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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11일 목요일

요아스(Jehoash, BC. 843~796년경) : 유다의 제8대 왕(BC. 835~796년경)

요아스(Jehoash, BC. 843~796년경) : 유다의 제8대 왕(BC. 835~796년경)

 
  • 출생 : 기원전 843년경
  • 사망 : 기원전 796년경
  • 부친 : 아하시야
  • 모친 : 시비아(Zibiah of Beersheba)
  • 배우자 : 여호앗단(Jehoaddan of Jerusalem)
  • 자식 : 아마샤(Amaziah), 아모스(Amoz)
  • 재위 : 기원전 836~796년경
  • 전임 : 아달랴
  • 후임 : 아마샤

 
유다의 제8대 왕인 요아스(Jehoash, 히브리어: יְהוֹאָשׁ, Yəhōʾāš, 라틴어: Ioas, 기원전 843년경 예루살렘 출생 기원전 796년경 밀로에서 사망)는 유다 역사상 가장 극적인 즉위 과정을 거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할머니에 의해 왕족이 거의 몰살당하는 비극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왕위에 올랐다. 그의 통치 기간은 약 40년으로, 초반에는 제사장 여호야다(Jehoiada)의 영향을 받아 의로운 통치를 펼쳤지만, 후반에는 배신과 비극적인 암살로 막을 내렸다. 그의 삶과 통치는 구약 성경의 열왕기하와 역대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 어린 시절 : 아달랴의 학살 속 생존과 은둔

 
요아스의 어린 시절은 죽음의 그림자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유다 왕 아하시야(Ahaziah)의 유일한 생존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브엘세바(Beersheba) 출신의 시비아(Zibiah)였다. 당시 유다 왕국은 아하시야의 어머니이자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Athaliah)의 폭정 아래 있었다. 아달랴는 자신의 아들인 아하시야 왕이 이스라엘의 예후(Jehu)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유다 왕국의 다윗 왕조를 말살시키고 스스로 여왕이 되기 위해 왕실의 모든 자손들을 학살하는 끔찍한 명령을 내렸다.
 
이 참혹한 학살 속에서 어린 요아스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의 고모이자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인 여호세바(Jehosheba)가 그를 구출했다. 여호세바는 아하시야가 살해된 직후 어린 요아스를 몰래 빼돌려 성전의 방 중 한 곳에 숨겼다. 그는 그곳에서 6년 동안 숨어 지내며 여호야다 대제사장 부부의 보살핌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아달랴는 유다의 여왕으로서 통치했고, 바알 숭배를 확립하려 했다.
 
7년이 되던 해, 여호야다 대제사장은 왕국의 장로들과 군 지휘관들과 은밀히 협력하여 어린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백성들의 환호 속에서 요아스는 성전에서 왕으로 즉위했고, 그의 머리에는 왕관이 씌워졌다. 왕궁에 있던 아달랴는 이 소란을 듣고 성전으로 달려왔지만, 이미 때늦은 뒤였다. 그녀는 여호야다의 명령에 따라 처형당하며 폭정의 막을 내렸다.
 

2. 업적 : 성전 복구와 개혁

 
요아스는 7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40년간 통치했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야훼(Yahweh) 앞에서 의롭게 행했다. 여호야다의 영향 아래 요아스는 중요한 종교 개혁과 재건 사업을 추진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은 예루살렘 성전의 복구였다. 아달랴 여왕의 통치 기간 동안 성전은 방치되었고, 바알 숭배의 영향으로 훼손되었다. 요아스는 성전을 보수하기 위한 기금을 모으도록 명령했다. 그는 성전 문에 구멍을 뚫어 헌금을 모으고, 이를 성전 보수 공사에 사용했다. 성전은 복구되었고, 성전 봉사가 정상적으로 재개되었다. 이 사건은 로마의 솔로몬 성전 재건을 기록한 요아스 석판(Jehoash Tablet)이라는 유물에서도 언급되는데, 이 석판의 진위 여부는 논란이 있다.
 
또한 요아스는 바알 숭배를 강력히 억압했다. 그의 즉위 후, 야훼와의 언약이 재확인되었고, 바알의 제단은 파괴되고 바알 제사장 맛단(Mattan)은 살해되었다. 이는 여호람(Jehoram) 시대에 도입되고 아달랴 시대에 강화된 바알 숭배를 뿌리 뽑으려는 시도였다. 이로써 예루살렘 성전과 그 사제단은 유다 왕국에서 다시금 국가적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3. 말년과 죽음 : 배신과 암살

 
요아스의 통치는 여호야다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 크게 변했다. 여호야다의 죽음 이후, 요아스는 유다의 지도자들의 꾀임에 넘어가 야훼에 대한 신의를 저버렸다. 그는 야훼의 성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선지자 스가랴(Zechariah), 즉 여호야다의 아들이자 요아스의 사촌이 이를 비난하자, 요아스는 백성들의 동의를 받아 스가랴를 성전 뜰에서 죽였다. 스가랴는 죽어가면서 "야훼께서 보시고 갚으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결국 요아스는 스가랴의 피에 대한 복수의 행위로 자신을 잃었다. 아람 왕 하사엘(Hazael)이 유다를 침공했고, 요아스는 많은 재물과 성전의 보물들을 바쳐 아람 군대를 물리쳐야 했다. 그는 결국 신하들에 의해 암살당한다. 베스 밀로(Beth Millo)에서 자신의 종들에 의해 살해당했는데, 이는 스가랴의 피에 대한 복수였다고 전해진다.
 
요아스는 다윗 성(City of David)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묻혔지만, “왕들의 묘실에는 묻히지 못했다. 그의 아들 아마샤(Amaziah)가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4. 랍비 문헌 속 요아스

 
유대교 랍비 문헌에도 요아스에 대한 여러 흥미로운 해석이 담겨 있다. 탈무드의 랍비들은 랍비들의 전승에 근거하여 예언자 아모스(Amoz)가 아마샤 왕의 형제였다고 언급하며, 이사야(Isaiah) 선지자 역시 왕실 가문의 일원이었다고 말한다.
 
랍비 문헌에 따르면, 다윗(David)의 남자 후손들이 몰살당하는 것은 사울(Saul)이 그의 종 에돔인 도엑(Doeg the Edomite)에게 제사장들을 몰살하라고 명령한 것에 대한 신적인 보응으로 여겨진다. 요아스는 제사장 아비아달(Abiathar) 한 명만 살아남았기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요아스가 숨어 있던 곳은 랍비 엘르아살(R. Eleazar)에 따르면 지성소 뒤편의 방 중 하나였고, 랍비 사무엘 벤 나흐만(R. Samuel b. Naḥman)에 따르면 성전의 위층 방 중 하나였다고 한다.
 
왕의 아들인 왕은 굳이 기름 부음을 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요아스와 솔로몬(Solomon), 그리고 여호아하즈(Jehoahaz)의 경우는 왕위 계승이 논쟁적이었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특히 요아스(Jehoash)의 머리에 씌워진 왕관(열왕기하 11:12)은 그에게 정확히 맞아 왕위에 합당함을 의미했다고 특별히 언급된다.
 

5. 요아스 석판 논란

 
2001년에 '요아스 석판' 또는 '성전 비문'으로 알려진 비문이 공개되었다. 이 석판은 요아스 통치 기간 동안 솔로몬 성전에서 이루어진 보수 공사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검은색 판석에 15줄의 히브리어 글자가 새겨져 있다. 광범위한 과학적 시험을 거친 후, 이스라엘 고고학 당국은 이를 위조품이라고 선언하고 위조자를 기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이 석판이 위조품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6. 연대 측정의 난점

 
요아스의 통치 연대를 정확히 측정하는 것은 고고학자들과 성경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많은 부분이다. 윌리엄 F. 올브라이트(William F. Albright)는 그의 통치 기간을 기원전 837년에서 800년 사이로 보았다. 반면, E. R. 틸레(E. R. Thiele)는 기원전 835년에서 796년 사이로 제시한다.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의 연대 측정 달력은 6개월 정도 차이가 있었다. 유다는 티슈리월(가을)에 시작했고, 이스라엘은 니산월()에 시작했다. 따라서 두 왕국 간의 교차 동기화는 왕의 시작 및/또는 종료 날짜를 6개월 범위 내로 좁히는 데 도움이 된다. 요아스의 경우, 성경 자료는 그의 즉위 시점을 기원전 835년 니산월 1일과 같은 해 티슈리월 1일 전날 사이로 좁힐 수 있게 한다. 그의 사망은 기원전 796년 니산월 1일과 같은 해 티슈리월 1일 전날 사이의 어느 시점에 발생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유다 궁정 기록관들은 여호사밧(Jehoshaphat) 시대에 북왕국의 관행에서 채택된 비즉위 연도 측정 시스템을 여전히 사용했는데, 이는 왕의 재임 첫 부분 연도를 그의 재임 첫 해로 계산하는 방식이다.
 

7. 기독교 문헌 속 요아스

 
신약성경 중 마태복음(Gospel of Matthew)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기록하면서 요아스를 언급하지 않는다. 요아스는 유다 왕 중 족보에서 생략된 네 명의 왕 중 한 명인데, 다른 세 명은 아하시야(Ahaziah), 아마샤(Amaziah), 그리고 여호야김(Jehoiakim)이다.

아달랴(Athaliah, BC. ?~835년경) : 유다의 왕비(섭정, BC. 841~835)

아달랴(Athaliah, BC. ?~835년경) : 유다의 왕비(섭정, BC. 841~835)

 
  • 출생 : 미상 / 사마리아
  • 사망 : 기원전 835년경
  • 배우자 : 여호람(Jehoram)
  • 자식 : 아하시야(Ahaziah)
  • 부친 : 오므리(Omri) 혹은 아합(Ahab)
  • 모친 : 이세벨

 
아달랴(히브리어: עֲתַלְיָה, 현대 히브리어: ʻAtalya, 티베리안 히브리어: ʿĂṯalyā, 그리스어: Γοθολία, 라틴어: Athalia)는 이스라엘 왕 아합과 왕비 이세벨의 딸이었다. 그녀는 다윗 왕의 후손인 유다 왕 여호람의 아내로서 유다의 왕비 배우자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기원전 841년에서 835년경까지 여왕 통치자(섭정 또는 직접 통치)가 되었다.
 

1.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딸인가 아합의 딸인가?

 
아달랴의 삶에 대한 기록은 히브리 성경의 열왕기하 8:1611:16과 역대기하 22:1023:15에 나온다. 신명기적 역사관에 따르면, 그녀는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딸이었다. 하지만 보통은 오므리의 아들인 아합 왕과 그의 아내 이세벨 왕비의 딸로 여겨진다. 일부 학자들은 아달랴가 오므리의 딸이었으나, 아합의 궁정에서 고아로 자랐다고 본다.
 

2. 유다 왕 여호람과 결혼하다

 
아달랴는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 간의 조약을 확고히 하기 위해 유다의 여호람과 결혼했다. 여호람은 자신의 지위를 굳건히 하려고 여섯 명의 형제들을 죽였다. 여호람은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통치한 지 5년째 되던 해에 유다 왕이 되었다(열왕기하 8:16). 이스라엘의 여호람은 아달랴의 친아버지에 따라 그녀의 오빠이거나 조카였다.
 

3. 여호람의 통치

 
유다의 여호람은 8년 동안 통치했다. 그의 아버지 여호사밧과 할아버지 아사는 야훼, 즉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숭배하고 그분의 길을 따랐던경건한 왕들이었다. 그러나 여호람은 그들의 본을 따르지 않고 야훼를 거부했으며, 그 결과 유다에 대한 그의 통치는 저주를 받게 된다. 에돔이 반란을 일으켰고, 여호람은 그들의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블레셋, 아랍인, 에티오피아인의 습격으로 왕궁은 약탈당했고, 여호람과 아달랴의 막내아들 아하시야를 제외한 그의 가족 전부가 사로잡혔다.
 

4. 아하시야의 통치와 북왕국의 쿠데타(예후)

 
여호람이 죽은 후, 아하시야가 유다 왕이 되었고, 아달랴는 '게비라'(왕대비)가 되었다. 왕위에 오른 지 1년 후(열왕기하 8:26), 아하시야와 이스라엘의 여호람은 여호람의 군대 장군인 예후에게 살해된다. 예후는 불경한 왕들에게 복수하기 위한 야훼의 비밀스러운 명령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다. 그 후, 예후는 이세벨과 아달랴의 다른 친척들을 모두 죽였다. 아합은 이미 예후의 학살이 일어나기 전에 전투에서 죽었다.
 

5. 아달랴, 유다의 왕권을 찬탈하다

 
아하시야의 죽음 소식을 듣자, 아달랴는 유다의 왕좌를 장악하고 왕위 계승권을 가진 모든 남자들을 죽였다. 여기에는 아하시야의 아들들과 그의 친척들, 그리고 아마도 여호람의 다른 아내에게서 난 자녀들도 포함된다. 일부는 이러한 살해가 다윗의 후손들이 아달랴의 친척들(대부분 이미 예후에게 죽임을 당함)보다 오래 살아남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본다. 다른 이들은 이를 여호사밧이 아들을 아달랴와 결혼시킨 결정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여긴다.
 

6. 요아스의 즉위와 아달랴의 죽음

 
그러나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학살 속에서 어린 아이 하나를 구해냈다. 바로 아하시야와 그의 아내 시비아의 아들인 유다의 요아스였다. 요아스는 여호세바의 남편이자 제사장인 여호야다에 의해 비밀리에 길러졌다.
 
"찬탈자 여왕"으로서 아달랴는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여 유다에 바알 숭배를 확립했다. 6년 후, 여호야다가 솔로몬 성전에서 요아스를 왕으로 즉위시키는 것을 보고 아달랴는 경악했다. 그녀는 반란을 막으려 달려갔으나, 여호야다의 명령에 따라 성전 밖에서 장군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는 그녀의 피가 "성전을 더럽힐 것"이기 때문이었다.
 

7. 아달랴 통치 기간의 연대 측정

 
윌리엄 F. 올브라이트(William F. Albright)는 아달랴의 통치 기간을 기원전 842년에서 837년 사이로 보았다. 반면, 에드윈 R. 틸레(Edwin R. Thiele)는 그의 대표작 세 번째 판에서 그녀의 통치 기간을 기원전 842/841년부터 836/835년 사이로 연대를 측정한다. 그러나 아달랴의 시작 연대를 기원전 842/841년으로 보는 것은, 틸레가 그의 아들 아하시야의 사망 연대로 제시한 기원전 841/840년보다 1년 빠르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틸레는 이러한 모순을 결코 해결하지 못했다.
 

8. 문학과 음악 속에서의 아달랴

 
아달랴는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유명한 여인들에 대하여(De Mulieribus Claris)와 크리스틴 드 피장(Christine de Pizan)여인들의 도시 책(The Book of the City of Ladies)에서 논의되었다.
 
1691, 프랑스 비극 작가 장 라신(Jean Racine)은 이 성서 속 여왕에 대한 연극 아탈리(Athalie)를 썼다. 독일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은 라신의 연극을 위한 극음악(그의 작품 번호 74)을 작곡했고, 이 음악은 1845년 베를린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멘델스존 음악에서 가장 자주 연주되는 발췌곡 중 하나는 사제들의 전쟁 행진곡”(War March of the Priests)이라는 제목이다.
 
1733, 음악가이자 작곡가인 헨델(Handel)은 아달랴의 삶을 바탕으로 한 오라토리오 아탈리아(Athalia)를 작곡하며 그녀를 이세벨의 딸, 바알 숭배자 유다의 여왕이라고 칭했다. 바알은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타나크/구약성경에서 자주 숭배했던 가나안인들의 다산의 신이었다.

2025년 9월 9일 화요일

아하시야(Ahaziah of Judah, BC. 863~841년경) : 유다의 제6대 왕(BC. 842~841년)

아하시야(Ahaziah of Judah, BC. 863~841년경) : 유다의 제6대 왕(BC. 842~841)

 

  • 이름 : 아하시야(Ahaziah of Judah, 히브리어: אֲחַזְיָהוּ ʼĂḥazyāhū; 그리스어: Ὀχοζίας Okhozias; 라틴어: Ahazia) 또는 여호아하스 1(역대하 21:17; 25:23)
  • 출생 : 기원전 863년경
  • 사망 : 기원전 841년경
  • 재위 : 기원전 842~841년경
  • 부친 : 여호람(Jehoram)
  • 모친 : 아달랴(Athaliah)
  • 배우자 : 십야(Zibiah)
  • 자식 : 여호아스(Jehoash of Judah)

유다 왕 아하시야
유다 왕 아하시야

1. 유다 왕 아하시야

 

아하시야(Ahaziah of Judah)또는 여호아하스 1(역대하 21:17; 25:23)는 유다의 여섯 번째 왕이며, 이스라엘 왕 아합의 딸(혹은 어쩌면 자매)인 아달랴와 여호람의 아들이다. 그는 어머니이자 뒤이은 통치자인 아달랴를 통해 다윗 왕조와 오므리 왕조 양쪽의 후손이 된 첫 유다 왕이기도 하다.

열왕기하
826절에 따르면, 아하시야는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가 22세였고, 1년간 통치했다. 역대하 222절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통치를 시작했을 때의 나이를 42세로 기록한다.

 

2. 아하시야의 통치 연대

 

윌리엄 F. 올브라이트(William F. Albright)는 그의 통치를 기원전 842년으로, E. R. 타일(E. R. Thiele)은 기원전 841/840년으로 제시했다. 르호보암 문서에서 설명되듯, 타일의 유다 초기 왕들에 대한 연대는 내부적 불일치를 지녀 아하시야의 통치를 그의 어머니 아달랴가 왕위를 찬탈한 이후 1년 뒤로 놓이게 했다. 이후 학자들은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이들 왕들의 날짜를 1년 앞당겼고, 그에 따라 현재 글에서는 아하시야의 재위 연대를 타일보다 1년 이르게 잡는다.

 

3. 아하시야의 치세

 

아하시야는 유다 왕 여호람의 막내아들이었다. 역대하 211617절에 따르면 그의 형제들은 블레셋과 아라비아 연합의 습격으로 끌려갔다.

어머니 아달랴의 영향 아래
, 아하시야는 야훼 신앙파를 불쾌하게 하는 형태의 예배를 도입했다.

아달랴의 친족들이 그의 자문역이 되었고
, 그들은 그에게 이스라엘 왕이자 그의 외삼촌인 여호람과 함께 아람 왕 하사엘에 대항하는 원정에 참여하라고 권유했다. 전투에서 여호람이 부상을 입자, 그는 이스르엘로 요양하러 갔다. 아하시야도 길르앗의 전선에서 물러났고, 예루살렘을 잠시 방문한 뒤 여호람과의 회담을 위해 이스르엘로 갔다가 예후의 반란에 휘말렸다. 열왕기하의 기록에 따르면, 아하시야와 여호람은 반역을 일으킨 장군 예후를 함께 만나러 나갔고, 여호람은 예후의 살의(殺意)를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아하시야는 활을 든 예후가 외삼촌을 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목숨을 구하려 도망쳤으나, 이블르암의 구르 어귀에서 부상을 입었고, 므깃도에 겨우 이르러 그곳에서 죽었다(열왕기하 9:2228). 한편 역대하는 아하시야의 죽음에 대해 다소 다른 내용을 전하는데, 예후의 쿠데타 후 사마리아에 숨어 있던 그가 예후의 명을 받은 부하들에게 발각되어 살해되었다고 기록한다.

 

4. 텔단 비문(Tel Dan Stele)

 

텔단 비문은 기원전 9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텔단에서 발견되었으며 성경 밖 자료 중 다윗 왕조를 언급하는 가장 중요한 고고학 유물로 평가된다. 텔단 유적 발굴 중 1993년과 1994년에 발견된 이 비문의 파편에 따르면, 비문 작성자는 유다의 다윗 왕조 출신 왕 아하시야와 이스라엘 왕 여호람을 자신이 죽였다고 주장한다. 이 비문의 작성자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인물은 아람의 하사엘이다. 이 비문이 동시대 기록일 가능성은 있지만, 이 시기의 왕들은 자신의 업적을 과장해 자랑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두 왕을 성경의 기록대로 예후가 죽였는지, 아니면 비문이 주장하듯 하사엘이 죽였는지, 혹은 예후가 하사엘과 협력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브라이언트 G. 우드에 따르면 열왕기상 1915절에서 예언자 엘리야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다마스쿠스로 가서 하사엘을 아람의 왕으로 기름 붓도록 명령받은 것은 이례적인 상황으로 평가되며, 이후 하사엘은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5. 연대기 문제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년 계산 달력은 6개월 차이가 났다. 유다는 가을에 해당하는 티쉬리(Tishri)부터, 이스라엘은 봄에 해당하는 니산(Nisan)부터 시작했다. 따라서 두 왕국의 연대를 교차 동기화하면, 어떤 왕의 즉위와/또는 치세 종료 시점을 6개월 범위로 좁힐 수 있다. 아하시야의 경우 성경 자료에 따르면 그의 즉위 시점은 기원전 841년 니산월 1일과 같은 해 티쉬리월 1일 전날 사이로 좁혀진다. 그의 사망도 이 6개월 범위 안에서 일어났다. 이 날짜들은 타일(Thiele)히브리 왕들의 신비한 숫자3판이 제시한 연대보다 1년 앞선 것으로, 르호보암 문서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타일이 끝내 해결하지 못한 내부 불일치를 수정한 결과다.

레슬리 맥폴
(Leslie McFall)은 아하시야와 그의 아버지 여호람 사이에 공동 통치가 있었다고 제안했는데, 이는 여호람이 죽기 1년 전에 걸린 병(역대하 21:1819) 때문에 생겨난 조치라는 것이다. 맥폴의 1년 공동 통치 구상은 여호람이 앓은 병의 심각성과 부합하며, 상식적으로도 공동 통치자를 세울 만한 상황을 설명해 준다. 이 가설은 열왕기하 825절과 929절 사이의 겉보기 모순도 설명한다. 첫 구절은 아하시야가 이스라엘 왕 여호람의 제12년에 시작했다고 말하지만, 두 번째는 여호람의 제11년으로 제시한다. 전자는 단독 통치의 시작을, 후자는 1년 앞선 공동 통치의 시작을 가리킨다는 해석이다. 타일은 이 두 구절의 겉보기 불일치를, 열왕기하 825절은 비계승 방식(non-accession) 계산, 열왕기하 929절은 계승 방식(accession) 계산이라고 보아 설명했는데, 이는 당시 유다가 비계승 계산에서 계승 계산으로 되돌아가던 과도기를 반영한다는 주장이다. 타일의 설명도 일리가 있지만, 아래 정보 상자에서는 맥폴의 공동 통치안을 채택했다. 이에 따르면 1년 공동 통치는 기원전 842년 니산월 1일 이후 6개월 중 어느 시점(이스라엘의 니산력과 비계승 계산 기준으로 여호람 제11, 열왕기하 9:29)에 시작한다. 유다 달력으로는 기원전 843/842, 즉 기원전 843년 티쉬리에 시작하는 해가 된다. 아하시야의 단독 통치는 기원전 841년 니산월 1일 이후 6개월 구간(이스라엘 왕 여호람 제12, 열왕기하 8:25)에 시작하며, 그의 죽음도 이 6개월 구간 안에서 일어났다.

모우리(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모우리 (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 ( 牟義理 )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   【 1878 년 】 미국 오하이오주 벨빌 (Bellville) 근교에서 사무엘 모우리 (Samuel Mowry, 1850-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