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1대 광무제 유수(光武帝 劉秀, BC. 5년 ~ AD. 57년) : 재위 AD. 25~57년
【기원전 5년】
- 기원전 5년 1월 15일, 유수(劉秀)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일부 자료에서는 기원전 6년에 태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자(字)는 문숙(文叔)이다.
- 전한 경제(景帝) 유계의 6세손으로, 전한 황실의 먼 후손이다.
- 아버지는 남돈령(南頓令) 유흠(劉欽)이고, 어머니는 번선두(樊嫻都)이다.
- 그는 지양현(棘陽縣, 현재 하남성 남양시 신야현)에서 태어났다 .
-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형 유연(劉縯) 등과 함께 자랐다.
【기원후 8년】
- 외척 왕망(王莽)이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新) 왕조를 세우며 국호를 ‘신’으로 바꿨다. 이로써 한 왕조는 일시적으로 단절된다.
【기원후 22년】
- 형 유연과 함께 왕망의 신나라에 반대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이 시기 천하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기원후 23년】
- 이 시기에 여러 반란군이 난립했는데, 유수의 종친인 유현(劉玄)이 황제에 즉위하여 경시제(更始帝)가 되었다 .
- 유수는 경시제 휘하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쿤양(昆陽) 전투에서 적은 병력으로 왕망의 대군을 격파하는 등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다.
- 그러나 경시제는 유수의 형인 유연의 명성과 군사력을 견제하여 살해했다. 유수는 이때 슬픔을 억누르고 경시제에게 충성을 다하며 때를 기다렸다.
【기원후 25년】
- 녹림군 출신 황제인 경시제가 여러 파벌 싸움과 능력 부족으로 국정을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자, 유수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 8월 5일, 허베이(河北)의 오성(鄗城)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건무(建武)로 정했다. 이로써 후한(後漢) 왕조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 그는 한나라를 복원했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세조(世祖) 광무황제(光武皇帝)라 칭했다.
- 즉위 후 군웅할거 시기의 다른 군벌들을 차례로 격파하며 중국을 재통일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다(기원후 36년에 통일을 완수함).
【기원후 29년】
- 낙양에 태학(太學)을 설치하고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어 유학(儒學)을 강론하게 했다.
- 주류 학설은 광무제가 유교를 숭상하고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광무제는 참위설(讖緯說)과 같은 신비주의적 예언 사상을 자신의 통치 근거로 삼기도 했다.
【기원후 30년】
- 과도한 군사 재정으로 인해 수확량의 1/10을 거두던 조세를 전한 시대와 같은 1/30로 대폭 감면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
- 둔전(屯田) 시행으로 병사들의 식량을 확보하고 민간 노동력을 전환하여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켰다.
【기원후 31년】
- 지방 상비군을 해체하여 재정 부담을 경감하고, 중앙정부의 삼공(三公) 제도를 정비했다.
- 불필요한 관직을 줄이고, 황실 재정을 국가 재정에 통합하는 등 재정 기관을 재편했다.
【기원후 36년】
- 기원후 36년에 마지막 남은 쓰촨(四川) 지방의 공손술(公孫述) 세력까지 진압하며 중국을 완전히 재통일했다.
- 천하 통일 후, 공이 큰 장수들과 관료들에게는 큰 봉지(封地)를 주되, 정치적 실권은 주지 않음으로써 권력 다툼을 방지하고 공신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송 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과 비교될 정도로 뛰어난 처신으로 평가된다.
【기원후 39년】
- 경지 면적과 호적에 대한 전국적인 조사를 시행하여 국가 재정의 기초를 확립하고 인민 통치를 강화했다.
【기원후 40년】
- 혼란스러웠던 화폐 제도를 안정시키기 위해 오수전(五銖錢) 주조를 재개했다.
- 같은 해, 베트남에서 일어난 쯩짝(Trưng Trắc) 자매의 반란을 마원(馬援)을 파견하여 진압했다.
【기원후 56년】
- 연호를 건무중원(建武中元)으로 변경했다. 그의 마지막 연호이다.
【기원후 57년】
- 3월 29일, 62세의 나이로 낙양(洛陽)에서 사망했다.
- 능은 낙양 북쪽의 원릉(原陵)이다.
- 사후 황태자 유장(劉莊)이 즉위하여 후한 명제(明帝)가 되었다.
【요약 정보】
- 이름 : 유수(劉秀)
- 자(字) : 문숙(文叔)
- 묘호 : 세조(世祖)
- 시호 : 광무황제(光武皇帝)
- 출생 : 기원전 5년 1월 15일 (일부 자료 기원전 6년)
- 출생지 : 지양현(棘陽縣)
- 사망 : 기원후 57년 3월 29일 (향년 62세)
- 사망지 : 낙양(洛陽)
- 재위 : 기원후 25년 8월 5일 ~ 기원후 57년 3월 29일 (31년 236일)
- 전임 :신(新)나라 황제 왕망(王莽)과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
- 후임 : 후한 명제(明帝) 유장(劉莊)
- 광무제 유수는 신나라의 혼란과 군웅할거 시대를 평정하고 후한을 건국하여 약 30여 년간의 재위 동안 중국을 다시 통일하고 안정을 회복시킨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치세는 광무중흥(光武中興)이라 불리며, 백성을 위한 조세 감면, 제도 개혁, 검소한 정치로 후한의 기반을 다졌다.
【광무제의 가계】
1) 족보 (선조)
- 7세조 : 한 경제(漢景帝)가 첩 정희(程姬)의 시녀였던 당아(唐兒, 즉 당희)와의 사이에서 장사정왕 유발(長沙定王 劉發)을 낳음.
- 6세조 : 유발(劉發)은 숭릉절후 유매(舂陵節侯 劉買)를 낳음.
- 5세조 : 유매(劉買)는 숭릉대후 유웅거(舂陵戴侯 劉熊渠)와 울림태수 유외(鬱林太守 劉外)를 낳음.
- 증조부 : 유외(劉外)는 거록도위 유회(巨鹿都尉 劉回)를 낳음.
- 조부 : 유회(劉回)는 남돈령 유흠(南頓令 劉欽)과 유량(劉良)을 낳음.
- 아버지 : 유흠(劉欽)은 번중(樊重)의 딸 번선도(樊娴都)와 결혼하여 자녀들을 낳음.
- 양아버지 : 한 원제 유석(漢元帝 劉奭) — 전한 황제로, 유수와 혈연은 없지만 종실 내에서 양부로 간주됨 (※ 정치적 관계)
2) 형제자매
- 장녀 : 유황(劉黃)
- 차녀 : 유원(劉元)
- 장남 : 유연(劉縯)
- 차남 : 유중(劉仲)
- 삼남 : 유수(劉秀) → 후일 광무제, 후한의 창시자
- 삼녀 : 유백희(劉伯姬)
3) 아내 및 후궁
- 황후 곽성통(郭聖通)
- 광열황후 음려화(光烈皇后 陰麗華)
- 미인 허씨(許氏) — 후궁
4) 황자 및 공주
- 곽성통 소생 :
유강(劉彊): 동해공왕
유보(劉輔): 패헌왕
유강(劉康): 제남안왕
유연(劉延): 부릉질왕
유언(劉焉): 중산간왕 - 허미인 소생 :
유영(劉英): 초여후 - 음려화 소생 :
한 명제 유장(漢明帝 劉莊)
유창(劉蒼): 동평헌왕
유경(劉荊): 광릉사왕
유형(劉衡): 임회회공
유경(劉京): 낭야효왕 - 공주들 :
무음장공주 유의왕(舞陰長公主 劉義王)
열양공주 유중례(涅陽公主 劉中礼)
관도공주 유홍부(館陶公主 劉红夫)
욕양공주 유예(淯陽公主 劉礼劉)
이읍공주 유수(郦邑公主 劉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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