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한 경시제 유현(更始帝 劉玄, BC. 3년 ~ AD. 25년) : 재위 AD. 23~25년
현한(玄漢, 23년 ~ 25년)은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이 23년에 왕망(王莽)의 신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운 황조이다. 경시제가 죽고 족제(族弟)인 유수(劉秀)가 후한(後漢)을 세우면서 멸망하였다. 경시제의 이름인 현(玄)을 따서 역사에선 현한(玄漢)이라고 부르며, 또 경시제의 존호에서 따서 경시정권(更始政權)이라고도 한다.
【기원전 3년】
- 유현(劉玄)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며, 서한(西漢) 경왕(景王)의 후손이자 남돈현령(南頓縣令) 유자장(劉子張)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유자장, 어머니는 하후씨(何休氏)이다.
- 전한 경제(景帝)의 6세손(六世孫)으로, 멀리 떨어진 황족 혈통이다.
- 형인 유백승(劉伯升, 본명 유연 劉演)과 함께 당대의 유력한 인물이었다.
【기원후 10년】
- 기원후 10년경, 왕망(王莽)의 치세에 그의 형 유백승이 노역에 동원되어 마을 관리에게 학대를 당하자, 유현은 복수심에 관리들을 살해하고 몸을 숨겼다.
【기원후 17년】
- 신(新)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여러 곳에서 반란군이 일어났고, 유현은 녹림군(綠林軍)에 합류했다.
- 유현은 온화하고 침착한 성격으로 녹림군 내부에서 존경을 받았으나, 실제 전투 능력은 부족했다고 평가된다.
【기원후 23년】
- 이 무렵 녹림군의 세력이 많아졌으나 장군들이 많아서 지휘가 중구난방이었기 때문에 제장들은 전한의 종실들 중에서 황제를 추대하기로 했다. 유현은 신시병과 평림병의 지지를 받았고, 그에 대항해 남양군의 사대부들과 하강병의 지도자 왕상은 용릉병의 지도자 유연을 지지했다. 그런데 하강병의 다른 지도자 장앙이 평림ㆍ신시병 편에 서니 내분을 꺼린 유연이 물러나 유현이 이해 2월에 황제로 즉위하고, 한나라를 재건하고 연호를 경시로 개원하였다.
- 5월에 유연이 완성을 함락해, 6월, 남양군 완성에 입성해 이곳을 수도로 삼고, 종실들과 장군들을 열후로 임명했다.
- 유연의 위명이 높아지자 이를 질시해 유연을 주살하고 광록훈 유사를 대신 대사도로 삼았다. 유연의 동생인 유수(劉秀, 훗날 광무제)는 이 사건에 대해 분노를 표하지 않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며 경시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 9월, 장안에서 난리가 나 왕망이 살해됐다. 왕망을 죽인 공빈취(公賓就)가 그 머리와 인수를 완으로 보내니, 왕망의 머리를 완성 저자에 효수했다. 이달에 낙양이 함락돼 신나라의 왕광과 애장을 사로잡아 보내니, 모두 참수했다. 10월에는 분위대장군(奮威大將軍) 유신이 여남군에서 황제를 자칭한 유망과 그의 대사마 장우와 승상 진무를 죽였다. 낙양으로 천도했다.
【기원후 24년】
- 24년 2월, 장안으로 천도하였다. 왕망이 패망했을 때 미앙궁만 불탔고 나머지 궁궐과 건물은 남아 있어, 궁녀와 기타 궁실의 물건들을 고치지 않고 옛 것을 그대로 썼다.
- 이송과 조맹이 공신들을 왕으로 봉할 것을 상주하자, 주유가 전한 고제의 명령대로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다고 반대했다. 경시제는 먼저 종실 중 태상장군(太常將軍) 유지를 정도왕(定陶王)에, 유사를 완왕(宛王)에, 유경(劉慶)을 연왕(燕王)에, 유흡을 원씨왕(元氏王)에, 대장군 유가를 한중왕에, 유신을 여음왕(汝陰王)에 봉했고, 나중에 이성제후왕을 세우니 왕광은 비양왕(比陽王)에, 왕봉은 의성왕(宜城王)에, 주유는 교동왕(膠東王)에, 위위대장군(衛尉大將軍) 장앙(張卬)은 회양왕(淮陽王)에, 정위대장군(廷尉大將軍) 왕상은 등왕(鄧王)에, 집금오대장군(執金吾大將軍) 요담은 양왕(穰王)에, 신도건은 평씨왕(平氏王)에, 상서 호은(胡殷)은 수왕(隨王)에, 주천대장군(桂天大將軍) 이통은 서평왕(西平王)에, 오위중랑장(五威中郞將) 이일(李軼)은 무음왕(舞陰王)에, 수형대장군(水衡大將軍) 성단(成丹)은 양읍왕(襄邑王)에, 대사공 진목은 음평왕(陰平王)에,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송조(宋佻)는 영음왕(潁陰王)에, 윤존은 언왕(郾王)에 봉했다. 주유만이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음은 감히 바꿀 수 없다 해 끝까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리고 주유는 좌대사마, 유사는 전대사마로 옮기고, 이송을 승상, 조맹을 우대사마로 옮겼다.
- 경시제는 성격이 유약하여 황제가 된 후 궁정생활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모두 장인인 조맹(趙萌, 경시제는 조맹의 딸을 조황후로 처로 삼음)에게 위탁하고 전권을 방임하였다.
- 12월, 적미군(赤眉軍)이 드디어 관문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기원후 25년】
- 또 다른 주요 농민 반란군이었던 적미군(赤眉軍)은 경시제 정권의 혼란을 틈타 장안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 25년 봄, 정월에 방망(方望)과 안릉(安陵, 섬서성 咸陽縣의 동쪽) 사람 궁림(弓林)이 함께 전한의 황태자였던 정안공(定安公) 유영을 황제로 옹립하고 무리 수천 명을 모아 임경(臨涇, 감숙성 鎭元縣)에 머무르자, 승상 이송 등으로 하여금 이를 격파하고 정안공을 비롯하여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의 목을 베게 하였다.
- 3월, 이송과 주유가 적미군과 홍농군 모향(蓩鄕)에서 싸워 졌다. 왕광과 장앙은 하동을 지키다가 등우에게 패배해 장안으로 왔다. 장앙ㆍ신도건ㆍ요담 등은 함께 장안에서는 더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장안 주변을 약탈하고 동쪽으로 가서 완왕 등과 합류하고, 잘 안 되면 그냥 예전처럼 도둑질이나 하자고 결의했다. 경시제는 이를 거부하고, 왕광ㆍ진목ㆍ성단ㆍ조맹을 경조윤 신풍현에, 이송은 신풍현의 홍문정(鴻門亭)에 있는 추성(掫城)에 주둔해 적미에 대항하게 했다. 장앙ㆍ요담ㆍ호은(胡殷)ㆍ신도건 등은 어사대부 외효와 모의하고 함께 경시제를 협박하기로 모의했으나, 시중 유능경(劉能卿)을 통해 이를 알아채 칭탈하고 장앙 등을 불러들여 죽이고자 했다. 외효가 오지 않자, 의심스러워 장앙 등 네 명을 밖에서 기다리게 했다. 장앙ㆍ요담ㆍ호은은 변이 생겼구나 싶어서 달아났고, 신도건만 홀로 들어와 베었다. 장앙ㆍ요담ㆍ호은이 군사를 일으켜 장안을 약탈하고 공격해 오니, 대패하고 다음날 아침 처자와 백여 거기와 함께 조맹이 있는 신풍으로 달아났다.
이제는 왕광과 진목, 성단 등도 장앙과 공모한 것으로 의심해 그들을 불러들여 먼저 온 진목과 성단을 곧장 베었다. 왕광은 이를 알고 두려워 장안으로 가 장앙에게 합류했다. 이송이 경시제 편을 들어 오니, 이송ㆍ조맹이 장안성으로 들어가 왕광ㆍ장앙 등과 한 달 여를 싸웠으나 졌다. 장신궁(長信宮)으로 옮겼다.
적미군이 고릉까지 나아오자 왕광ㆍ장앙 등은 적미군에게 항복했고, 그들은 함께 성을 공격했다. 이송에게 출전하게 했으나 져서 2천여 명이 죽었고 이송도 생포됐다. 이송의 동생 이범(李汎)이 성문교위를 맡고 있었는데, 적미가 형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이범에게 성문을 열게 했다. - 9월, 적미군이 성에 들어오니 유현은 홀로 달아났다. 시중 유공이 걸어서 고릉으로와 함께했다. 경시제를 놓쳐서 적미에게 주살될까 두려워해 성 바깥을 경비하던 우보도위 엄본(嚴本)에게 들켜 갇혔다. 적미군은 20일의 말미를 주며 그 안에 항복하면 장사왕(長沙王)으로 삼겠다고 했다. 유공을 보내서 항복을 청했고 적미는 장군 사록(謝祿)에게 항복을 받게 했다.
- 25년 10월, 사록을 따라 나와 웃옷을 벗어(육단) 장락궁에 이르러 옥새와 인수를 적미의 황제 유분자에게 바쳤다. 적미는 경시제를 억류하고 죽이려 하니, 유공과 사록이 살려줄 것을 청했으나 듣지 않자 경시제를 풀어주고 함께 칼로 자결하려 했다. 번숭이 이들을 말리고 경시제를 사면해 외위후(畏威侯)에 추증했다가, 나중에는 약속대로 장사왕에 봉했다. 이후 경시제는 항상 사록과 유공에게 의지했다.
적미가 삼보를 약탈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경시제에게 향하자, 장앙의 부추김을 받은 사록에게 교살됐다. 유공은 밤중에 경시제의 시신을 거두어 숨겼다. - 후한 광무제가 즉위 후에 회양왕(淮陽王)으로 추증하고 지금의 산시 장안현 동쪽 패릉(霸陵)에 장사지냈다.
【요약 정보】
- 이름 : 유현(劉玄)
- 시호 : 회양왕(淮陽王) - 광무제가 추증
- 묘호 : 없음
- 재위 칭호 : 경시제(更始帝)
- 출생 : 기원전 3년
- 사망 : 기원후 25년 (향년 28세)
- 부친 : 유자장(劉子張)
- 모친 : 하후씨(何休氏)
- 재위 : 기원후 23년 2월 ~ 기원후 25년 9월 (2년 7개월)
- 전임 : (자신이 멸망시킨) 신(新)나라 황제 왕망(王莽)
- 후임 : 동한(東漢)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 경시제 멸망 직후에는 적미군 황제 유분자(劉盆子)가 있었음
- 경시제는 왕망의 신나라를 멸망시킨 농민 반란군의 황제였지만, 리더십 부족과 내부 분열, 그리고 강력한 적미군의 압박으로 인해 짧은 재위를 마감하고 살해당했다. 그는 동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에게 황권의 정통성을 넘겨주는 과도기적 인물로 평가된다.
【경시제 유현의 가족관계】
1) 선조
- 7세조 : 한나라 경제와 시녀 당아(唐兒) 사이에서 장사정왕 유발(劉發)을 낳음
- 6세조 : 유발(劉發)이 아들 숭릉절후 유매(劉買)를 낳음
- 고조부 : 유매는 숭릉대후 유웅거(劉熊渠)와 울림태수 유외(劉外)를 낳음
- 증조부 : 유웅거(劉熊渠)는 숭릉효후 유인(劉仁)과 창오태수 유리(劉利)를 낳음
- 조부 : 유리(劉利)는 아들 유자장(劉子張)을 낳음
- 아버지: 유자장(劉子張)은 부인 하씨(何氏)와 사이에서 유현(劉玄)과 유건(劉騫)을 낳음
2) 아내와 후궁
- 한부인(韓夫人) : 총애받은 후궁, 술을 좋아함
- 조부인(赵夫人) : 역시 총애받은 후궁, 조맹(赵萌)의 딸
3) 아들들
- 유구(劉求) : 상읍후(襄邑侯). 경시제 유현의 제사를 계승하였으며, 나중에 성양후(成陽侯)로 봉작이 바뀜
- 유흠(劉歆) : 곡숙후(谷熟侯)
- 유리(劉鲤) : 수광후(寿光侯). 패헌왕 유보(劉輔)와 사이가 좋았으며, 유번자(劉盆子)가 아버지를 해쳤다고 원망하여 그의 형인 식후 유공(式侯 劉恭)을 죽여 복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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