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西晉, AD. 266~316년)의 역사와 역대 군주
서진(西晉, 266년 2월 4일 ~ 316년 12월 11일)은 중국 역사상 삼국 시대 조위(曹魏) 이후에 세워진 왕조로, 이후의 동진(東晉)과 함께 합쳐서 일반적으로 진(晉)나라라고 부른다. 진무제 사마염(晉武帝 司馬炎)이 266년 2월(을유년 12월)에 즉위하여 태시(泰始)로 개원한 것을 시작으로, 316년 진 민제(晉愍帝)가 포로로 잡히기까지 총 3대 4명의 황제, 약 51년간 존속하였다.
서진의 수도인 낙양(洛陽)은 영가의 난(永嘉之亂) 중에 함락되었고, 제4대 황제 진민제 사마업(晉愍帝 司馬鄴)은 어쩔 수 없이 장안(長安)으로 천도하였다. 서진은 위진남북조 시대(魏晉南北朝時代)에 잠시나마 통일을 이룬 유일한 왕조였으나, 동시에 “가장 약하고 가장 혼란스러운 통일 왕조”로 비판받기도 한다.
1. 사마씨의 정권 장악
서진(西晉)의 건국 황제 사마염(司馬炎)은 하내 사마씨(河內司馬氏)라는 명문 세족 출신이었다. 그의 조부 사마의(司馬懿)는 삼국 시대 조위(曹魏)에서 대장군, 태위, 태부 등의 고위직을 역임하였으며, 백부 사마사(司馬師)는 대장군까지 올랐고, 부친 사마소(司馬昭)는 후일 진왕(晉王)에 봉해졌다.
249년, 사마의(司馬懿)는 고평릉의 변(高平陵之變)을 일으켜 조위의 종실 권신 조상(曹爽)을 제거하고, 조위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로써 조씨 정권은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사마씨(司馬氏)가 조위의 정권을 사실상 장악하게 되었다.
2. 진의 건국과 삼국 통일
서진이 건국되기 직전인 263년, 사마소(司馬昭)는 병력을 보내 촉한(蜀漢)을 멸망시키고, 그 뒤에 일어난 종회(鐘會)의 반란도 평정하였다. 이후 을유년(乙酉年) 겨울 12월 병인일(丙寅, 266년 2월 8일), 사마염(司馬炎)은 조위를 폐하고 황제로 즉위하여, 국호를 “진(晉)”이라 바꾸었다.
서진 통치 중에는 서릉의 전투(西陵之戰)가 있었으며, 279년 말에는 오 정벌(滅吳之戰)을 개시하였고, 280년에는 손오(孫吳)를 멸망시켜 삼국 분열 체제를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이로써 동북에서 서역(西域)에 이르는 여러 소국들까지 모두 조공을 바치고 귀속하였다.
서진은 오나라를 멸망시킨 뒤 중국을 통일하면서, 후한 말기 이래로 이어지던 전쟁과 혼란을 종식시켰다. 덕분에 사회적 생산 질서가 회복되었고, 진 무제 사마염(晉武帝 司馬炎)의 통치 초반인 태강(太康) 연간에는 통치에 힘쓰며 토지 제도 개혁과 농업 생산 장려, 수리 사업 등을 시행하였다. 전쟁이 사라진 덕에 인구도 점차 회복되었고, 이 시기는 “태강지치(太康之治)”로 불리는 잠시의 번영기였다.
3. 중앙 권력의 약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패와 사치가 서진 사회의 주류 풍조가 되었으며, 관료 귀족들 사이에서는 서로 경쟁적으로 사치를 부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서진 형주자사(荊州刺史)였던 석숭(石崇)은 상인들을 노략질하여 재산을 모으는 악질적인 수법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진 무제 사마염(司馬炎)이 사마씨 가문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왕실 일족들을 지방의 제후왕으로 대거 봉작하였고, 이들을 통해 중앙 권력을 수호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은 도리어 각지의 제후들이 병력을 장악하고 독립적으로 세력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세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은객제(蔭客制)와 점전령(佔田令) 같은 조치를 시행하여, 귀족들의 특권을 계속 확장하였다. 그 결과, 세족 귀족들의 권력과 영향력은 점점 더 커졌고, 문벌 정치(門閥政治)는 갈수록 심화되어 갔다.
4. 팔왕의 난
1) 우둔한 후계자 사마충
태시 원년(太熙元年, 290년), 진 무제 사마염(晉武帝 司馬炎)이 병으로 사망하고, 태자인 사마충(司馬衷)이 즉위하여 진 혜제(晉惠帝)가 되었다. 그러나 혜제는 국가를 다스릴 능력이 전혀 없었다. 이전부터 많은 대신들은 태자가 “우둔하다(不慧)”는 이유로, 무제에게 총명하고 명성이 높았던 동생, 제왕(齊王) 사마유(司馬攸)에게 제위를 양위하길 권고했다.
진 무제(司馬炎)도 한때 태자를 폐위할 생각을 했지만, 황후와 측근들의 만류로 생각을 바꾸고, 오히려 사마유를 수도에서 쫓아내어 봉국으로 돌려보냈다. 사마유는 분노와 실의 끝에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사마충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2) 혼란의 시작 : 궁정 쿠데타
무제가 죽기 전, 그는 장인을 맡고 있던 양준(楊駿)에게 섭정을 명했다. 그러나 혜제의 황후, 가남풍(賈南風)은 원래부터 정치를 장악하려는 야심이 있었고, 종실인 초왕(楚王) 사마외(司馬玮)와 공모하여 원강 원년(元康元年, 291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양준과 그 일가를 몰살하였다.
그 뒤 종실 중 연장자인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이 정무를 맡게 되었지만, 가황후는 초왕 사마외를 사주해 사마량을 살해하게 하였고, 곧이어 사마외도 “독살 전횡”의 죄로 제거했다. 이로써 실권은 전적으로 가남풍에게 집중되었다.
그 뒤 몇 년간, 지방에서는 유민과 유입 이민족들의 반란이 계속되었으나, 조정은 비교적 안정을 유지하였다.
3) 갈등의 폭발 : 태자의 폐위와 살해
그러나 원강 9년(299년), 가황후는 혜제의 후궁 소생 태자, 사마욱(司馬遹)을 폐위하고, 다음 해에는 그를 살해하였다. 이 사건은 서진 통치층 내부의 갈등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4) 조왕 사마륜의 찬탈과 내전의 격화
금위군을 통솔하고 있던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은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 가황후를 제거하고, 새로 황태제로 옹립된 회남왕(淮南王) 사마윤(司馬允)까지 살해한 뒤, 혜제를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사마륜의 찬탈은 종실 제왕들의 대규모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쿠데타는 곧 전면 내전으로 비화되었다. 지방의 군권을 쥐고 있던 다음 제왕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
-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 – 당시 허창(許昌)에 주둔
-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 업(邺, 현재 하북 임장 서남)에 주둔
-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 – 관중 지역에 주둔
이들은 사마륜을 공격하여 결국 그를 처형하고, 혜제를 복위시켰다. 그러나 이후 세 왕은 서로 간에 권력 투쟁을 벌이게 되었고, 여기에 장사왕(長沙王) 사마의(司馬乂)와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도 참전하면서, 내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5) 북방 사회의 붕괴와 팔왕의 난의 종결
각 제왕들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지방 관리들과, 이민족 집단들까지 끌어들여 전쟁에 동원하였고, 이로 인해 북방 사회는 극심한 혼란과 동요에 빠졌다.
진 혜제(司馬衷)가 즉위한 이후부터 이 정변과 내전에 깊이 연루된 주요 종실 제왕은 다음 8명으로, 역사에서는 이를 “팔왕(八王)”이라 부른다:
-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
- 초왕(楚王) 사마외(司馬玮)
-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
-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
-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
- 장사왕(長沙王) 사마의(司馬乂)
-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
광희 원년(光熙元年, 306년)까지, 장안(長安)을 점거하고 있던 하간왕 사마옹을 제외한 제왕들은 대부분 패사하였다. 최후에는 동해왕 사마월(司馬越)이 조정을 장악하고, 혜제를 독살한 후 사마치(司馬熾)를 즉위시켰다. 이가 바로 진 회제(晉懷帝)이다.
회제는 사마옹을 불러 조정에 등용하려 했지만, 사마옹은 도중에 살해되었다. 이로써 팔왕의 난은 종결되었다. 하지만 이 시점까지, 남흉노(南匈奴)와 저족(氐族) 유민들은 각각 한조(漢趙)와 성국(成國)이라는 독립 정권을 세웠으며, 이로써 서진의 통일 질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5. 진 회제의 통치와 ‘영가의 난’
서진(西晉)의 진 회제(晉懷帝, 사마치 司馬熾) 재위 시기, 중국 북부의 한족 지역은 끊임없는 대규모 전쟁에 시달렸고, 내지로 이주한 주변의 이민족들은 잇달아 군주제 정권을 수립하며 점차 강성해졌다. 이들은 서진 정권에 큰 위협이 되기 시작했다.
311년(영가 5년), 당시 서진 조정의 실권자였던 사마월(司馬越)은 강한(江漢) 지역을 약탈하던 한조(漢趙)의 군벌 석륵(石勒)을 토벌하기 위해 출병하였다. 그러나 사마월은 행군 도중 병사하였고, 왕연(王衍)은 그의 시신을 봉국인 동해(東海)로 운구하여 장례를 치르려 했다.
하지만 서진의 주력군이 고현(苦縣, 현재 하남성 노읍현)에 이르렀을 때, 석륵의 매복 공격을 받아 참패하였고, 이 전투는 역사상 “녕평성 전투(寧平城之戰)”로 불린다. 이 전투로 인해 서진의 주력군이 전멸하면서, 이후 서진은 한조 등 군벌 정권에 대항할 전력이 사실상 소멸되었다.
같은 해, 한조의 대군은 서진의 수도 낙양(洛陽)을 함락시켰고, 태자 및 수만 명의 관료와 백성을 학살하였다. 진 회제(司馬熾)는 생포되어 끌려갔고, 곧 처형되었다. 이 일련의 사태는 역사상 “영가의 난(永嘉之亂)”으로 불린다.
팔왕의 난으로 인해 국력이 극심하게 손상되자, 유목 민족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정권을 세웠고, 오호십육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311년, 한조(漢趙)의 황제 유총(劉聰)이 낙양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진 회제(晉懷帝)는 포로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6. 서진의 멸망과 동진의 건국
1) 서진의 멸망
영가 7년(313년), 진 회제(司馬熾)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안(長安)에 있던 사마업(司馬鄴)이 황제에 즉위하여,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바꾸었으니, 이는 곧 진 민제(晉愍帝)이다.
그러나 건흥 4년(316년), 한조는 장안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고, 진 민제는 결국 항복하였다. 그는 얼마 후 살해되었고, 이로써 서진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2) 동진의 건국
317년, 강동(江東)에 머물던 서진 황실의 종친인 사마예(司馬睿)가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건무(建武)로 바꾸었으며, 수도를 건강(建康)에 정하였다. 후세는 이 정권을 “동진(東晉)”이라 부른다.
진 건무 연간(317년 이후), 북방의 전쟁이 계속되자, 중원(中原)의 한족 관료와 백성들이 대거 남쪽으로 피난하게 되었고, 이는 역사상 “의관남도(衣冠南渡)”라 불리는 대규모 남천(南遷) 현상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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