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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12일 일요일

스눅(Velma L. Snook, 1866-1960) 한국명 선우리(鮮于理ㆍ鮮于梨).

스눅(Velma L. Snook, 1866-1960) 한국명 선우리(鮮于理鮮于梨). 



미국북장로회 선교사ㆍ교육가.
 

1866

  • 1월 29일, 미국 아이오와주 페어필드에서 출생하였다.
 

1889

  •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중ㆍ고등학교를 거쳐 1889년 아이오와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00

  • 고향의 초등학교 교사로 봉직하다가 해외선교를 지원하여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파송을 받아 19001018일 내한하였다.
 

1901

  • 서울선교부에 배치되어 1년 동안 어학 공부를 한 후 19019월부터 평양선교부로 옮겨 어학 공부를 계속하면서 블레어 부인과 함께 평양 외성(外城) 지역을 순회하며 여성사역을 시작하였다.
 

1902

  • 1902년 이후 순회사역 외에 여학교 사역에 참여하였다.
 

1903

  • 1903년 평양의 두 번째 장로교회로 남문밖교회가 개척될 때 담임 스왈른을 도와 여성사역을 담당하였다.
  • 당시 웰즈 부인이 담당하던 숭덕여학교는 기혼여성과 어린 여학생을 포함 200명이 다니고 있었는데 초등과정을 마친 졸업생들을 위한 중학교 설립이 시급하였다. 이에 신양리선교부 안에 있던 한옥 세 채를 교사와 기숙사로 개조한 후 19031031일 베스트(Margaret, 배귀례)를 초대 교장으로 평양부인중학교’(Advanced School for Girls and Women)을 시작하였다. 첫 입학생 43명은 대부분 기혼 여성이었고 연령이 13세부터 37세까지 다양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20명은 리 부인이 관리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였고 처음엔 13개월 수업을 하였고 1년 후 6개월, 3년 후 8개월로 늘렸다.
 

1905

  • 스눅은 교사로 참여했다가 1905년부터 교장이 되었다.
 

1906

  • 1905년 복음주의연합공의회에서 서울과 평양에서 중학과 대학을 초교파적으로 운영한다는 결정에 따라 19069월학기부터 감리교의 정의여학교 중학과와 합하여 82명 학생으로 평양여자중학교’(Seminary of Women)을 시작하였고 스눅은 연합중학교 초대 교장이 되었다.
 

1907

  • 19071월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숭의여학교에서도 사흘째 되는 날, 스눅의 1교시 수업이 끝난 후 9시에 시작된 아침기도회가 세 시간 넘게 진행되면서 학생들의 통회자복이 일어났다. 부흥회를 거치면서 통합 이후 어색했던 장로교와 감리교의 학생과 교사, 학교분위기가 쇄신되었다.
  • 19072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 파슨스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09

  • 19098월 귀환하여 숭의여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 사이 숭의여학교는 학생 수도 늘어나 150명 재학생 가운데 117명이 장로교 학생이었으며 78명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 19085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09년 대한제국 학부로부터 사립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 Union Academy for Women)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때부터 신양리선교부의 여자성경학원 건물로 옮겨 수업을 하였다.
  • 19097월 여름방학을 이용해 한 달 동안 교사 사범과를 시작하였는데 전국 기독교 초등학교의 남자 교사 120, 여자교사 20명이 등록해서 강의를 들었다. 사범과는 연례행사가 되었다.
 

1910

  • 1910224-25일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서울 시내 기독교학교 자모회 모임 강사로 초청을 받아 대부분 불신자인 2천여 명 부인들에게 여성교육에 관하여 강연하였다.
  • 517-18일 서울에서 열린 한국교육선교사협회에서도 기독 여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란 주제로 강연하였다.
  • 1910년 숭의여학교 학생수가 160명으로 늘어나자 더 넓은 교실과 기숙사 공간이 필요했다. 이에 미감리회 본관, 북장로회에서 기숙사 건물을 짓기로 하였다.
 

1911

  • 1911년 봄 상수구리에 6천여 평 부지를 확보한 후 건축을 시작하여 그해 112층짜리 기숙사를 완공하였다.
 

1912

  • 19123월 본관을 완공하였다. 모두 2층 벽돌 양관건물이었다.
 

1913

  • 1913년 선교 보고에 의하면 재학생 216명 가운데 장로교 학생이 156명이었고 전체 학생의 3분의 1이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스눅이 관리하는 고학생들을 위한 가사과(Self-Support Department)43명이 참여하여 수예품을 만들어 스스로 학비를 벌었다.
 

1914

  • 1909년 시작한 교사 사범과를 1914년부터 초등학교 여교사만을 위한 부인사범강습회로 명칭을 바꾸어 2주간 집중교육을 실시하였다.
  • 1914년 숭의여학교 자치단체로 학생선교회를 조직하여 매달 특정 지역을 선정하여 매주 화요일 방과후 시간에 모여 그 지역 사정에 대한 연구 발표와 기도회를 가진 후 마지막 주 화요일에 그 지역에 나가 전도활동을 벌였다.
  • 같은 해 숭의여학교 교사 김경희와 황애덕, 졸업생 안정식 주도로 박현숙ㆍ황신덕ㆍ채광덕ㆍ이마대ㆍ이효덕ㆍ송복신ㆍ최자혜ㆍ서매물ㆍ이혜경 등 재학생 20여 명이 항일비밀단체 송죽회를 조직하고 비밀리에 구국기도회와 독립운동 자금모금운동을 벌였다. 송죽회는 이후 선후배 관계로 회원을 늘렸고 191931독립운동 때 여성 만세시위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스눅은 학생선교회를 공개적으로 지지 후원하였으며 송죽회 조직을 묵인하였다.
 

1919

  • 191931독립운동 때 숭의여학교 교사박현숙과 많은 학생들이 평양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

  • 191911월 미감리회 선교부에서 장ㆍ감 통합교육을 포기하고 별도로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함에 따라 1920년 봄 학기부터 숭의여학교는 북장로회 단독 운영으로 전환하였다.
 

1922

  • 그로 인해 일시 학생이 줄어들었지만 스눅 교장은 교육 시설 확충을 위해 노력하여 19226천 달러로 가사과 건물을 지었다.
 

1923

  • 19239천 달러로 강당을 지었다.
  • 1923-1924년 안식년 휴가를 다녀왔다.
 

1924

  • 1924년 당시 숭의여학교는 교사 9명이 학생 137명을 가르치고 있었고 1920년부터 시작한 유치원 사범과(보육과)에도 30명이 재학하였다.
 

1926

  • 1926126일 숭의여학교 졸업생과 재학생 연합으로 선우리 교장 교육사업 25, 61세 회갑기념축하식이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되었다.
  • 1926년 봄 새 본관 건물을 신축하고 이전 교사는 별관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숭의여학교는 7학급에 재적생 784명이었고, 직원은 남자 7명 여자 11명이었다.
 

1927

  • 그리고 19277동아일보에서 본사 사옥 낙성 기념으로 전국 교육공로자 20여 명을 선정하여 표창할 때 스눅도 포함되었다.
 

1930

  • 1930년에는 기숙사 건물에 식당을 증축하였고 1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 건축계획을 세웠다.
 

1931

  • 이런 노력의 결과 숭의여학교는 193112월 조선총독부로부터 5년제 지정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은 후 학생 수가 늘어나 400명을 넘겼다.
  • 1931-1932년 안식년 휴가를 다녀왔다.
  • 1931년 조선총독부 지정학교가 된 후 숭의여학교 교장직을 후배 스왈른(O. R. Swallen)에게 넘겨주고 평교사로 봉사하였다.
 

1933

  • 숭의여학교는 19331031일 바자회ㆍ음악회ㆍ운동회를 포함한 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1935

  • 스눅은 스왈른 교장이 안식년 휴가를 떠난 19351월부터 교장 대리로 근무하였다. 그런데 그해 5월 평남도청은 평양 기독교학교 교장들을 소집하여 신사참배 수용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1936

  • 19361월 숭실전문학교의 모우리 교장과 숭의여학교 스눅 교장은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므로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당국에 전달하였다.
  • 이에 평안남도는 1936121일 숭실과 숭의 교장 파면과 설립자 취소를 통보하였다. 결국 스눅은 숭의 사역 33을 마감하고 122일 정식 환송식도 없이 학교를 떠났다.
  • 그 장면을 취재한 조선중앙일보여자 교육계의 은인, 선우리양을 파면이란 제목으로 보도하면서 스눅 교장이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내 몸은 이 땅에 바쳐 여러 학생을 위하여 또는 이 학교를 졸업한 여러 학생들을 위하여 내 힘을 써왔고 미약한 힘이나마 조선여성을 위하여 애써 온만큼 이 자리를 떠남에 있어서 조금도 섭섭함이 없다. 이 학교를 떠난다는 것은 아주 떠남이 아니오 내 영혼과 마음은 언제나 여러 학생과 또는 빛나는 역사를 가진 숭의여학교와 더불어 할 것이니 여러 학생은 안심해주기 바란다. 내 몸은 이 학교에 바친 즉 앞으로 대강당을 건축하는 것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게획을 세우고 있는 만큼 앞으로도 이 학교를 위하야 일할 것을 이 기회에 맹세해 둔다.”는 말을 전했다.
  • 스눅이 파면 통보를 받은 1주일 후 12971세 생일을 맞아 선교사직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날 평양에 살던 숭의여학교 졸업생 50여 명이 모교 식당에서 조촐한 생일축하 겸 위로회를 마련했다.
  • 1936916일 숭의여학교에서 학생 환송회, 평양 화신백화점 음식점에서 평양교회 송별회에 참석한 후 귀국길에 올랐다.
 

1943

  • 귀국 후 펜실베니아에 머물다가 1943년 결혼하였는데 상대는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26년간 사역하다 10년 전 은퇴하여 귀국해 있던 맥머트리(Robert M. McMurtrie, 1863.4.4.-1946.9.30.)였다. 그때 신랑은 79, 신부는 77세였다.
 

1946

  • 결혼 후 플로리다 세인트피터즈버그에 살다가 194611월 남편이 먼저 별세하였다.
 

1960

  • 스눅은 1960320일 별세하였다.

2025년 10월 2일 목요일

진공제 사마덕문(晉恭帝 司馬德文, AD. 386~421년) : 중국 동진 11대 황제(AD. 419~420년)

진공제 사마덕문(晉恭帝 司馬德文, AD. 386~421) : 중국 동진 11대 황제(AD. 419~420)

 
  • 사마덕문(司馬德文) 진공제(晉恭帝)
  • 통치 기간 : 419128~ 42077(재위 1161)
    강제로 선위(禪位)
    • 전임 : 진안제 사마덕종(晉安帝 司馬德宗)
    • 후임 : 유유(劉裕)의 찬위(篡位) 송나라(劉宋) 건국
  • 출생 : 386
  • 사망 : 421112(향년 34세 또는 35)
  • 능묘 : 충평릉(冲平陵)
  • 연호(年號) :
    • 원희(元熙) 419~ 4206
  • 시호(諡號) :공황제(恭皇帝)
 

기원후 386

  • 효무제 사마요의 아들이며 안제 사마덕종의 동복 동생으로 태어났다.
  • 하내군 온현(河内郡 温县, 현재 중국 허난성 자오쭤시 온현) 출신이다.
 

기원후 392

  • 태원(太元) 1711월 경인일(庚寅日, 3921227)에 낭야왕(琅邪王) 으로 봉해졌고, 이후 중군장군(中軍將軍),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임명되었다.
 

기원후 398

  • 융안(隆安) 2(398)에 위장군(衞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전임되었다.
 

기원후 399

  • 399년에 시중(侍中)으로 옮겨졌으며, 사도(司徒)를 겸임하고, 상서육조사(尚書六條事)를 총괄하는 직책을 맡았다.
 

기원후 402

  • 환현(桓玄)이 사마도자(司馬道子) 부자를 격파하고 조정을 장악하자, 사마덕문(司馬德文)을 태재(太宰)로 임명하였다.
 

기원후 404

  • 40411, 환현이 황위를 찬탈하고 제위를 선포하자, 진안제(晉安帝)는 평고왕(平固王)으로 강등되었고, 사마덕문 역시 작위가 강등되어 석양현공(石陽縣公)으로 봉해졌다.
  • 그 후 환현은 안제를 심양(尋陽, 현재의 장시성 구이저우시)으로 옮겼고, 사마덕문도 그를 따라갔다.
  • 유유(劉裕)가 군을 일으켜 환현을 토벌하였고, 환현은 패하여 심양으로 도주하였다. 그곳에서 곽창지(郭昶之)로부터 군수품과 병력을 제공받은 후, 다시 진안제를 협박하여 함께 강릉(江陵, 현재의 후베이성 장링현)으로 향했다.
  • 그러나 환현은 익주(益州)로 도망가는 도중에 패사하였고, 이후 진안제는 형주별가(荊州別駕) 왕강산(王康產)과 남군태수(南郡太守) 왕등지(王騰之)에 의해 남군의 관저로 맞이되었다. 이때 사마덕문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 하지만 유유의 군대가 강릉에 도착하기 전에, 환진(桓振) 등 환씨(桓氏)의 잔당이 빈틈을 타 기습하였고, 결국 강릉성이 함락되었다. 왕강산과 왕등지는 살해되었으며, 환진은 말을 타고 창을 들고 성 안으로 들어와, 환현의 아들 환승(桓昇)의 행방을 물었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듣자 환진은 크게 분노하며, 그들이 환씨를 몰살시킨 것에 대해 질책하였다.
  • 이때 사마덕문이 나서서 변호하며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우리 형제들의 뜻이겠습니까!”라고 하였고, 환겸(桓謙)의 간곡한 만류로 인해 환진은 결국 안제를 해치지 않았다.
  • 이후 환진은 계속해서 강릉을 장악하였고, 사마덕문을 서주자사(徐州刺史)로 임명하며, 유의(劉毅)가 이끄는 토벌군과의 대항을 이어갔다.
 

기원후 405

  • 405년에 유의의 군대가 강릉을 점령하였고, 사마덕문은 안제와 함께 하무기(何無忌)의 호위를 받아 건강(建康, 지금의 난징)으로 귀환하였다. 건강으로 돌아온 후, 사마덕문은 대사마(大司馬)로 승진하였다.
 

기원후 416

  • 416, 유유(劉裕)가 후진(後秦)을 북벌할 준비를 하면서, 당시 유유는 진() 왕실의 명분으로 북방 민심을 달래고자 하여, 사마덕문(司馬德文)의 이름을 앞세워 출병하려 했다. 이에 사마덕문은 진 왕조의 능묘(山陵)를 참배한다는 명분으로 출병할 것을 상주하였고, 결국 유유는 사마덕문과 함께 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기원후 417

  • 417, 유유는 후진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같은 해 말에 동쪽으로 회군하였다. 사마덕문도 이에 동행하였다.
 

기원후 418

  • 418년 여름에 유유가 팽성(彭城, 지금의 장쑤성 쉬저우시)에 도착하자, 사마덕문은 먼저 건강(建康)으로 돌아갔다. 그 직후 유유는 구석(九錫)을 받으며, 송왕(宋王)으로 봉해졌다.
 

기원후 419

  • 당시 유유는 중서시랑(中書侍郎) 왕소지(王韶之)를 시켜 진안제(晉安帝)를 암살하고, 사마덕문을 즉위시켜, “창명(昌明) 이후로 두 명의 황제가 더 있을 것이다라는 예언을 맞추려 했다.
  • 그러나 사마덕문은 식사나 잠잘 때나 항상 진안제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왕소지는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 해 말에 사마덕문이 병을 앓아 자리를 비우자, 왕소지는 그 틈을 타 진안제를 살해하였다. 유유는 유언(遺詔)을 위조해, 사마덕문을 후계자로 삼아 황제로 즉위시켰다.
  • 형 사마덕종이 사망하자 형의 뒤를 이어 동진의 11대 황제가 되었으나 형인 사마덕종과 마찬가지로 유유의 괴뢰 황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덕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전혀 없었고 동진은 사실상 유유가 지배했다.
  • 그는 419년 봄, 자신의 아내인 저씨(褚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였다. 또한 당시 송공(宋公) 의 작위를 가지고 있던 유유(劉裕)를 송왕(宋王)으로 진봉하였는데, 유유는 처음에는 이를 사양했지만 419년 가을에 받아들였다.
 

기원후 420

  • 42075, 유유가 조정에 들어오자, 부량(傅亮)은 사마덕문에게 제위를 양위하라는 뜻을 돌려 말하며, 미리 준비해 둔 양위 조서의 초안을 그에게 올렸다. 사마덕문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직접 붓을 들어 조서를 베껴 쓰며 말했다 :
    “환현(桓玄)이 찬탈했을 때 이미 진 왕조는 천하를 잃었고, 유공(劉公)께서 그 국운을 20년 가까이 연장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런 일을 하게 된 것은 저의 진심입니다.”
  • 이틀 뒤, 사마덕문은 낭야왕부(琅邪王府)로 물러났고, 백관들이 진 황제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동진(東晉)은 이로써 멸망하였다.
  • 그 후 3일 뒤, 유유는 정식으로 즉위하여 황제가 되었고, 사마덕문에게는 영릉왕(零陵王) 작위를 내렸다. 또 장쑤성 강녕현(江寧縣)에 있는 말릉현(秣陵縣)의 옛 관청을 그의 저택으로 삼게 하였다.
  • 이때 연호, 수레, 복식 등 모든 예법을 진 왕조 시절과 동일하게 하였고, 이는 마치 진()이 위()를 찬탈했을 때의 전례를 따르는 것이었다. 또한 유준(劉遵)에게 병력을 파견시켜 사마덕문의 거처를 호위하게 하였다.
  • 유유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낭야낭중령 장위에게 독을 잔뜩 섞은 술단지를 쥐어준 뒤 이것을 사마덕문에게 먹여 자결하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장위는 이렇게 착한 황제를 독살하는 건 인간이 할 짓이 못된다고 하면서 그 술을 자기가 먹고 자결함으로써 사마덕문을 대신해 죽었다.
 

기원후 421

  • 이에 유유는 사마덕문의 아들이 태어날 때마다 사람을 시켜 죽였고 이 때문에 사마덕문은 두려운 나머지 항상 저영원과 같이 지냈다. 이 때문에 전혀 손을 쓰지 못하고 있던 유유는 저영원의 오빠인 저숙도와 저담지 형제를 보내서 저영원과 만나게 했다. 저영원은 오빠들을 만나기 위해 별실로 가는 사이 이 기회를 노리고 있던 유유의 병사들은 사마덕문을 붙잡고 자결을 강요하자 사마덕문은 불교에서는, 자살하면 인간으로 환생할 수 없으니 내가 죽기를 원한다면 살해해주게라 말했다. 이에 병사들은 사마덕문에게 이불을 뒤집어 씌워서 질식사시켰다.
  • 사마덕문은 아주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6척 높이의 금불상을 제작하여 친히 와관사까지 10여 리를 걸으면서 금불상을 맞이했다. 또한 성품이 신중하고 선량해서 지적장애를 앓고있는 형 사마덕종을 평생동안 돌봐줬다. 이러한 사마덕문의 훌륭한 인품 덕에 장위와 같이 그를 대신해서 죽는 사람이 생길 정도였다.
 

가족 관계

  • 배우자
    • 공사황후 하남 저씨(恭思皇后 河南 褚氏, 384~436)
    • 이름 : 저영원(褚靈媛)
  • 해염공주(海鹽公主, (403~439)
    • 이름 : 사마무영(司馬茂英) 장녀
    • 유의부(劉義符, 406~424)와 혼인함
  • 부양공주(富陽公主) 차녀

모우리(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모우리 (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 ( 牟義理 )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   【 1878 년 】 미국 오하이오주 벨빌 (Bellville) 근교에서 사무엘 모우리 (Samuel Mowry, 1850-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