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 고제 유방(劉邦, Liu Bang, 기원전 256~195년) : 재위 202~195년
【기원전 256년】 또는 기원전 247년
- 유방은 기원전 256년에 태어났다는 주장이 있다. 또는 기원전 247년에 태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서진(西晉)의 학자 황보밀(皇甫謐, 215~282)은 유방이 진 소양왕(秦昭襄王) 51년에 태어나 한(漢)나라 12년에 사망했을 때 62세였다고 기록한다. 하지만 《한서(漢書)》를 주해한 신하 잔(臣瓒)의 기록에 따르면 유방은 한왕(漢王)에 즉위했을 때 42세였고 12년간 재위 후 53세에 사망했다고 보아 기원전 247년에 태어났다고 추정한다. 유방은 패현(沛縣) 풍읍(豐邑) 중양리 사람으로, 성은 유(劉)씨, 이름은 방(邦)이다. 자(字)는 계(季)인데, 막내를 뜻하는 글자로 흔히 쓰는 호칭이었다. 그의 가문은 원래 위(魏)나라의 영토였던 풍읍으로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되며, 유방의 조부는 풍공(豐公)에 봉해졌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형제로는 큰형 유백(劉伯, Liu Bo), 둘째 형 유희(劉喜, Liu Xi), 이복동생 유교(劉交, Liu Jiao)가 있었다.
- 유방은 진나라의 수도 함양(咸陽)에서 노역을 하던 중, 순행하는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년~기원전 210년)의 위엄을 보고 “아아, 대장부라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라고 감탄하였다. 이는 훗날 그가 천하를 호령할 원대한 포부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유방은 젊은 시절, 전국시대 위나라의 명재상인 신릉군(信陵君)을 매우 흠모했으나, 신릉군이 성인이 되기 전에 사망하여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 신릉군의 옛 식객이었던 장이(張耳)가 외황(外黃)의 현령이 되자, 유방은 그를 찾아가 식객으로 지내며 벗이 되었다. 이후 위나라가 진나라에 의해 멸망하자, 장이는 진나라를 섬기지 않고 도망쳤으며, 유방 또한 고향으로 돌아왔다.
- 유방은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으로 지냈다. 정장은 당시 작은 마을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였다.
【기원전 209년】 진 이세황제 원년
- 7월 진승ㆍ오광의 난과 거병 : 진 이세(秦二世) 원년 7월(기원전 209년), 진승(陳勝, Chen Sheng)과 오광(吳廣,Wu Guang)이 정해진 기일을 맞추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대택향(大澤鄉)에서 봉기하는 대택향 기의(大澤之變)가 일어난다. 각지에서 진나라에 맞서는 반란이 확산되자 패현 현령(沛縣縣令)은 두려움에 떨며 진승에게 호응하려 했다. 이때 주리(主吏) 소하(蕭何, Xiao He)와 옥연(獄掾) 조참(曹參, Cao Can)이 현령에게 명망이 높던 유방을 불러들여 그를 지지하라고 조언한다. 현령은 번쾌(樊噲, Fan Kuai)를 보내 유방을 불렀으나, 유방이 성에 당도하자 돌연 마음을 바꿔 성문을 걸어 잠근다. 이에 유방은 성 밖에서 백성들에게 서신을 보내 현령의 처사를 알리며 호소했고, 성내 주민들이 현령을 죽인 후 유방을 추대하여 ‘패공(沛公)’이 된다. 패공이 된 유방은 약 3천 명의 병력을 모아 호릉(胡陵)과 방여(方与) 등을 공격하고, 자신의 고향인 풍읍(丰邑)을 지키는 등 초기 세력을 확장했다.
- 함양 함락 : 유방은 유학자 역이기(酈食其, Li Yiji)의 조언을 받아 진류(陳留)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손에 넣으며 식량과 병력을 보충한다. 그는 개봉(開封)과 남양(南陽)을 차례로 공략하며 진(秦)의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유방은 항복하는 성주들의 지위를 보전해 주는 정책을 펴 불필요한 전투를 피하고 진격 속도를 빠르게 가져갔다. 결국 유방은 관중(關中)의 남부 관문인 무관(武關)까지 이르게 된다. 이 시기, 진나라 환관 조고(趙高, Zhao Gao)는 2세 황제를 죽이고 유방에게 관중을 둘로 나누어 각자 왕이 되자는 밀서를 보내지만, 유방은 이를 거절하고 장량(張良, Zhang Liang)의 계책으로 무관 수비대장을 속여 무관을 차지하고 함양(咸陽)을 함락한다. 진시황 사후 2세 황제를 내세워 전권을 장악했던 조고는 결국 왕으로 옹립하려던 자영(子嬰, Ziying)에게 피살된다.
【기원전 208년】
- 유방은 초회왕(楚懷王)이 보낸 영포(英布)의 부하 포장군(蒲將軍)을 따라 서진하며 진나라 군과 싸워 용서(雍齒)의 부대가 있던 풍(豐)을 함락시키고 항우와 함양으로 향하는 등 여러 전투에 참여하였다.
【기원전 207년】
- 10월(한 원년) : 진나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자영(子嬰, 기원전 ?~206년)이 유방에게 항복하면서 진나라가 멸망한 달이다. 역사가들은 이 달을 ‘한 원년’의 시작으로 본다. 유방은 화려한 진나라 궁궐에 머물려 했으나, 번쾌(樊噲, 기원전 ?~189년)와 장량(張良, 기원전 ?~186년)의 간언을 듣고 뜻을 접었으며, 소하(蕭何)는 진나라의 중요한 지도와 호적 자료 등을 수습하여 훗날 한나라 통치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유방은 함양 백성들에게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폐지하고 ‘약법삼장(約法三章)’을 공포하여 큰 지지를 얻었다.
- 11월 : 유방은 장량의 조언에 따라 함곡관(函谷關)을 지켜 다른 제후들이 관중(關中)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
- 12월 : 항우(項羽, 기원전 ?~202년)는 유방이 함곡관을 봉쇄하고 관중에서 왕이 되려 한다는 소식에 크게 분노하여 진군하였다. 항우는 함곡관을 공격해 뚫고 희(戲) 지역에 이르러 유방을 공격하려 했다. 이때 유방의 부하인 좌사마 조무상(曹無傷)이 항우에게 유방에 대한 밀고를 했고, 장량의 벗인 항백(項伯, 기원전 ?~192년)의 도움과 장량의 설득으로 유명한 ‘홍문연(鴻門宴)’이 벌어졌다. 홍문연에서 항우는 범증(范增, 기원전 277~204년)의 조언을 듣지 않고 유방을 죽이지 못하여, 유방은 이 위기를 극복하게 된다.
【기원전 206년】
- 항우에 의해 서부 한중(漢中)에 좌천되어 한왕(漢王)으로 봉해진 해이다. 이 시기부터 기원전 202년 2월까지 유방은 ‘한왕(King of Han)’의 칭호로 통치했다. 항우는 각지의 제후들에게 봉지를 나누어 주었는데, 유방에게는 촉(蜀), 파(巴), 한중(漢中) 등 먼 오지 지역을 봉토로 주었고, 관중 지역은 옹왕 장한(章邯), 새왕 사마흔(司馬欣), 적왕 동예(董翳)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에 유방은 파촉으로 물러났고, 얼마 후 한신(韓信)의 조언을 받아 관중을 공격하여 세 왕을 제압하고 관중을 장악하며 초한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기원전 205년】
- 유방은 북벌을 단행하여 위왕 표(魏豹)를 토벌하고, 이어 제왕 전횡(田橫)을 공격했으나 크게 고전하였다. 이후 유방은 항우에게 대패하여 하남(河南) 지역을 상실하기도 했다.
- 기원전 205년, 유방은 아군으로 끌어들인 제후들과 연합하여 56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彭城)으로 진격한다. 팽성 점령 후 승리에 도취된 한군이 군기가 해이해져 주연을 즐기고 방심하는 사이, 항우는 자신의 군대에서 정예병 3만 명을 뽑아 급히 돌아와 팽성의 한군을 급습한다. 이 전투에서 유방군은 10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며 참패하고, 유방은 가까스로 도망쳐 목숨을 건진다. 이 과정에서 유방의 아버지 유태공(劉太公, Liu Taigong)과 부인 여치(呂雉, Lü Zhi)는 초군(楚軍)의 포로가 된다. 유방이 도망치던 중 마차를 가볍게 하기 위해 아들 유영(劉盈, Liu Ying)과 딸 노원공주(魯元公主, Princess Luyuan)를 여러 번 마차 밖으로 밀어 떨어뜨리려 했으나, 마부였던 하후영(夏侯嬰, Xiahou Ying)이 다시 태워 구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 패배 이후 유방에게 가세했던 제후들은 일제히 항우에게로 돌아선다.
【기원전 204년】
- 유방은 항우와의 형양(滎陽) 대치에서 군사적 열세에 몰렸으나, 이신(酈食其)의 제후 설득과 진평(陳平)의 계책 등으로 항우 진영을 이간질하며 버텼다.
【기원전 203년】
- 유방은 항우와의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마침내 항우와 광무(廣武)에서 휴전을 맺고 중분천하(中分天下, 천하를 양분)하기로 합의했다.
【기원전 202년】
- 수많은 전쟁 끝에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에서 항우를 최종적으로 토벌하고,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다. 같은 해 2월 28일, 유방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전한(前漢, Western Han)을 건국하고 고황제(高皇帝, Emperor Gaozu)가 된다. 재위 기간 동안 그는 군현제(郡縣制)와 봉건제(封建制)를 병행하는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한다. 또한, 무위(無爲)를 숭상한 유학자 육가(陸賈, Lu Jia)의 영향과 더불어, 황제와 노자(老子)를 지칭하는 황로사상(黃老思想)을 통해 나라를 다스렸다.
- 그의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고황제(高皇帝)이며, 일반적으로 고조(高祖)로 불린다. 그는 처음 낙양(Luoyang)에 수도를 정했으나, 장량(張良)과 루징(Lou Jing)의 조언에 따라 관중 지역의 장안(長安)으로 천도했다. 또한, 그의 부인인 여치(呂雉)를 황후로, 아들인 유영(劉盈)을 태자로 책봉했다. 그는 군현제와 봉건제를 병용한 군국제를 실시하였으며, 무위(無爲)를 숭상한 유학자 육가(陸賈)의 영향 속에서 무위를 실행하며 황제와 노자(老子)를 지칭하는 황로사상(黃老思想)을 이용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황제가 된 후, 그는 이른바 ‘이성제후왕(異姓諸侯王)’들을 제거하며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해 나갔다.
【기원전 201년】
- 유방은 한 제국 건국에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포상을 시작했으나, 포상 배분 방식에 대한 논의가 길어져 1년 동안 지연되었다. 이때 소하(蕭何)가 가장 큰 공신으로 인정받아 후작에 봉해지고 가장 많은 식량 비축량을 하사받았다.
【기원전 200년】
- 소하의 지휘 아래 장락궁(長樂宮)이 완공되었으며, 유방은 궁정을 장락궁으로 옮겨 통치했다.
- 북방 유목민족 흉노(Xiongnu)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주나라 귀족의 후손 10만 명을 강제로 북쪽 국경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또한, 흉노와의 백등산 포위(白登山之圍) 사건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며, 유방은 진평의 계책으로 겨우 포위망을 벗어났다.
【기원전 199년】
- 제왕 한신(韓信)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소하의 계책으로 한신을 붙잡아 회음후(淮陰侯)로 강등하고 후에 참형에 처했다.
【기원전 198년】
- 위앙궁(未央宮)이 완공된 해이다.
【기원전 197년】
- 회남왕 영포(英布)가 반란을 일으켜 유방이 직접 토벌에 나섰다.
【기원전 196년】
- 번쾌가 상국(相國)이 된 해이다.
【기원전 195년】
- 6월 1일 : 유방이 장락궁에서 붕어(사망)한 날짜이다. 그는 영포의 반란 진압 과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병을 얻어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한 혜제(漢惠帝)가 황위에 올랐다. 그의 사망 시 나이에 대해서는 62세라는 설과 53세라는 설이 전해진다.
【요약】
- 출생 : 기원전 256년(또는 기원전 247년) / 패현 풍읍(沛縣豊邑) 중양리(中陽里)
- 사망 : 기원전 195년 6월 1일 / 장락궁(長樂宮)
사인 : 영포(英布) 반란 진압 과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한 병환 - 재위
한왕(漢王) 시절 : 기원전 206년~기원전 202년
한 황제 시절 : 기원전 202년~기원전 195년 - 전임 : 진(秦)나라 마지막 왕 자영(子嬰, Ziying) - (최초의 황제이므로 정식 전임자는 없음)
- 후임 : 한 혜제(漢惠帝) 유영(劉盈, Liu Ying)
- 부모
부 : 태상황 유태공(太上皇 劉太公)
모 : 소령황후 왕함시(昭靈皇后 王含始) - 형제자매
첫째 형 : 무애왕 유백(武哀王 劉伯) - 일찍 사망. 한 5년(기원전 202년) 봄 정월, 당시 유방은 한왕이었기에 생전에는 후작으로 추증됨. 고후 7년(기원전 181년) 5월, 무애왕으로 추존됨.
둘째 형 : 오경왕 유희(吳頃王 劉喜) - 대왕으로 봉해졌으나, 흉노의 침공 때 성을 버리고 도망쳐 유방에게 강등당함 → 합양후(合陽侯). 기원전 193년 사망. 그의 아들 유비(劉濞)가 오왕으로 봉해진 뒤, 유희는 추존되어 “경왕”이라 불림.
넷째 동생 : 초원왕 유교(楚元王 劉交) - 유가(儒家)의 대표적 인물로, 신자(荀子)의 제자인 부구백(浮邱伯)에게 《시경(詩)》을 배움. 한 6년(기원전 201년) 초왕에 봉해짐. “원왕시(元王詩)”라는 이름으로 《시경》 주석을 달아 유교 초기 문헌으로 평가됨. 팽성 유씨(彭城劉氏)의 시조.
누이 : 선부인(宣夫人) - 이름 및 생애는 전해지지 않음. 유방이 황제가 된 후 “선부인”으로 추존됨. 여후 7년(기원전 181년) 5월, 다시 "소애후(昭哀后)"로 추존됨. - 황후
여치(呂雉) : 유방의 정실 황후. 한 혜제 유영(劉盈)과 노원공주(魯元公主)의 생모. 유영이 즉위 후 “여태후”로 존숭됨. 시호는 “고황후(高皇后)”. 후한 광무제는 “황” 자를 빼고 단순히 “고후”로 부름. - 후궁들
척희(戚姬) : 혜제의 이복동생 유여의(劉如意)의 생모.
박희(薄姬) : 문제 유항(文帝 劉恆)의 생모. 문제 즉위 후 “박태후(薄太后)”로 존숭됨. 후한 광무제는 그녀를 “고황후”로 존숭함.
관부인(管夫人)
조자아(趙子兒) 부인
석미인(石美人) : 만석군(萬石君) 석분(石奮)의 누나.
부부인(傅夫人) : 유방과 함께 장릉(長陵)에 묻힌 것으로 보임. 전41년, "충(忠)"이라는 인물이 무리를 이끌고 부부인의 무덤을 도굴함.
당희(唐姬, 당산부인) : 한 초대의 여류 시인. 유명 시집 《안세방중가(安世房中歌)》 17편을 남김.
조씨(曹氏) : 유방의 젊은 시절 애인. 《한서》에는 “조부인(曹夫人)”이라 기록됨. 공식 후궁이었는지는 불명.
조희(趙姬) : 장오(張敖)가 바친 미인. - 황자(아들)
제도혜왕(齊悼惠王) : 유비(劉肥, 기원전 ?~189년) 생모 - 조씨(曹氏)
한 혜제(漢惠帝) : 유영(劉盈, 기원전 211/210~188년) 생모 - 여치(呂雉)
조은왕(趙隱王) : 유여의(劉如意, 기원전 207~194년) 생모 - 척희(戚姬)
한 문제(漢文帝) : 유항(劉恆, 기원전 203~157년) 생모 - 박희(薄姬)
조공왕(趙共王) : 유회(劉恢, 기원전 ?~181년) 생모 - 불명
조유왕(趙幽王) : 유우(劉友, 기원전 ?~181년) 생모 - 불명
회남려왕(淮南厲王) : 유장(劉長, 기원전 198~174년) 생모 - 조희(趙姬)
연령왕(燕靈王) : 유건(劉建, 기원전 ?~181년) 생모 - 불명 - 황녀(딸)
장녀 : 노원공주(魯元公主) 생모 –여치. 장오(張敖)에게 출가함.
기타 공주들 : 이공주(李公主), 신도공주(申徒公主), 영공주(榮公主), 부공주(傅公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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