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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12일 일요일

함태영 [咸台永, 1873-1964]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 목사

함태영 [咸台永, 1873-1964]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 목사

 
일제강점기 때, 한성재판소 검사, 대심원 판사 등을 역임하였고, 교회세력을 배경으로 31운동을 이끌었으며 해방 이후, 3대 부통령을 역임한 법조인ㆍ목사ㆍ정치인ㆍ독립운동가. 본관은 강릉(江陵). 호는 송암(松岩)이다.

 

1873

  • 18731022일 함경북도 무산에서 함우택(咸遇澤)의 아들로 태어났다.
  • 아버지 함우택은 서당의 훈장이었고 작명, 관상, 풍수지리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함우택은 본부인 밀양 손씨를 잃고, 연이어 두번째 부인 동래 정씨도 잃고, 후에 맞이한 부인 원주 변씨에게서 함태영을 보았다.
 

1889

  • 아버지 함우택은 전라좌수영 도시 무과에 급제하여 1889(고종 26)에 선략장군 행용양위 부사과에 제수되어 한양으로 떠났으며 사헌부감찰, 통정대부 의관 등을 지냈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895

  • 1895416, 한국 최초의 근대식 법조인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에 입학, 6개월 과정을 수석으로 수료하였다.
 

1896

  • 189635, 법관양성소 동기였던 이준(李儁)의 뒤를 이어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검사시보로 임명되면서 법관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재직 중 강직한 성품과 불의를 응징하는 성격을 보였다.
 

1898

  • 1898(광무 1) 726일 김홍륙이 황태자의 커피에 독을 타서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 되었다. 고종은 냄새가 이상하여 마시지 않았는데, 황태자는 마시다가 토하고 기절했다. 김홍륙에 대한 재판을 평리원 판사 함태영이 맡게 되었다. 725일 고종 탄신 다음 날 에 발생한 것으로 김홍륙은 시베리아에서 서양 요리사 김종호를 궁중 요리사 로 추천하여 고종 과 황태자의 수라상을 차리고 있었다. 수라상은 내 소주방에서 접시와 음식을 먼저 검사하고 맛보고 올리는데, 그 커피를 맛본 사람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함태영은 일단 김홍륙에게 증거 불충분 이란 이유로 무죄 또는 가벼운 처벌로 끝내려 하였다. 민씨 가문에서는 극형 에 처하라고 계속 압력을 보냈다. 그러나 함태영은 민씨 정권의 요구를 거절했다.
  • 훗날 김홍륙의 먼 일가 후손인 김재준(金在俊) 목사는 만년의 함태영에게 이 사건의 진상을 물어보았다. 함태영은 이 사건은 민씨네가 조작한 음모였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고종으로부터 어떠한 밀지가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끝내 함구하였다. 재판은 다른 판사에게 넘겨지고 김홍륙 등은 사형당했다.
  • 189810월 독립협회 활동을 하다가 검거되어 재판에 회부된 이상재(李商在) 등 중심인물 17인에 대하여 경미한 처벌을 받도록 하였다가 파면당하였다.
  • 1898112일 주임관 4(奏任官四等)으로 특별 서임되었다.
  • 1116일 함태영은 한규설과 함께 상주를 올려 독립협회를 방해하던 조병식, 민종묵, 이기동, 김정근 등을 독립협회를 증거 없이 무고했다며 탄핵하였다.
  • 그러나 고종의 의중임에도 소신껏 이상재 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고 1122일 고등재판소에서 알아서 조사할 일을 관인이 규정을 준수하지 않고 수시로 드나들면서 봤다는 이유로 파면당하였다.
  • 그러나 5일만에 복관되어 1127일 법부검사가 되었다. 이후 법부 대심원(大審院복심법원(覆審法院)의 판사를 역임하였다.
 

1899

  • 함태영은 독립협회 등의 편의를 봐주었다는 이유로 1899313일자로 법부 검사에서 다시 한성부재판소 검사 주임관 41(轉任漢城府裁判所檢事 奏任四等一級)으로 전출되고 일반 죄수와 민사를 담당하다가 43일 면직되었다
  • 1899(광무 2) 5월 고종은 검사 사직서를 내고 두문불출 하고 있던 함태영에게 일본에 다녀오라는 명을 받았다. 그것은 일본 에 있는 망명 정객들의 동정을 살피고 오라는 밀령이었다. 18995월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며칠간 일본에 체류하며 함태영이 어떠한 일을 하였는지, 어떤 인물들을 어떻게 감시하였는지는 알려져있지 않다
 

1902

  • 1902214일 전라남도 관찰소주사 판임관 2(全羅南道觀察所主事 敍判任二等)이 되고 528일 정3품으로 승자되었으나 190392일 면직되었다가 936품으로 복직했다.
 

1904

  • 1904430일 철도원주사(鐵道院主事)가 되었으나 513일 사직서를 제출하고 의원면직하였다. 다시 1904년 613일 철도원주사 판임관 3(鐵道院主事 敍判任三等)에 임명되었다가 73일 근무 중 직무유기로 징계, 76일 면직되었다.
 

1905

  • 다시 법관으로 복직, 1905(광무 8) 225일 평리원 검사, 같은 해 330일 평리원 검사 주임관 41(平理院檢事 敍奏任四等一級)이 되고, 52일 죄인을 조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 1905521일 평리원 검사직을 사직하였으나 같은 날 법부참서관에 임명되었다.
  • 1905(광무 8) 623일 법부참서관 주임관 4(任法部參書官 奏任四等)에 임명된 뒤, 그해 725일 겸임 법부 법률기초위원(法部法律起草委員)을 거쳐 109일 정3품이 되었다. 1905115일 경가전(慶嘉殿)의 개수 시, 감독관으로 공사에 참여한 공로로 정3품 당상관 통정대부로 승진했다.
 

1906

  • 1906629일 주임관 45급이 되고, 같은 해 12월 특별 상금으로 30(三十圜)을 받았다.
 

1907

  • 1907620일 법부서기관 주임관 3(法部書記官 奏任三等), 628일 주임관 24(奏任二等 四級)을 거쳐 1907510일 법부서기관(法部書記官)이 되었다.
  • 순종 즉위 후 1907(융희 1) 827일 법부 형사국 서기관으로 재직 중 겸임 형법교정관에 임명되었다
 

1908

  • 1908(융희 2) 법부 형사국 서기관이 되었다가, 그해 914일 판사에 임명되고 대심원판사(大審院判事)로 발령되고 108일 판사 주임관 2(判事 奏任官二等)이 되었다.
  • 그가 기독교인이 된 동기는 그의 부친이 먼저 기독교인이 되어 연동교회에 열심히 출석한 데 영향을 받았으며, 1908년 복부내종으로 사경을 헤매던 중에 기도로 치료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1909

  • 1909년 연동교회 당회장 게일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부친이 묘동교회로 분립하여 나갈 때 함태영은 계속 연동교회에 남아 집사가 되었다.
  • 19091월 연동교회의 집사로 임명되었다.
 

1910

  • 1910(융희 4) 경성부 경성공소원 판사로 발령되었으나 102일 경술국치 후 사직하였다.
 

1911

  • 연동교회에서 1911년에 장로가 되었다.
 

1915

  • 1915년 경충노회 추천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8

  • 19184월 함태영은 남대문교회의 조사(助師, 대한민국 건국 후 전도사로 명칭변경)에 임명되었다.
  • 평양 장로회 신학교 재학 중 1918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헌법 기초위원의 한 사람으로 피선되었다.
 

1919

  • 1919년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운동계획이 구체화되자 교회세력을 배경으로 31운동을 막후에서 이끌었다. 이때 다른 민족대표들이 잡힐 경우 그들의 가족을 보호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최린(崔麟) 등의 부탁을 받아 33인의 민족대표로 서명하지 않았다.
 

1920

  • 31독립운동이 계획대로 전개된 뒤 주동 인물로 잡혀, 이듬해 10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921

  • 1921년 출옥하였다.
 

1922

  •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목사가 되어 종교활동에 힘썼다.
  • 192212월 경충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충청북도 청주부 청주읍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23

  • 192398일부터 913일까지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열린 조선장로회 총회에서 제12대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1926

  • 1926년 충청노회장을 역임하였다.
  • 1926년 청주교회 담임목사 재직 중 충청노회 노회장에 선출되어 겸직하였다.
  • 1926910일부터 919일에는 평양에서 열린 조선장로회총회에 참여하여, 일본 문부성의 종교법안 반대에 기독교 장로교회 측 진정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왔다.
 

1927

  • 1927년 마산 문창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 192712월에 마산 문창교회의 제6대 목사로 부임하여 교회를 안정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28

  • 1928년 경남노회장을 역임하였다.
 

1929

  • 192912월 경성 연동교회의 초빙을 받고 연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가 대한제국 시절 한성에서 처음 평신자로 다녔던 교회였다. 1929년 평양숭실전문학교 이사를 역임하였다.
 

1930

  • 1930년 조선예수교회서회(書會) 이사를 역임하였다.
 

1932

  • 1932년에는 연동교회 담임목사 재직 중 경성노회(京城老會) 노회장에 선출되었다.
 

1933

  • 1933년 조선기독교 연합공의회 회장을 지냈다.
  • 1933627일 정신여학교 후원발기회의 발기위원의 한사람이 되었다.
 

1934

  • 1934년 신흥우가 주도한 적극신앙단에 가입하였는데, 이것이 서북계 교회지도자들과의 마찰을 일으켰고 장로교 내부의 분란을 일으켰다. 당시 서북계 인사들과 선교사들의 지휘를 받고 있는 총회와 경성노회에 반발하여 경중노회를 따로 분립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1935

  • 1935210일 윤치호, 양주삼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국을 찾아가 기독교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때 함태영은 기독교인들도 죄수들과 자유롭게 대화하도록 허용해줄 것을 제안하였다.
  • 1935919일 중앙 YMCA로 찾아가 윤치호에게 연동교회 재건축 비용 25천엔을 기부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 19351118일에는 경성에서 열린 장로회 경성노회에서 적극신앙단과 관련되어 함태영과 전필순, 권영식 등 목사 3명의 회원권 정지를 가결하였다.
 

1936

  • 1936515일 경성부 수송정 116번지에서 기독교계 연합회 신문인 기독신보사(基督申報社) 창립에 참석하고, 기독신보사의 장로교측 이사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37

  • 1937년 양측의 화해로 경중노회는 자진 해산되었다.
  • 1937년의 조선총독부의 신사 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당하기도 하였다.
 

1938

  • 1938년에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고서에 동지회, 흥업구락부의 관련 인사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었다.
  • 19381016일의 조선신궁 신사 참배 당시 소집에는 응하였으나 신사 참배는 거부하였다
 

1939

  • 19392월부터 조선신학교 설립을 추진, 송창근, 김대현, 김영주 등과 함께 조선신학원 설립기성회를 결성하고 신학교 설립기성준비위원이 되었다.
 

1940

  • 1940년 일제는 그에게 창씨 개명을 강요하였으나 거절하였다. 학도병 권유문 및 각종 서명, 기고, 참여 요구를 거절하고, 목회 활동에 전념하였다.
 

1941

  • 1941년 연동교회 목사직에서 퇴직하고 원로목사에 추대되었
 

1943

  • 19436월 조선신학원 원장에 추대되었다. 그밖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평양숭실학교의 재단 이사로도 활동했다.
  • 1943년 세번째 부인 고숙원이 사망했다. 이후 함태영은 재혼하지 않고 살아남은 두 아들을 혼자 양육하였다.
 

1945

  • 1945년 해방 직전 경성부 송파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 1945년부터 1946년까지 초동교회 초대 목사로 시무했다.
  • 194592일 한국민주당의 창당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98일 미군정 주둔 후, 그는 미군정의 적산불하 공고를 보고 영어 실력으로 미군정 관재국장에 임명된 남궁혁 목사를 찾아가 서울역 입구 근처(경성부 용산구 동자정 15번지)에 있던 일본 천리교 조선교구 본부 건물과 경성교구 본부 건물을 불하, 인수받았다. 그는 경북 김천의 송창근, 평안북도 신의주의 한경직, 최윤관 등을 불러들여 조선신학교에 즉시 합류하였다. 덕수교회 내에 있던 조선신학원장 김재준을 교장으로 선출하고 함태영은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 194510, 35년만에 귀국한 이승만은 곧장 경기도 광주의 둔전 마을로 차를 보내어 함태영을 조선호텔로 모셨다.
  • 함태영은 기독교 목회에 전념하려 하였지만 19462월에 미군정 하에 입법의원이 구성될 때 이승만의 강력한 추천으로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이 되었다.
  • 194512월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요인 귀국 환영회에 참석하였다. 이후 그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 194512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 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 순국선열추념대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6

  • 1946214일 이승만·김구 등에 의해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28인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민족주의 우파를 지지하는 기독교 정치인으로 활약하였다.
  • 1946214일 민주의원 결성대회가 열렸으나 그는 김창숙, 여운형, 정인보, 조소앙 등과 함께 민주의원 의원직을 거부하였다.
  • 1946611일 경성 승동교회에서 장로회 총회 남부대회(1회 남부대회)를 개회할 때 대회장은 배은희, 부대회장 함태영을 추대했다. 611일부터 614일까지 열린 제33차 장로회총회 대회 및 제1차 남부대회에서 그는 조선장로회총회 부회장에 선출되어 47418일까지 재직했다. 이어 1946년 조선기독교총회에서 회장과 부회장을 선출할 때 배은희를 회장으로 선출하였고 그는 기독교총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이어 기독교언론 기독공보사(基督公報社)의 사장에 피선되었다.
  • 1946615일 오후 540분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 1946년 이갑성, 김창숙, 윤치영 등과 함께 이준열사기념사업회의 조직, 창설 과정에 참여하고 그해 714일 이준열사기념사업회를 창립, 1대 기념사업회장에 선출되었다.
 

1947

  • 1947년 조선신학교 졸업생들과 함께 이단 교수 조사위원회 조사위원에 선출되었다.
  • 19471월 서울 인현동에 기독교흥국형제단본부(基督敎興國兄弟團本部)와 함께 조선농민복음학교를 설립하였다. 농민복음학교는 그해 47일에 개교하였다. 310일 덕수교회 창립에 참석하고 창립 기념예배를 주관하였다. 19474월 남부총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48

  • 1948년 민족주의 우파 진영이 단독정부 수립론과, 단독정부 반대론으로 나뉘게 되자 그는 이승만, 이시영 등을 따라 단독정부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 1948년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이승만은 초대 내각 조각에 함태영을 참여시키려 하였지만 함태영이 고령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하는 인사들이 있었다
  • 1948125일 반민특위 특별재판장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국회 표결 결과 김병로가 85, 함태영은 38표로 낙마하였다.
 

1949

  • 1949년 제2대 심계원장(審計院長)
 

1950

  • 19506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손자 함의섭 내외 등 일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갔다.
  • 19507월 조선신학대학장 임시서리에 임명되어 1951427일까지 겸임 재직했다. 심계원장이던 그는 같은 동명이인의 목사 창현 함태영(唱泫 咸泰英)을 내무부 지방국장에 추천하였으나, 창현 함태영은 사양하였다.
 

1951

  • 1951년 한국신학대학장을 지냈다.
  • 한국 전쟁 중이던 1951516일의 제2대 부통령 선거에서 원내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다. 그러나 같은 원내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 장택상과 경쟁해야 했다. 선거 결과 낙선했다. 1차 지명전에서 17표를 받고, 2차 지명전에서는 10표를 받았다.
 

1952

  • 19525, 2대 부통령인 김성수가 부통령직에서 사퇴하자, 무소속으로 제3대 부통령으로 출마하였다. 대통령 출마설, 부통령 출마설 등의 소문이 돌았으나 그는 처음에 출마설을 부인하고 출마 권유를 물리쳤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에게 부통령 출마를 권유했다. 그는 이승만보다 나이가 많았고, 호인(好人)이었다. 이미 제2대 부통령 선거에서도 낙선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는 거절했다. 정치적 기반도 없지만 국민들이 자신의 이름 조차 모르므로 출마는 당치 않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걱정 말라고 하면서 막무가내로 계속 권하므로 마음씨 좋은 함태영은 출마를 결정했다. 이는 이범석의 급성장을 두려워한 이승만의 사전 포석이었고, 이승만의 강경파 측근들의 존재를 우려하던 미국 역시 함태영을 지지하였다. 724일까지도 출마의사를 보이지 않다가 727일에 부통령 출마를 선언하였다.
  • 자유당의 2인자였던 이범석의 성장을 두려워한 이승만의 지원으로 경쟁자인 이범석을 누르고 80세의 나이에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승만이 무소속의 함태영을 추천한 이유로는 이승만 자신이 죽을 고비를 넘겼던 대한제국 고종 때의 독립협회 사건 때 재판장으로 재직중이었던 함태영이 자신을 잘 보아주었다는 과거의 인연과 함태영의 특색 없는 성격과 정치경력이 고려되었다는 것이다. 함태영은 이범석을 112만표 차로 승리하였다. 부통령이 된 함태영은 기독교 운동계 인사를 내각에 장관, 차관 후보자로 천거, 추천하였는데 이 중 이자익 등은 함태영의 추천을 사양, 거절하기도 했다. 이자익은 1942년 분열되고 연락이 두절된 각지의 장로교회를 모아 장로교 총회를 재건했고, 함태영은 이자익의 능력에 감동받아 그를 이승만에게 장관으로 추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자익은 목사로 남겠다며 함태영의 제안을 거절했다.
 

1953

  • 19531115일의 하와이 한인이민 50주년 행사에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개인 사정으로 부득이 가지 못하게 되자, 113일 함태영이 대신 다녀왔다.
 

1954

  • 195442CBS방송 후원회 이사에 선출되었다. 45일 식목일 기념행사에 참석하다. 1954년 한국신학대학 이사장이 되었다.
  • 54417일 서울 남산에서 '촛불예배'로 시작된 부활절 행사가 개최되자, 418일 새벽 530분 테일러 주한 미8군 사령관과 함께 행사에 참석하였다.
  • 1954년 다시 한국신학대학교 학장에 취임하였다.
 

1955

  • 195535일 인촌 김성수의 국민장이 끝난 뒤, 인촌 김성수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자, 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1956

  • 부통령의 임기가 끝난 해 제41회 대한기독교장로회(후의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 1956년 논개의 사당인 의암사 현판을 썼다.
  • 1956년 부통령 퇴임 직후 외교관 여권으로 출국하였다. 19568월 캐나다연합교회의 초청을 받고, 3대 부통령 퇴임 직후 817일부터 김정준 등과 함께 출국, 캐나다 연합교회 총회에 한국측 기독교 대표자로 참석한 뒤 성지순례를 하고,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를 방문, 각국의 기독교 연합회 대표자들을 만나고 기독교 유적지를 답사하고 일본을 방문했다가 19571월 귀국했다.
 

1957

  • 19576월 한국에 입국한 서독과 프랑스의 가톨릭 추기경 일행을 만났다.
 

1959

  • 19592월 한국신학대학 학장직을 사퇴하고, 19593월 한신대학교 명예학장에 추대되었다.
 

1960

  • 1960120일 자유당 당무회의에서 자유당 제4대 정부통령 선거 선거대책위원회 지도위원(이갑성과 공동)에 선출되었고, 122일 자유당과 구 대한국민당계 등 범여권의 선거대책위원회 고문(이갑성과 공동)에 산출되었다.
  • 1960425일 자유당 정권 붕괴 후, 야당 정치인과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1961

  • 1961122일 오후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북아현동에서 자동차 고장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전치 1주의 부상을 당하였다.
 

1962

  • 은퇴 후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공로국민장을 받았다.
 

1963

  • 3공화국 출범 이후에도 이승만의 환국운동을 추진하였고, 19631월 이승만박사 환국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64

  • 1964122일 중앙대학교 명예법학박사를 수여받았다.
  • 19641024일 상오 8시경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1396번지 자택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직후 고혈압과 노환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93세였다. 1025일 정부는 총무처장관 이석제(李錫濟)의 특별담화를 통해 조의를 표하였다.
  • 장례는 국민장으로 엄수되었고 경기도 의정부에 안장되었다.
  • 손자 함인섭은 강원대학교의 설립자이다.

모우리(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모우리 (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 ( 牟義理 )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   【 1878 년 】 미국 오하이오주 벨빌 (Bellville) 근교에서 사무엘 모우리 (Samuel Mowry, 1850-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