왕의 내세를 보장하고 그의 신성한 영원한 통치를 상징하는 강력한 건축물이었다. 기자(Giza) 평원에 위치한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의 피라미드들은 이 시대 건축 기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어떤 다른 이집트 시대도 제4왕조의 업적에 필적할 만한 것을 이루지 못했다. 이 거대한 기념비들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고대 이집트 문명의 위대함을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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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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