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이집트 제8왕조 : 기원전 약 2181~2160년경
1. 고대 이집트 제8왕조 : 무너진 질서, 새로운 시대의 서막
고대 이집트의 영광스러운 고왕국(Old Kingdom)은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하며 번영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기원전 22세기경, 6왕조의 끝자락부터 이집트 사회는 점차 혼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듯한 이집트 제8왕조(Eighth Dynasty of Egypt)는 공식적으로는 고왕국의 마지막 왕조로 분류되지만, 그 실상은 불안정과 지방 세력의 부상으로 점철된 시대를 상징한다. 이 왕조는 약 20년에서 4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지속되었으며, 이후 이집트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제1 중간기(First Intermediate Period)를 여는 서막이 되었다.
2. 제8왕조를 이해하는 열쇠 : 역사적 자료들
제8왕조에 대한 정보는 6왕조나 신왕국 시대의 찬란한 기록들에 비해 매우 단편적이며 불완전하다. 하지만 여러 시대의 자료들이 조각난 퍼즐처럼 제8왕조의 모습을 어렴풋이 보여준다.
1) 신왕국 시대 자료들(New Kingdom sources)
신왕국 시대(New Kingdom)에 이르러 이집트의 역대 왕들을 정리한 중요한 문서들이 작성되었다. 아비도스 왕 목록(Abydos King List)과 토리노 파피루스 왕 목록(Turin King List), 카르나크 왕 목록(Karnak King List)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목록들은 제8왕조의 왕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으며, 비록 통치 기간이 매우 짧다고 언급되더라도 이 왕들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핵심 자료이다. 토리노 파피루스에 따르면, 8왕조의 왕들은 6왕조의 테티(Teti)부터 이브이(Ibi)까지 이어지는 계보에 속했으며, 약 10~18명의 왕이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2)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 자료(Ptolemaic source)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이집트 사제 마네토(Manetho)가 그리스어로 작성한 『아이귑티카(Aegyptiaca)』는 이집트 역사를 왕조별로 정리한 중요한 저술이다. 비록 원본은 소실되었으나, 이후 역사가들의 인용을 통해 전해지며 제8왕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마네토는 제7왕조에 대해 "멤피스 출신의 70명의 왕이 70일 동안 통치했다"고 기록했는데, 이 기록은 극심한 혼란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집트학자 위르겐 폰 베커라트(Jürgen von Beckerath)는 마네토가 제7왕조와 제8왕조를 하나로 보았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실제로 일부 학자들은 제7왕조를 허구로 간주하거나, 제8왕조의 시작을 좀 더 이르게 보기도 한다.
3) 당대 증거(Contemporary evidence)
고고학적 발굴은 제8왕조의 존재를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왕들의 봉인(seals), 비문(inscriptions), 그리고 특히 일부 지방 통치자들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이 시기에 여전히 왕권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멤피스 사카라에 위치한 이비(Ibi) 왕의 피라미드 건축군(pyramid complex)은 제8왕조의 존재를 확증하는 중요한 고고학적 유적이다. 그러나 고왕국의 전성기에 비해 거대한 건축물이나 대규모 비문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는 당시 중앙 왕권의 약화와 경제력 감소를 반영하는 것이다.
3. 고왕국의 종말과 혼돈으로의 몰락
고대 이집트의 고왕국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기반으로 번성했다. 특히 6왕조의 페피 2세 (Pepi II, 재위 기원전 2278~2184년경)는 94년간의 긴 통치 기간 동안 왕권을 강화하고 대규모 건축 사업을 벌였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긴 통치 말년에 왕권의 쇠퇴가 시작되었다. 그의 통치 말기부터 지방 관리들의 권한이 비대해지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중앙 왕권의 약화는 자연재해와 결합되어 더욱 심화되었다. 나일강의 불규칙한 범람이나 가뭄 같은 환경적 요인들은 식량 생산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이는 곧 기근과 사회적 불안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에 지방 총독인 노마르크(Nomarch)들은 자신들의 영지에서 사실상의 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멤피스에 위치한 중앙 왕실의 통제력을 더욱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제8왕조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출현했다. 왕실은 여전히 멤피스에 있었고, 과거 고왕국의 전통적인 통치 시스템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이미 무너진 중앙집권 체제를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왕들의 평균 통치 기간은 매우 짧았고, 연이은 왕위 계승은 극심한 혼란 속에서 이루어졌다. 어떤 왕은 몇 달, 심지어 몇 주 만에 권좌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제7왕조와 제8왕조를 아우르는 '혼돈'의 시대로 기록되었다. 왕실의 권위는 추락하고, 지방 세력들 간의 다툼이 심화되면서 이집트는 통일된 국가로서의 기능을 점차 상실했다. 사회는 분열되고, 경제는 침체되었으며, 문화적인 발전도 한동안 정체되었다. 이는 고왕국 시대의 안정과 번영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다.
4. 폰 베커라트(von Beckerath)의 견해에 따른 제8왕조
- 네체르카레 십타(Netjerkare Siptah) : 제6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분류되기도 함. 니토크리스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 있음.
- 멘카레(Menkare) : 여왕 네이트의 무덤에서 발견된 부조로 알려짐.
- 네페르카레 2세(Neferkare II)
- 네페르카레 네비(Neferkare Neby) : "네페르카레 네비는 생명을 지속한다"라는 이름의 (사카라에 있는) 피라미드 건설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 제드카레 셰마이(Djedkare Shemai)
- 네페르카레 켄두(Neferkare Khendu)
- 메렌호르(Merenhor)
- 네페르카민(Neferkamin)
- 니카레(Nikare) : 원통형 인장으로 존재 가능성 알려짐.
- 네페르카레 테레루(Neferkare Tereru)
- 네페르카호르(Neferkahor) : 원통형 인장으로 확인됨.
- 네페르카레 페피세넵(Neferkare Pepiseneb) : 토리노 파피루스에서 최소 1년 통치로 기록됨.
- 네페르카민 아누(Neferkamin Anu)
- 카카레 이비(Qakare Ibi) : 토리노 파피루스에 따르면 2년 1개월 1일 통치. 사카라 피라미드로 고고학적 증거 있음.
- 네페르카우레(Neferkaure) : 4년 2개월 통치(토리노 파피루스). 민 신전 관련 칙령 있음.
- 크위위헤푸 네페르카우호르(Khwiwihepu Neferkauhor) : 2년 1개월 1일 통치(토리노 파피루스). 민 신전 관련 8개 칙령 및 세마이 재상의 무덤 비문 있음.
- 네페리르카레(Neferirkare) : 1년 반 통치(토리노 파피루스). 호루스 데메지브타위 또는 와드지카레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 있음. 민 신전 관련 칙령 있음.
이 왕들 중 대부분은 단지 이름만 남아 있을 뿐, 구체적인 업적이나 통치 방식에 대한 기록은 매우 드물다. 이는 당시 중앙 왕권이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5. 제8왕조의 종말, 제1 중간기의 시작
제8왕조는 비록 이름뿐인 중앙 왕조였지만, 고대 이집트가 하나의 통일된 국가 체제를 유지하려 노력했던 마지막 시기를 대표한다. 그러나 결국 지방 세력들의 자립과 내분이 심화되면서 멤피스 왕조의 영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특히 나일 델타 지역에 형성된 9왕조의 헤라클레오폴리스(Heracleopolis)와 상이집트의 11왕조 테베(Thebes) 세력 간의 충돌은 이집트를 남북으로 양분하고 길고 혼란스러운 제1 중간기 시대를 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제8왕조의 몰락은 단순한 왕조의 교체가 아니라, 고대 이집트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중앙 왕의 신성하고 절대적인 권위는 사라지고, 각 지방의 독립적인 노마르크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이집트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이후 중왕국(Middle Kingdom) 시기에 이르러 다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가 재건될 때까지 이집트는 분열의 시기를 겪게 된다.
결론적으로, 고대 이집트 제8왕조는 강력했던 고왕국의 마지막 잔재이자, 이집트 역사상 가장 불안정했던 시기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과도기적 존재이다. 그 짧고 혼란스러운 통치는 고대 이집트 사회가 겪었던 격변과 변화를 상징하며, 미래의 왕국들이 어떤 방식으로 권력을 재건할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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