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3일 수요일

디아두메니아누스(Diadumenian, AD.208~218) : 로마 제국 제22대 공동황제(AD.217~218)

디아두메니아누스(Diadumenian, AD.208~218) : 로마 제국 제22대 공동황제(AD.217~218)

 
  • 208년 출생 이름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디아두메니아누스(Marcus Opellius Diadumenianus)
    217년 이름 :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안토니누스 디아두메니아누스(Marcus Opellius Antoninus Diadumenianus)
  • 출생 : 기원후 208914
  • 사망 : 기원후 2186
  • 부친 : 마크리누스(Macrinus)
  • 모친 : 노니아 켈사(Nonia Celsa)
  • 재위 :
    Caesar : 기원후 2175~ 2185
    Augustus : 기원후 2185~6

디아두메니아누스(Diadumenian, AD.208~218) : 로마 제국 제22대 공동황제(AD.217~218)
디아두메니아누스(Diadumenian, AD.208~218) : 로마 제국 제22대 공동황제(AD.217~218)
 

1. 디아두메니아누스 : 로마 역사 속 비운의 9세 황제

 
로마 제국의 역사는 강력한 황제들과 위대한 정복자들의 이야기로 가득하지만, 때로는 잔혹한 권력 투쟁 속에서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스러져 간 비운의 인물들의 이야기도 존재한다. 서기 3세기 초 로마의 역동적인 전환기에 살았던 어린 황제 디아두메니아누스(Diadumenian, 208218)는 그러한 비극적인 운명을 짊어진 대표적인 인물이다. 9세의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올랐지만, 1년도 되지 않아 목숨을 잃은 그의 삶은 로마 제국의 불안정성과 권력의 냉혹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다섯 황제의 해이후 겨우 안정을 되찾는 듯했던 로마가 다시금 혼란의 나락으로 떨어지던 시기에 황실의 일원이 되었고, 격동의 시대 한가운데에서 비운의 최후를 맞이했다. 디아두메니아누스의 짧고 비극적인 생애를 통해 당시 로마 제국의 권력 지형과 정치적 상황을 자세히 탐구한다.
 

2. 탄생과 불안정한 시대적 배경

 
디아두메니아누스는 서기 208914, 로마 제국의 상급 기사이자 당시 프라이토리아니(황제 근위대)의 사령관이었던 마크리누스(Macrinus, 165218)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디아두메니아누스(Marcus Opellius Diadumenianus)였다. 그의 어머니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Historia Augusta)라는 사료에 노니아 켈사(Nonia Celsa)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이름은 사료의 신뢰성을 고려할 때 가공된 것일 수 있다.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시기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콤모두스(Commodus)의 폭정과 암살 이후, 세베루스 왕조가 권력을 잡고 있었으나, 내부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특히 카라칼라(Caracalla, 188217) 황제의 독선적인 통치는 로마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었고, 이는 곧 마크리누스의 권력 찬탈로 이어진다.
 

3. 아버지 마크리누스의 집권과 디아두메니아누스의 카이사르책봉

 
카라칼라는 뛰어난 군인이었지만, 자신의 동생 게타(Geta)를 살해하는 등 잔인하고 독단적인 통치를 이어가며 많은 적을 만들었다. 결국 서기 2174, 카라칼라는 파르티아 원정 도중 자신의 프라이토리아니 사령관이었던 마크리누스의 음모에 의해 암살당했다. 로마 원로원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마크리누스는 카라칼라의 암살 이후 혼란스러운 틈을 타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그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플라비우스, 네르바-안토니누스, 세베루스 왕조와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첫 번째 비원로원 출신 황제였다.
 
마크리누스가 제위에 오르자마자 한 일 중 하나는 자신의 어린 아들 디아두메니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이었다. 서기 2175, 겨우 8세였던 디아두메니아누스는 카이사르(Caesar)’ 칭호를 받고 황실 후계자의 지위를 얻었다. 이는 새로운 황조를 확립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마크리누스의 전략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는 또한 디아두메니아누스에게 안토니누스(Antoninus)’라는 이름도 부여했는데, 이는 대중에게 인기가 많았던 안토니누스 왕조와의 연관성을 통해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였다. 당시 디아두메니아누스는 안티오키아(Antioch)에서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로 가는 길에 제우그마(Zeugma)에서 카이사르로 선포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디아두메니아누스는 어릴 때부터 매우 수려한 외모를 지녔다고 한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그를 모든 사람을 능가하는 아름다움을 지녔으며, 키가 다소 크고 금발에 검은 눈, 그리고 매부리코를 가졌다. 턱은 아름답게 조형되었고, 입은 키스를 위해 디자인된 듯했으며, 본래 강인하면서도 훈련을 통해 우아했다고 묘사한다. 이 묘사는 과장되었을 수 있지만, 그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용모를 지녔음을 시사한다.
 

4. 엘라가발루스의 반란과 아우구스투스책봉

 
마크리누스의 황제 즉위는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특히 세베루스 왕조의 남은 세력, 즉 율리아 마이사(Julia Maesa, 160224년경)와 그녀의 딸들, 그리고 그 손자들(엘라가발루스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은 카라칼라의 복수를 외치며 마크리누스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다. 서기 218516, 율리아 마이사의 손자인 엘라가발루스(Elagabalus, 203222)가 에메사(Emesa)에서 병사들의 지지를 받아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고 마크리누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마크리누스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진군했으며, 아파메아(Apamea)의 요새에서 결정적인 조치를 취했다. 반란군에 대항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그는 서기 2185, 9세밖에 되지 않은 아들 디아두메니아누스를 자신과 동등한 권한을 가진 공동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격상시켰다. 이는 비상시국에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아들의 황위 계승을 확고히 하려는 필사적인 시도였다.
 
디아두메니아누스의 즉위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후계자들이 주로 양자 입양을 통해 황제가 되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황실 혈통에 대한 마크리누스의 기대를 반영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위험에 노출된 채 황제의 책무를 지게 되었다.
 

5. 안티오키아 전투와 비극적인 최후

 
결정적인 전투는 서기 21868, 시리아의 안티오키아(Antioch) 근처에서 벌어졌다. 마크리누스가 이끄는 군대는 엘라가발루스와 그의 지지자들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전투가 끝난 후, 마크리누스는 북쪽으로 도주하려 했고, 아들 디아두메니아누스의 안전을 위해 그를 파르티아 제국의 아르타바누스 4(Artabanus IV of Parthia) 궁정으로 보내 피신시키려 했다.
 
그러나 운명은 디아두메니아누스를 외면했다. 파르티아로 향하던 중, 그는 제우그마(Zeugma)에서 붙잡혔다. 그리고 서기 2186월 말, 9세의 어린 나이에 그는 잔혹하게 처형당했다. 그의 목은 엘라가발루스에게 전리품처럼 보내졌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어린 황제의 짧은 통치와 비극적인 삶은 로마 제국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6. 담나티오 메모리아이(Damnatio Memoriae)와 역사에 남은 흔적

 
디아두메니아누스와 그의 아버지 마크리누스의 죽음 이후, 로마 원로원은 엘라가발루스에게 지지를 표명하며 두 사람을 로마의 적(enemies of Rome)’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담나티오 메모리아이(damnatio memoriae)’라는 혹독한 처벌을 내렸다. 이는 그들의 이름과 이미지를 모든 공식 기록과 공공 기념물에서 지우고 파괴하는 형벌이었다. 엘라가발루스는 심지어 자신의 통치를 카라칼라 시대의 끝으로 소급하여, 마크리누스와 디아두메니아누스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려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디아두메니아누스의 흔적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동전학(Numismatics) 연구에 따르면, 그가 카이사르로 재직할 때 발행된 많은 수의 주화가 남아 있지만, 아우구스투스로서 발행된 주화는 극히 드물다. 이는 마크리누스가 패배한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디아두메니아누스의 주화들이 대량으로 용해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살아남은 주화들과 부서진 흉상들은 비록 왜곡되었지만 그의 존재와 비운의 최후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디아두메니아누스의 이야기는 로마 제정기 초기 황위 계승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혹한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한 개인의 비극을 상기시킨다. 그의 짧은 생애는 로마의 영광 뒤에 숨겨진 어둡고 냉혹한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율리아누스(Julian, AD.331~363) : 로마 제국 제46대 황제(AD.360~363)

율리아누스 (Julian, AD.331~363) : 로마 제국 제 46 대 황제 (AD.360~363)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Flavius Claudius Julianus) Ancient Greek : Ἰ ουλιανός , I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