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인물 - 타]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인물 - 타]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5년 9월 18일 목요일

테우데발트(Theudebald, AD. 534~555) : 재위 547~555년

테우데발트(Theudebald, AD. 534~555) : 재위 547~555

 
테우데발트
  • 현대 영어로는 테오발트(Theobald)
  • 프랑스어로는 티보(Thibaut) 또는 테오데발드(Théodebald)
  • 독일어로는 테우도발드(Theudowald)
 
테우데베르트 1세와 도이테리아의 아들로, 534년부터 555년까지, 또는 547년이나 548년부터 555년까지 메츠, 랭스, 혹은 아우스트라시아(다양하게 불린다)의 왕이었다.
 

기원후 534

  • 테우데베르트 1세와 도이테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원후 547

  • 그는 즉위 당시 겨우 13세였고 병약했다. 그러나 귀족들의 아버지 기억에 대한 충성심 덕분에 그의 미성년 기간 동안 평화가 유지되었다.
  • 그는 롬바르드 왕 바코의 딸이자 그의 계모인 비시가르드의 여동생인 발드라다(Waldrada)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아우스트라시아와 롬바르드 사이의 동맹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원후 550

  • 550, 테우데발트는 툴(Toul) 공의회를 소집했다. 테우데발트가 이 공의회를 소집한 것은 트리르의 주교 니케티우스(Nicetius)가 금지된 혈연 관계로 결혼한 프랑크 귀족들을 파문하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기원후 552

  •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우데발트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아버지의 정복지들을 지켜낼 수 없었다.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52년에 나르세스(Narses)의 지휘 아래 군대를 파견했다. 고트족 왕 테이아(Teia)는 프랑크족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 테우데발트 왕은 직접적인 지원을 거부했지만, 그의 신하들인 알레만니족 족장 로타르(Leutharis)와 부틸리누스(Butilinus)가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아풀리아에서 굶주림이나 전염병으로 죽지 않은 프랑크족 전사들은 카실리눔(Casilinum)에서 패배했다.
 

기원후 555

  • 오랜 질병과 허약함 끝에 그는 555년에 사망했다. 그의 왕국은 결국 테우데리크 1세의 직계 가족을 벗어나 그의 큰삼촌 클로타르 1세의 왕국들과 통합되었고, 클로타르 1세는 곧 모든 프랑크인의 왕이 되었다.

서기 555년, 테우데발트(Theudebald)가 사망한 해의 프랑크 제국
서기 555테우데발트(Theudebald)가 사망한 해의 프랑크 제국

테우데베르트 1세(Theudebert I, AD. 500~548년) : 재위 533~548년

테우데베르트 1(Theudebert I, AD. 500~548) : 재위 533~548

 
  • 오스트라시아 왕국의 왕(King of Austrasia)
  • 재위 기간 : 533~ 548
  • 전임자 : 테우데리크 1(Theuderic I)
  • 후임자 : 테우데발트(Theudebald)
  • 출생 : 500년경
  • 사망 : 548
  • 배우자 : 비시가르트(Wisigard), 되테리아(Deuteria)
  • 자녀 : 테우데발트, 베르토아라(Berthoara)
  • 왕조 : 메로베우스 왕조(Merovingian dynasty)
  • 아버지 : 테우데리크 1(Theuderic I)
 
테우데베르트 1(프랑스어: Thibert/Théodebert, 500548)533년부터 548년 사망까지 아우스트라시아의 메로빙거 왕이었다. 그는 테우데리크 1세의 아들이자 테우데발트의 아버지였다

테우데베르트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은 6세기 후반 투르의 그레고리가 작성한 역사또는 프랑크족의 역사에서 비롯된다. 또한 아우스트라시아 궁정에서 작성된 외교 서신(아우스트라시아 서한으로 알려진),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의 시, 프로코피우스 저작의 기록과 소수의 다른 자료들이 있다.
 

기원후 500

  • 테우데리크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 아버지의 통치 기간 동안 젊은 테우데베르트는 자신이 유능한 전사임을 보여주었다.
 

기원후 516

  • 516년에 그는 북부 골을 습격한 후 덴마크 군대를 클로킬라이크(베오울프의 히옐라크) 왕 휘하에서 물리쳤다. 그의 명성은 비시고트족을 상대로 한 셉티마니아에서의 일련의 군사 원정으로 더욱 높아졌다.
 

기원후 534

  • 아버지가 사망하자, 테우데베르트는 아버지의 왕국을 상속받기 위해 삼촌 킬데베르트와 클로타르 1세 모두와 싸워야 했다. 결국 그의 군사적 능력이 킬데베르트를 설득하여 분쟁을 포기하고 테우데베르트를 자신의 후계자로 입양하게 했다. 그들은 함께 클로타르에 대항하여 원정을 벌였지만 그들의 군대가 폭풍에 휩쓸린 후 평화를 요청했다.

534년경, 마인츠(Mainz)에서 테우데베르트(Theudebert)가 주조한 금화 솔리두스(Solidus)
534년경마인츠(Mainz)에서 테우데베르트(Theudebert)가 주조한 금화 솔리두스(Solidus)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고트 전쟁

  • 프랑크족 왕들 간의 관계가 안정된 후, 테우데베르트는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탈리아의 동고트족을 정복하려 했을 때 시작된 고트 전쟁에 휘말렸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테우데베르트를 이상적인 동맹자로 보았다 : 아우스트라시아 영토는 북부 이탈리아의 동고트족과 인접해 있었다. 황제는 그의 도움에 대해 테우데베르트에게 후한 대가를 지불했지만, 테우데베르트는 신뢰할 수 없는 동맹자임이 증명되었다. 프랑크족 군대는 이탈리아 분쟁을 약탈의 기회와 북부 이탈리아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을 주장할 기회로 보았다. 결국 비잔틴인들은 동고트족만큼이나 프랑크족과도 싸워야 했다.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 테우데베르트는 유럽 무대에서 자신의 힘이 커지는 것을 즐긴 것 같다. 그의 편지들은 비잔틴 영토를 포함하여 아우스트라시아 주변의 광대한 영토에 대한 주장을 보여준다.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프랑크족 왕들은 항상 비잔틴 황제에게 일정한 경의를 표했지만, 테우데베르트는 열등한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거부했다 :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의 이미지가 담긴 금화를 주조함으로써 제국의 관습을 깨뜨렸다. 이전까지 프랑크족 왕들은 제국의 관례를 존중하여 황제의 이미지가 있는 금화를 유통시켰다. 아마도 놀랍지 않게도, 비잔틴 연대기 작가 아가티아스는 비잔틴인들이 테우데베르트가 트라키아 침공을 계획하고 있다고 의심했다는 소문을 콘스탄티노플에서 기록했다.
 

테우데베르트의 결혼

  • 당시 다른 프랑크족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테우데베르트는 원할 때마다 여러 아내를 맞이했다. 아버지 왕국의 후계자로서, 그는 롬바르드 왕 바코의 딸 비시가르트와 약혼했다. 이런 종류의 정치적 결합은 메로빙거 왕들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테우데베르트는 남부 골에서 원정 중에 만난 갈로-로마인 도이테리아를 위해 비시가르트를 버렸다. 그러나 그의 지지자들은 비시가르트에 대한 그의 대우에 만족하지 않았고, 아마도 정치적 차원 때문에, 테우데베르트를 설득하여 그녀를 다시 받아들이게 했다. 그러나 비시가르트는 곧 사망했고, 테우데베르트는 다시 결혼했다.
 

갈리아 교회에 대한 후원

  • 군사적 능력으로 유명했을 뿐만 아니라, 테우데베르트는 갈리아(프랑스) 교회에 대한 후원으로 동시대인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투르의 그레고리는 이 점에서 그에게 특별한 찬사를 보내며, 그의 경건함은 포르투나투스에 의해서도 언급된다.
 

테우데베르트의 사망

  • 테우데베르트는 재위 14년째(547년 말 또는 548년 초)에 사망했다. 그는 사냥 중에 들소에게 살해당했다. 도이테리아와의 아들 테우데발트가 그를 계승했다. 많은 메로빙거 왕들이 경험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테우데발트의 즉위는 평화로웠다.

테우데리크 1세(Theuderic I, AD. 487~534년) : 재위 AD. 511~534년

테우데리크 1(Theuderic I, AD. 487~534) : 재위 AD. 511~534

 
  • 메츠의 왕(King of Metz)
  • 재위 : 511534
  • 전임자 : 클로비스 1(Clovis I)
  • 후임자 : 테우데베르트 1(Theudebert I)
  • 출생 : 487
  • 사망 : 534(46~47)
  • 배우자 : 수아베고타 (Suavegotha)
  • 자녀 : 테우데베르트 1, 테오데킬트 (Theudebert I, Theodechild)
  • 왕조 : 메로빙거 왕조 (Merovingian dynasty)
  • 아버지 : 클로비스 1(Clovis I)
 
테우데리크 1(487534)는 메츠(Metz), 랭스(Rheims), 또는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다양하게 불리듯이의 메로빙거 왕으로, 511년부터 534년까지 통치했다.
 

기원후 487

  • 그는 클로비스 1세와 그의 초기 아내 또는 첩 중 한 명(아마도 쾰른의 프랑코-라인 공주 에보킬디스(Evochildis)일 것이다)의 아들이다.
 

기원후 511

  • 살리안족의 전통에 따라, 왕국은 클로비스의 살아남은 네 아들, 즉 파리의 킬데베르트 1(Childebert I), 오를레앙의 클로도메르(Chlodomer), 수아송의 클로타르 1(Chlothar I) 사이에 분할되었다. 테우데리크는 511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메츠를 상속받았다.
  • 재위 초기에 그는 자신의 왕국을 침략한 스칸디나비아 왕 클로킬라이크(Chlochilaich, 베오울프에 나오는 히옐라크(Hygelac))를 살해하도록 아들 테우데베르트를 보냈다 .
  • 테우데리크는 튀링기아 왕 헤르만프리트(Hermanfrid)와 그의 형제 바데릭(Baderic) 사이의 전쟁에 개입했다. 테우데리크는 도움을 주는 대가로 튀링기아의 절반을 약속받았고, 바데릭은 패배했지만 약속된 영토는 받지 못했다.
초록색 부분이 테우테리크 1세의 영토
초록색 부분이 테우테리크 1세의 영토
 

기원전 531

  • 531, 테우데리크는 그의 형제 클로타르(Chlothar), 그리고 그의 아들과 함께 헤르만프리트에게 복수하기 위해 튀링기아를 공격했다. 하두가토(Hadugato) 공작 휘하의 작센인들의 도움으로 튀링기아가 정복되었고, 클로타르는 베르타르(Berthar) (헤르만프리트의 죽은 형제)의 딸 라데군트(Radegund)를 받았다. 헤르만프리트는 운스트루트(Unstrut) 전투에서 사망했고 그의 왕국은 합병되었다.
  • 이후 클로비스의 네 아들은 모두 부르군트 왕 시기스문트(Sigismund)와 고도마르(Godomar)에 대항하여 싸웠다. 고도마르는 도주했고 시기스문트는 클로도메르(Chlodomer)에게 포로로 잡혔다.
  • 테우데리크는 시기스문트의 딸 수아베고타(Suavegotha)와 결혼했다.
  • 고도마르는 부르군트 군대를 규합하여 왕국을 되찾았다. 테우데리크의 도움을 받은 클로도메르는 고도마르를 물리쳤지만, 베제롱스(Vézeronce) 전투에서 전사했다.
 

기원후 534

  • 그의 형제 킬데베르트와 조약을 맺은 후, 테우데리크는 534년에 사망했다. 그가 사망하자 메츠의 왕위는 (의외로 아무 방해 없이) 그의 아들 테우데베르트에게 넘어갔다.
  • 테우데리크는 또한 딸 테오데킬트(Theodechild, 패배한 부르군트의 시기스문트의 딸인 그의 아내 수아베고타 소생)를 남겼다.
  • 테오데킬트는 상스(Sens)에 생 피에르 르 비프(St-Pierre le Vif) 수도원을 설립했다.

2025년 8월 25일 월요일

교황 텔레스포로(Pope Telesphorus, AD.?~c.137) : 제8대 교황(AD.c.126~c.137)

교황 텔레스포로(Pope Telesphorus, AD.?~c.137) : 8대 교황(AD.c.126~c.137)


  • Pope Telesphorus [Greek : Τελεσφόρος]
  • 출생 : 미상 / Thurii (today Terranova da Sibari, Calabria), Italy, Roman Empire
  • 사망 : c.137 / Rome, Italy, Roman Empire
  • 재위 : c.126~c.137
 
바이에른 슈트라우빙의 카르멜 수도원에 있는 성 텔레스포루스의 14세기 묘사
바이에른 슈트라우빙의 카르멜 수도원에 있는 성 텔레스포로의 14세기 묘사
 
교황 텔레스포로(Pope Telesphorus, 라틴어: Telesphorus)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여덟 번째 교황으로, 서기 125년부터 137년까지 교황직을 수행했다. 그의 재위 기간은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 76138)와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86161)의 치세와 겹친다. 이는 초대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통제 속에서 점차 성장하고 체계를 갖추어 나가던 중요한 시기였다. 텔레스포로는 모든 초기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사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특히 순교자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받은 초기 교황이라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1. 텔레스포로의 생애와 배경

 
텔레스포로는 그리스 혈통으로서 오늘날 이탈리아 칼라브리아주(Calabria)의 테라노바다시바리(Terranova da Sibari)에서 태어났다. 교황 연대표(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그는 교황이 되기 전에 은수자(hermit)였다고 전해진다. 은수 생활을 했다는 것은 그가 세속적인 삶을 떠나 영적 성찰과 고행에 전념했던 인물이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배경은 그가 로마 교회의 수장으로서 영적 권위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교부 에우세비오(Eusebius, 260년경339년경)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에 따르면, 텔레스포로는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 재위 12년에 교황으로 즉위하여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재위 1년에 선종했다고 증언한다. 이는 그가 대략 12년에서 13년 정도 교황직을 수행했음을 의미한다.
 

2. 전례 개혁과 교회 조직화에 기여

 
텔레스포로에게는 여러 중요한 전례 관습을 도입한 공로가 전통적으로 귀속된다. 이러한 기록은 주로 후대의 문헌, 특히 에우세비오의 증언에 기반을 두고 있다.
 
  • 예수 성탄 대축일(Christmas Eve) 전야 미사 제정 : 텔레스포로는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 미사를 제정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초기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방식을 구체화하고, 이를 위한 특별한 전례를 마련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다.
  • 예수 부활 대축일(Easter) 날짜 제정 : 그는 예수 부활 대축일의 날짜를 주일(일요일)로 제정했다고 한다. 당시 교회는 부활절을 언제 지낼 것인가에 대한 논쟁(‘콰르토데키만 논쟁)이 활발했다. 유대교의 과월절(Passover) 날짜에 따라 부활절을 지내는 지역 교회도 있었지만, 텔레스포로는 부활절을 과월절과 무관하게 주일에 기념하는 전통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 사순 시기(Lent) 규정 : 예수 부활 대축일 전 7주간을 사순 시기로 지정하도록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사순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고 회개하는 기간으로, 이 시기의 확립은 기독교인의 영성 생활에 중요한 틀을 제공했다.
  • 미사 중 대영광송(Gloria) 가창 지시 : 그는 미사 중에 대영광송을 노래로 부를 것을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대영광송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중요한 찬송가로, 미사 전례의 풍성함을 더하는 요소이다.
 
이러한 전례적 기여들은 텔레스포로가 로마 교회의 전례를 표준화하고,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체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시사한다. 이는 초대 교회가 지역적 다양성을 넘어 보편적인 전례 관습을 형성해나가던 시기의 모습이다.
 

3. ‘영광스러운 순교와 그 역사적 의미

 
텔레스포로는 초기 교황들 가운데 순교자라는 칭호를 받은 첫 번째 교황 중 한 명이라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교부 이레네오(Irenaeus, 130년경202년경)는 그의 저서 모든 이단에 반대하여(Against Heresies)에서 텔레스포로가 영광스러운 순교(glorious martyrdom)’를 했다고 명확하게 증언한다. 이는 그보다 앞선 교황들(베드로, 리노, 아나클레토, 클레멘스 1, 에바리스토, 알렉산데르 1, 식스토 1)에 대해서는 이레네오가 직접적인 순교 증언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비록 교황 연대표가 초기 교황 대부분을 순교자로 기록하는 경향이 있지만, 텔레스포로는 교황 연대표보다 훨씬 이전 시기인 2세기 중후반에 이레네오에 의해 순교자로 인정받은 최초의 교황이라는 점에서 그의 순교 전승은 더 큰 역사적 신뢰성을 가진다. 그의 순교는 초대 교회가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겪었던 어려움과 박해의 단면을 보여주며,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지도자로서 텔레스포로의 영적 권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사후 그는 기독교의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15일이다.
 

4. 부활절 논쟁과 카르멜회와의 연관성

 
2세기 말엽, 부활절을 언제 기념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콰르토데키만 논쟁’)이 교회 내에서 활발했다. 교부 이레네오가 교황 빅토르 1(Pope Victor I, 재위 189199)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교황 텔레스포로는 유대인의 과월절 절기에 따라 평일이 아니라 주일(일요일)에 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했다고 증언된다. 하지만 그는 빅토르 1세와는 달리, 이러한 전통을 따르지 않는 다른 기독교 공동체와도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분열을 피하려 노력했다. 이는 텔레스포로가 교회의 일치와 보편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텔레스포로는 가르멜회(Carmelites)에서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다. 그 이유는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에 팔레스타인의 가르멜 산(Mount Carmel)에서 은수 생활을 했었다는 일부 문헌의 기록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승은 그의 은수자로서의 배경과 연결되어, 가르멜 수도회의 영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흥미롭게도 캐나다 퀘백 주 남서부 지방에 있는 마을인 생텔레스포르(Saint-Télesphore)는 바로 성 텔레스포로 교황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는 그의 영향력이 특정 종교 단체나 전례를 넘어 지리적 명칭으로까지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5. 결론 : 순교와 전례 개혁으로 초대 교회를 이끈 교황

 
교황 텔레스포로는 초대 로마 교회의 여덟 번째 수장으로서, 혼란스러웠던 초기 기독교 시기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이레네오에 의해 영광스러운 순교자로 기록된 최초의 교황으로서, 신앙을 위한 희생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 미사, 부활절 날짜 규정, 사순 시기 확립, 미사 중 대영광송 가창 지시 등 주요 전례 관습을 도입하여 로마 교회의 조직화와 신앙생활의 표준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은수자 배경과 카르멜회와의 연결고리, 그리고 부활절 논쟁에서의 현명한 대처는 그가 단순한 행정가를 넘어 깊은 영성과 지혜를 지닌 지도자였음을 시사한다. 텔레스포로는 사도 시대의 유산을 이어받아, 격동하는 제국 속에서 기독교가 더욱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보편적인 체계를 갖추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유산은 오늘날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례와 성인 공경에 깊이 자리하고 있으며, 초대 교회의 역동적인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통찰을 제공하는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모우리(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모우리 (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 ( 牟義理 )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   【 1878 년 】 미국 오하이오주 벨빌 (Bellville) 근교에서 사무엘 모우리 (Samuel Mowry, 1850-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