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타(Geta, AD.189~211) : 로마 제국의 공동황제(AD.209~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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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타(Geta, AD.189~211) : 로마 제국의 공동황제(AD.209~211) |
로마 황제 게타, 형제 통치의 좌절과 기억 말살의 비극
게타(Geta, 189~211)는 세베루스 왕조의 일원으로 209년부터 211년까지 형 카라칼라(Caracalla, 188~217)와 함께 공동 황제로 재위한 인물이다.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45~211)의 뒤를 이어 제국 통치에 참여했으나, 211년 말 로마에서 형제 간 권력 투쟁의 끝에 피살되었고, 곧바로 대대적인 기억 말살(damnatio memoriae)의 대상이 되었다.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형제 공동 통치의 실패와 로마 정치 문화의 그늘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출생과 가문, 초기 입지
게타는 189년 3월 7일 로마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아프리카 속주 렙티스 마그나 출신의 장군이자 후일 황제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45~211)이며, 모친은 시리아의 명문 가문 출신 율리아 도므나(Julia Domna, 160~217)이다. 형은 카라칼라(Caracalla, 188~217)로, 두 형제는 어려서부터 궁정 교육과 군사적 소양을 동시에 익히며 제국의 후계 구도 속에 자리하였다. 이러한 배경은 게타에게 일찍부터 공적 역할을 부여하는 토대가 되었다.
‘카이사르’에서 ‘아우구스투스’로, 권력의 문턱을 넘다
게타는 198년에 ‘카이사르’로 선포되어 명목상 후계 서열에 편입되었다. 209년에는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어 형 카라칼라와 함께 공동 황제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이는 세베루스가 내전 종식 이후 제국의 안정을 위해 왕조적 연속성을 공고히 하려는 구상이 반영된 인사였다. 공식 칭호와 주화, 공문에서 게타의 위상은 명확히 드러났고, 제정 후반의 ‘공동 통치’ 전통이 다시 한 번 재확인되었다.
브리튼 원정과 궁정 운영, 역할의 분담
세베루스는 말년에 브리튼 전선을 직접 시찰하며 북방 방어선을 재정비하였다. 게타는 궁정 운영과 민정 관리에서, 카라칼라는 원정과 군사 지휘에서 상대적으로 비중을 두는 분업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는 형제의 기질과 경험을 고려한 실용적 조정이었으나, 두 사람 사이의 경쟁심과 반목을 잠재우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다. 세베루스가 타협과 조정을 시도했지만, 형제 갈등은 가라앉지 않았다.
211년의 전환, 부친 서거와 공동 통치의 위험 신호
211년 2월 4일 브리튼의 에보라쿰(오늘날 요크)에서 세베루스가 서거하였다. 게타와 카라칼라는 공동 황제로서 로마로 귀환하여 정무를 이어갔다. 그러나 궁정 내 세력 기반과 정책 선호, 인사 문제를 둘러싼 불신이 깊어지며 권력 분점의 힘겨루기가 본격화되었다. 고대 사가들은 두 형제가 제국을 둘로 나누는 방안까지 검토했다고 전하며, 이는 반목의 정도가 체제 안정에 위협적 수준이었음을 시사한다.
게타의 피살, ‘기억 말살’과 숙청의 파장
211년 12월, 로마 궁정에서 게타는 형 카라칼라의 지시로 살해되었다. 사건은 모친 율리아 도므나가 있는 공간에서 벌어졌다는 기록이 전하며, 이후 카라칼라는 게타의 이름과 형상을 공적 공간에서 지우는 ‘기억 말살’을 단행하였다. 공문서의 이름 삭제, 초상 파괴, 비문 수정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고, 게타와 연루된 인물들에 대한 체포와 처형, 추방이 이어졌다. 법학자 파피니아누스(Papinian, 142~212)의 참극은 형제 갈등이 법과 정의의 영역까지 침범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으로 회자된다.
행정ㆍ재정의 쟁점, 게타 시대의 정책 환경
게타의 재위 기간은 매우 짧았고, 형제 공동 통치라는 특성 때문에 독자적 정책을 완결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재정과 병참, 변경 방어선 관리, 도시 치안 등 핵심 사안에서 그는 궁정과 민정의 조정을 맡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내전기의 부담과 군사비의 지속적 확대, 화폐의 신뢰 문제 등 구조적 과제는 이미 아버지 세대에서 누적된 것이었고, 게타는 이를 완화하기보다 체제 유지에 필요한 ‘타협과 중재’의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이해된다.
주화와 칭호, 명분 정치의 흔적
게타는 카이사르ㆍ아우구스투스 단계에서 각각의 주화를 주조하였다. 주화 표제와 도상은 효(孝), 관용, 질서 회복 같은 덕목을 강조하며, 공동 통치의 정당성을 시각적으로 설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는 세베루스 왕조가 내전 이후 질서와 번영의 회복을 표방하는 메시지를 확산하는 수단이었고, 게타의 정치적 이미지는 이 장치 속에서 구성되었다.
사료와 해석, 전기 전통의 비판적 독해
게타의 생애와 죽음을 전하는 고대 사료(카시우스 디오, 헤로디아노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서술 목적과 관점이 서로 다르다. 기억 말살 조치로 인해 1차 자료가 훼손되었고, 살아남은 기록들도 승자 서사의 편향을 보인다. 따라서 게타의 성정이나 능력, 정책에 대한 단정적 평가보다는, ‘형제 공동 통치의 구조적 취약과 정치 문화의 폭력성’이라는 맥락에서 그의 비극을 읽는 균형 감각이 요구된다.
게타와 율리아 돔나, 궁정 권력의 또 다른 축
모친 율리아 돔나는 학예 후원과 궁정 운영에서 탁월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게타 피살 이후에도 율리아 돔나는 카라칼라 치세에서 ‘아우구스타’로 남아 국정에 관여하였다. 이는 세베루스 왕조에서 황후의 정치적 역할이 제도 바깥의 중대한 비공식 권력으로 작동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죽음의 의미와 유산, 로마 정치의 교훈
게타의 죽음은 단일한 비극을 넘어, 로마 제정의 권력 작동 원리를 드러낸 사건이다. 공동 통치가 제도적 조정 없이 감정과 파벌의 경쟁으로 흘러갈 때, 체제는 가장 취약한 고리에서 파국을 맞는다. 기억 말살은 승자에게 단기 정당성을 제공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기록과 신뢰를 훼손해 국가의 역사적 자기 이해를 가린다. 게타의 서사는 ‘권력의 분점과 조정’이 작동하지 않을 때 어떤 비용이 발생하는지를 경고한다.
연표로 보는 핵심 이정표
- 189년 3월 7일 : 로마에서 출생.
- 198년 : 카이사르로 선포되어 후계 구도에 편입.
- 209년 :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어 공동 황제에 오르다.
- 211년 2월 : 에보라쿰에서 부친 서거, 형과 공동 통치를 시작하다.
- 211년 12월 : 로마 궁정에서 피살되다.
- 212년 전후 : 이름과 형상을 지우는 기억 말살 조치가 제국 전역에서 시행되다.
주변 인물과 사건의 교차점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45~211)는 게타의 부친이자 세베루스 왕조의 창건자이다.
- 카라칼라(Caracalla, 188~217)는 형제로, 211년 게타를 제거하고 단독 통치를 개시하였다.
- 율리아 돔나(Julia Domna, 160~217)는 모친으로, 학예 후원과 궁정 운영의 중심 인물이었다.
- 파피니아누스(Papinian, 142~212)는 고전기 법학의 거장으로, 게타 사건 이후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오늘의 역사로 읽는 게타의 의미
게타의 짧은 통치는 공동 통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비춘다. 제국의 안정은 혈연과 칭호만으로 보장되지 않으며, 권력의 분점에는 제도적 안전장치와 신뢰의 정치가 필요하다. 게타의 비극은 로마 제정의 내적 논리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 매개이며, 승자의 서사가 어떻게 패자의 흔적을 지우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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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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