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AD.193~235) : ‘제국의 군사화’, ‘강력한 여성들’
1. 강력한 군사력, 강력한 여성들
서기 193년부터 235년까지, 로마 제국은 세베루스 왕조의 통치를 받았다. 이 왕조는 약 42년간 지속되었으며, 혼란스러운 ‘다섯 황제의 해(Year of the Five Emperors)’ 내전을 종식시키고 제국에 안정을 되찾아 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45–211년)에 의해 세워졌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통치하며, 제국의 군사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세베루스 왕조의 통치는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불안정한 가족 관계와 군부의 강력한 영향력으로 인해 ‘3세기 위기(Crisis of the Third Century)’라는 더 큰 혼란을 예고하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 왕조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그의 아내 율리아 돔나(Julia Domna)가 개창했으며, 그들의 두 아들인 카라칼라(Caracalla, 188–217년)와 게타(Geta, 189–211년)가 제위를 이었다. 잠시 마크리누스(Macrinus, 165경–218년)의 통치로 단절되기도 했으나, 율리아 돔나의 조카들인 엘라가발루스(Elagabalus, 203–222년)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Severus Alexander, 208–235년)가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왕조를 이어갔다. 특히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와 같은 여성들의 강력한 영향력은 세베루스 왕조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꼽힌다.
2.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45–211년) : 군인 황제 시대의 서막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북아프리카의 렙티스 마그나(Leptis Magna) 출신으로, 로마 시민권을 가진 페니키아계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비록 변방 출신이었지만 뛰어난 능력과 야망으로 군대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다섯 황제의 해’ 내전 속에서 가장 강력한 황제 후보로 부상했다. 서기 193년, 그는 경쟁자들을 차례로 제압하며 로마 제국의 통일된 지배자가 되었다.
세베루스는 제위에 오른 후, 내전으로 피폐해진 제국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강력한 군사적 통치를 기반으로 국경을 강화하고, 파르티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제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는 또한 군인들의 처우를 크게 개선하여 군대의 충성심을 확보했다. 병사들의 급여를 인상하고, 결혼을 허용하는 등 파격적인 정책을 통해 군대를 자신의 핵심 지지 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제국의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고, 군대가 황제의 주요 권력 기반이 되면서 훗날 ‘군인 황제 시대’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베루스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 황제 콤모두스를 신격화하고, 자신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연결되는 것처럼 선전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아들 카라칼라를 후계자로 지명하며 안정적인 계승을 도모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는 비교적 평화와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죽음을 맞이할 때 “서로 잘 지내고, 병사들을 부유하게 하며,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3. 율리아 돔나(Julia Domna, 170경–217년) : 권좌 뒤의 강력한 여인
세베루스 왕조의 특징 중 하나는 여성 황족들의 강력한 영향력이었다. 특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내인 율리아 돔나는 남편의 통치뿐만 아니라 아들들과 조카들의 재위 기간에도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황제 즉위 전부터 세베루스의 통치에 중요한 조언자 역할을 했으며, ‘마그나 마테르(Magna Mater, 위대한 어머니)’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율리아 돔나는 빼어난 지성과 학식으로도 유명했다. 그녀는 로마에서 학자들과 철학자들을 모아 학술 모임을 주최하며 지적인 후원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남편의 죽음 이후,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의 공동 통치 시기에는 두 아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려 노력했으며, 카라칼라가 게타를 살해한 후에도 실질적인 국정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 그녀의 정치적 능력은 비록 남성 중심으로 운영되던 로마 제국의 한계가 있었지만, 황실 여성으로서 전례 없는 권력을 휘둘렀던 독특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4. 카라칼라(Caracalla, 188–217년)와 게타(Geta, 189–211년) : 형제간의 비극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죽기 전에 두 아들인 카라칼라와 게타에게 공동 통치를 맡겼다. 그러나 두 형제는 성격과 기질이 판이하게 달라 심각한 불화를 겪었다. 결국 서기 211년, 카라칼라는 어머니 율리아 돔나의 눈앞에서 동생 게타를 살해하는 비극적인 선택을 했다. 이 사건은 로마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카라칼라의 통치는 더욱 전제적이고 잔혹해졌다.
게타를 제거한 후 단독 황제가 된 카라칼라는 폭정으로 점철된 통치를 이어갔다. 그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으며, 군인들에게는 아낌없이 퍼주며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졌다.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서기 212년에 공표된 안토니누스 칙령(Constitutio Antoniniana)이었다. 이 칙령은 로마 제국 내 모든 자유인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표면적으로는 로마의 영광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시민권 부여를 통해 더 많은 세금을 걷기 위한 재정적 목적이 컸다. 이 칙령은 로마 제국의 사회 구성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카라칼라는 또한 로마에 거대한 목욕장인 ‘카라칼라 욕장’을 건설하는 등 대규모 건축 사업을 벌였으나, 그의 독재적인 통치와 폭력적인 성향은 결국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그는 파르티아 원정 중이었던 서기 217년, 자신의 프라이토리아니 사령관 마크리누스의 음모로 암살당했다.
5. 마크리누스(Macrinus, 165경–218년)의 짧은 공백과 율리아 마이사(Julia Maesa, 160경–224년)의 책략
카라칼라 암살 이후, 그의 암살을 주도했던 프라이토리아니 사령관 마크리누스가 황제에 올랐다. 그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는 아무런 혈연 관계가 없는 첫 비원로원 출신 황제였다. 그의 아들 디아두메니아누스(Diadumenian, 208경–218년)도 함께 공동 황제로 재위했다.
하지만 마크리누스의 통치는 채 1년도 되지 않아 위기를 맞았다. 세베루스 왕조의 강력한 여인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이자 율리아 소아이미아스(Julia Soaemias)와 율리아 마마이아(Julia Mamaea)의 어머니인 율리아 마이사는 언니 율리아 돔나가 카라칼라의 죽음 이후 자결하자, 세베루스 왕조를 복원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자신의 손자인 바시안(Bassianus), 즉 엘라가발루스를 카라칼라의 사생아라고 선전하며 동방 군단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결국 마크리누스는 동방 군단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주하던 중 붙잡혀 처형되었으며, 디아두메니아누스도 함께 사망했다. 이로써 세베루스 왕조는 잠시 단절되었다가 율리아 마이사의 책략에 의해 다시 로마의 지배권을 되찾았다.
6. 엘라가발루스(Elagabalus, 203–222년)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Severus Alexander, 208–235년) : 말년에 이른 세베루스 왕조
마크리누스를 무너뜨리고 제위에 오른 엘라가발루스는 율리아 마이사의 손자이자 율리아 소에미아스의 아들이었다. 그는 불과 1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며, 시리아의 태양신 ‘엘라가발’의 사제이기도 했다. 그의 통치는 종교적인 광기와 기이한 행동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를 무시하고 태양신 엘라가발 숭배를 강요했으며, 성 정체성에 대한 논란과 사치스러운 생활로 로마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그의 통치 방식은 원로원과 보수적인 로마인들의 강한 반발을 샀고, 결국 율리아 마이사는 또 다른 손자이자 비교적 온건하고 교육적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후계자로 내세웠다.
엘라가발루스는 결국 서기 222년, 프라이토리아니에 의해 암살당했고, 그의 사촌 동생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새로운 황제로 추대되었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의 섭정 아래 통치를 시작했다. 그는 엘라가발루스와는 달리 유능하고 교양 있는 통치를 지향했으며, 원로원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는 잠시 평화를 누리는 듯했다.
그러나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국경 방어에 취약한 모습을 보였다. 사산 제국(Sasanian Empire)과의 전쟁과 게르만족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군인들의 불만을 샀다. 그는 군인들의 봉급을 인상하지 않았고, 지나친 평화주의적 태도로 군부의 신뢰를 잃었다. 결국 서기 235년, 그는 마인츠(Mainz)에서 게르만족과의 협상을 진행하던 중 자신의 군대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 암살 사건은 로마 제국의 극심한 혼란기인 '3세기 위기'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신호탄이 되었다.
7. 세베루스 왕조의 유산과 로마 제국의 전환점
세베루스 왕조는 ‘다섯 황제의 해’라는 혼란을 잠재우고 로마 제국에 일시적인 안정을 가져왔지만, 그들의 통치는 제국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확립한 군사 중심의 통치 방식은 황제의 권력이 군대에 의해 좌우되는 ‘군인 황제 시대’의 기반을 닦았다. 또한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 등의 강력한 여성들의 활약은 로마 황실의 새로운 권력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왕조는 불안정한 가족 관계와 황제들의 무능, 그리고 지나친 군부 의존으로 인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특히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죽음은 로마 제국이 겪게 될 약 50여 년간의 극심한 내전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혼란인 ‘3세기 위기’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세베루스 왕조는 로마 제국의 중흥을 이끌었지만, 동시에 제국의 점진적인 쇠퇴를 가속화하는 중요한 전환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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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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