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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0일 화요일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Edinburgh Conference, 1910년 6월 14-23일) - 윤치호 참석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Edinburgh Conference, 1910년 6월 14-23)

 
국제선교협의회(IMC,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1921년에 설립되었지만 그 뿌리는 19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것은 또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윌리엄 캐리는 1793년에 인도에 건너가 선교사업에 현대적인 자극을 준 지 오래지 않아 그는 선교사들간의 협력의 필요성을 생각하고 1810년에 케이프타운에서 선교사회의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다양하게 전개된 협력의 노력은 비기독교국가들에서 활동하고 있던 여러 선교회의 대표들이 영국 에든버러에서 열린 전세계 선교사 회의에 참석한 1910년에 그 절정에 이르렀다.
 
1961년 인도의 뉴델리 대회에서 결국 합쳐지게 된 교회의 3가지 흐름인 신앙과 직제(일치), 생활과 사업(봉사), 국제선교협의회(증거)는 직접적으로 에든버러 대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또한 에든버러 대회에서는 비가톨릭교회들과 비희랍정교회 교회들 안에 존재하는 차이점들을 존중하고 인정하자는 자발적인 의사가 표현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대회에서는 초교파적이고 국제적인 협력관계 속에서 크리스챤이 함께 일하고자 하는 열망이 진술되었다.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계속위원회(Continuation Committee)가 설치되고 회장은 모트(John R. Mott), 서기에는 올담(J. A. Oldham)이 선출되었다.
 
존 모트는 에딘버러 선교사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280km를 여행하였는데 그 거리가 자그마치 지구를 68바퀴나 돌 정도였다고 한다. 모든 교회와 선교단체가 더 이상 경쟁하지 않고 서로 연합할 것을 당부하기 위해 그는 인도, 중국, 일본, 브라질, 남아공, 호주, 뉴질랜드 등지를 방문하였고, 한국 역시 두 번이나 방문하였다. 특별히 19071월부터 4월까지 한국을 방문하면서 평양장대현교회에서 열렸던 평양대부흥운동을 경험할 수 있었다. 세계복음화를 위한 연합과 일치의 정신은 마침내 1910614일부터 23일까지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세계선교사대회가 열림으로 모트의 비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참석한 대의원도 1,200명이 등록하여 성황리에 개최되었고, 선교회나 선교단체도 무려 160개나 참석하여 큰 호응을 보였다. 감사한 것은 한국대표도 15명이나 참석해 초기 한국교회의 선교를 상세하게 보고하기도 하였다.
 
1910년 에딘버러 선교사대회의 주제는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이다.
 
개회식은 1910614() 저녁에 대회의장인 어셈블리 홀(Assembly Hall)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이곳은 교회가 서있고, 신학교가 세워진 곳이기에 의미가 더욱 깊은 곳이었다. 대회장인 버레이의 발포가 홀에 들어서자 세 명의 연설자들도 함께 뒤 따랐다. 대회장은 신사여러분, 저는 위대하신 왕으로부터 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의심할 바 없이 위엄과 존경하는 마음으로 메시지를 받으시길 바랍니다라고 선포하자 대회는 시작되었다. 대회장이 왕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전달할 때에 모든 사람들이 일어섰다: “왕께서는 저로 하여금 오늘 에딘버러에서 열리는 세계선교사대회에 깊은 관심을 표시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왕의 메시지가 전달된 이후에 세 명의 연설자, 즉 대회장, 캔터베리의 대주교, 로버트 스피어(Robert E. Speer)가 연설을 하였는데 대회장인 버레이의 발포는 선교사대회 기간 동안 무엇보다도 일치(unity)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더욱이 개회식 때 특별한 사항이라면 독일 식민성(植民省)이 에딘버러 대회에 보낸 메시지이고, 그 다음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가 에딘버러대회 의장에게 보낸 편지이다. 루즈벨트 대통령 역시 일치를 촉구하였다: “기독교 사역을 확장하기 위하여 크리스천간의 연합 정신은 교리의 차이점으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리의 차이점으로 더 많은 어려움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교리의 차이점이 우리의 사역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곧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이 대회는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보아 선교적인 노력을 검토해 보기 위해 소집된 평의회로서 특히 세계복음화의 이상을 제시한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국제선교협의회의 창설과 에든버러 회관의 개관을 통해서 이 대회는 선교협회들 간의 보다 긴밀한 협동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많은 기독교단체들과 약 160여개의 선교단체 또는 선교협회의 대표로 파견된 약 1,200명의 인원이 참가하였다. J. R. 모트가 이 위원회의 의장이었으며 J. H.오울덤이 이 대회의 대회장이었다.
 
1910년 영국 에든버러에서 개최된 제1차 회의에는 피선교국의 회원국에서 제외되었고 다만 초청형식으로 참가하였는데, 한국에서는 윤치호 박사가 참가했다. [한국대표로 참석한 사람은 아담스(James E. Adams), 에비슨(O. R. Avison), 버크몰(H. O. T. Burkmall), 푸트(W. R. Foote), 포사이더(W. H. Forsythe), 게일(James S. Gale), 질레트(P. L. Gillett), 해리스(M. C. Harris), 존스(George Heber Jones), 녹스(Robert Knox), 마펫(S. A. Moffett), 레이드(W. T. Reid), (Alex F. Robb), 언더우드(H. G. Underwood), 윤치호(T. H. Yun)이다.]
 
이후 1921년에 정식 발족하면서 피선교국의 신생교회도 참가할 수 있도록 되었다. 그후 1928년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선교협의회에는 우리나라에서 신흥우ㆍ양주삼ㆍ정인과ㆍ김활란ㆍ노블(W. A. Nobble)ㆍ마펫(S. A. Moffett, 마모삼열) 등이 정식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2024년 2월 15일 목요일

한국의 러시아정교회

한국의 러시아정교회

 
러시아정교회에서 북아시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표트르 대제 때부터이며, 종교적인 이유에서보다는 정치적 이유가 더 작용하여 수행되었다. 시베리아 개발의 동기가 선교확장까지 자극하였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대개 사제들이 아니면 수도사들이었다. 그래서 1750년까지는 캄챠카반도의 사람들이 명목상으로는 다 기독교인이 되는 발전을 기록할 수 있었다. 러시아정교회가 잠시 중국의 북경에서 선교하기는 하였지만 대개는 만주변경의 전란에서 붙잡힌 소련 사람들로서 그곳에까지 끌려와 그대로 정착한 본국인에 대한 영적 지도에 국한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19세기 말엽 조선에는 러시아 군인들을 포함하여 약 120여명의 러시아인 그리고 러시아 국적 한국인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주일이면 러시아 공사 관저에서 예배를 드렸으나 정교회 사제가 없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주한 러시아 공사는 러시아정교회 신자들의 고충을 해결하기위해 189713일 본국에 사제 파송을 요청했고, 그해 6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한국 선교를 명령하였다. 이에 암브로시우스 구드코 대신부, 니콜라이 알렉세예프 보제, 크라신 등으로 구성된 선교단이 1898년 러시아를 출발했으나, 당시 한ㆍ러관계가 악화되어 그 중에 니콜라이만 입국하게 되었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 신부의 입국 실패로 제대로 종교 행사를 가질 수 없게 되자 러시아정교회는 다시 19001월 초 두 번째 선교단을 파송하였다. 이들은 러시아공사관 안에 교당을 설치하고 2월부터 공식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한국정교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1899년 최초의 러시아인 선교사로 니콜라이 부제가 입국하였고 두 번째 러시아인 선교사로 크리산토스 사제가 입국하여 서울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에서 리뚜르기야(성찬예배)를 봉헌함으로써 한국에서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업이 자리잡게 되었다. 당시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와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II세는 서로 협력하여 서울 정동(현 경향신문사 자리)에 한국에서 최초로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건축하였으며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은 서울을 중심으로 고양, 문산 등 경기도 지방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청ㆍ일전쟁,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 12차 세계대전, 한국 전쟁을 겪는 동안 한국에서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업은 위축되었다. 이 기간 동안 한국인으로서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로 서품되어 활동한 사람은 1912년에 처음으로 서품된 사재 요한 강탁 신부와 1924년에 돌아가신 사제 루가 김희춘 신부, 그리고 1950년에 납북된 사제 알렉세이 김의한 신부 등 3명 뿐이다.
 
김의한 신부 납북 후 수년 동안 성직자도 없이 교회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한국의 러시아 정교회 공동체는 그리스 정교회의 도움과 보호를 받다가 1956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관할로 귀속되었다. 이로써 러시아 정교회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지 59년만에 중단되었다.
 
 
러시아 정교회 한국선교회의 역사는 조선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선교회는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을 마치고 대한제국을 선포할 준비를 하던 무렵, 러시아 제국 외교사절단 부영사 대행의 성직자 파송 요청에 따라 공식적으로 창설되었으나 그 선교 활동은 1899년 중순 2명의 러시아인 선교사와 19002월 흐리산프 셧콥스키 대수도사제(архимандрит Хрисанф Щетковский)가 한성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싶었던 고종이 1898년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짓도록 서울 정동의 토지 825평을 러시아 외교사절단에 선물하였는데,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외교적 스캔들이 되었고 러시아 정부는 결국 땅 값을 한국 정부에 환불함으로써 토지를 사실상 구입하였다.
 
당시 한국인들은 한국에 새로 들어온 정교회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0049일자 제국신문이 정교회 활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최근 희랍교(그리스 정교)는 들어온 지가 수 주일에 불과한데 입교하는 사람이 심히 많다고 하니 어느 교파이던지 천주교(기독교 전반)란 일반적으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듯하다.” 선교회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러시아어, 기독교 교리 등을 가르쳤는데, 그 중 한국인 14명이 세례를 받아 정교 신도가 되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은 1903년에 재장비한 선교회 부속 학교에서 열렸고 성 니콜라이으로 명명되었지만 불과 1년 후 문을 닫게 되었다. 1904, 일본과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 간 대립이 첨예해지면서 한반도와 만주가 전장이 되었다. 한국에 진주한 일본군은 러시아 선교사들을 추방하였고 한국선교회의 활동을 중단시켰다. 러일전쟁 후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활동은 1906년 재개되었다. 1906~ 1912년 성찬예배가 한국어로 완역됐고 선교회 부속의 새 남학교들과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322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 중 최초의 조선인 정교회 성직자도 생겼다.
 
그러나 정교회 자체가 본래 선교에 대한 신학이 빈약하였고, 또 교회가 비잔틴 전통에 따라서 황제교황주의의 영향 아래 국가의 수장이 곧 교회의 수장이라는 교리적 원리 때문에 선교가 제정 러시아의 국책에 구체적으로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국선교의 역사도 곧 러시아의 한국내 정치 및 외교, 군사활동과 기복을 거의 같이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부진을 면할 수 없었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강태용, “러시아 정교회”, 기독교사상 43(4), 1999.4, 222-228.
기독신문, [이주일의 역사] 러시아정교회의 한국선교, 2010.12.25.
서울신문, 러시아정교회의 한국 선교 중단과 70년 만의 재개, 2019.1.8.

2024년 2월 13일 화요일

1773년 예수회 해산 - 클레멘스 14세, Clement XIV, 1705-1774(재위 1769-1774)

1773년 예수회 해산 - 클레멘스 14, Clement XIV, 1705-1774(재위 1769-1774)

 
예수회를 금지시키는 데 동의했기 때문에 주로 논란이 있어 왔던 교황 클레멘스는, 비록 매우 원칙적이고 의무감이 투철한 사람이기는 했어도, 나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외과의인 로렌초 강가넬리와 안젤라 세라피노의 아들인, 지오반니 빈센초 안토니오 강가넬리는 17051031일에 이탈리아 리미니 근처의 상트 아르칸젤로에서 태어났다. 그는 클레멘스 14세로 176964일부터 1774922일 로마에서 죽던 날까지 통치했다.
 

어려서 고아가 된 지오반니는 친척들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리미니의 예수회 학교와 우르비노의 피아리스트회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그의 친척 중 하나인 프란체스코수도회 수사와 더불어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는 그 수사의 영향을 받아 17235월 그 수도회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1년 후에 우르비노에서 그의 아버지 이름인 프라로렌초로서 엄격한 서약을 행했다.
 
그는 로마의 보나벤투라대학에서 철학과 신학부분의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런 다음 아스콜리ㆍ볼로냐와 밀라노에서 9년 동안 가르쳤다. 1740년에 그는 성 보나벤투라수도원의 수도원장이 되었다. 교황 베네딕투스 14세는 그가 수도회에서 전체 설교를 하는 것을 듣고 그를 교황청의 자문으로 앉혔다. 그의 동료들은 1753년과 1759년에 두 번씩이나 그를 수도회의 총장으로 선출했으나 그때마다 그는 거절했다. 그는 1759924일에 교황 클레멘스 13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받았다. 새로 추기경이 된 그는 파니스페르나에 있는 그의 명의 교회인 성 로렌초교회 근처에서 살았으며, 프란체스코수도회의 청빈한 생활을 계속 실행해 나갔다.
 
이 당시 교회로서는 골치아픈 문제들이 많던 시기였다. 가톨릭이 대부분의 서구 기독교 국가들의 국가종교이기는 했으나, 사실상 대부분의 정부들은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조차 그들의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얀센주의자들, 볼테르주의자들 및 백과전서파들은 교황청에 대한 반대운동을 선동했다. 부르봉가(프랑스ㆍ스페인ㆍ나폴리ㆍ프라마의 지배자들)는 공동정책을 펴서 교황의 세력을 구속했다. 교황의 첫 번째 지지그룹인 예수회파가 이들의 표적이 되었다.
 
예수회를 금지시키는 문제는 클레멘스 13세의 후계자를 선출하기 위해 1769215일에 소집된 추기경 교황선거회의 논의주제였다. 대단한 세력을 가진 성직자들은 예수회를 지지하는 편과 지지하지 않는 편의 추기경들의 명단을 작성했다. 그 명단은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자”, “좋지 못한 자”(즉 예수회 지지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평판이 매우 좋은 자로 구분되어 있는데, 추기경 강가넬리의 이름은 그 중 첫 번째 명단에 선출되었다. 1769518, 그는 47표 중 46표로 선출되었다. 그 반대표 하나는 그 자신이 교황 클레멘스 13세의 조카인 추기경 카를로 레존니코에게 던진 표였다.
 
예수회에 대한 그의 태도가 추기경들의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기록상에는, 예수회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어떠한가를 묻는 질문에 클레멘스는 금지조치는 가능하며, 한편 이로울 수도 있으나 교회법의 규정에 따라 이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답변함으로써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선출된 교황은 528일에 주교로 임명을 받고, 176964일에 교황 클레멘스 14세로 권좌에 올랐다. 교황은 가톨릭 군주들에게 자신의 교황직 수행의 목표를 알리는 글을 친히 썼다. 즉 반종교의 흥세에 대항하여 그들의 후원을 얻기 위해서 그들과 평화를 유지해 나가겠다는 내용이었다. 그에게 평화유지란 대단한 양보를 의미했다. 그는 스페인 법정의 총신인 추기경 오피지오 팔라비시니를 그의 국무비서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포르투갈과 10년 동안의 관계 단절을 마무리짓고 로마교회와 다시 화합시켰다. 포르투갈 사람들을 처벌하는 대신에, 클레멘스는 그들에게 호의를 보였으며, 심지어는 반성직자의 수상인 폼발의 형제인 파울로 드 카르발로 에 멘도자를 추기경에 임명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성직자들은 특히, 클레멘스를 설득하여, “교회의 평화를 보존하기 위하여”(그가 말했듯이), 1773721일자 예수회 금지교서인 Dominus ac Redemptor(주와 구세주)를 발표했다.
 
[예수회의 해산은 프랑스에서 계몽사상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에 계몽사상가들의 승리를 의미했다. 18세기에 예수회는 계몽사상가들의 가장 큰 적이었기 때문이다.]
 
[예수회는 그들의 다양하고 적극적인 활동의 결과, 교회 내외의 다양한 적들에 둘러싸이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이 결국 그들의 축출을 이끌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고립은 그들의 종교관과 사상의 차이에서 온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에서 예수회가 희생된 면도 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와 기독교를 조화시키려한 예수회는 당시 경쟁자인 얀센주의자에 비해 훨씬 온건하고 열린 종교를 추구했다. 또한 지상에서의 행복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인정, 그리고 신의 산물로서 인간의 진보에 대한 긍정 등은 당시 계몽사상과도 유사하였다. 그러므로 예수회와 당시 계몽사상가들의 갈등 그리고 예수회의 추방은 일종의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17747월에 클레멘스 14세는 또 다른 부르봉가인 루이 16세를 지지하며, 그에게 베산콘, 오랑쥬, 브리타니 및 부르군디의 주교관구에 주교들을 임명하는 권리를 허락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프랑스에서는 바로 그 당시에 수도회들이 점점 파괴되어가고 있었다. 왕의 칙령, 교황의 훈령 및 개혁위원회의 명령에 의해, 수도회들에게 더 이상 수련수사들을 받아들이지 말고, 다른 수도회와 합병하거나 또는 그들의 엄격한 조직을 완화시키라는 통고가 주어졌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 전종호, “예수회의 루이 르 그랑 콜레주(Collège Louis le Grand)’와 프랑스의 계몽주의”, 서강인문논총41, 2014.
- 전종호, “18세기 프랑스문학과 예수회”, 서강인문논총21, 2007.

1685년, 퐁텐블로 칙령 - 낭트 칙령 폐지

1685, 퐁텐블로 칙령- 낭트 칙령 폐지

 
1610514, 앙리 4세가 자코뱅 수도원의 수도사 라바이약(Ravaillac)에 의해 암살되고, 루이 138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래서 앙리 4세의 두 번째 부인이자 루이 13세의 어머니인 마리에 데 메디치(Marie de Medici)가 섭정을 했다. 섭정 모후는 낭트 칙령의 계속을 약속했다. 그리고 위그노들은 교회 총회에서 새 국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마리에는 이탈리아인들을 고문으로 임명했다. 그들은 프랑스의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협조 정책을 폈는데,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비타협적인 가톨릭주의를 지향하면서 프로테스탄트에 대해서 증오를 나타났다. 루이 13세는 스페인의 공주 안나(Anne of Austria)와 결혼했으며, 루이 13세의 자매인 이사벨라(Isabella)는 앞으로 스페인의 왕인 필립 4세가 될 왕자와 결혼했다. 그래서 위그노 반란이 발발했다. 많은 위그노 지도자들은 죽고 위그노의 요새들은 상실되었다.
 
1622년 마리에가 권력을 잃고 추기경 리셸리외가 실제적 권한을 장악했다. 그는 왕권 강화와 함께 자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힘을 썼다. 그는 위그노 탄압 정책을 폈다. 위그노의 요새인 라로셸(La Rochelle)을 함락시켰으며, 그래서 25,000명의 주민 중 15,000명만 남게 되었다.
 
1642년 리셸리외가 죽고 1643년에는 루이 13세도 죽었다. 루이 13세의 아들인 루이 145세의 나이에 국왕이 되었으며, 그의 어머니인 안나 모후가 섭정을 했다. 추기경 마자랭이 통치자가 되었는데, 그는 추기경 리셸리외의 정책을 계승했다. 위그노들은 더욱 확산되어 갔다.

[루이 14세]
 
루이 14세가 23세가 되었을 때 마자랭이 죽었다. 루이 14세는 로마 가톨릭에 대해서는 교황지상주의에 반해 갈리아주의를 지향하고 위그노에 대해서는 탄압 정책을 폈다. 그는 태양 왕”(the Sun King)으로서 아무도 자기의 권력을 가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루이 14세는 위그노들에 대해 재연합을 설득했다. 1단계는 돈으로 위그노들을 매수한 것이다. 성직자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성직을 잃게 되는데 그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했다. 또한 평신도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고객을 잃게 되는데, 역시 그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2단계는 무력으로 위그노들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1684년 무력으로 진압하자 많은 위그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마지막 단계는 낭트 칙령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1685년 퐁텐블로 칙령(Edit of Fontainebleau)에 의해 낭트 칙령이 폐지됨으로 위그노는 불법적이 되었다. 30만 명 이상의 많은 위그노들이 스위스, 독일, 영국, 네덜란드, 북미 등지로 도피했다. 이들은 많은 사람들이 상공인들이었으므로 이들이 이주함으로 프랑스는 경제적으로 침체하게 되었다. 한편, 외적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위그노들은 밤에 들이나 숲에서 예배를 드리는 광야교회(The Church of the Desert)를 형성했다. 이들은 체포되면 남자들은 갤리선에 보내졌으며, 여자들은 종신형에 처해졌다. 체포된 위그노 목사들은 처형되었으며, 아동들은 가톨릭 양부모에게 보내졌으며 가톨릭으로 교육을 받게 했다.
 
[참고] 이양호, “프랑스의 종교개혁”, 신학과 교회7, 2017년 여름.

모우리(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모우리 (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 ( 牟義理 )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   【 1878 년 】 미국 오하이오주 벨빌 (Bellville) 근교에서 사무엘 모우리 (Samuel Mowry, 1850-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