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3일 수요일

율리아 마이사(Julia Maesa, AD.c.160~224) : 세베루스 왕조를 재건한 시리아 여인

율리아 마이사(Julia Maesa, AD.c.160~224) : 세베루스 왕조를 재건한 시리아 여인

 
율리아 마이사(Julia Maesa)
  • 출생 : 기원후 160년 이전 57/ 시리아 에메사
  • 사망 : 기원후 224/ 이탈리아 로마
  • 부친 : 율리우스 바시아누스(Julius Bassianus)
  • 여동생 : 율리아 돔나(Julia Domna)
  • 배우자 : 율리우스 아비투스 알렉시아누스(Julius Avitus Alexianus)
  • 자식 : 율리아 소에미아스(Julia Soaemias), 율리아 아비타 마메아(Julia Avita Mamaea)

율리아 마이사(Julia Maesa, AD.c.160~224) : 세베루스 왕조를 재건한 시리아 여인
율리아 마이사(Julia Maesa, AD.c.160~224) : 세베루스 왕조를 재건한 시리아 여인
 

1. 율리아 마이사 : 로마 제국 황실을 재건한 위대한 시리아 여인

 
로마 제국의 역사는 종종 강인한 황제들의 위업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 이면에는 황실을 지탱하고 제국의 운명을 바꾼 강력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율리아 마이사(Julia Maesa, 160년경224년경)는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불굴의 의지로 세베루스 왕조(Severan dynasty)의 재건을 주도하며 로마 제국의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녀는 다섯 현제(Five Good Emperors)’ 시대 이후 불안정했던 로마 황실의 안정을 되찾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황제들을 좌지우지하며 마이사 가문의 위세를 드높였다. 그녀의 생애는 권력 투쟁과 전략적 지혜로 점철된 로마 황실의 복잡한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2. 에메사의 귀족 출신 : 세베루스 왕조의 뿌리

 
율리아 마이사는 서기 160년경 로마 제국의 시리아 속주, 에메사(Emesa, 현 홈스)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가문은 에메사의 유력한 아랍 귀족이자 지역 태양신인 엘라가발(Elagabal)의 대제사장 가문이었다. 이러한 배경은 훗날 그녀의 정치적 책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마이사에게는 훗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45211)의 황후가 되어 세베루스 왕조의 초석을 다진 여동생 율리아 돔나(Julia Domna, 160217)가 있었다.
 
마이사는 유능한 원로원 의원이자 기사 계급의 인물이었던 율리우스 아비투스 알렉시아누스(Gaius Julius Avitus Alexianus)와 결혼하여 율리아 소에미아스(Julia Soaemias)와 율리아 마마이아(Julia Mamaea) 두 딸을 두었다. 이 두 딸은 훗날 세베루스 왕조의 황제인 엘라가발루스(Elagabalus, 203222)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Severus Alexander, 208235)의 어머니가 되면서 율리아 마이사는 황제의 할머니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3. 암흑기 : 세베루스 왕조의 위기

 
율리아 마이사의 동생 율리아 돔나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황후가 되면서 세베루스 왕조는 로마 제국의 강력한 황실로 부상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제국을 안정시켰고, 그의 아들 카라칼라(Caracalla, 188217)가 제위를 계승하며 왕조는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서기 217, 파르티아 원정 중이던 카라칼라가 자신의 프라이토리아니(황제 근위대) 사령관 마크리누스(Macrinus, 165218)에게 암살당하면서 세베루스 왕조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마크리누스는 카라칼라 암살 직후 황제 자리에 올랐으며, 세베루스 황실의 핵심 인물들을 제거하려 시도했다. 율리아 돔나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절망감과 황실의 몰락에 대한 위기감 속에서 자결을 선택했다. 이 시기 율리아 마이사는 마크리누스에 의해 자신의 고향 에메사로 추방당해 감시를 받게 되었다. 이는 그녀의 권력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추락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율리아 마이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세베루스 왕조를 부활시키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4. 치밀한 복귀 계획 : 엘라가발루스의 등극

 
율리아 마이사는 마크리누스의 통치가 군인들과 로마 시민들로부터 점차 불신을 얻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는 로마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시리아와 동방 속주에 주둔한 로마 군단의 불만도 높아지고 있었다. 특히 군단병들은 카라칼라에게 깊은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암살에 대한 복수를 열망하고 있었다.
 
마이사는 이 점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딸 율리아 소에미아스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바시안(Bassianus)을 황제 후보로 내세웠다. 그녀는 바시안이 사실은 암살된 카라칼라의 사생아라는 소문을 교묘하게 퍼뜨렸다. 이는 카라칼라에게 충성했던 군단병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동시에 그녀는 황실에서 추방당할 때 마크리누스에게서 받은 상당한 재물을 활용하여 군단병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뿌리며 지지를 확보했다.
 
서기 218516, 3군단 갈리카(Legio III Gallica)의 병사들은 에메사의 태양신 엘라가발 사원에서 바시안을 황제로 선포했다. 그는 이후 자신이 섬기던 태양신의 이름을 따 엘라가발루스(Elagabalus, 203222)로 불리게 된다. 마크리누스는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율리아 마이사와 엘라가발루스를 지지하는 군단병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안티오키아 전투에서 마크리누스의 군대는 패배했고, 그는 도주하던 중 처형당했다. 이로써 율리아 마이사는 단숨에 세베루스 왕조를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5. 권좌 뒤의 그림자 : 엘라가발루스 시대의 실질적 통치자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오른 엘라가발루스는 통치 경험이 전무했고, 로마 정치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 게다가 그는 시리아의 태양신 엘라가발 숭배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보이며 로마의 전통 종교를 무시하고 사회적 관습에 도전하는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 이러한 엘라가발루스의 기행은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의 반발을 샀고, 이는 율리아 마이사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 시기 율리아 마이사는 실질적으로 로마 제국의 통치권을 행사했다. 그녀는 아들 율리아 소에미아스와 함께 국정 운영의 많은 부분을 담당했다.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고, 자신의 초상을 주화에 새기는 등 황실 여성으로서 전례 없는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엘라가발루스의 무분별한 행동을 바로잡고 제국의 안정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황제의 예측 불가능한 성격과 종교적 열정은 통제하기 어려웠다.
 

6. 새로운 전략 :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등장

 
엘라가발루스의 계속되는 실정은 율리아 마이사에게 심각한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문과 세베루스 왕조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또 다른 손자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Severus Alexander, 208235)를 새로운 후계자로 내세우는 전략을 펼쳤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율리아 마이사의 딸 율리아 마마이아의 아들이자, 엘라가발루스의 사촌 동생이었다.
 
율리아 마이사는 엘라가발루스에게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양자로 삼고 카이사르(Caesar)’ 칭호를 부여하게 설득했다. 이는 대중의 불안감을 잠재우고 왕조의 안정을 꾀하기 위한 조치였다. 비교적 온화하고 학식이 깊었던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곧 원로원과 프라이토리아니의 호감을 얻기 시작했다. 엘라가발루스는 이러한 상황에 위기감을 느끼고 알렉산데르를 제거하려 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서기 222311, 프라이토리아니는 엘라가발루스와 그의 어머니 율리아 소에미아스를 살해했다. 이 암살의 배후에는 율리아 마이사의 치밀한 계획이 있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이로써 율리아 마이사는 다시 한번 황제를 바꾸고 세베루스 왕조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7. 안정기의 조력자 :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의 마이사

 
엘라가발루스의 죽음 이후, 율리아 마이사는 어린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섭정이자 사실상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알렉산데르는 당시 불과 13세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율리아 마이사와 그의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는 황실의 중요한 결정을 전담했다. 마이사는 자신의 손자를 로마 전통에 따라 교육시키고, 유능한 행정가와 군인들로 하여금 국정 운영을 보좌하게 했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는 비교적 평화와 안정을 누렸다. 이는 율리아 마이사의 노련한 정치적 감각과 통치 능력 덕분이었다. 그녀는 원로원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황실 재정을 안정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주화에는 그녀의 초상이 계속해서 새겨졌으며, 그녀는 여전히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율리아 마이사는 서기 224년경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으로 율리아 마마이아가 황제의 유일한 조언자가 되었으나, 마이사의 카리스마와 정치적 수완은 비할 데 없었다.
 

8. 율리아 마이사의 유산 : 로마 제국 황실의 여성 권력

 
율리아 마이사는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전략적인 여성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그녀는 혈통으로 인한 황후의 자리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지혜와 정치적 능력으로 두 명의 황제를 황좌에 앉히고 세베루스 왕조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그녀의 삶은 로마 제국의 통치 방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 이상 남성 황제의 전적인 능력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황실 내부의 강력한 여성들이 제국의 운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비록 세베루스 왕조가 결국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리고 ‘3세기 위기(Crisis of the Third Century)’라는 대혼란 시대로 접어들지만, 율리아 마이사의 통치 방식은 이후 로마 제국에서 황실 여성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그녀는 로마 역사상 가장 어둡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지성과 전략으로 황실을 지탱한 진정한 권력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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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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