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 5대 문제 유항(文帝 劉恒, BC. 202~157년) : 재위 BC. 180~157년
【기원전 202년】
- 전한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 그의 어머니는 박희(薄姬, 훗날 박태후 薄太后)이다.
【기원전 196년】
- 대왕(代王)으로 봉해지다.
- 황후 여씨(呂氏)의 견제로 다른 형제들과 달리 비교적 약소한 봉국이었던 대나라(代國)의 왕으로 책봉되었다.
- 그의 이복형인 조은왕(趙隱王) 유여의(劉如意)가 여태후에 의해 살해당한 후 대왕에 봉해졌다는 내용도 있다.
- 그는 재위 기간 동안 대나라를 모범적인 번국으로 만들고 유능한 관료들을 임명했다.
【기원전 180년】
- 여태후(呂太后)가 사망한 후, 승상 진평(陳平)과 태위 주발(周勃)을 비롯한 대신들이 여씨 일족을 숙청하는 정변(여씨의 난)을 일으켰다.
- 대신들은 전소제와 후소제 등 혜제의 아들들이 실제로는 혜제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명분으로 그들을 폐위하고 살해했다.
- 새로운 황제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제왕(齊王) 유양(劉襄)은 권력이 강대하고 외척이 미약하며,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은 오만하고 성미가 급하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 대왕 유항은 어머니 박씨 가문이 외척으로서 세력이 약하고, 그의 성품이 온후하며 효심이 깊고 대나라가 평화롭다는 점 때문에 황제 적임자로 추대되었다.
- 처음에는 대왕으로서 신중하게 장안으로 입궁하여 황제 자리를 수락하기를 주저했다.
- 대신들과 협의하고 길흉을 점친 후,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로 결정하고 장안에 입성하여 고조의 사당에서 즉위했다.
【기원전 179년】
- 대나라 시절의 황후가 일찍 죽고 자녀가 없자, 궁인 두씨(竇氏, 훗날 효문황후 孝文皇后)가 낳은 아들 유계(劉啓)를 황태자로 삼았다.
- 태자가 되었지만 두씨는 총애를 잃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황후를 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자녀를 둔 두씨가 황후로 책봉되었다.
【기원전 179~157년】 치세: 문경지치
- 형벌 제도 개혁 : 잔혹한 육형(肉刑)을 폐지하고, 대신 감옥에 가두는 등 온건한 방식으로 전환했다. 부모의 범죄로 인한 자녀의 연좌제를 폐지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
- 검소한 생활 : 백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궁궐 증축을 반대하고, 황후와 후궁들에게 비단 옷을 금지하는 등 솔선수범하여 검소한 삶을 살았다.
- 세금 감면 및 경제 발전 : 조세를 가볍게 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 경제 발전을 촉진했다.
- 민본주의 : 백성을 사랑하고 농업을 장려하며 덕치를 펼쳤다.
- 관리 개혁 : 관료들의 봉급을 인상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려 노력했다.
- 군국주의 폐해 극복 : 지방 제후국의 봉국을 축소하고 중앙 집권화를 강화하여 군국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려 노력했다.
- 흉노 방어 : 흉노의 침공에 대비하여 변경을 방어하고 화친 정책을 병행했다.
【기원전 157년】
- 7월 6일 : 재위 23년 만에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그의 시신은 장안 동쪽 백록원(白鹿原)에 위치한 패릉(霸陵)에 묻혔다.
- 유언에 따라 간소하게 장례를 치렀고, 왕릉에 부장품을 많이 넣지 말라고 했다.
【요약 정보】
- 이름 : 유항(劉恒)
- 묘호 : 태종(太宗)
- 시호 : 효문황제(孝文皇帝) : 문제(文帝)는 줄임말
- 출생 : 기원전 202년
- 출생지 : (명확한 기록 없음)
- 사망 : 기원전 157년(향년 45세)
- 사망지 : 장안(長安) 궁궐 내(추정)
- 부친 : 전한 고조(高祖) 유방(劉邦)
- 모친 : 박희(薄姬, 훗날 박태후 薄太后)
- 형제자매
첫째 형 : 제도혜왕 유비(齊悼惠王 劉肥)
둘째 형 : 한 혜제 유영(漢惠帝 劉盈)
셋째 형 : 조은왕 유여의(趙隱王 劉如意)
넷째 본인 : 효문황제 유항(孝文皇帝 劉恒)
다섯째 동생 : 조공왕 유회(趙共王 劉恢)
여섯째 동생 : 조유왕 유우(趙幽王 劉友)
일곱째 동생 : 회남려왕 유장(淮南厲王 劉長)
여덟째 동생 : 연령왕 유건(燕靈王 劉建) - 후비(아내 및 후궁)
대왕 왕후(代王 王后) : 유항이 대왕(代王)이었을 때의 정실 왕후. 일찍 사망했으며, 낳은 아들 4명도 모두 일찍 죽음.
황후 두의(竇漪, 두씨) : 문황후(文皇后)로 책봉됨. 자녀: 유표(劉嫖), 유기(劉啟), 유무(劉武)
신부인(慎夫人) : 총애를 받았음.
윤희(尹姬) : 신부인과 함께 총애받은 후궁. 총애는 받았으나 자식은 없었음.
위영(魏嬰) : 陕西성 고고학자들이 문제의 후궁일 가능성을 제기한 인물. - 아들
장남 : 유기(劉啟) – 한 경제(漢景帝), 두황후 소생, 뒤를 이어 즉위.
차남 : 유무(劉武) – 양효왕(梁孝王), 두황후 소생.
셋째 : 아들 유참(劉參) – 대효왕(代孝王)
넷째 : 아들 유읍(劉揖) – 양회왕(梁懷王) - 딸
장녀 : 유표(劉嫖) –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 두황후 소생.
이름 미상의 공주 : 주발(周勃)의 아들 주승지(周勝之)에게 출가. 《사기》에는 단순히 ‘공주’로만 기록됨. 원나라 시대 《문헌통고》에서는 “창평공주(昌平公主)”로 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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