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 9대 폐제 유하(廢帝 劉賀, BC. 92~59년) : 재위 BC. 74년
【기원전 92년】
- 유하(劉賀)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 그는 전한 무제(武帝)의 서손(庶孫)이자 창읍애왕(昌邑哀王) 유박(劉髆)의 아들이다.
【기원전 88년】
- 아버지 창읍애왕 유박이 사망했다.
【기원전 86년】
-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창읍왕에 봉해졌다. 기록상 당시 유하는 매우 어린아이(toddler)였다고 추정된다.
- 어린 시절부터 부적절한 행동과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수도 장안의 태수(太守) 왕길(王吉)과 경위(警衛) 사령관 공수(龔遂)가 그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비판했지만, 유하는 개선하려 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은 그가 폐위된 후에 작성된 것이므로 편향되었거나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기원전 74년】
- 전한 소제(昭帝)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대장군 곽광(霍光)이 황제 후보로 유하를 지목했다.
- 그는 기원전 74년 7월 18일(양력)에 황제에 즉위했다.
- 8월14일(양력) 황제로 즉위한 지 불과 27일 만에 폐위되었다. 곽광과 대신들은 유하가 “천자의 예의범절을 따르지 않고, 도를 행하지 않으며, 황음무도한 행실을 보인다”는 이유로 태후에게 주청하여 폐위시켰다.
- 《한서(漢書)》에는 그가 27일 재위 기간 동안 무려 1127건의 황당한 일(荒唐事)을 저질러 하루 평균 41건, 시간당 1건 이상의 잘못을 저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 폐위 후에는 황제 목록에서 삭제되었고, 그의 원래 작위인 창읍왕위도 박탈되었다. 그는 폐위 후 원래 봉지로 송환되었지만, 창읍국은 산양군(山陽郡)으로 폐지되었고, 유하에게는 탕목읍(湯沐邑) 2천 호가 지급되었다. 그의 네 누이에게도 각 1천 호가 지급되었다.
【기원전 64년】
- 조정은 산양군 태수(太守) 장창(張敞)을 통해 유하의 일상생활과 교류하는 인물들에 대한 철저한 감시를 지시했다.
【기원전 63년】
- 전한 선제(宣帝)는 그를 해혼후(海昏侯)로 책봉하고(강등됨), 예장군(豫章郡) 해혼현(海昏縣, 현재 강서성江西省)으로 보내 봉토 4천 호를 주었다.
- 이후 특정 사건으로 인해 봉토가 3천 호 삭감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 선제는 유하가 옛 봉지에서 멀리 떨어지도록 하려는 의도였다고 여겨진다.
【기원전 59년】
- 기원전 59년 9월 8일 사망했다.
- 그는 16명의 아내와 22명의 자녀를 두었다.
- 그의 사후, 아들 유충국(劉充國)과 유봉친(劉奉親)이 잇따라 사망하면서 해혼후국은 잠시 폐지되었다. 훗날 한원제(漢元帝) 초원(初元) 3년(기원전 46년)에 그의 아들 유대종(劉代宗)이 해혼후 작위를 다시 물려받았다.
【해혼후 묘(海昏侯墓) 발굴】
- 2011년부터 해혼후의 묘가 발굴되기 시작하여, 약 2만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 유물 중에는 300개 이상의 금 유물, 200만 개의 동전, 가장 오래된 공자(孔子)의 초상화가 그려진 거울 등이 포함되어 있다.
- 5,200여 개의 죽간(竹簡)이 발견되어 해혼후국이 폐지된 시점 및 유하의 정확한 사망일(기원전 59년 9월 8일) 등 역사 기록에는 없는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 2016년 3월 2일, 고고학자들은 옥인장, 묵서금병, 상주문 복사본 서명 등을 통해 무덤 주인이 유하임을 확인했다.
- 그의 무덤은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추진되고 있다.
- 유해는 치아만 남아있었고, 복부에서 멜론 씨앗이 발견되었다. 신장은 173~183cm로 추정되었다.
【요약 정보】
- 이름 : 유하(劉賀)
- 칭호 : 전한 폐제(廢帝), 창읍왕(昌邑王), 해혼후(海昏侯)
- 출생 : 기원전 92년 / 출생지 : (창읍국 일대로 추정되나 명시된 기록 없음)
- 사망 : 기원전 59년 9월 8일 (향년 32~33세) / 사망지 : 예장군 해혼현(豫章郡 海昏縣, 현재 강서성江西省 난창시 신젠구)
- 황제 재위 : 기원전 74년 (27일간, 7월 18일 ~ 8월 14일)
창읍왕 재위 : 기원전 86년 ~ 기원전 74년
해혼후 재위 : 기원전 63년 ~ 기원전 59년 - 전임 : 전한 소제(昭帝) 유불릉(劉弗陵)
- 후임 : 전한 선제(宣帝) 유병이(劉病已)
- 부친 : 창읍애왕(昌邑哀王) 유박(劉髆)
- 모친 : (명시된 기록 없음)
- 양부 : 한 소제 유불릉(漢昭帝 劉弗陵)
- 배우자 :
총 약 16명의 아내 및 후궁이 있었다.
[정실] “해혼후부인(海昏侯夫人)”이라 불렸으며, 이름은 “대(待)”로 사망 후 유하(劉賀)의 무덤 옆 묘에 함께 안장되었다. - 자녀
총 약 22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대표적으로 유충국(劉充國), 유봉친(劉奉親), 유대종(劉代宗) 등이 있다.
유대종(劉代宗) : 유하(劉賀)의 작위인 해혼후(海昏侯)를 계승하였다.
신작 3년(기원전 59년), 유하가 사망하며 해혼국은 폐지되었다가 한 원제 초원 3년(기원전 46년), 유대종이 다시 해혼후로 봉해졌다. 유대종은 아들 유보세(劉保世)에게 작위를 물려주었고, 손자 유회원(劉會邑)으로 이어졌다. 후에 광무중흥(光武中興, 후한 초기) 시기에 다시 봉해졌다. - 유하는 전한의 단명한 황제이자 방탕한 인물로 기록되었으며, 그의 일생은 드라마틱한 파란을 겪었다. 그러나 최근 발굴된 해혼후 묘를 통해 당시 서한 시대를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와 함께 그의 생애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계속 밝혀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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