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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23일 화요일

동탁(董卓, AD. ?~192년) : 중국 후한말의 군벌이자 정치가

동탁(董卓, AD. ?~192) : 중국 후한말의 인물


  • 이름 : 동탁(董卓)
  • () : 중영(仲穎)
  • 작위 : 미후(郿侯)
  • 출생지: 민현 감숙성(岷縣, 甘肅)
  • 사망일 : 192522/ 서안(西安)에서 사망
  • 주요 관직 :
  • 태사(太師) : 189192
  • 승상(相國) : 189
  • 전장군(前將軍) : 188189
 

변방에서 군 생활을 시작하다

  • 예주(豫州) 영천군(潁川郡)에서 태어났다.
  • 비범한 괴력을 지녔고, 말 위에서 좌우로 활을 쏠 수 있었다.
  • 젊은 시절 강호(羌胡) 족이 사는 지역을 유람하며 호걸들과 교류했다. 나중에 농사를 지을 때, 호걸들이 찾아오면 생계에 필요한 소를 잡아서 성대하게 대접했고, 서로 예의를 갖춰 왕래했다.
  • 농서태수(隴西太守)는 동탁을 군 병마연(郡兵馬掾)으로 등용하여 변방을 순시하게 했다
  • 양주자사(涼州刺史) 성취(成就)는 다시 동탁을 종사(從事)로 등용하여 기마병을 이끌고 오랑캐를 토벌하게 했다.
 

강족 토벌에 공을 세우다

  • () 환제(桓帝) 말년에 동탁은 한()나라 금군(禁軍) 우림랑(羽林郎)으로 징집되었고, 이후 호흉노중랑장(護匈奴中郎將) 장환(張奐)의 부하 군사마(軍司馬)가 되어 한양(漢陽)의 강족들을 토벌했다. 동탁은 거칠면서도 지략 있는 전투 방식으로 큰 전공을 세웠다. 1만여 명의 강군(羌軍) 병사들을 토벌했으며, 직접 강군 군장과 호걸들을 참수했다. 이 때문에 강족들은 동탁을 매우 두려워했고, 감히 침범하려 하지 않았다. 나중에 동탁은 낭중(郎中)으로 승진했으며, 비단 9천 필을 상으로 받았는데, 그 상금을 모두 부하들에게 나눠 주었다.
  • 이후 광무령(廣武令), 촉군(蜀郡) 북부도위(北部都尉), 서역(西域) 무기교위(戊己校尉)를 역임했지만, 죄를 지어 혁직되었다. 병주자사(并州刺史) 단경(段熲)은 동탁을 공부(公府)에 추천했고, 사도(司徒) 원외(袁隗)는 그를 연()으로 삼았다. 차례로 병주자사, 하동태수(河東太守)로 승진했다.
 

기원후 185

  • 중평(中平) 원년(185), () 영제(靈帝)는 동탁을 중랑장으로 봉하고 그에게 황건군(黃巾軍)을 토벌하게 했지만, 그는 패배하여 면직되었다.
  • 나중에 한수(韓遂)와 변장(邊章)의 강군이 양주(涼州)에서 봉기하자, 동탁은 다시 중랑장(中郎將) 직함을 받아 파로장군(破虜將軍) 장온(張溫)을 따라 강군을 토벌했다. 강군이 유성(流星)을 보고 사기가 꺾여 후퇴하려 할 때, 동탁은 선제공격하여 수천 명을 베어 죽였다.
  • 한번은 동탁이 한군을 이끌고 수만 명의 강호(羌胡) 군대에 포위되어 식량이 끊겼는데, 동탁은 강군에게 물고기를 잡는 척하면서 철수 경로에 있는 강물을 막아 둑을 쌓아 큰 인공 호수를 만들었다. 그 호수에 물이 수십 리에 걸쳐 가득 차자, 동탁은 인공 호수 아래 둑을 허물어 그 틈을 타 몰래 한군을 도주시켰다. 도주 후 동탁은 쌓았던 둑을 무너뜨렸다. 수만 명의 강호(羌胡) 군대가 동탁이 도주한 것을 발견하고 추격했을 때, 무너진 둑으로 인해 생긴 큰물이 이미 깊어서 강호(羌胡) 군대는 강을 건너 동탁의 한군을 추격할 수 없었다. 당시 한군 6개 군이 동한과 강족의 전쟁에 참가했는데, 5개 군은 강군에게 패했지만, 동탁의 한군만 전원 무사히 귀환했다. 동탁은 동한과 강족의 전쟁 전선에서 철수하여 섬서(陝西) 부풍(扶風)에 주둔했고(장온(張溫) 군 중에서 유일하게 전군이 돌아온 부대이다), 태향(斄鄉, 옹주(雍州) 무공(武功)) ()에 봉해지고 천 호의 식읍을 받았다.
 

기원후 188

  • 중평(中平) 5(188), 한수(韓遂)와 변장(邊章)의 강군이 다시 침입하자, 동탁은 전장군(前將軍) 태향후(斄鄉侯)에 봉해지고, 좌장군(左將軍) 황보숭(皇甫嵩)과 함께 한수(韓遂) 등의 강군을 크게 격파했다.
 

기원후 189

  • 중평(中平) 6(189), 그는 소부(少府)로 징용되었지만, 동탁은 수도에 가서 취임하기를 거절했고, 이에 조정은 그를 병주목(并州牧)으로 바꾸어 임명했다.
  • 한편, 태평어람(太平御覽) 496권에 인용된 강표전(江表傳)에 따르면, 동탁이 거록군(鉅鹿郡) 태수(太守) 곽전(郭典)과 함께 곡양(曲陽)으로 퇴각한 황건(黃巾)의 수령 장보(張寶)를 공격할 때, 곽전은 포위 둑을 만들려 했으나 동탁이 동의하지 않았다. 그 후 한군이 황건적을 격파하자, 당시 사람들은 곽 군이 둑을 쌓고 동 장군이 불허했으니, 여우와 이리들이 이리로 변할 뻔했네. 다행히 우리 곽 군은 강한 권세도 두려워하지 않아, 한순간에 적들을 궁지에 몰아넣었으니, 참으로 훌륭한 군주가 강토를 보전했도다.”라는 말로 동탁을 풍자했다고 한다.
  • 중평(中平) 6(189), 대장군(大將軍) 하진(何進)은 환관들을 제거하고자 자신의 힘을 강화하려고 했다. 이에 하진은 동탁(董卓) 부대에 명령하여 낙양(洛陽)으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당시 동탁은 하동군(河東郡)에 주둔하고 있었고, 면지(澠池)까지 진군했을 때 조정은 종소(种劭)를 파견하여 철군하라는 칙령을 선포했다. 동탁은 조정에 변화가 생긴 것을 의심했지만, 종소의 굳건한 주장으로 석양정(夕陽亭)까지 물러났다. 하지만 동탁의 한()군이 낙양(洛陽)에 도착하기도 전에 하진은 이미 환관들에게 살해당한 상태였다.
  • 공경(公卿) 이하의 모든 관료들이 동탁과 함께 망산(邙山) 기슭에서 한()나라 황제를 맞이했다. 처음 낙양에 입성했을 때 동탁의 병력은 3천 명에 불과했다. 그는 대군이 수도를 압박하는 것처럼 보여 이웃 제후들을 위협하기 위해 매일 밤 병사들을 성 밖으로 내보낸 다음, 다음 날 다시 대대적인 기세로 입성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낙양 전체에는 대군이 끊임없이 진군하는 듯한 허황된 상황이 연출되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동탁은 동생 동민(董旻)에게 명령하여 오광(吳匡)과 연합해 상사 하묘(何苗, ?~189)를 살해하게 했다. 또한 여포(呂布, ?~198)를 영입하여 정원(丁原, ?~189)을 죽이게 했고, 이로써 신속하게 주변의 병력을 흡수했다. 이어서 동탁은 소제(少帝)를 폐위하고 유협(劉協, 181~234)을 황제, 헌제(獻帝)로 옹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태후(何太后)마저 살해하고 조정을 독단적으로 운영했다. 그는 한() 화제(和帝), 안제(安帝), 순제(順帝), 환제(桓帝)의 묘호(廟號)와 공회황후(恭懷皇后), 경은황후(敬隱皇后), 공민황후(恭愍皇后)의 존호(尊號)를 박탈하기도 했다.
  • 동탁은 태위(太尉)로 승진하고 전장군사(前將軍事)를 겸했으며, 더욱이 미후(郿侯)에 봉해졌다. 동탁은 이미 권력을 장악했으므로, 당고의 화(黨錮之禍)로 인해 억울한 일을 당했던 삼군(三君) 진번(陳蕃, ?~168), 두무(竇武, ?~168)와 팔준(八俊) 이응(李膺, ?~169) 등을 위로하고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현명한 인재들을 끌어들이려고도 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상국(相國)으로 승진했고, 동탁의 어머니는 지양군(池陽君)에 봉해졌다. 이후 순욱(荀彧, 163~212)의 삼촌인 순상(荀爽, 128~190)과 채옹(蔡邕, 132~192) 등에게 조정의 관직에 부임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원소(袁紹, ?~202)가 동탁과 다툼을 벌이다 홀로 낙양을 떠나자, 동탁은 본래 원소를 죽이려 했으나, 부하 오경(伍瓊)과 주비(周毖) 등의 설득으로 유화적인 방법으로 그를 안심시키고 원소를 발해태수(渤海太守)로 임명했다. 동시에 또 다른 명사들인 진류태수(陳留太守) 장막(張邈, ?~195), 기주자사(冀州刺史) 한복(韓馥, ?~191), 예주자사(豫州刺史) 공주(孔伷, ?~189) 등을 관리로 등용했다. 그러나 이들은 훗날 모두 동탁을 토벌하는 주력이 되었다. 동시에 동탁 자신의 심복들은 단지 열교(列校)에 불과했으며 동탁에 의해 승진하지 못했다.
 

기원후 190

  • 헌제(獻帝) 초평(初平) 원년(190), 관동(關東) 연합군은 동탁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봉기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동탁에게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다. 190117, 동탁은 장안(長安)으로 천도했다. 동탁의 부대는 낙양(洛陽)의 궁궐, 종묘, 창고, 민가 등을 불태우고 무덤을 발굴했다.
  • 동탁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인심을 얻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력으로 사람들을 복종시키려 했다. 동탁은 병사를 양성(陽城)으로 보냈는데, 그곳에서 관동(關東) 제후군의 세력과 마주치게 되었다. 동탁은 크게 놀랐다. 또한 동탁의 사위 우보(牛輔)3만 병력을 이끌고 하동(河東) 백파군(白波軍)을 정벌하다 대패하자, 동탁은 양측이 연합할 것을 염려했다. 그리하여 정월 12일 계축일(36)에 이유(李儒, ?~192)를 보내 폐위된 홍농왕(弘農王) 유변(劉辯, 176~189)을 독살했다. 그 외에도 당시 2월 사일(社日)에는 많은 백성이 제사에 참여하러 나왔는데, 동탁의 군대는 그들을 모두 참수했다. 백성의 수레에 소와 부녀자, 재물을 싣고, 사람의 머리를 수레바퀴 축에 매달아 마치 도적을 베어 얻은 것처럼 꾸몄다.
  • 조조(曹操, 155~220)가 군사를 일으켜 동탁의 군대를 추격했으나, 형양(滎陽) 변수(汴水)에서 서영(徐榮)에게 격패 당했다. 동탁은 사로잡힌 관동 연합군 병사들을 학살했고, 연합군 또한 내분으로 해산되었다.
 

동탁의 말로

  • 동탁은 조야(朝野) 안팎으로 측근들을 널리 배치했다. 조정은 광록훈(光祿勳) 선번(宣璠)에게 명하여 동탁을 태사(太師)로 책봉하고, 그 위계는 제후왕보다 위에 두었다. 동탁은 천자와 비슷한 의복과 수레를 참람되이 사용했고, 삼공(三公)을 부르듯이 신하들을 불러 모았다. 상서(尚書) 이하의 관리들은 조정을 거치지 않고 동탁의 집으로 가서 정무를 논의했고, 관료들이 동탁과 이야기하다가 조금이라도 의견이 맞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이는 조야의 불만을 야기했다.

【기원후 192년

  • 사도(司徒) 왕윤(王允, ?~192)은 이간계를 써서 동탁의 대장 여포(呂布, ?~198)를 부추겨 동탁을 죽이게 했다.
  • 사서(史書) 기록에 따르면, 동탁은 몸집이 비대하여 시체가 버려진 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시신이 전시되었다. 시신을 지키던 병사들은 동탁의 배꼽에 등불 심지를 꽂아 불을 붙여 조명으로 사용했고, 이는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 동탁의 잔당 이각(李傕, ?~198)과 곽사(郭汜, ?~197)가 군대를 이끌고 성에 들어와 왕윤(王允, ?~192)을 살해하고 조정의 대권을 장악했다. 이각 등은 동탁의 유골을 수습하여 관에 넣어 장례를 치렀는데, 장례 당일 큰 비바람이 불고 천둥 번개가 치면서 그 관에 벼락이 떨어졌고, 물이 묘혈로 흘러들어 관이 물 위에 떠올랐다.
  • 당나라 시대에는 농서(隴西) 적도(狄道)의 백성들이 동탁을 제사 지내는 일이 있었다. 고적(高適)이 상소를 올려 동탁의 죄악을 역설하며 조정에 이러한 행위를 금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
 

가족 관계

 
  • 동군아(董君雅) : 동탁의 부친, 영천 윤씨 위
  • 지양군(池陽君) : 동탁의 생모, 성씨 미상
  • - 동탁(董擢) : 자는 맹고(孟高), 일찍 사망
  • 본인 - 동탁(董卓) : 자는 중영(仲穎)
  • 동생 동민(董旻) : 자는 숙영(叔穎), 황보숭에게 전사
  • 조카 동황(董璜) : 동탁의 조카, 동탁과 함께 출정
  • 자녀
    • 동씨(董氏) : 우보에게 시집감
    • 사위 우보(牛輔) : 동탁의 사위, 죽은 후 목이 장안에 보내짐
    • 아들 동모(董某) : 171년생, 일찍 사망
    • 아들 동모(董某) : 동백(董白)의 아버지
    • 아들 동모(董某)
    • 아들 동모(董某) : 190년생, 첩이 낳은 아이, 유아 시 봉후됨
    • 양자 여포(呂布) : 동탁의 양자, 동탁을 살해
  • 손녀 동백(董白) : 위양군(渭陽君) 봉작, 미혼 상태에서 작위 수여
  • 손자 동모(董某) : 186년생, 동탁이 친자식처럼 사랑

2025년 9월 4일 목요일

이슬람에서 바라본 다윗 왕

이슬람에서 바라본 다윗 왕

 
이슬람에서 다윗은 단순한 역사적 인물을 넘어 알라(Allah)의 예언자이자 메신저이며, 동시에 정의로운 통치자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의 이야기는 꾸란(Quran)에 여러 차례 언급되며, 무함마드(Muhammad) 이전에 존재했던 중요한 예언자 계보의 한 연결 고리로 인정받는다. 그는 특별히 신의 계시를 받은 왕이자 지혜로운 지도자로 평가된다.
 

1. 다윗의 지위 : 예언자이자 왕

 
다윗(Dāwūd 또는 David)은 이슬람에서 예언자이자 알라(하나님)의 사자로 여겨지며, 동시에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의롭고 신성하게 기름 부음을 받은 왕으로 간주된다. 그는 통치자와 종교 지도자라는 이중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무슬림들에게는 신성한 지혜와 세속적 통치 능력의 조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또한, 무슬림들은 다윗이 신의 계시인 자부르(Zabur)’를 받았다는 점에서도 그를 존경한다. 다우드(Dawud)는 이슬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는 꾸란(코란)에 총 16번 등장하며, 무함마드 이전의 예언자 계보 속에 등장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비록 일반적으로 율법을 부여받은 예언자들(울루 알-아즈므, ulū al-ʿazm) 중 한 명으로는 간주되지 않지만, 이슬람 사상에서 결코 주변적인 인물이 아니다. 이후의 이슬람 전통에서는, 그가 기도와 금식에 매우 엄격했던 인물로 칭송받는다. 또한 그는 정의로운 통치자의 전형, 즉 하나님의 지상 통치 권위의 상징으로 제시되며, 이는 그가 예언자이자 동시에 왕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슬람 예루살렘의 종교적 구조와 전통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히브리 성경에 따르면, 다우드(Dawud)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일 왕국의 두 번째 왕으로, 기원전 약 1010~970년경에 통치한 것으로 알려진다.
 

2. 다윗의 이름과 언어적 배경

 
꾸란에서 다윗의 이름은 아랍어로 다우드(Dāwūd 또는 Dāwud)로 표기된다. 이는 코이네 그리스어: Δαυίδ(David), 시리아어: ܕܘܝܕ(Dawīd), 그리고 히브리어: דָּוִד(Dāwīd)의 형태와는 구별된다. 이러한 아랍어 표기들은 꾸란에 총 16회 등장하며, 이슬람 전통에서 다윗이 얼마나 빈번하게 언급되고 중요한 인물인지를 나타낸다. 그의 이름은 발음상 이슬람 전통에 통합되며, 아브라함 계통 종교 간의 문화적, 언어적 연결점을 보여준다.
 

3. 꾸란에 나타난 다윗 이야기 : 지혜와 통치, 계시의 연결

 
꾸란에 나오는 다윗(Dāwud)의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히브리 성경의 내용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는 예언자(نَبِي, nabī)로도, 사도(رَسُول, rasūl)로도 언급된다. 다윗은 계시(وَحْي, waḥy) 또는 인도(hudā; 꾸란 6:84)를 받은 이들의 명단에 포함되며, 이 명단에서는 그의 아들 솔로몬(Sulayman)과 나란히 이름이 등장한다 (꾸란 4:163). 이는 부자가 모두 예언자로서 신의 축복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또한 꾸란은 하나님께서 두 사람에게 모두 건전한 판단력(حُكْم, ḥukm)”지식(عِلْم, ʿilm)”을 주셨다고 말한다 (꾸란 21:79; 27:15). 이는 다윗과 솔로몬이 뛰어난 지혜와 통찰력을 지녔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꾸란은 다윗에게 솔로몬과 구별되는 특별한 자질들도 부여한다. 예를 들어, 다윗은 골리앗(Goliath)을 죽였고(꾸란 2:251), 이는 그의 용기와 알라의 도움으로 이룬 승리로서 특별히 강조된다. 그는 또한 자부르’(Zabur)라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 (꾸란 17:55에서는 부정관사, 21:105에서는 정관사 -자부르(al-Zabūr)’ 사용). 이 자부르는 아마도 히브리 성경의 시편(Psalms)을 가리키는 것으로, 히브리어 미즈모르(mizmōr) 또는 시리아어 마즈무라(mazmūrā, ‘시편’)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스러운 시가를 통해 알라를 찬양했음을 나타낸다.
 
다우드가 물매로 잘룻(골리앗)의 군대를 무찌르다
다우드가 물매로 잘룻(골리앗)의 군대를 무찌르다
 
꾸란 21:7934:10에 따르면, 산들과 새들이 다윗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는 그의 경건함과 알라와의 특별한 유대 관계를 상징한다(이는 시편 148:710과 유사한 장면이다). 또한 하나님은 다윗을 칼리파(خَلِيفَة, khalīfa)’, 즉 하나님의 대리자 또는 지상 통치자로 삼았다(꾸란 38:26). 이 칭호는 꾸란 전체에서 아담(Adam, 꾸란 2:30)과 다윗에게만 사용된다. 이 칭호는 다윗이 단순한 사도를 넘어, 신의 뜻에 따라 세상을 다스린 지도자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역할은 꾸란 2:251에서도 암시된다 :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왕권(مُلْك, mulk)과 지혜(حِكْمَة, ḥikmah)를 주시고, 당신의 뜻대로 가르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막지 않으셨다면, 땅은 타락했을 것이다.”
 

4. 다윗에게 가르쳐진 기술과 신의 은총

 
꾸란은 다윗에게 갑옷을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주셨다고 말한다(꾸란 21:80, 34:1011). 이는 다윗의 군사적 업적이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능력의 결과임을 시사한다. 그의 승리는 단순한 인간의 힘이 아니라, 신의 은총에 힘입은 것임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또한, 다윗에게 주어진 지혜는 고전 이슬람 해석자들에 의해 예언의 은사로도 해석되었다. 이는 그의 통치뿐만 아니라 영적인 통찰력 또한 신으로부터 왔음을 의미한다.
 
꾸란은 또 다윗과 예수를 연결 지으면서, 두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에 거역하고 믿지 않은 유대인들을 저주했다고 말한다(꾸란 5:78). 이는 다윗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의 도구로도 활용되었음을 시사한다. 게다가, 꾸란은 다윗이 정의를 판결할 때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능력(faṣl al-khiṭāb)을 가졌다고도 말한다(꾸란 38:20). 이는 그의 통치자로서의 역할에서 정의와 공정성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꾸란에는 하나님이 다윗을 시험에 들게 하셨고, 그가 기도하고 회개하자 용서받았다는 암시도 있다(꾸란 38:2425). 이는 그가 신앙적으로 시련을 겪고 겸손하게 알라에게 회개하여 용서받은 모습을 보여준다.
 

5. 수라트 사드 : 다윗의 장

 
꾸란의 38(Surah Ṣād)다윗의 장으로도 불린다. 이 장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절을 했기 때문에, 이슬람 전통에서는 무함마드에게도 이 장을 읽을 때 절하라는 명령이 주어졌다는 전승이 있다. 이는 다윗의 겸손과 회개하는 태도가 무슬림들에게 모범이 됨을 강조한다. 이처럼 꾸란의 특정 장이 예언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는 경우는 그의 특별한 위치를 나타낸다.
 

6. 종교적 중요성 : 왕권과 예언자직의 통합

 
다윗(David)은 이슬람 예언자들 가운데 드물게 왕권을 동시에 부여받은 인물이다.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다른 왕들이 통치하는 시대에 활동했지만, 다윗은 자신이 직접 왕이었던 시기에 예언자로서 사역했다. 그래서 그는 단순히 영적으로 백성을 인도하는 것뿐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 전체가 강건하게 유지되도록 다스리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그가 예언자이자 통치자로서 수행한 역할은 모든 무슬림들에게 매우 높은 지위로 여겨진다.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Sulayman, 예언자이자 왕)은 정의롭게 나라를 다스린 이상적인 인물들로 간주된다. 하나님은 꾸란에서 다윗의 높은 예언자적 지위를 자주 언급하며, 다른 위대한 예언자들과 나란히 언급함으로써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지를 강조한다. 예를 들어 꾸란 6:84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우리는 그(아브라함)에게 이삭과 야곱을 주었고, 이전에 노아를 인도한 것처럼 그들을 인도하였다. 또 그의 후손 중에는 다윗과 솔로몬, 욥과 요셉, 모세와 아론이 있다. 이렇게 우리는 의롭고 선을 행한 자들에게 보상을 내린다”(꾸란 6:84). 이 구절은 다윗이 인류에게 모범이 되는 예언자들의 계보 속에 속해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7. 예루살렘과 다윗의 기도처

 
칼리프 우마르(‘Umar)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그는 성전 산(Temple Mount)을 거닐며 미흐라브 다우드(Mihrab Dawud, 다윗의 기도처)’를 찾아 기도하려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당시 예루살렘의 기독교 총대주교 소프로니오스(Sophronius)가 그를 동행했다. 후대 이슬람 해설자들은 이 기도처를 현재의 다윗탑(Tower of David)’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이는 예루살렘이라는 신성한 도시가 이슬람에서도 다윗과 깊은 역사적, 영적 연관성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8. 하디스에 나타난 다윗의 기도와 금식

 
이슬람 전승(하디스)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신 기도와 금식은 다윗의 방식이었다고 한다 : 압둘라 이븐 암르 이븐 알 아스(Abdullah ibn Amr ibn al-As)가 전하기를, “알라의 사도(무함마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기도는 다윗의 기도이고, 가장 사랑하시는 금식도 다윗의 금식이다. 그는 밤의 절반은 잠을 자고, 그 다음 3분의 1은 기도하고, 마지막 6분의 1은 다시 잠을 자며, 하루는 금식하고 하루는 먹었다’”(사히흐 알-부카리, Sahih al-Bukhari). 이 하디스는 다윗이 알라를 향한 깊은 헌신과 균형 잡힌 영적 생활을 실천했음을 보여주며, 무슬림들이 따라야 할 중요한 모범 중 하나로 제시된다.
 

9. 다윗에게 계시된 책 : 자부르 (Zabur)

 
자부르(Zabur)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성서로, 이는 무사(Musa, 모세)가 타우라(율법, Tawrat), 이사(Jesus, 예수)가 인질(복음, Injil), 무함마드가 꾸란(Qur’an)을 받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슬람 전통에서 자부르는 성경의 시편(Psalms)에 해당한다. 꾸란 17:55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 “너의 주는 하늘과 땅에 있는 자를 모두 알고 계신다. 우리는 예언자들 중 일부를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게 하였으며, 다윗에게는 시편(자부르)을 주었다”(꾸란 17:55). 이 구절은 다윗이 특별한 계시를 받은 예언자로서, 그의 말이 단순한 인간의 지혜가 아닌 신성한 말씀의 일부임을 명확히 한다. 자부르는 무슬림들에게 다윗의 예언자적 권위를 확증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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