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제1중간기 : 제7-11왕조(기원전 약 2181~2055년경)
1. 분열의 시대 : 고대 이집트 제1중간기의 혼란과 새로운 시작
고대 이집트 역사에서 기원전 약 2181년부터 기원전 약 2055년까지 약 125년간 이어진 시기를 '제1중간기(First Intermediate Period)'라 부른다. 이는 강력했던 고왕국(Old Kingdom) 시대의 막을 내리고, 중앙집권적 통치가 붕괴되어 이집트가 여러 지방 권력으로 분열되었던 혼란과 격동의 시기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시기는 지방 문화가 발전하고 새로운 통치자들이 등장하며, 결국 중왕국(Middle Kingdom)이라는 또 다른 황금기를 위한 초석이 다져진 변화의 시기이기도 하다. 이집트 역사의 전환점인 제1중간기를 자세히 살펴보는 글이다.
2. 제1중간기로 이어진 사건들: 쇠퇴의 징조
고대 이집트 고왕국 시대는 기원전 약 2686년부터 2181년까지 약 500년간 이어졌던 번영의 시기였다. 특히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한 건축물들이 건설되며 파라오의 신성한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시기이다. 하지만 제6왕조 말기에 이르러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중앙집권 체제는 점차 약화되고 붕괴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 파라오 권위의 약화 : 특히 오랜 기간 재위했던 페피 2세(Pepi II, 재위 기원전 약 2278-2184년)의 통치 말기, 중앙 정부의 권위는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그의 너무 긴 재위는 후계자 문제와 함께 중앙 행정의 혼란을 초래했다는 분석도 있다.
- 지방 총독(노마르크)의 부상 : 나일강 유역을 따라 존재했던 42개 행정 구역인 '노무(nome)'의 지방 총독들(노마르크)은 점차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무에서 세습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병력을 유지하며, 심지어 독자적인 기념물을 세우는 등 파라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지방 총독들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파라오에게 보내는 세금과 자원의 양은 줄어들었고, 이는 중앙 정부의 재정난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 경제적 압박과 기후 변화 : 대규모 피라미드 건설에 소요된 엄청난 인력과 자원, 그리고 파라오와 고위 관료들을 위한 막대한 제사 유지 비용은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또한 당시 이집트는 사하라 사막의 확산과 같은 기후 변화를 겪고 있었는데, 나일강의 범람 주기가 불안정해지면서 농업 생산량이 감소하고 기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연구도 있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은 사회 불안을 가중시켰다.
- 행정 체계의 경직성 : 오랜 기간 유지된 고왕국의 행정 체계는 변화하는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이는 중앙 정부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복합적인 문제들은 결국 제6왕조의 마지막을 고하고, 이집트를 분열의 시대로 몰고 간 주요 원인이 되었다.
[참고] 고대 이집트 제6왕조 [바로가기]
3. 멤피스 왕조들의 허상: 제7왕조와 제8왕조
고왕국의 수도였던 멤피스(Memphis)에서는 제6왕조 멸망 이후에도 파라오의 명맥을 잇는 시도가 이어졌다. 이 시기에 등장한 것이 바로 제7왕조와 제8왕조이다. 마네토(Manetho)와 같은 역사가들은 제7왕조에 무려 70일 동안 70명의 왕이 통치했다는 전설적인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이 시기의 극심한 혼란과 왕위 계승의 불안정성을 과장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이 왕조들은 대부분 매우 짧은 기간 동안 통치했으며, 이름만 남았을 뿐 실질적인 권력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8왕조 역시 멤피스를 기반으로 명맥을 이어가려 했지만, 그들의 실제 통치 범위는 멤피스와 그 주변 지역에 불과했을 것이다. 지방 총독들의 독립적인 세력이 너무 강해져 파라오의 명령이 더 이상 전국적으로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왕들은 명목상 이집트 전체의 통치자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지방 세력들이 난립하는 상황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다. 제7왕조와 제8왕조는 중앙집권적 파라오의 시대가 끝나고, 진정한 의미의 분열 시대가 도래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허상에 가까운 존재였다.
[참고] 고대 이집트 제7왕조 [바로가기]
[참고] 고대 이집트 제8왕조 [바로가기]
4. 헤라클레오폴리스 왕들의 부상: 북부의 강자
멤피스의 중앙 정부가 약화되자, 각 지방에서 새로운 권력의 중심지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하이집트와 중이집트의 경계 지역에 위치한 헤라클레오폴리스 마그나(Heracleopolis Magna)이다. 이 지역의 강력한 총독이었던 케티(Kheti, 생몰년 미상) 가문은 제9왕조와 제10왕조를 세우며 이집트 북부 지역의 새로운 통치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멤피스의 파라오들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며 이집트의 재통일을 목표로 삼았다.
[참고] 고대 이집트 제9왕조 [바로가기]
[참고] 고대 이집트 제10왕조 [바로가기]
헤라클레오폴리스의 왕들은 주로 중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치하며 농업 생산량을 증대시키고, 관개 시설을 보수하는 등 지역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누비아(Nubia)와 델타 지역 외부 세력으로부터의 위협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특히 메리이브레 케티(Meryibre Kheti, 생몰년 미상)나 와카레 케티(Wahkare Kheti, 생몰년 미상)와 같은 왕들은 이집트 북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이전 파라오들의 장례 신전과 묘지에서 자재를 가져다 자신들의 건축물을 짓는 등 이전 왕조의 자원까지 활용하며 권위를 강화하려 했다.
5. 지방 총독 안크티피: 혼돈 속의 구원자
제1중간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인물 중 하나는 바로 히에라콘폴리스(Hierakonpolis)와 에드푸(Edfu)의 지방 총독이었던 안크티피(Ankhtifi, 생몰년 미상)이다. 그의 무덤에서 발견된 비문은 이 시대의 참혹한 현실과 한 지방 총독의 영웅적인 노력을 직접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안크티피의 비문에 따르면, 그의 지역은 극심한 기근과 무정부 상태에 시달렸다고 한다. 나일강의 범람이 충분치 않아 농업 생산량이 급감했고, 이집트 전역은 약탈과 살인이 난무하는 혼돈 그 자체였다. 이 비문에는 "전 이집트가 마치 메뚜기떼처럼 굶주렸다"라는 구절과 "어떤 사람도 고대 하와이에 살았던 사람들처럼 나쁜 시기를 겪지 않았다"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안크티피는 자신의 통치 지역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헌신했다. 그는 약탈자들을 진압하고 질서를 회복했으며, 심지어 주변 노무에서 곡물을 구해와 자신의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고 기록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그의 백성 중 어느 누구도 굶주리지 않았으며, 그는 인접한 노무들까지도 도와주었다고 자부했다. 안크티피의 비문은 중앙 정부의 부재 속에서 각 지역의 지방 총독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이는 제1중간기가 비록 분열의 시대였지만, 동시에 지방 통치자들의 독립적인 역량과 지역 중심의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였음을 시사한다.
6. 테베 왕들의 부상: 통일의 주역
헤라클레오폴리스가 북부를 장악하고 있을 때, 남부 상이집트에서는 또 다른 강력한 세력이 떠오르고 있었다. 바로 고대 이집트의 종교적 중심지 중 하나이자 오늘날 룩소르(Luxor)로 알려진 테베(Thebes)이다. 테베의 지방 총독들은 점차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여 제11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들은 제1중간기 말기에 이집트 재통일을 이루는 주역이 된다.
[참고] 고대 이집트 제11왕조 [바로가기]
테베의 첫 번째 파라오로 알려진 멘투호텝 1세(Mentuhotep I, 생몰년 미상)의 후손들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북진했다. 특히 인테프 2세(Intef II, 재위 기원전 약 2112-2063년)는 테베의 세력을 남부 상이집트 전역으로 확장하고, 헤라클레오폴리스와 대립하며 중이집트의 아비도스(Abydos)까지 진출했다. 양측의 오랜 군사적 대결은 불가피했다.
결국 멘투호텝 2세(Mentuhotep II, 재위 기원전 약 2055-2004년)에 이르러 테베의 왕조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다. 그는 헤라클레오폴리스를 완전히 제압하고 이집트 전역을 재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한다. 멘투호텝 2세는 새로운 '중왕국' 시대를 열며, 고대 이집트 역사에서 다시 한번 강력한 파라오의 시대를 예고하는 인물이 된다.
7. 이푸베르 파피루스: 혼돈을 묘사한 문학
이푸베르 파피루스(Ipuwer Papyrus)는 제1중간기 또는 그 직후의 혼란스러운 시대를 배경으로 쓰여진 고대 이집트 문학 작품이다. 이 작품은 사회적 혼란, 도덕적 타락, 그리고 세상이 뒤집어진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집트의 위대한 역사가들이 "하인들이 주인처럼 되고, 부자들이 가난해지며, 나일강은 메마르고 질병이 만연한다"는 등 사회의 모든 질서가 무너진 모습을 묘사한다.
이 파피루스는 "세상은 혼돈에 빠졌고, 가난한 자들이 부자가 되고, 부자들은 비참해졌다"는 식의 사회 계층의 역전과 법과 질서의 붕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비록 다소 과장된 표현과 문학적인 요소를 담고 있지만, 이푸베르 파피루스는 제1중간기가 얼마나 큰 사회적 동요와 불안정을 겪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이는 또한 당시 이집트 지식인들이 이러한 사회 변화에 대해 깊은 성찰을 했음을 나타낸다.
8. 제1중간기의 예술과 건축: 지역적 특색의 발현
고왕국 시대의 거대한 피라미드와 정교한 왕실 예술에 비해, 제1중간기의 예술과 건축은 다소 소박하고 투박한 특징을 보인다. 중앙 정부의 통제와 지원이 사라지면서, 왕실 주도의 대규모 프로젝트는 중단되었고, 각 지방의 노마르크들이 자신들의 지역에서 독자적인 예술 양식을 발전시켰다.
- 품질의 저하와 지역적 다양성 : 경제적 어려움과 숙련된 장인 집단의 해체로 인해 예술 작품의 전반적인 품질은 저하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각 지방의 특색이 강하게 드러나는 다양한 예술 양식들이 나타났다. 고왕국 시대의 엄격한 규범에서 벗어나 더욱 생동감 있고 개성적인 표현이 가능해졌다.
- 초상화의 변화 : 파라오의 이상적인 모습만을 그리던 고왕국 시대와 달리, 제1중간기에는 개인의 개성과 고통이 담긴 사실적인 초상화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는 혼란 속에서 개인의 삶과 감정이 더 중요하게 부각되었음을 보여준다.
- 무덤 건축의 변화 : 왕실 피라미드 대신, 지방 총독들의 암굴묘(rock-cut tombs)나 소규모 마스타바(mastaba)가 유행했다. 이 무덤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장인들이 아닌 지역 장인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내부 장식 또한 지역적 색채가 강하다.
- 관과 비문 : 시신을 담는 관(coffin)의 경우, 외부를 장식하는 전통이 계속되었고, 특히 죽은 자가 오시리스(Osiris)의 왕국에서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돕는 주문인 '관 텍스트(Coffin Texts)'가 이 시기에 널리 사용되었다. 이는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개인적인 차원으로 확장되었음을 시사한다.
제1중간기는 이집트 문명의 잠시 멈춤이자 재조정의 시기였다. 중앙 정부의 부재는 혼란을 야기했지만, 동시에 지방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촉진시켰고, 새로운 사상과 예술적 표현이 싹틀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 시기를 통해 이집트는 더욱 강하고 회복력 있는 문명으로 거듭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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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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