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 황태자 유자 영(孺子 嬰, AD. 5~25년) : 재위 AD. 6~9년)
【기원후 5년】
- 유영(劉嬰)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 전한 선제(宣帝)의 현손(玄孫)이자 광척후(廣戚侯) 유현(劉顯)의 아들이다.
- 서한(西漢) 말대 군주이자 황태자였으며, 유자(孺子)라는 호칭 때문에 유자 영(孺子嬰)으로 불렸다.
- 전한 평제(平帝)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왕망(王莽)은 자신의 찬탈 계획을 위해 후계자가 될만한 유력 황족들을 대부분 제거했다.
- 이에 따라 왕망의 손에 살아남은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가장 어린 현손이었던 유영이 황태자 후보로 지목되었다.
- 하지만 왕망은 유영의 나이가 너무 어려 ‘정식 황제’로 즉위시키지 않고, 자신을 ‘가황제(假皇帝)’ 또는 ‘섭황제(攝皇帝)’라고 칭하며 모든 국정을 장악했다.
- 유영은 이 기간 동안 황태자의 지위만 가졌다.
【기원후 6년】
- 기원후 6년 4월 17일, 유영은 ‘유자 영(孺子嬰)’으로 칭해지며, 명목상의 통치자로 자리매김했다.
- 재위 기간은 기원후 6년부터 8년 11월까지이다.
【기원후 9년】
- 기원후 9년 1월 10일, 왕망은 ‘가황제’ 칭호를 폐지하고, 전한을 완전히 멸망시킨 후 신(新)나라를 건국하여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 왕망은 유영에게 정안공(定安公)이라는 작위를 내렸다.
- 왕망은 어린 유영을 고립시켜 궁궐 깊숙한 곳에 감금하고, 유모조차 말을 걸지 못하게 했다. 이로 인해 유영은 성인이 되어서도 일반적인 동물도 알아보지 못하고, 인지 수준이 어린아이와 같았다고 한다.
- 왕망은 자신의 손녀인 왕씨(王氏, 왕우의 딸)를 유영에게 시집보내 결혼시켰다.
【기원후 24년】
- 왕망의 신나라가 혼란스러워지고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던 시기, 평릉(平陵) 사람 방망(方望) 등이 봉기하여 유영을 추대하며 임경(臨涇)에서 황제로 옹립했다. 그들은 유영이야말로 한나라의 정통을 잇는 천자라고 주장했다.
【기원후 25년】
- 기원후 25년 2월, 유영은 20세 또는 2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개명제(更始帝) 유현(劉玄)이 이송(李松)을 보내 임경을 공격했고, 이때 유영이 살해당했다.
- 그는 황제로서 즉위한 적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전한의 마지막 황제 중 한 명으로 인식된다.
【요약 정보】
- 이름 : 유영(劉嬰)
- 호칭 : 유자영(孺子嬰), 정안공(定安公)
- 묘호 : 없음
- 시호 : 없음
- 출생 : 기원후 5년
- 사망: 기원후 25년 2월 (향년 20세 또는 21세)
- 사망지 : 안정군(安定郡) 임경현(臨涇縣)
- 부친 : 광척후(廣戚侯) 유현(劉顯)
- 모친 : (명시된 기록 없음)
- 배우자 : 정안부인 왕씨(王莽의 손녀)
- 자녀 : (명시된 기록 없음)
- 재위 : 정식 황제 즉위는 없었으며, 기원후 6년부터 8년 11월까지 명목상 황태자로 존재
- 전임 : 전한 평제(平帝) 유간(劉衎)
- 후임 : 신(新) 황제 왕망(王莽)
- 유자영은 왕망의 전한 찬탈 과정에서 희생된 비운의 인물로, 옹립된 적이 있지만 사실상 왕망의 꼭두각시이자 정권 이양의 상징으로 이용되었다. 왕망의 신나라 건국 후 정안공으로 강등되어 감금당했고, 후한이 개창되기 전 혼란기에 살해당하며 짧은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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