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4일 일요일

신(新) 황제 왕망(王莽, BC. 45년 ~ AD. 23년) : 재위 AD. 9~23년)

 () 황제 왕망(王莽, BC. 45~ AD. 23) : 재위 AD. 9~23)

 

기원전 45

  • 왕망은 기원전 45년에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왕망이며, 자는 거군(巨君)이다.
  • 본관은 원성 왕씨(元城王氏)로서, 그 출신은 제북왕 전안(田安)6대손으로, 아버지는 왕만(王曼)이며, 어머니는 거씨(渠氏), 형은 왕영(王永)이다.
  • 왕망의 숙모는 한 원제 유석(元帝 劉奭, BC. 76~33)의 황후이자 한 성제 유오(成帝 劉驁, BC. 51~7)의 어머니인 왕정군(王政君) 태황태후이다. 왕망의 아버지 왕만은 그가 어릴 때 일찍 사망했다. 어린 시절 왕망은 검소하고 학문에 정진하는 삶을 살았으며, 부유하게 사는 사촌들과는 달리 겸손, 검약, 학구적인 태도로 칭송받았다. 그는 유교 학자의 옷을 입었으며,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사망한 형 왕용(王永)의 아내와 아들을 잘 돌보는 것으로 칭찬받았다.
 

기원전 16

  • 왕망의 또 다른 숙부인 성도후 왕상이 자신의 봉토 일부를 나누어 왕망을 후로 책봉해 달라는 청원을 했다. 여러 존경받는 관리들도 이 요청에 동의했고, 성제는 왕망의 명성에 감명을 받았다. 이에 따라 성제는 왕망을 신도후(新都侯)로 책봉하고, 그를 광록대부광록대부(光祿大夫)로 승진시켰다. 역사가들은 왕망이 더 높은 직위로 승진할수록 더욱 겸손해졌다고 기록한다. 그는 부를 축적하지 않고, 학자들을 후원하고 동료들에게 선물을 주는 데 돈을 사용하여 많은 칭찬을 받았다.
 

기원전 8

  • 왕망의 숙부이자 병권을 쥐고 있던 대장군 왕봉이 병들자, 왕망은 그를 밤낮으로 간호하여 왕봉은 왕망의 극진한 보살핌에 감동하여 태후에게 왕망을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다.
  • 기원전 81116일에 병세가 위중했던 숙부 왕근이 사임하고 왕망을 후임으로 추천하자, 기원전 81128일에 37세의 나이로 대사마(大司馬)에 임명되었다. 대사마는 당시 황실 정부에서 가장 강력한 직위였다. 그는 사촌인 춘위장의 부패를 고발하여 그의 처형에 이르게 했고, 이를 통해 권력 장악에 기여했다.
 

기원전 7

  • 기원전 7년에 성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그의 조카 유흠(劉欣)이 애제로 즉위했다. 애제 즉위 초 왕망은 여전히 강력한 인물이었으나, 애제의 할머니인 부태후의 영향력 확대와 함께 왕망의 권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애제의 생모인 정태후와 부태후는 자신들의 일족을 왕씨 가문과 동등하게 만들고자 했다. 부태후와의 직접적인 대립이 발생했는데, 한 황실 연회에서 왕망은 부태후의 좌석이 태황태후 왕정군의 옆에 배치된 것을 보고 담당 관리를 꾸짖어 부태후의 좌석을 옆으로 옮기게 했다. 이에 격분한 부태후는 연회 참석을 거부했고, 왕망은 부태후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사임했다. 애제는 그의 사임을 승인했고, 이 사건 이후 왕씨 가문은 점차 권력을 잃었다.
 

기원전 5

  • 기원전 5년에는 애제가 부태후의 요청에 따라 왕망을 그의 영지인 신두로 돌려보냈다. 그는 반역을 꾸민다는 허위 고발을 피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았다. 같은 해에 그의 아들 왕획이 가노를 죽이자, 왕망은 그에게 자살을 명했다.
 

기원전 2

  • 기원전 2년경에는 왕망의 수도 복귀를 요청하는 백성과 관리들의 청원이 수백 건에 달했다. 애제도 왕망을 존경하여 그와 그의 사촌 왕인을 다시 수도로 불러들여 태황태후 왕정군을 돕도록 했다. 하지만 왕망은 공식 직책을 맡지 않았고, 정치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기원전 1

  • 기원전 1년에 애제는 후사 없이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태황태후 왕정군은 애제의 총신이자 대사마였던 동현에게서 병권을 회수하고, 왕망을 다시 황실 정부로 불러들였다.
  • 애제의 뒤를 공식적으로는 그의 사촌 유기자(유평)가 평제로 계승했지만, 이는 9년 후 왕망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애제의 권력 남용은 처음에는 할머니의 영향을 받았고 나중에는 동현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백성들과 관리들이 왕씨의 복귀를 갈망하게 만들었다.
  • 기원전 1년에 권력을 되찾은 왕망은 실제 또는 인지된 정치적 적들을 숙청하기 위한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기원후 1

  • 왕망은 먼 월상족을 뇌물로 설득하여 희귀한 길조로 여겨지는 흰 꿩을 바치게 했고, 그의 추종자들이 태황태후 왕정군을 설득하여 왕망을 안한공(安漢公)으로 책봉하게 했다. 이는 한나라 귀족 제도에 없는 작위였고, 한나라 역사상 공작이 책봉된 적은 없었다. 이 조치는 왕망에게 주공과 비견될 만한 칭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기원후 3

  • 왕망의 아들 왕우(王宇)는 아버지의 독재적인 정권과 개인 숭배를 강화하는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평제가 성인이 되면 왕씨 가문이 대중의 반발에 직면할 것을 우려했다. 왕우는 그의 스승인 오장, 처남인 여관, 그리고 위씨(Weis) 가문과 함께 왕망의 독재적인 권력을 깨트리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만들어 왕망을 걱정하게 한 다음, 오장이 왕망에게 위씨에게 권력을 이양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왕우는 여관에게 왕망의 저택 문에 피 한 병을 던지라고 지시했지만, 여관은 왕망의 경비대에게 발각되었다. 왕망은 왕우를 체포했고, 왕우는 자살했다. 그의 아내(여관의 여동생) 여언은 처형되었다. 왕망은 이어서 오장과 위씨 가문 전체를 처형했지만, 위희는 제외되었다. 왕망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다른 잠재적 적들을 제거했다.
 

기원후 9

  • 점점 높아지는 위상과 백성들의 권유를 등에 업고 황제에 올라 신나라를 건국했다.
  • 신나라의 유일한 황제로서 공식적으로는 시건국천제(始建國天帝)로 불렸다.
  • 그의 통치 기간은 서한과 동한 사이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는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토지 재분배 프로그램을 시작했으며, 유교 학자로서 중국 고전에 나타난 조화로운 사회를 구현하려 했다.
 

기원후 18

  • 기원후 18년에 흉노의 선우선이 사망하고 그의 동생 유가 선우가 되었다. 유는 신나라와의 평화를 고려했고, 그의 핵심 관리 중 한 명과 조카를 장안에 사절로 보냈다. 이에 왕망은 왕소군의 형제 왕흡을 보내 공주 운과 그녀의 남편 서우당을 만나게 했다. 그러나 회의 중에 신나라 군대가 공주와 그녀의 남편을 기습적으로 납치하여 장안으로 데려갔다. 왕망은 서우를 선우로 삼아 무력으로 흉노 왕좌에 앉힐 계획을 세웠고, 이로 인해 흉노와의 평화는 깨졌다.
 

기원후 20

  • 기원후 20년에 왕망은 후계자를 갑자기 변경했다. 그는 태자 왕림이 동생 왕안보다 어리다는 이유로 태자 자리에서 폐위하고, 왕안을 신천왕, 왕림을 동의양왕으로 봉했다.
 

기원후 21

  • 기원후 21년에 황후 왕씨가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 후 왕망은 황후의 궁녀였던 원벽과 자신이 불륜 관계였으며그녀가 태자 왕림과도 관계를 맺었고 왕림의 폐위 때문에 왕망을 살해하려 공모했음을 발견했다. 왕망은 왕림에게 독으로 자살하라고 명령했지만, 왕림은 거부하고 칼로 자결했다. 그해 말 왕안도 사망했다. 왕망은 이후 자신이 여종들에게서 얻은 두 아들이 있다고 발표하고, 그들을 공작으로 봉했다.
 

기원후 22

  • 기원후 22년에 왕망은 농민 반란이 흉노보다 훨씬 큰 위협임을 깨달았다. 그는 왕광과 연단에게 농민 반란 진압을 명했으나, 지친 군대는 결국 붕괴했다. 같은 해 여림군은 전염병으로 인해 반군 병력의 절반을 잃었다.
 

기원후 23

  • 그의 후기 통치는 대규모 농민 반란,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적미군의 봉기로 혼란스러웠다.
  • 기원후 2310, 수도 장안이 공격받고 황궁이 약탈당하면서 왕망은 전투 중에 사망했다.
  • 그의 사망으로 한나라는 23년 갱시제가 즉위하거나, 25년 광무제가 적미군을 격파하고 즉위하면서 복원되었다.
 

요약 정보

  • 출생 : 기원전 45, 자는 거균이다
  • 사망 : 기원후 23106(향년 67), 수도 장안이 공격받아 전투 중에 사망했다.
  • 재위 : 신나라의 창건자이자 유일한 황제로, 기원후 9년부터 23년까지 재위했다.
  • 전임 : 한 유자영(孺子嬰)
  • 후임 : 한 갱시제 또는 한 광무제
  • 부친 : 왕만(王曼)
  • 모친 : ()
  • 왕망은 한나라 외척 가문 출신으로, 잠시 황위에 올라 신나라를 건국했지만, 그의 개혁 노력은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고 결국 농민 반란으로 인해 몰락했다. 전통적으로는 찬탈자로 평가받지만,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그를 선구적이고 이상적인 사회 개혁가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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