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2일 화요일

카라칼라(Caracalla, AD.188~217) : 로마 제국 제21대 황제(198~217)

카라칼라(Caracalla, AD.188~217) : 로마 제국 제21대 황제(198~217)

 

로마 황제 카라칼라, 시민권 칙령과 피의 통치

 
카라칼라(Caracalla, 188~217)198년에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45~211)와 함께 공동 황제가 되었고, 211년 형제 게타(Geta, 189~211)를 제거한 뒤 단독 통치에 들어가 217년 암살로 생을 마친 로마 황제이다. 그는 제국 내 자유민 대부분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안토니누스 칙령으로 유명하며, 동시에 형제 살해와 대규모 숙청, 군사 우선의 재정ㆍ화폐 정책으로 기억되는 복합적 유산을 남겼다.

카라칼라(Caracalla, AD.188~217) : 로마 제국 제21대 황제(198~217)

 

출생과 가문, 이름의 변화

 
카라칼라는 갈리아의 루그두눔(오늘날 리옹)에서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Lucius Septimius Bassianus)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는 아프리카 속주 렙티스 마그나 출신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시리아의 명문가 출신 율리아 도므나(Julia Domna, 160~217)의 장남이다. 성년 무렵 그는 정치적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가문에 연계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Marcus Aurelius Antoninus)’라는 군주명을 채택하였다. ‘카라칼라라는 별칭은 갈리아풍의 후드 망토 이름에서 비롯되었으며, 그의 대중적 호칭으로 굳어졌다.
 

제위로의 경로와 공동 통치의 시작

 
193다섯 황제의 해의 혼란 속에서 세베루스가 집권하여 내전을 수습한 뒤, 카라칼라는 196년에 카이사르’, 198년에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어 아버지와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는 브리튼과 동방 원정에 동행하며 군사적 경험을 쌓았고, 궁정과 군단의 핵심 네트워크에 조기 편입되었다. 이 시기 그의 정략결혼 상대는 프라이토리움 총관 플라우티아누스의 딸 풀비아 플라우틸라(Fulvia Plautilla, 180~212)였으나, 플라우티아누스의 실각과 함께 결혼은 파탄으로 끝났다.
 

211년의 단절, 게타 살해와 숙청

 
211년 브리튼 전선에서 세베루스가 사망하자 카라칼라와 게타는 잠시 공동 통치에 나섰다. 그러나 형제 간 권력 분점은 곧 파국으로 치달았고, 카라칼라는 같은 해 말 궁정 회합 자리에서 게타를 살해하였다. 그는 형의 이름과 형상을 공적 기록과 조각에서 지우는 기억 말살(damnatio memoriae)’을 단행했고, 게타 측근과 의심받는 이들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지시하였다. 저명한 법학자 파피니아누스(Papinian, 142~212)가 살해된 것도 이 과정과 연동된 사건으로 전해진다.
 

안토니누스 칙령과 시민권의 확대

 
212년 카라칼라는 제국 내 거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안토니누스 칙령(Constitutio Antoniniana)’을 반포하였다. 이 조치는 법적 권리의 평준화를 진전시켜 재산·상속·혼인 등 사법 관계의 통일을 촉진하였다. 동시에 시민권 보유자에게 부과되는 상속·해방세 등 세원 확대를 통해 재정을 보강하려는 의도가 공존하였다. 제국 통합의 이념과 재정 기반 확대가 결합된 상징적 정책이었다.
 

군제 우선의 재정 운영과 화폐 정책

 
카라칼라는 군단의 충성 확보를 위해 병사 급여를 인상하고, 전역금과 각종 급부를 확대하였다. 그 결과 국고 부담이 커졌고, 데나리우스 은 함량의 저하와 새로운 명목 화폐의 도입 같은 완충책이 병행되었다. 215년경 그는 명목상 두 데나리우스에 해당한다고 선전된 안토니니아누스의 전신 격 주화를 유통시키며 재정 압박을 완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실질 은 함량과 구매력의 하락은 물가 불안을 자극했고, 장기적으로 화폐 신뢰를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토목 사업과 로마의 일상, ‘카라칼라 욕장

 
카라칼라는 로마 남부에 대규모 공중목욕 시설인 카라칼라 욕장을 건설하였다. 이 단지는 서고, 체육 공간, 정원과 함께 온탕ㆍ미온탕ㆍ냉탕을 완비한 종합 여가 시설로, 212년 착공되어 216년경 준공 단계에 이르렀다. 아쿠아 마르키아 수로의 연장과 거대한 보일러ㆍ난방 시스템은 로마 공학의 절정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화려한 토목 사업은 군사 우선의 통치 속에서도 도시 생활의 품격을 상징적으로 보완하려는 의지로 해석된다.
 

독재적 기질과 도시 폭력, 알렉산드리아 학살

 
카라칼라는 권위에 도전하는 여론에 특히 가혹하였다. 215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시민들이 그와 게타의 갈등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그는 부대를 동원해 시민들을 학살한 사건을 남겼다. 현지의 인적ㆍ경제적 피해는 컸고, 동방 도시 엘리트 사회는 황제 권력의 무자비함을 체감하였다. 그는 또한 검투 경기와 군사적 의례를 대대적으로 열어 대중을 달래는 동시에 군사 권위의 과시를 병행하였다.
 

변경 방위와 원정, 게르만 전선과 동방 전쟁

 
카라칼라는 213년에 라인·도나우 전선에서 게르만 부족을 상대로 원정을 감행하여 국경 방위선을 재정돈하였다. 216년에는 파르티아(아르사케스 왕조)를 상대로 동방 전쟁에 나서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휩쓸고, 아르메니아ㆍ아라비아 방면으로 압박을 확대하였다. 그는 혼인 동맹을 명분으로 파르티아 왕실에 접근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무력 충돌로 전환하는 등 공세적 외교를 구사하였다. 그러나 장기 점령과 안정적 병참 구축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암살과 권력 교체, 마크리누스의 집권

 
217년 봄 카라칼라는 카르하이(하란) 인근에서 원정 중 변을 당하였다. 그는 노상에서 경비를 수행하던 병사 율리우스 마르티알리스에게 살해되었고, 배후에는 프라이토리움 총관 마크리누스(Macrinus, 165~218)의 음모가 있었다는 전통적 해석이 널리 전해진다. 곧 마크리누스가 원로원의 추인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면서 세베루스 왕조의 직계 계승은 일시 중단되었다.
 

통치의 공과, 엇갈린 평가의 요점

 
카라칼라는 시민권의 대확장과 도시 인프라의 개선, 변경 방위의 재정비라는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형제 살해와 숙청, 폭력적 통치, 재정 압박과 화폐 신뢰의 약화는 제국의 내구력을 갉아먹었다. 군사비의 구조적 증가와 조세·세원 확대에 기대는 재정 운영은 후대 위기의 한 축으로 지목된다. 공적 담론에서는 평등의 법피의 정치가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통치로 정리된다.
 

핵심 인물 관계와 궁정의 역학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45~211)는 카라칼라의 아버지이자 군사ㆍ행정 중심 통치의 설계자이다.
  • 게타(Geta, 189~211)는 동복 형제로, 211년 궁정에서 살해되었으며 대대적 기억 말살의 대상이 되었다.
  • 율리아 돔나(Julia Domna, 160~217)는 학예와 궁정 운영의 후원자로, 말년에까지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 마크리누스(Macrinus, 165~218)는 프라이토리움 총관으로, 217년 카라칼라 사후 황위를 승계하였다.
  • 파피니아누스(Papinian, 142~212)는 고전기 법학의 거장으로, 게타 사건 이후 처형되어 법과 권력의 긴장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연표로 보는 이정표

 
  • 18844: 루그두눔에서 출생.
  • 196~198: 카이사르 승격 후 198년에 아우구스투스로 공동 황제가 된다.
  • 2112: 세베루스 사망, 게타와 공동 통치를 시작한다.
  • 211년 말 : 게타 살해와 숙청을 단행한다.
  • 212: 안토니누스 칙령으로 시민권을 제국 전역에 확대한다.
  • 213: 게르만 전선 원정으로 국경 방위를 재정비한다.
  • 215: 알렉산드리아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 216~217: 동방 원정을 전개한다.
  • 21748일경 : 카르하이 인근에서 암살되어 사망한다.
 

오늘의 역사로 읽는 카라칼라의 의미

 
카라칼라의 치세는 권력의 집중과 법적 평준화가 동시에 추진될 때 발생하는 기회와 위험을 집약한다. 시민권의 보편화는 제국의 법 질서를 통일하는 진전이었지만, 폭력적 권력 행사는 사회적 신뢰를 약화하였다. 군사비를 축으로 한 재정 구조는 단기 충성 확보에는 유효했으나, 화폐ㆍ세제의 왜곡을 불렀다. 그의 통치는 로마가 군사ㆍ법ㆍ재정의 균형 위에서만 지속 가능한 질서를 유지할 수 있음을 일깨우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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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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