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2일 화요일

마크리누스(Macrinus, AD.c.165~218) : 로마 제국 제22대 황제(AD.217~218)

마크리누스(Macrinus, AD.c.165~218) : 로마 제국 제22대 황제(AD.217~218)

 

로마 황제 마크리누스, 외교로 전쟁을 멈추려 한 첫 기사계급군주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Marcus Opellius Macrinus, 165~218)217411일에 황제로 선포되어 21868일까지 통치한 로마 황제이다. 그는 재위 내내 로마에 입성하지 못한 채 동방에서 국정을 보았고, 상원의원 신분이 아닌 기사계급 출신으로서는 최초의 황제였다. 아울러 즉위와 함께 아들 디아두메니아누스(Diadumenian)를 공동 통치자로 세웠으나, 1년 남짓의 짧은 치세 끝에 안티오키아 전투에서 패해 몰락하였다.

마크리누스(Macrinus, AD.c.165~218) : 로마 제국 제22대 황제(AD.217~218)
 

아프리카 출신의 배경과 로마에 가지 못한 황제의 특이성

 
마크리누스는 모리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오늘날 알제리 셰르셸)에서 태어난 베르베르 계통의 기사계급 가문 출신이었다. 즉위 이전에는 카라칼라(Caracalla)의 프라이토리아누스 총관으로서 수도의 민정을 다루었고, 재위 중에는 끝내 로마를 방문하지 못한 최초의 황제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출신과 이력은 상원의 전통 엘리트가 아닌 지방 출신 관료ㆍ군 지휘관의 등장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즉위의 경로와 정통성의 틀

 
217411일경 동방에서 군단의 추대로 황제로 선포된 뒤, 원로원으로부터 추인을 받으면서 정통적 절차를 갖추었다. 동시에 그는 아들 디아두메니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세워 왕조적 연속을 시도하였다. 재위 내내 로마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공식 칭호와 집정관 선출(218) 등 제도적 장치는 정상적으로 가동되었다.
 

군국의 재정은 바닥이라는 출발선

 
즉위 직후 마크리누스가 마주한 현실은 재정 고갈과 다중 전선의 전쟁이었다. 선대 카라칼라는 병사 급여를 대폭 인상하는 등 군사비 지출을 급격히 늘렸고, 여러 재원에서 무리하게 충당해 국고를 소진하였다. 마크리누스는 화폐ㆍ급여ㆍ지출 구조를 손보려 했으나, 곧 군 내부의 반발을 자극하는 역풍을 맞았다. 재정 안정과 군심 관리 사이의 균형은 그의 통치 내내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았다.
 

대외정책의 방향 전환, 전쟁에서 외교로

 
그는 우선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중단시키려 했다. 217년 니시비스 전투가 결판을 내지 못하자, 파르티아의 아르타바누스 4세에게 큰 전쟁배상금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체결하였다. 이어 아르메니아에서는 선대가 투옥했던 호스로프 1세의 왕가를 복권하고 티리다테스 2세에게 왕관과 노획품을 반환함으로써 봉신왕국 지위를 회복시켰다. 다키아 전선도 인질 석방 등을 통해 분쟁을 가라앉혔다. 일련의 조치는 재정적 부담을 수반했지만, 동시다발 전선을 신속히 진정시키려는 현실적 외교였다.
 

병사와 재정, 그리고 개혁의 반동

 
마크리누스는 군비 지출과 급여 체계를 조정하여 재정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병사 보수의 축소ㆍ지급 방식 변경 등은 즉각적인 불만을 촉발했고, 전쟁배상금 지출 또한 굴욕적 강화라는 인식으로 번져 군심을 악화시켰다. 그는 군제의 기강을 되살리려 했으나, 재정 안정의 속도와 병사 충성도 사이의 간극을 끝내 메우지 못했다.
 

줄리아 마에사의 역공, 엘라가발루스의 봉기로

 
군 내부의 동요를 포착한 줄리아 마에사(Julia Maesa)14세 손자 엘라가발루스(Elagabalus)를 황제로 내세워 동방 군단의 봉기를 선동하였다. 반란은 빠르게 확산되었고, 마크리누스는 21868일 안티오키아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그는 전장에서 도주해 로마로 향하다 칼케돈에서 체포되어 카파도키아에서 처형되었다. 아들 디아두메니아누스는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누스 4세에게 보내 구명하려 했으나, 도중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몰락 이후, ‘기억 말살과 패자의 운명

 
마크리누스 부자의 최후 뒤 원로원은 둘을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고, 공적 기록과 형상에서 이름을 삭제하는 기억 말살(damnatio memoriae)’을 결정하였다. 패자에 대한 가혹한 처벌은 새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전형적 절차였고, 마크리누스의 개혁 흔적은 정치적 선전 속에서 급속히 퇴색하였다.
 

외교적 황제의 성과와 한계

 
마크리누스는 다전선 전쟁을 외교로 정리하고 재정을 추슬러 제국을 안정시키려 했다. 파르티아ㆍ아르메니아ㆍ다키아와의 평화는 단기적으로 국경을 조용하게 만들었고, 전쟁의 소모를 줄였다. 그러나 배상금 지급과 병사 대우 조정은 군의 반발을 불렀고,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그는 군심 이반을 견디지 못했다. 기사계급 출신 최초의 황제라는 상징성과, 재위 중 로마에 들어가지 못한 전례 없는 조건은 그가 제도·정통성 경쟁에서 불리한 출발선에 서 있었음을 말해 준다.
 

통치 기구와 칭호, 제도적 흔적

 
그의 공식 군주명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세베루스 마크리누스 피우스 펠릭스 아우구스투스로 정비되었다. 218년에는 마르쿠스 오클라티니우스 아드벤투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재위 기간에는 아들 디아두메니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호명하는 체계를 유지하였다. 재위가 짧았음에도 제도적 외형은 황제정의 정규 절차를 따랐다.
 

연표로 보는 마크리누스

 
  • 165년경 : 모리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 카이사레아(오늘날 알제리 셰르셸) 출생.
  • 217411일경 : 동방에서 황제로 선포되고 원로원 추인을 받다.
  • 217: 니시비스 전투 이후 파르티아와 강화를 맺는다.
  • 217~218: 아르메니아 복권, 다키아와 평화 조정 등 대외 안정화를 추진한다.
  • 21868: 안티오키아 전투 패배 후 칼케돈에서 체포되어 카파도키아에서 처형된다.
  • 218: 원로원이 부자(父子)를 적으로 선포하고 기억 말살을 단행한다.
 

맺음말

 
마크리누스의 14개월은 전쟁을 멈추고 재정을 고치려는외교ㆍ재정 지향의 통치 실험이었다. 그는 단기적 평화를 얻었으나, 군사비 구조와 병사 심리를 바꾸지 못해 반동을 불러왔다. 기사계급 출신 최초의 황제라는 상징은 로마 권력의 사회적 기반이 바뀌고 있음을 알리지만, 동시에 제도ㆍ정통성ㆍ군심이 정렬되지 않은 통치는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실험은 승자의 서사에 지워졌으나, ‘무력-재정-외교의 균형이 깨질 때 제국의 통치가 얼마나 취약해지는지를 증언하는 사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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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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