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前漢 : 기원전 202년~기원후 8년)의 역사와 역대 황제
전한(前漢: 기원전 202년~기원후 8년)은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 대륙 쟁탈 뒤에 세운 왕조로서 진(秦)에 이어서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한 왕조이다. 수도는 장안이었는데 그 위치가 후에 세워진 후한의 수도 낙양보다 서쪽에 있어서 서한(西漢)이라고도 불린다.
1. 전한 건립
1) 진말 난세
진시황이 세운 진나라(秦朝)는 그의 통치가 짧았고, 폭정을 거듭하면서 농민 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혼란스러운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2) 초한 쟁패
진나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각지에서 군웅들이 할거했다. 그중에서도 초나라 항우(项羽)와 한나라 유방(刘邦)이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여 천하를 놓고 치열하게 다투는 초한 쟁패(楚汉争霸)가 벌어졌다. 결국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승리하며, 한 왕조를 세우게 된 것이다.
- [참고] 전한 1대 고제 유방 [바로가기]
2.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다
1) 무위이치
초한 쟁패로 황폐해진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한 초기의 통치자들은 ‘무위이치(无为而治)’의 사상을 바탕으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는 정책을 펼쳤다. 특히 한고조 유방과 혜제(惠帝) 때 이러한 통치 방침이 세워졌다. 이러한 정책은 도교의 황노사상(黄老思想)에 기반을 두며, 백성들이 스스로 생업에 종사하게 하여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
2) 여태후 전권 (呂太后專權)
한고조가 죽고 혜제(惠帝)가 즉위한 후, 여태후(呂太后)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혜제가 병약하고 어린 나이에 죽자, 여태후는 어린 황제들을 허수아비로 세우고 실제 정치는 자신이 직접 주관했다. 이 시기에 왕실의 혼란이 있었지만, 그녀의 통치는 진나라 멸망 후 경제적 회복과 사회 안정에 기여하기도 했다. 여태후 사후, 공신 세력들은 여씨 세력을 제거하고 한 문제(漢文帝)를 옹립했다.
- [참고] 전한 2대 혜제 유영 [바로가기]
- [참고] 전한 3대 소제 유공 [바로가기]
- [참고] 전한 4대 후소제 유홍 [바로가기]
3) 문경지치(文景之治)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재위 기간은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불리는 전한 시대의 황금기였다. 두 황제는 ‘황노사상’에 입각하여 백성의 세금을 줄이고, 지방의 요역(徭役)과 병력 동원을 감소시키며, 빈민들에게 산과 연못 사용을 허가하는 등 ‘백성과 함께 쉬는(與民休息)’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또한, 형벌을 완화하여 사회 혼란을 수습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경제가 회복되고 백성들의 삶이 개선되었으며, 한나라의 국력이 증강되었다. 그러나 경제 재위 중 조조(晁错)의 건의로 시행된 제후국 삭봉 정책은 칠국의 난(七国之乱)이라는 대규모 반란을 초래했다. 한 경제는 태위 주아부(周亞夫)를 보내 반란을 진압하여 제후왕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했다.
- [참고] 전한 5대 문제 유항 [바로가기]
- [참고] 전한 6대 경제 유계 [바로가기]
3. 전성기로 접어들다
1) 한무제(漢武帝)
한 무제(漢武帝)의 시대는 전한의 전성기로 평가된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흉노(匈奴)와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펼쳐 북방 국경을 안정화하고, 장건(張騫)의 서역 파견을 통해 비단길(丝绸之路)을 개척하며 한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이 시기에 유교(儒學)가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확립되었고, 대외 정복 전쟁과 국가 사업으로 인해 국고는 풍족했으나 말년에는 전쟁의 장기화와 사치스러운 생활로 인해 재정이 파탄 나고 백성들의 고통이 심화되었다. 무제는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윤대죄기지조(輪台罪己之詔)’를 발표하며 생산력 증진과 백성 안정을 위한 정책 전환을 약속하기도 했다.
- [참고] 전한 7대 무제 유철 [바로가기]
한 무제 말년의 혼란과 재정 위기 이후, 한 소제(漢昭帝)와 한 선제(漢宣帝)의 통치 기간 동안 ‘소선중흥(昭宣中興)’이라는 재건기가 찾아왔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소제를 보좌한 곽광(霍光)은 무제 말년의 정책을 계승하여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경제를 회복시켰다. 소제가 일찍 죽은 후, 즉위한 한 선제는 민간에서 자란 경험을 바탕으로 백성의 고통과 사회 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선제는 경세적이고 법가적 요소를 결합한 ‘왕패지도 잡지(王霸之道雜之)’를 통치 이념으로 삼아 세금을 경감하고, 관료 조직을 정비하며, 법 집행을 공정하게 했다. 이 시기에 흉노가 한나라에 복속되었고,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설치하여 서역 36개국을 한나라의 통치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등 외치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 [참고] 전한 8대 소제 유불릉 [바로가기]
- [참고] 전한 9대 폐제 유하 [바로가기]
- [참고] 전한 10대 선제 유순 [바로가기]
4. 쇠퇴의 길로
1) 원제와 성제의 통치
‘소선중흥’ 이후, 한 원제(漢元帝)와 한 성제(漢成帝)의 통치 시기에 한나라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 원제는 선제의 정책을 뒤집고 유교적이고 현실성이 부족한 정책을 추진했으며, 이로 인해 토지 겸병(土地兼併)이 심해지고 관리들의 부패가 만연하여 중앙 집권 체제가 약화되었다. 심지어 한 원제는 관동 지역에 큰 수해가 발생하여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사냥을 즐기는 등 향락에 빠졌다. 서한 후기에는 세금 부담과 토지 겸병으로 인해 자작농들이 파산하고 유민이 급증하는 사회 문제가 발생했다. 한 선제 때도 천재지변으로 인한 유민 문제가 있었으나, 원제 때는 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 것이다.원제와 성제 시기에는 철관노(铁官奴)들의 기의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정부의 전매 정책과 그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 애제(漢哀帝)와 한 평제(漢平帝) 시기에는 외척인 왕망(王莽)의 세력이 점차 강해져 황실의 권위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애제는 즉위 초 동현(董賢)을 총애하여 그에게 막대한 권력을 부여했으나,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평제가 즉위한 후에는 왕망이 섭정으로서 모든 권력을 장악하며 한나라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왕망이 세운 신나라(新朝)가 농민 봉기로 멸망한 후, 유현(劉玄)을 중심으로 한 한나라 종친 세력에 의해 경시제(更始帝) 정권이 세워졌다. 이 정권은 왕망 사후 잠시 한나라를 재건했지만,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과 내부 갈등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다. 경시 정권은 적미군(赤眉軍)과 같은 농민 반란 세력과 동한(東漢)의 건국자 유수(劉秀, 후의 광무제) 등 여러 세력 사이에서 잠시 존재했던 과도기적 정권이다.
- [참고] 신 황제 왕망 [바로가기]
- [참고] 현한 경시제 유현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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