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눅(Velma L. Snook, 1866-1960) 한국명 선우리(鮮于理ㆍ鮮于梨).
미국북장로회 선교사ㆍ교육가.
【1866년】
- 1월 29일, 미국 아이오와주 페어필드에서 출생하였다.
【1889년】
-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중ㆍ고등학교를 거쳐 1889년 아이오와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00년】
- 고향의 초등학교 교사로 봉직하다가 해외선교를 지원하여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파송을 받아 1900년 10월 18일 내한하였다.
【1901년】
- 서울선교부에 배치되어 1년 동안 어학 공부를 한 후 1901년 9월부터 평양선교부로 옮겨 어학 공부를 계속하면서 블레어 부인과 함께 평양 외성(外城) 지역을 순회하며 여성사역을 시작하였다.
【1902년】
- 1902년 이후 순회사역 외에 여학교 사역에 참여하였다.
【1903년】
- 1903년 평양의 두 번째 장로교회로 남문밖교회가 개척될 때 담임 스왈른을 도와 여성사역을 담당하였다.
- 당시 웰즈 부인이 담당하던 숭덕여학교는 기혼여성과 어린 여학생을 포함 200명이 다니고 있었는데 초등과정을 마친 졸업생들을 위한 중학교 설립이 시급하였다. 이에 신양리선교부 안에 있던 한옥 세 채를 교사와 기숙사로 개조한 후 1903년 10월 31일 베스트(Margaret, 배귀례)를 초대 교장으로 ‘평양부인중학교’(Advanced School for Girls and Women)을 시작하였다. 첫 입학생 43명은 대부분 기혼 여성이었고 연령이 13세부터 37세까지 다양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20명은 리 부인이 관리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였고 처음엔 1년 3개월 수업을 하였고 1년 후 6개월, 3년 후 8개월로 늘렸다.
【1905년】
- 스눅은 교사로 참여했다가 1905년부터 교장이 되었다.
【1906년】
- 1905년 복음주의연합공의회에서 “서울과 평양에서 중학과 대학을 초교파적으로 운영한다”는 결정에 따라 1906년 9월학기부터 감리교의 정의여학교 중학과와 합하여 82명 학생으로 ‘평양여자중학교’(Seminary of Women)을 시작하였고 스눅은 연합중학교 초대 교장이 되었다.
【1907년】
- 1907년 1월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숭의여학교에서도 사흘째 되는 날, 스눅의 1교시 수업이 끝난 후 9시에 시작된 아침기도회가 세 시간 넘게 진행되면서 학생들의 통회자복이 일어났다. 부흥회를 거치면서 통합 이후 어색했던 장로교와 감리교의 학생과 교사, 학교분위기가 쇄신되었다.
- 1907년 2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 파슨스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09년】
- 1909년 8월 귀환하여 숭의여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 사이 숭의여학교는 학생 수도 늘어나 150명 재학생 가운데 117명이 장로교 학생이었으며 78명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 1908년 5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09년 대한제국 학부로부터 사립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 Union Academy for Women)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때부터 신양리선교부의 여자성경학원 건물로 옮겨 수업을 하였다.
- 1909년 7월 여름방학을 이용해 한 달 동안 교사 사범과를 시작하였는데 전국 기독교 초등학교의 남자 교사 120명, 여자교사 20명이 등록해서 강의를 들었다. 사범과는 연례행사가 되었다.
【1910년】
- 1910년 2월 24-25일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서울 시내 기독교학교 자모회 모임 강사로 초청을 받아 대부분 불신자인 2천여 명 부인들에게 ‘여성교육’에 관하여 강연하였다.
- 5월 17-18일 서울에서 열린 한국교육선교사협회에서도 “기독 여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란 주제로 강연하였다.
- 1910년 숭의여학교 학생수가 160명으로 늘어나자 더 넓은 교실과 기숙사 공간이 필요했다. 이에 미감리회 본관, 북장로회에서 기숙사 건물을 짓기로 하였다.
【1911년】
- 1911년 봄 상수구리에 6천여 평 부지를 확보한 후 건축을 시작하여 그해 11월 2층짜리 기숙사를 완공하였다.
【1912년】
- 1912년 3월 본관을 완공하였다. 모두 2층 벽돌 양관건물이었다.
【1913년】
- 1913년 선교 보고에 의하면 재학생 216명 가운데 장로교 학생이 156명이었고 전체 학생의 3분의 1이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스눅이 관리하는 고학생들을 위한 가사과(Self-Support Department)에 43명이 참여하여 수예품을 만들어 스스로 학비를 벌었다.
【1914년】
- 1909년 시작한 교사 사범과를 1914년부터 초등학교 여교사만을 위한 ‘부인사범강습회’로 명칭을 바꾸어 2주간 집중교육을 실시하였다.
- 1914년 숭의여학교 자치단체로 학생선교회를 조직하여 매달 특정 지역을 선정하여 매주 화요일 방과후 시간에 모여 그 지역 사정에 대한 연구 발표와 기도회를 가진 후 마지막 주 화요일에 그 지역에 나가 전도활동을 벌였다.
- 같은 해 숭의여학교 교사 김경희와 황애덕, 졸업생 안정식 주도로 박현숙ㆍ황신덕ㆍ채광덕ㆍ이마대ㆍ이효덕ㆍ송복신ㆍ최자혜ㆍ서매물ㆍ이혜경 등 재학생 20여 명이 항일비밀단체 ‘송죽회’를 조직하고 비밀리에 구국기도회와 독립운동 자금모금운동을 벌였다. 송죽회는 이후 선후배 관계로 회원을 늘렸고 1919년 3ㆍ1독립운동 때 여성 만세시위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스눅은 학생선교회를 공개적으로 지지 후원하였으며 송죽회 조직을 묵인하였다.
【1919년】
- 1919년 3ㆍ1독립운동 때 숭의여학교 교사박현숙과 많은 학생들이 평양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 1919년 11월 미감리회 선교부에서 장ㆍ감 통합교육을 포기하고 별도로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함에 따라 1920년 봄 학기부터 숭의여학교는 북장로회 단독 운영으로 전환하였다.
【1922년】
- 그로 인해 일시 학생이 줄어들었지만 스눅 교장은 교육 시설 확충을 위해 노력하여 1922년 6천 달러로 가사과 건물을 지었다.
【1923년】
- 1923년 9천 달러로 강당을 지었다.
- 1923-1924년 안식년 휴가를 다녀왔다.
【1924년】
- 1924년 당시 숭의여학교는 교사 9명이 학생 137명을 가르치고 있었고 1920년부터 시작한 유치원 사범과(보육과)에도 30명이 재학하였다.
【1926년】
- 1926년 1월 26일 숭의여학교 졸업생과 재학생 연합으로 ‘선우리 교장 교육사업 25년, 61세 회갑기념’ 축하식이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되었다.
- 1926년 봄 새 본관 건물을 신축하고 이전 교사는 별관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숭의여학교는 7학급에 재적생 784명이었고, 직원은 남자 7명 여자 11명이었다.
【1927년】
- 그리고 1927년 7월 「동아일보」에서 본사 사옥 낙성 기념으로 전국 교육공로자 20여 명을 선정하여 표창할 때 스눅도 포함되었다.
【1930년】
- 1930년에는 기숙사 건물에 식당을 증축하였고 1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 건축계획을 세웠다.
【1931년】
- 이런 노력의 결과 숭의여학교는 1931년 12월 조선총독부로부터 5년제 지정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은 후 학생 수가 늘어나 400명을 넘겼다.
- 1931-1932년 안식년 휴가를 다녀왔다.
- 1931년 조선총독부 지정학교가 된 후 숭의여학교 교장직을 후배 스왈른(O. R. Swallen)에게 넘겨주고 평교사로 봉사하였다.
【1933년】
- 숭의여학교는 1933년 10월 31일 바자회ㆍ음악회ㆍ운동회를 포함한 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1935년】
- 스눅은 스왈른 교장이 안식년 휴가를 떠난 1935년 1월부터 교장 대리로 근무하였다. 그런데 그해 5월 평남도청은 평양 기독교학교 교장들을 소집하여 신사참배 수용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1936년】
- 1936년 1월 숭실전문학교의 모우리 교장과 숭의여학교 스눅 교장은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므로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당국에 전달하였다.
- 이에 평안남도는 1936년 1월 21일 숭실과 숭의 ‘교장 파면과 설립자 취소’를 통보하였다. 결국 스눅은 ‘숭의 사역 33년’을 마감하고 1월 22일 정식 환송식도 없이 학교를 떠났다.
- 그 장면을 취재한 「조선중앙일보」는 “여자 교육계의 은인, 선우리양을 파면”이란 제목으로 보도하면서 스눅 교장이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내 몸은 이 땅에 바쳐 여러 학생을 위하여 또는 이 학교를 졸업한 여러 학생들을 위하여 내 힘을 써왔고 미약한 힘이나마 조선여성을 위하여 애써 온만큼 이 자리를 떠남에 있어서 조금도 섭섭함이 없다. 이 학교를 떠난다는 것은 아주 떠남이 아니오 내 영혼과 마음은 언제나 여러 학생과 또는 빛나는 역사를 가진 숭의여학교와 더불어 할 것이니 여러 학생은 안심해주기 바란다. 내 몸은 이 학교에 바친 즉 앞으로 대강당을 건축하는 것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게획을 세우고 있는 만큼 앞으로도 이 학교를 위하야 일할 것을 이 기회에 맹세해 둔다.”는 말을 전했다.
- 스눅이 파면 통보를 받은 1주일 후 1월 29일 71세 생일을 맞아 선교사직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날 평양에 살던 숭의여학교 졸업생 50여 명이 모교 식당에서 조촐한 생일축하 겸 위로회를 마련했다.
- 1936년 9월 16일 숭의여학교에서 학생 환송회, 평양 화신백화점 음식점에서 평양교회 송별회에 참석한 후 귀국길에 올랐다.
【1943년】
- 귀국 후 펜실베니아에 머물다가 1943년 결혼하였는데 상대는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26년간 사역하다 10년 전 은퇴하여 귀국해 있던 맥머트리(Robert M. McMurtrie, 1863.4.4.-1946.9.30.)였다. 그때 신랑은 79세, 신부는 77세였다.
【1946년】
- 결혼 후 플로리다 세인트피터즈버그에 살다가 1946년 11월 남편이 먼저 별세하였다.
【1960년】
- 스눅은 1960년 3월 20일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