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2일 화요일

엘라가발루스(Elagabalus, AD.c.204~222) : 로마 제국 제23대 황제(AD.218~222)

엘라가발루스(Elagabalus, AD.c.204~222) : 로마 제국 제23대 황제(AD.218~222)

 

로마 황제 엘라가발루스, 태양신의 대사제로 즉위한 소년 군주의 빛과 그늘

 
엘라가발루스(Elagabalus, 204~222)218년부터 222년까지 통치한 로마 황제이다. 그는 14세에 즉위하여 종교적 논란과 궁정 스캔들, 급진적 의례로 대중의 주목을 받았고, 18세에 암살되어 재위가 막을 내렸다. 사후에는 사촌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즉위하였고, 엘라가발루스의 통치는 세베루스 왕조 내부 권력의 재정렬을 촉발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엘라가발루스(Elagabalus, AD.c.204~222) : 로마 제국 제23대 황제(AD.218~222)

 

시리아 에메사 출신, 태양신 엘라가발의 대사제

 
그의 본명은 섹스투스 바리우스 아비투스 바시아누스이며, 시리아 에메사(현 홈스)의 유력 아랍계 가문 출신이다. 엘라가발루스는 어린 시절부터 태양신 엘라가발의 대사제로 봉직하였고, 이 종교적 정체성은 즉위 후 로마의 공적 의례와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엘라가발은 아랍어 일라 al-자발(산의 신)’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로마에서는 솔(Helios) 숭배와 접합되어 이해되었다는 설명이 전한다.
 

권력 장악의 배후, 줄리아 마에사의 기획과 군단의 봉기

 
카라칼라(Caracalla, 188~217)의 피살 이후 프라이토리움 총관 마크리누스(Macrinus, 165~218)가 집권하자, 외가의 실력자 줄리아 마에사(Julia Maesa, 생몰년 미상)는 손자인 엘라가발루스를 옹립하기 위한 모의를 개시하였다. 가니스(Gannys) 등의 조력과 동방 군단의 지지를 확보한 봉기는 218년 마크리누스를 전장에서 무너뜨렸고, 14세의 엘라가발루스가 원로원의 추인을 받아 원수정의 정식 황제로 선포되는 결말로 이어졌다.
 

로마 입성과 아드벤트스’, 그리고 인사 개편

 
엘라가발루스는 219년 여름~가을경 로마에 입성하면서 전형적 황제 의식 아드벤트스를 거행하였다. 마크리누스 측 핵심 인사 처벌과 동시에 상층부 사면을 제시하되, 법학자 울피아누스(Ulpian, 170~223)는 유배되었다. 총애하던 코마손(Comazon)을 프라이토리움 총관ㆍ집정관(220)ㆍ도시장에 잇따라 발탁하는 등 파격 인사를 단행하여 원로원과 전통 엘리트의 반감을 자극하였다.
 

로마 종교 전통과의 충돌, 엘라가발 숭배의 도입

 
그는 에메사에서 봉안하던 신성석(baetyl)을 로마로 옮겨 태양신 엘라가발 숭배를 도시의 중심 의례로 격상시켰다. 원로원ㆍ고관들이 신전 의식에 참여하도록 강제하는 방식은 로마의 전통 다신교 의례 질서와 충돌하였고, 종교적 반발과 정치적 의심을 동시에 키웠다. 사료에는 다회 결혼과 베스타 신전의 무녀 아킬리아 세베라와의 혼인 같은 규범 파괴적 사례가 전해지며, 이는 로마적 도덕의 경계를 넘었다는 비판을 강화하였다.
 

궁정 사생활 논란과 사료 비판의 필요성

 
엽기ㆍ퇴폐ㆍ성적 일탈이라는 이미지가 사후 오랫동안 엘라가발루스를 따라다녔다. 에드워드 기번에서 아드리안 골즈워디에 이르는 전통적ㆍ근대적 서술은 그를 무능하거나 방종한 군주로 묘사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현대 연구는 카시우스 디오(Cassius Dio, 155~235)ㆍ헤로디아노스(Herodian, 생몰년 미상)ㆍ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선정적 서술 편향, 그리고 동방성에 대한 당대의 고정관념이 평가에 개입했을 가능성을 지적하며, 사료 비판적 독해를 요구한다.
 

궁정과 도시, 황실 별궁과 경기장 건설

 
그는 호르티 스페이 베테리스(Horti Spei Veteris) 일대를 황실 별궁으로 중건하고, 아레나ㆍ원형경기장(Amphitheatrum Castrense)ㆍ서커스 바리아누스(Circus Varianus)를 결합한 대규모 유락 공간으로 재편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가문의 이름 바리아누스(Varius)로 전차 경기에 직접 참여하여 대중성을 과시하려 하였고, 측근들에게도 요직을 부여하며 권력 기반을 다지려 하였다. 이러한 도시ㆍ건축 사업은 궁정의 사교와 황제 권위의 시각적 연출을 겸하였다.
 

군ㆍ원로원ㆍ민심의 이반, 권력 기반의 균열

 
종교 혁신과 인사 개편, 사생활 논란은 프라이토리아누스 근위대ㆍ원로원ㆍ평민의 동시 이반을 촉발하였다. 엘라가발루스는 외가의 네트워크와 동방 군단의 지지를 통해 즉위했으나, 로마 핵심부의 합법성과 관습을 조밀하게 설득ㆍ통합하는 데 실패하였다. 정무 수행 자체를 무능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권력 운영의 기초인 연합ㆍ협력의 정치가 작동하지 못한 점은 분명하다.
 

2223월의 최후, 사촌에게 왕위가 넘어가다

 
2223, 프라이토리아누스 일부가 엘라가발루스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배후에는 외할머니 줄리아 마에사의 공작이 있었다는 전승이 유력하며, 곧 사촌 세베루스 알렉산데르(Severus Alexander, 208~235)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는 세베루스 왕조 내 여인들의 후견 정치와 근위대의 권력 중재가 결합한 교체 방식으로, 3세기 제국의 권력 역학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장면이다.
 

공동 통치ㆍ집정관 이력과 제도적 외피

 
엘라가발루스는 즉위 직후부터 집정관직을 연이어 맡았고(218~220), 측근 코마손을 집정관ㆍ도시장으로 승격시키는 등 제도적 외피를 통해 권력의 합법성을 연출하였다. 그러나 인사 원칙과 관례의 파격은 원로원과의 불신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동하였다. 결과적으로 제도는 존재했으나, 제도를 떠받치는 신뢰ㆍ관습의 기반은 약화되었다.
 

평판의 두 얼굴, 종교 혁신과 비난의 정치

 
엘라가발루스의 통치는 가혹한 비난 속에서도 종교사적 실험으로 조명되기도 한다. 엘라가발 숭배의 도입과 태양신 중심 의례의 강화는 이후 솔 인빅투스(Sol Invictus)와 같은 태양 숭배의 재부상을 예견하는 전조로 읽힌다. 동시에 그의 사후에 가공ㆍ증폭된 선정적 전언은 패자에 대한 정치적 낙인작용이었다는 지적이 병존한다. 이 상반된 평가의 간극 자체가 3세기 로마 정치의 균열을 반영한다.
 

연표로 보는 엘라가발루스

 
  • 204년경 : 시리아 에메사 출생이며 태양신 엘라가발의 대사제로 성장하다.
  • 218: 줄리아 마에사의 봉기 기획으로 즉위하다.
  • 219: 로마에 아드벤트스로 입성하고, 코마손을 중심으로 파격 인사를 단행하다.
  • 220년경 : 황실 별궁과 경기장 시설을 확장하고 도심 유락 공간을 중건하다.
  • 2223: 프라이토리아누스의 손에 암살되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즉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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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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