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3일 수요일

율리아 돔나(Julia Domna, AD.c.160~217)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내

율리아 돔나(Julia Domna, AD.c.160~217)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내

 
  • 출생 : 기원후 160년경 / 시리아 에메사
  • 사망 : 기원후 217/ 안티오크
  • 부친 : 율리우스 바시아누스(Julius Bassianus)
  • 배우자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기원후 187년 결혼)
  • 자식 : 카라칼라(Caracalla), 게타(Geta)

율리아 돔나(Julia Domna, AD.c.160~217)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내
율리아 돔나(Julia Domna, AD.c.160~217)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내
 

1. 율리아 돔나 : 로마 제국을 뒤흔든 시리아 출신 황후

 
로마 제국의 역사는 수많은 황제와 장군들의 위업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그림자 속에서 묵묵히, 때로는 과감하게 제국의 운명에 영향을 미쳤던 여성들도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율리아 돔나(Julia Domna, 160217)는 로마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황후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그녀는 남편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45211)의 통치뿐만 아니라, 두 아들 카라칼라(Caracalla, 188217)와 게타(Geta, 189211)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중요한 정치적 결정에 깊이 관여하며 세베루스 왕조(Severan dynasty)’의 실질적인 기둥 역할을 했다. 동방 시리아 출신이라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지성, 학식, 정치적 수완을 겸비하여 로마 사회에 전례 없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2. 초라한 시작에서 황후의 자리로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의 만남

 
율리아 돔나는 서기 160년경 로마 제국의 시리아 속주에 위치한 유서 깊은 도시 에메사(Emesa, 현 홈스)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가문은 태양신 엘라가발(Elagabalus)의 사제직을 대대로 이어온 유력한 아랍 귀족 집안으로, 아버지 율리우스 바시아누스(Julius Bassianus)는 지역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삶이 로마 제국의 역사와 교차하게 된 것은 서기 187, 당시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총독이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의 결혼이었다. 세베루스는 전처를 잃고 새로운 아내를 찾고 있었는데, 율리아 돔나의 아름다움과 지성,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출생 천궁도에 황후가 될 운명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 매료되어 결혼을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의 결혼은 단순히 개인적인 결합을 넘어, 훗날 세베루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당시 로마 귀족 사회에서 동방 출신과의 결혼은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세베루스의 야망과 율리아 돔나의 비범함이 이 만남을 성사시켰다.
 
결혼 후 율리아 돔나는 카라칼라와 게타라는 두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서기 193, ‘다섯 황제의 해(Year of the Five Emperors)’라는 극심한 내전 속에서 남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면서 율리아 돔나는 명실상부한 로마의 황후로 등극하게 된다. 그녀는 세베루스 왕조의 첫 황후가 되는 영광을 안았다.
 

3. 율리아 돔나 : 제국의 숨겨진 지배자

 
율리아 돔나는 단순히 황제의 아내 역할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녀는 제국의 정치, 사회, 철학 분야에서 전례 없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 정치적 영향력과 무적의 진영의 어머니 : 율리아 돔나는 남편 세베루스의 통치 전반에 걸쳐 중요한 조언자 역할을 했다. 그녀는 종종 남편과 함께 군사 캠페인에 동행했으며, 이로 인해 무적의 진영의 어머니’(Mater Castrorum, Mother of the Invincible Camps)라는 특별한 칭호를 받기도 했다. 이는 그녀가 군대 내에서도 상당한 권위와 존경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황실 내부의 문제뿐만 아니라, 제국의 주요 정책 결정 과정에도 그녀의 의견이 반영되었고, 그녀의 탁월한 정치적 감각은 세베루스가 안정적으로 제국을 통치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 문화적, 지적 후원자(철학자 황후) : 율리아 돔나는 뛰어난 지성과 학식을 갖춘 인물로 유명했다. 그녀는 로마에서 가장 지적인 살롱을 운영하며 당대 최고의 학자들, 철학자들, 수사학자들을 모아 토론과 연구를 지원했다. 유명한 의사이자 철학자인 갈레노스(Galen)와 법학자 파피니아누스(Papinian), 그리고 플로티노스(Plotinus)의 스승인 암모니우스 사카스(Ammonius Saccas) 등이 그녀의 후원을 받았다. 그녀는 복잡한 철학적 문제들을 능숙하게 다루었으며, 스토아 학파와 신플라톤주의 등 다양한 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그녀의 지적인 활동은 철학자 황후라는 별명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녀는 지적인 교류를 통해 황실의 문화적 수준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학자들을 통해 제국의 여론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4. 어머니로서의 고뇌 :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의 비극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서기 211년 사망하자, 율리아 돔나는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의 공동 통치 체제 속에서 더욱 복잡한 역할을 맡게 된다. 두 형제는 성격과 기질이 판이하여 끊임없이 갈등을 겪었고, 율리아 돔나는 이들의 불화를 중재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형제간의 질투와 권력 다툼은 극단적인 파국으로 치달았다.
 
결국 서기 211, 카라칼라는 어머니 율리아 돔나의 품에 안겨 있던 동생 게타를 직접 살해하는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율리아 돔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아들을 잃은 슬픔과 함께, 두 아들 간의 관계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렸을 터다. 그러나 그녀는 이 비극 속에서도 황실의 안정을 유지하고 아들 카라칼라의 통치를 지원하는 강인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그녀의 정치적 감각과 세베루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얼마나 굳건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5. 카라칼라 시대의 율리아 돔나 : 권력을 잃지 않은 조언자

 
게타의 죽음 이후, 카라칼라가 단독 황제로 통치하게 되자, 율리아 돔나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카라칼라의 폭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들의 궁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했으며, 때로는 공동 황후였던 카라칼라의 아내 풀비아 플라우틸라(Fulvia Plautilla)보다 더 큰 권한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녀는 존엄한 피우스 아우구스타’(Pia Felix Augusta)라는 전례 없는 황후 칭호를 받기도 했는데, 이는 일반적인 황후 이상의 막강한 권한이 그녀에게 부여되었음을 시사한다.
 
율리아 돔나는 카라칼라의 주요 정책 결정에 관여했으며, 그의 동방 원정에도 동행했다. 그녀는 안티오키아(Antioch)에 거주하며 광범위한 행정 및 통치 업무를 처리하기도 했다. 이는 황제가 군사 작전에 몰두하는 동안 황실의 행정과 정책을 실질적으로 관장했음을 의미한다. 그녀는 뛰어난 문서 처리 능력과 판단력을 바탕으로 제국의 중요한 서신을 읽고 답변하며, 황제에게 직접 보고해야 할 사안을 분류하는 등 총리대신에 버금가는 역할을 수행했다.
 

6. 비극적인 최후와 역사적 평가

 
율리아 돔나의 삶은 서기 217, 카라칼라가 파르티아 원정 중 암살당하면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아들의 죽음 소식과 함께 세베루스 왕조의 권력이 상실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심각한 충격을 받고 자결을 선택했다. 이는 그녀가 왕조에 얼마나 깊은 소속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그녀는 로마 황실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했으며, 제국의 안녕과 왕조의 존속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율리아 돔나의 죽음으로 세베루스 왕조는 잠시 공백기를 맞았지만, 그녀의 언니인 율리아 마이사(Julia Maesa, 160224)가 이끌었던 세베루스 왕조 부흥 운동의 배경에는 율리아 돔나가 생전에 쌓아 올린 황실 내외의 영향력과 위상이 크게 작용했다. 율리아 마이사는 율리아 돔나의 손자, 즉 조카 아들의 혈통을 내세워 다시금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함으로써 세베루스 왕조를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율리아 돔나는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여성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그녀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뛰어난 지성과 정치적 감각, 그리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황실의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녀의 삶은 황후가 단순한 혈통적 지위를 넘어 제국의 정치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녀는 로마가 혼란한 시기를 극복하고 안정을 찾아가는 데 기여했으며, 특히 군인 황제 시대의 도래를 앞두고 여성으로서 황권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때로는 실질적으로 행사했던 독특한 사례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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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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