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AD,145~211) : 로마 제국 제20대 황제(AD.193~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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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AD,145~211) : 로마 제국 제20대 황제(AD.193~211)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다섯 황제의 해’를 끝내고 새 질서를 연 군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45~211)는 193년 4월 9일부터 211년 2월 4일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이다. 전임자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였고, 사후에는 카라칼라와 게타가 공동으로 뒤를 이었다. 그는 즉위명에 ‘페르티낙스’를 포함해 정통성과 개혁 이미지를 결합하려 했고, 제국의 무게중심을 군사력과 변경 방위로 재배치하여 세베루스 왕조의 기틀을 세웠다. 출생지는 아프리카의 렙티스 마그나였으며, 붕어는 브리튼의 에보라쿰에서 맞았다. 재위 기간 동안 원로원과의 긴장을 감수하면서도, 동방 원정과 방위선 정비를 통해 제국의 외연을 크게 확장하였다.
아프리카 출신의 제국 최고통치자, 배경과 정체성
세베루스는 145년 4월 11일 렙티스 마그나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모친은 풀비아 피아로 전하며, 이탈리아ㆍ리비아ㆍ포에니 전통이 뒤섞인 가문적 배경을 지녔다. 카시우스 디오는 그를 “리비아인 출신”으로 언급하였고, 이러한 주변 속주 출신성은 그가 ‘첫 지방 출신 황제’로 평가되는 근거가 되었다. 라틴어ㆍ그리스어 교육과 수사 훈련을 받았고, 젊은 시절부터 공적 연설 능력을 갖추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다섯 황제의 해’의 열림과 집권의 기세
191년, 프라이토리아누스 총관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에투스의 건의로 세베루스는 판노니아 수페리오르 총독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말 코모두스가 암살되고, 193년 초 페르티낙스가 근위대에 살해되자, 카르눈툼에서 제14군단이 세베루스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인근 군단들이 연이어 동조했고, 세베루스는 군대를 집결해 신속히 이탈리아로 진군하였다. 원로원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사형에 처하자 세베루스는 무혈로 로마를 장악했고, 페르티낙스의 살해범을 처형한 뒤 근위대를 해산하고 자신의 충성병으로 재편하여 수도의 치안을 장악하였다.
즉위명 ‘페르티낙스’의 정치학과 원로원과의 거리
그는 즉위명에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페르티낙스 아우구스투스’를 사용하며 선왕 페르티낙스의 검약과 공공선 이미지를 계승하려 했다. 그러나 집권 기반이 군단의 추대였던 만큼 원로원과의 사이는 처음부터 매끄럽지 않았다. 세베루스는 부패와 음모 혐의를 들어 다수의 원로원을 처형하고 측근으로 교체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로마의 통치를 군사적 독재에 가깝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낳았으나, 코모두스 치세의 부패를 정리했다는 이유로 시민들 사이에서는 일정한 지지를 얻었다. 로마에는 개선의 상징으로 ‘세베루스 개선문’이 세워졌다.
군사ㆍ행정 개편과 플라우티아누스의 부상과 몰락
197년 이후 세베루스는 프라이토리아누스 총관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의 영향 아래에서 통치를 전개하였다. 플라우티아누스의 딸 플라우틸라는 카라칼라와 혼인했으며, 총관은 거의 전권을 행사했으나 205년 음모 혐의로 처형되었다. 이후 세베루스는 유능한 법학자 파피니아누스를 요직에 기용하였고, 제도적 정비를 병행했다. 플라우티아누스 사건 이후에는 배우자 율리아 도므나의 조언이 행정 전반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동방 원정과 대아프리카 방위선, 외연 확장의 성과
세베루스는 파르티아 원정에서 니시비스와 싱가라를 확보하며 일정 기간 동안 동방에서의 로마 우위를 굳혔다. 북아프리카 출신인 그는 트리폴리타니아 방위선을 확장·강화해 농업지대를 안정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재정과 병참을 군대 중심으로 재편하고 병사 급여를 인상해 충성도를 높였으나, 이 정책은 후대 황제들에게 지속적인 군사비 부담을 안겼다. 일부 학자들은 그의 말년 제국의 물리적 영역이 500만 제곱킬로미터를 넘어 최대치에 이르렀다고 평가한다.
군제 개혁과 수도 치안, 근위대의 재구성
세베루스는 근위대를 해산하고 자신의 군단 병사들로 그 자리를 채웠다. 이는 수도 치안을 확고히 하는 동시에 반란의 위험을 낮추려는 조치였다. 변경에서는 군단의 배치와 보급로를 재정비하고, 장성 인사를 통해 충성 체계를 강화했다. 그의 군제 개편은 단기적으로 통치 안정에 기여했지만, 군의 위상을 지나치게 높여 민정과의 균형을 흔들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브리튼 원정과 에보라쿰의 말년
재위 말기 세베루스는 브리튼의 전선을 점검하고 북방 부족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직접 원정에 나섰다. 병세가 악화한 그는 211년 2월 4일 에보라쿰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후에는 장남 카라칼라와 차남 게타가 공동 황제로 올랐으나, 형제 갈등은 곧 유혈로 번져 왕조의 내적 불안정을 예고하였다.
통치 철학과 유산, 공과의 균형
세베루스는 군사력과 법률ㆍ행정의 결합을 통해 제국을 통치했다. 부패한 질서를 정리하고 변경 방위선을 강화했으며, 동방에서 로마의 위신을 회복하였다. 동시에 원로원의 자율성을 축소하고 정치적 폭력을 빈번히 사용하여, 제국을 ‘군대가 지배하는 국가’로 전환시켰다는 비판도 받는다. 병사 대우를 대폭 개선한 정책은 단기 충성 확보에는 효과적이었지만, 군사비 상승과 조세 부담을 구조적으로 확대해 후대의 재정 압박을 키웠다. 그럼에도 그는 혼돈의 193년을 수습해 왕조적 연속성을 회복시켰고, 제국 외연을 실질적으로 넓힌 군주로 기억된다.
핵심 연표
- 145년 4월 11일 : 렙티스 마그나에서 출생.
- 191년 : 판노니아 수페리오르 총독으로 임명.
- 193년 4월 9일 : 카르눈툼에서 군단의 추대를 받아 즉위.
- 193년 : 로마 입성,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처형, 근위대 해산ㆍ재편.
- 197년경 : 동방 원정의 성과와 로마 개선문 건립.
- 205년 : 플라우티아누스 처형, 파피니아누스 기용.
- 211년 2월 4일 : 에보라쿰에서 붕어 .
오늘의 역사로 읽는 세베루스의 의미
세베루스는 군단의 추대와 속주 엘리트 네트워크를 발판으로 수도의 합법성을 장악하여, ‘다섯 황제의 해’의 내전을 종결시킨 군주이다. 그는 국경 방어와 동방 원정을 통해 제국의 안전지대를 확장했고, 수도 치안을 군사적으로 재구성하여 단기 안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원로원을 희생시키는 통치와 군사 비용의 급증은 후대 위기의 씨앗이 되었다. 그의 치세는 로마 국가가 ‘무력ㆍ법ㆍ재정’의 삼각축으로 재편되는 분기점이었으며, 그 공과는 제국의 장기 궤적 위에서 양면적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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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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