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이집트 제22왕조 : 부바스티스 왕조(Bubastite Dynasty, 기원전 943~716년경)
1. 제3중간기와 ‘부바스티스 왕조’의 등장
고대 이집트 제22왕조는 흔히 ‘부바스티스 왕조(Bubastite Dynasty)’로 불리며, 기원전 10세기 초부터 8세기 말까지 하 이집트를 중심으로 통치한 리비아계 메슈웨시 집단의 수장들이 세운 왕조이다. 제21ㆍ22ㆍ23ㆍ24ㆍ25왕조가 묶여 제3중간기로 분류되며, 이 시기 이집트는 상·하 이집트의 권력이 분절되고 지방 유력 세력이 군사ㆍ사제권을 매개로 성장하는 특징을 보인다. 제22왕조는 그 가운데서도 하 이집트 델타의 도시 네트워크, 특히 부바스티스와 타니스에 기반을 둔 정치 연합의 형태로 출현한다.
2. 기원과 정체성
메슈웨시의 정착과 이집트화 제22왕조의 주도층은 ‘메슈웨시(Meshwesh)’로 알려진 고대 리비아계 집단으로, 이미 제20왕조 무렵부터 나일 델타 지역에 정착해 ‘마의 대족장(Chiefs of the Ma)’으로 불리며 군사ㆍ행정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점차 이집트화되어 신왕국 이래의 관료 체계와 종교 관습, 호루스명ㆍ프레노멘 등 왕명 체계를 채택했다. 제22왕조는 이러한 장기적 정착과 혼융의 귀결로 성립하며, 외래 기원의 정체성은 유지하되 통치 이념과 상징에서는 전통 이집트 왕권의 계승을 강조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3. 수도 문제
부바스티스와 타니스 문헌 전통에서는 제22왕조를 ‘부바스티스 왕조’라 부르지만, 실제 통치 중심과 왕릉은 타니스에 집중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마네토 전승은 부바스티스를 왕조의 발상지로 지시하지만, 고고학 자료와 왕릉의 분포는 타니스를 실질 수도로 지목한다. 결과적으로 ‘부바스티스=정체성의 표상, 타니스=실제 권력의 좌정’이라는 이중 구도가 이 왕조의 지역 기반을 설명한다. 델타 동부의 두 거점은 동지중해 해상 교역로와 접속했고, 이는 제22왕조가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했다.
4. 시기 구분과 연대
제22왕조의 재위 기간은 대략 기원전 943년에서 기원전 716년으로 제시된다. 왕조 성립은 쇼센크 1세(Shoshenq I)가 주도했고, 이후 오소르콘 1세, 타켈로트 1세 등 메슈웨시 출신의 계승 군주들이 뒤를 이었다. 말기에는 쇼센크 5세(Shoshenq V) 이후 권력이 더욱 쪼개졌고, 타니스의 다음 통치자로 지목되는 오소르콘 4세(Osorkon IV)는 하 이집트의 일부만을 실질 통제한 인물로 파악된다. 이 연표는 제3중간기의 일반적 특징인 ‘분절적 통치’와 맞물린다.
1) 창건자 : 쇼센크 1세(Shoshenq I, 재위 기원전 943~922년경)
쇼센크 1세(Shoshenq I)는 제22왕조의 창건자로, 메슈웨시 족장 집단의 군사력과 델타 정치 연계를 바탕으로 하 이집트 왕좌를 장악했다. 카르나크의 승리 비문과 다양한 기물에 남은 그의 이름은 상하 이집트 통합 권위의 상징적 재주조를 보여 준다. 일부 전승에서는 그를 구약성서의 ‘시삭(Shishak)’과 동일시하는 시도가 이어져 왔는데, 이는 쇼센크 1세의 레반트 원정 전통과 연계해 해석되곤 한다.
2) 중흥과 사제권
오소르콘 1세(Osorkon I, 재위 기원전 922~887년경)와 후계 오소르콘 1세(Osorkon I, 생몰년 미상)는 쇼센크 1세의 후계로 제22왕조의 제도화를 진척시킨 군주이다. 그는 아문 사제직과 왕권의 접합을 강화하고 지방 유력자 네트워크를 재편하여 델타 권력의 안정을 도모했다. 이 무렵 제22왕조는 상 이집트 테베 지역의 신관ㆍ사제권과 동맹 또는 긴장 관계를 조율해야 했고, 이 조정 실패는 훗날 제23왕조의 발생과 남북 이중 권력 구조로 이어지는 원인이 된다. 즉, 강력한 종교 권력이 정치적 균형을 좌우하는 제3중간기의 패턴이 이 시기에 뚜렷해진다.
3) 분절과 경쟁
제23왕조, 24왕조, 25왕조와의 교차 제22왕조가 존속하는 동안 하·상 이집트에서는 복수의 왕조가 병존하는 양상이 전개된다. 제23왕조는 주로 상 이집트와 일부 델타 거점에서 제왕 칭호를 사용하며 병렬 통치 구조를 형성했고, 서델타의 사이이스(Sais) 지역에서는 테프나크테(Tefnakhte) 계통이 부상해 제24왕조로 이어졌다. 누비아 기원의 제25왕조는 남방으로부터 북상해 테베ㆍ델타에 영향력을 투사하며 이집트 재통합을 시도했다. 이러한 다중 왕조의 병존은 전통적 ‘단일 파라오’ 개념을 약화시키며, 지역 기반과 군사력, 종교 권위의 삼중축이 각 축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구조를 만든다.
4) 후기 통치와 오소르콘 4세(Osorkon IV, 재위 기원전 8세기 후반)
쇼센크 5세(Shoshenq V) 이후 타니스 계열의 왕권은 급격히 축소되었고, 오소르콘 4세(Osorkon IV, 생몰년 미상)는 때때로 제22왕조 구성원으로 보지 않기도 한다. 그의 실질 통제 범위는 하 이집트의 일부에 국한되었고, 사이이스의 테프나크테와 레온토폴리스의 이우푸트 2세(Iuput II) 등 경쟁 세력과 병렬로 존재했다. 이 시기의 정치 지형은 ‘왕조=국가’ 등식이 아니라 ‘왕조=지역 연합체’에 가까웠고, 외교·군사 사건의 충격에 따라 권역 간 경계가 유동적으로 재편되었다.
5. 제22왕조의 특징
1) 행정과 종교
델타 네트워크와 테베의 아문 사제권 제22왕조 행정의 핵심은 델타 도시 네트워크의 통합과 관할이었다. 부바스티스ㆍ타니스 같은 거점은 해상 교역ㆍ수로 교통의 허브였고, 이들 거점을 잇는 가도ㆍ운하 체계가 물자 이동과 과세·징발의 기반이 되었다. 종교적으로는 테베의 아문 신전 세력이 막강했고, 신관직 세습과 신전 경제의 독립성이 강하여 왕권과의 조율이 필수적이었다. 왕조는 종교 축제를 후원하고 신전 건축을 이어가며 정통성을 강화했으나, 사제권의 자율성은 남북 이중 권력의 구조적 배경으로 남았다.
2) 군사와 대외관계
동지중해와 누비아의 압력 제22왕조는 동지중해 정치 변동과 남방 누비아의 부상이라는 이중 압력 속에서 균형을 모색했다. 델타 도시의 해상 연결은 경제적 기회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외부 세력의 간섭 가능성을 높였다. 남방에서는 쿠시계 제25왕조가 종교적·문화적 공명(테베·아문 숭배)을 바탕으로 북상하며 정치적 통합을 지향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제22왕조는 혼맥, 종교 후원, 군사 동원을 조합했으나, 분절된 권력 구조 탓에 일원적 대응이 제한적이었다.
3) 물질문화와 언어, 종교 실천
제22왕조는 이집트어 전통 문서 문화와 종교 상징체계를 계승했으며, 왕명과 신의 칭호, 제의 절차 등에서 전통을 충실히 유지했다. 동시에 메슈웨시 출신 엘리트의 무장·복식, 장례 관습 일부는 기원을 암시하며, ‘이집트화된 리비아 왕조’라는 성격을 보여 준다. 종교는 고대 이집트 종교를 전체적으로 따랐으며, 아문·라·오시리스 신앙이 지역에 따라 변주되었다. 왕조의 정체성은 이러한 ‘전통의 계승 + 주변문화의 혼융’ 위에 구축되었다.
6. 제22왕조 통치자들
7. 제22왕조의 역사적 의의
제22왕조는 외래 기원의 엘리트가 이집트 국가체제 안에 흡수되어 전통 왕권을 수행한 사례로, 고대 이집트의 유연한 정치·문화 수용력을 보여 준다. 동시에 델타 중심의 지역 권력과 테베 사제권의 이중 구조는 후기 고대 이집트에서 ‘종교-정치 권력 분화’가 갖는 구조적 장기 지속성을 시사한다. 이 왕조의 성쇠는 이후 제24ㆍ25왕조로 이어지는 재편의 전주곡으로 기능하며, 제3중간기의 ‘다중 왕조 병존’이라는 독특한 정치형태를 대표한다.
8. 분절 속의 지속
제22왕조는 분절과 혼융의 시대에 등장한 통치 실험이었다. 메슈웨시라는 외래 기원, 델타 도시 국가망의 현실성, 테베 종교권력과의 공존·경쟁, 다중 왕조 병존이라는 정치적 조건 속에서, 이 왕조는 전통 왕권 표상과 실질 권력 기반을 병행해 유지하려 했다. 수도 표상의 이중성(부바스티스와 타니스), 왕조 구성원의 이집트화, 후기로 갈수록 심화되는 지역 분절은 제22왕조 연구의 핵심 주제가 된다. 이 왕조를 통해 제3중간기의 복합성과 고대 이집트 국가의 적응력을 동시에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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