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로니누스(Saloninus, AD.?~260) : 로마 제국 제34대 공동황제(AD.260)
살로니누스(Saloninus, ?~260), 국경의 도시 쾰른에서 스러진 ‘왕세자 황제’의 순간
살로니누스는 3세기 위기 한복판에서 황제 가문에 태어나, 258년에 카이사르로 선포되고 260년 갈리아 전선에서 잠시 아우구스투스로 추대된 뒤 포스투무스(Postumus) 세력에 의해 사망한 인물이다. 그는 갈리에누스(Gallienus, 약 218~268)의 아들이자 발레리아누스(Valerian, 약 199~260)의 손자로, 로마 중심과 국경 방위를 잇는 ‘왕조적 연속’의 실험이 현장에서 어떻게 좌초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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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니누스(Saloninus, AD.?~260) : 로마 제국 제34대 공동황제(AD.260) |
출생과 가계, 비두니아 뿌리의 어머니와 황제 가문
살로니누스의 부친은 황제 가리엔누스이고, 모친은 비두니아 출신의 그리스계 귀족 코르넬리아 살로니나(Cornelia Salonina)이다. 3세기 위기의 로마에서 혈연과 혼인은 합법성의 중요한 언어였고, 살로니누스는 발레리아누스 왕조의 외손으로 제국 중심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후계자였다.
258년 카이사르 선포와 갈리아 파견
갈리에누스는 258년에 살로니누스를 카이사르로 임명하고 갈리아로 보냈다. 카이사르는 관례적으로 제1순위 계승자를 가리키는 칭호였고, 살로니누스는 쾰른(Colonia Agrippina)을 거점으로 라인 국경의 행정과 군사적 권위를 보조하였다. 현지 보호자로는 프라이토리움 총관 실바누스(Silvanus, 다른 전승에서는 알바누스)가 배정되었고, 이는 일리리쿰에서 발레리아누스 2세에게 잉게누우스(Ingenuus)를 붙였던 선례와 같은 구도였다.
발레리아누스의 왕조 실험과 ‘계승의 문법’
연구자 브레이(Bray)는 살로니누스와 발레리아누스 2세의 카이사르 임명이 발레리아누스 본인의 주도로 이뤄졌다고 추정한다. 그는 가문의 ‘파트리아 포테스타스(patria potestas, 가부장 권한)’를 바탕으로 계승을 조기에 확정하고 지속 가능한 왕조를 도모하려 한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테트라르키아처럼 체계화된 제도 설계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황실 수호자 실바누스에게 ‘실질 통치’의 의지를 부여한 점은 분명하였다.
포스투무스와의 충돌, 전리품을 둘러싼 균열
260년 여름, 실바누스는 포스투무스 병력이 게르만 전투에서 거둔 전리품의 반납을 명하였다. 국경군은 ‘먼 로마의 명령’이 자신들의 관습과 공을 무시한다고 받아들였고, 불만은 곧 살로니누스와 실바누스를 겨냥한 폭발로 번졌다. 두 사람은 충성 병력을 이끌고 쾰른으로 피신했으나, 포스투무스는 즉시 황제로 추대되어 도시를 포위하였다. 라인 전선의 군심은 보급과 방어의 현실을 우선했고, 중앙의 대표가 행사하는 명목상의 권위는 현장에서 설득력을 잃어 갔다.
260년 ‘즉위’의 시도와 쾰른 포위전의 결말
갈리에누스는 도나우 전선에 묶여 있었고, 발레리아누스는 이미 사산 왕조의 샤푸르 1세에게 사로잡힌 뒤였다. 살로니누스의 휘하 병력은 상황 반전을 노리고 그를 아우구스투스로 추대했으나, 포스투무스 군의 포위는 멈추지 않았다. 약 한 달 뒤 쾰른 시민은 살로니누스와 실바누스를 포위군에게 넘겼고, 두 사람은 살해되었다. 포스투무스가 살해를 제지할 수 있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그가 최소한 이를 막지 못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이 사건은 ‘현장 충성’과 ‘왕조 합법성’의 충돌에서 어느 쪽이 더 빨랐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재위 표기의 범위와 공식 배열
요약 표준에서는 살로니누스를 260년 7월경 아주 짧게 아우구스투스로 기록한다. 선임자는 갈리에누스로, 후임 역시 갈리에누스로 정리되어, 그의 황제 호칭이 국지적 포위전 속에서 ‘정치적 장치’로 쓰였음을 시사한다. 사망지는 쾰른(Colonia Agrippina)이며, 발레리아누스 왕조의 손자 황제는 국경 도시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쾰른의 황자, 주화와 초상의 흔적
살로니누스는 카이사르 시절부터 주화를 발행하여 후계자 이미지를 선전하였다. 또한 회백색 사도닉스 카메오 한 점은 전통적으로 필리푸스 2세로 알려졌으나, 엔트위슬(Entwistle)과 아담스(Adams)는 이 초상이 살로니누스를 묘사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불확실성을 전제하더라도, 국경 도시의 젊은 카이사르가 시각 예술과 화폐를 통해 권위의 언어를 학습했고, 그 언어가 포위전의 현실 앞에서 얼마나 무력했는지 역시 함께 드러난다.
요약 연표
- 258년 : 갈리에누스가 살로니누스를 카이사르로 선포하고 갈리아로 파견한다. 보호자로 실바누스가 배정된다.
- 260년 7월경 : 포스투무스가 전리품 환수를 거부한 사태가 폭발하고, 살로니누스는 쾰른으로 피신한다.
- 260년 7~8월 : 살로니누스가 아우구스투스로 추대되나, 쾰른 포위전 종결과 함께 살해된다.
갈리아 전선의 정치학, ‘현장 관습’과 ‘중앙 명령’의 마찰
전리품을 둘러싼 충돌은 부당한 탐욕의 문제가 아니라 국경 방위 경제의 작동 방식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라인과 도나우에서 국경군은 자급적 요소가 강했고, 지휘관 포스투무스는 병사들의 기대를 정치화하여 독자 정권으로 나아갔다. 발레리아누스 왕조가 설계한 후계 장치는 갈리아의 현실을 흡수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살로니누스의 ‘즉위’는 국경군의 결속을 시험하는 역설적 촉매가 되었다.
갈리에누스의 이후 선택, 왕조 실험의 종결
전승에 따르면 갈리에누스는 살로니누스의 죽음 이후 셋째 아들 에그나티우스 마리니아누스를 황위에 올리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이는 발레리아누스의 ‘손자 세습’ 실험이 두 차례의 비극으로 종결되었음을 의미한다. 다만 이 대목은 사료마다 신빙성에 편차가 있으므로, ‘그렇다는 전승이 있다’는 수준에서 조심스럽게 참고할 필요가 있다.
사료와 신뢰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살로니누스 항목은 본문 일부에 주석이 부족하다는 편집 표지가 붙어 있다. 요컨대 기본 골격—가계, 258년 카이사르, 갈리아 파견, 쾰른 거점, 260년 갈등과 포위, 아우구스투스 추대와 피살—은 상호 보강되는 반면, 세부 정황과 동기는 사료마다 진폭이 있다. 따라서 본문은 교차 가능한 사실을 기준으로 정리하고, 해석이 갈리는 지점은 추정과 전승의 층위를 구분해 서술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오늘의 역사로 읽는 의미, ‘합법성의 언어’와 ‘현장의 속도’
살로니누스는 혈통과 칭호, 의전과 주화라는 합법성의 언어를 장착했으나, 국경의 현장은 포위선의 속도와 병사들의 관습이 규칙을 만들었다. 260년 쾰른의 포위전은 왕조합법성과 현장충성이 서로를 설득하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그가 남긴 것은 치적의 목록이 아니라, ‘누가 로마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제국이 흔들리던 시대의 생생한 증거이다.
간단 연표
- 258년 : 카이사르 선포, 갈리아 파견, 쾰른 주둔.
- 260년 7월경 : 전리품 분쟁, 포스투무스 봉기, 쾰른 포위 시작.
- 260년 7~8월 : 아우구스투스 추대, 쾰른 시민의 인도 후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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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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