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24일 수요일

사마염(司馬炎, AD. 236~290년) : 서진의 황제(AD. 266~290)

사마염(司馬炎, AD. 236~290) : 서진의 황제(AD. 266~290)

 
  • 이름 : 사마염(司馬炎)
  • () : 없음(기록 없음)
  • 시호 : 무제(武帝)
  • 묘호 : 세조(世祖)
  • 출생 : 236
  • 사망 : 290516
  • 황제 즉위일 : 26628
  • 재위 기간 : 266~290
  • 선왕 작위 : 진왕(晉王) 26597~ 26628
 

기원후 236

  • 사마염(司馬炎)236년에 태어났으며, 사마소(司馬昭)의 장자이다.
  • 어머니 왕원희(王元姬)는 경학자 왕숙(王肅)의 딸이다.
 

관직 생활 시작

  • 조위(曹魏) 가평(嘉平) 연간에 사마염(司馬炎)은 북평정후(北平亭侯)에 봉해졌으며, 급사중(給事中, 5)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 이후 봉거도위(奉車都尉), 중루장군(中壘將軍) 등을 역임했고, 산기상시(散騎常侍)를 겸했으며, 여러 차례 승진하여 중호군(中護軍)과 가절(假節)에 이르렀다.
 

기원후 260

  • 감로(甘露) 5(260), () 황제 조모(曹髦)가 사마씨(司馬氏)의 손에서 권력을 되찾으려 시도했지만 실패하여, 군사들이 패배하고 살해되었다. 이에 승상(丞相) 사마소(司馬昭)는 사지절(使持節) 행중호군(行中護軍) 중루장군(中壘將軍) 사마염(司馬炎)을 파견하여 상도향공(常道鄉公) 조환(曹璜)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게 했다.
  • 사마소(司馬昭)는 일찍이 사마염(司馬炎)을 위해 완적(阮籍)의 딸에게 청혼하려 했다. 그러나 완적(阮籍)이 연달아 60여 일간 술에 취해 있었으므로, 사마소(司馬昭)는 청혼을 제안할 기회를 찾지 못했고, 결국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기원후 265

  • 사마소(司馬昭)의 둘째 아들 사마유(司馬攸)는 사마사(司馬師)의 양자이다. 사마소(司馬昭)는 자신의 권위가 사마사(司馬師)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여, 사마유(司馬攸)에게 진왕(晉王)의 자리를 잇게 하여 사마사(司馬師)에게 보답하려 했다.
  • 그러나 중신들의 반대로, 결국 함희(咸熙) 2(265) 5월에 사마염(司馬炎)을 세자(世子)로 세울 수밖에 없었다.
  • 같은 해 8월 사마소(司馬昭)가 세상을 떠난 후, 사마염(司馬炎)은 진왕(晉王)의 작위를 계승했다.
  • 함희(咸熙) 2(265), 사마소(司馬昭)55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진왕(晉王) 사마염(司馬炎)은 상국(相國)의 지위를 계승하고 전국 군정 대권을 장악했다.
  • 그는 면밀한 준비를 거쳐, 음력 같은 해 12, 과거 조비(曹丕)가 한()나라를 대신했던 전례를 모방하여 즉위 준비를 했다. 사마염(司馬炎)이 상국(相國) 직을 맡은 후, 몇몇 사람들은 사마염(司馬炎)의 지시를 받아 조환(曹奐)에게 어서 빨리 황제의 자리를 양위할 것을 설득했다. 얼마 후 조환(曹奐)은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왕(晉王)이여, 그대의 가문은 대대로 황제를 보필하여 그 공훈이 하늘보다 높으며, 온 세상은 사마씨(司馬氏) 가문의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하늘이 내게 황제의 자리를 그대에게 양보하라고 하니,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고 사양하지 마십시오!”
  • 사마염()은 여러 차례 사양했다. 사마염(司馬炎)의 심복인 태위(太尉) 하증(何曾), 위장군(衛將軍) 가충(賈充) 등은 문무백관(文武百官)을 이끌고 거듭 간언했다.
  • 사마염(司馬炎)은 여러 차례 사양한 후에야 조환(曹奐)의 선양(禪讓)을 받아들였고, 조환(曹奐)을 진류왕(陳留王)에 봉했다.
  • 사마염(司馬炎)은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으로 개칭했으며, 역사는 이를 서진(西晉)’이라 칭한다.
  • 즉위 후, 사마염()은 그의 조부 사마의(司馬懿), 큰아버지 사마사(司馬師), 아버지 사마소(司馬昭)를 황제로 추존했다.
  • 건국 후 일련의 진보적인 경제 정책을 시행하여 생산력 발전을 도모했다. 여러 차례 군현 관리들에게 농업과 양잠을 권장하고 격려할 것을 지시했으며, 사적으로 소작인(佃客)을 고용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또한 오()와 촉() 지역의 백성들을 북쪽으로 불러들여 북방의 인구를 충실하게 했고, 둔전제(屯田制)를 폐지하여 둔전민들을 주군(州郡)의 일반 호구로 편입시켰다.
 

기원후 270

  • 태시(泰始) 6(270), 하서(河西) 선비족(鮮卑族) 영주 돌발수기능(禿髮樹機能)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듬해에는 흉노(匈奴) 유맹(劉猛)도 그를 따라 관문 밖으로 나왔다.
 

기원후 272

  • 태시(泰始) 8(272), 사마염(司馬炎)은 하정(何楨)을 파견하여 이각(李恪)을 회유하고 유맹(劉猛)의 반란을 평정하게 했다.
 

기원후 274

  • 진 무제(晉武帝)는 일련의 진보적인 정책들을 시행하여 국력을 증강시키고 생산력을 발전시켰다. 이 시기 손오(孫吳)의 정세는 혼란스러웠고, 오제(吳帝) 손호(孫皓)는 내정을 돌보지 않고 사치를 일삼아 민심이 이반되어 있었다. ()나라를 방어하기 위해 사마염()은 양호(羊祜)를 양양(襄陽)에 진수시켜 오()의 장수 육항(陸抗)과 대치하게 했고, 왕준(王濬)을 익주(益州)에 파견하여 대형 전함을 대량 건조하게 했다.
  • 태시(泰始) 10(274) 육항(陸抗)이 사망했다.
 

기원후 275

  • 함녕(咸寧) 원년(275), 사마염(司馬炎)은 노비들을 풀어 병사 대신 둔전(屯田)하게 했고, 수기능(樹機能)이 항복했으며, 탁발부(拓跋部)의 사막한(沙漠汗)이 진()나라에 사신으로 왔다. 마순(馬循)이 선비족(鮮卑族)을 평정했다.
 

기원후 276

  • 양호(羊祜)는 오()를 정벌할 것을 건의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기원후 277

  • 함녕(咸寧) 3(277) 수기능(樹機能)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준(司馬駿)이 문앙(文鴦) 등을 이끌고 수기능(樹機能)을 격파하고 선비족 20만 명의 항복을 받아냈다. 사막한(沙漠汗)은 선비족(鮮卑族)의 구귀족(舊貴族)들에게 살해되었고, 위관(衛瓘)이 탁발부(拓跋部)의 내란을 평정했다.
 

기원후 278

  • 함녕(咸寧) 4(278) 양호(羊祜)는 병사했으며, 임종 시에 두예(杜預)에게 형주(荊州)를 진수할 것을 추천했다.
 

기원후 279

  • 함녕(咸寧) 5(279) 서북의 돌발수기능(禿髮樹機能)의 난이 평정되자, 왕준(王濬)과 두예(杜預)는 사마염(司馬炎)에게 상소하여 지금이 오()를 정벌할 때라고 주장했다. 가충(賈充), 순욱(荀媰) 등은 서북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반대했다.
  • 결국 사마염()은 같은 해 12월 오()나라를 공격하기로 결정했고, 역사는 이를 진() 멸오(滅吳) 지전(之戰)이라고 기록한다. 그는 가충(賈充)을 대도독(大都督)으로 삼고, 상류(上流)에는 왕준(王濬), 당빈(唐彬) 군을, 중류(中流)에는 두예(杜預), 호분(胡奮), 왕융(王戎) 군을, 하류(下流)에는 왕혼(王渾), 사마주(司馬伷) 군을 두어 여러 갈래로 진격하게 했다.
 

기원후 279

  • 함녕(咸寧) 5(279) 사마염(司馬炎)은 마륭(馬隆)을 양주(涼州)로 파견하여 반란을 평정하게 했고, 돌발부(禿髮部)의 백성들은 돌발수기능(禿髮樹機能)을 살해하고 항복했다.
 

기원후 280

  • 3월 건업(建業)을 압박하자, 손호(孫皓)는 대세가 기울었음을 보고 항복하여 손오(孫吳)는 멸망했고, ()나라는 천하를 통일하여 삼국시대는 끝이 났다.
  • 태강(太康) 원년, 호조식(戶調式)을 반포했는데, 이는 점전제(占田制), 호조제(戶調制), 품관점전음객제(品官占田蔭客制)를 포함한다. 태강(太康) 연간에는 번영하는 모습이 나타났으며, 이를 역사에서는 태강지치(太康之治)”라고 부른다.
  • 사마염(司馬炎)은 위()나라 종실이 쇠미해지고 황실이 고립되어 약해져 결국 멸망에 이른 교훈을 거울삼아, 황족을 대규모로 제후왕(藩王)에 봉하여 사족(士族)에 대항하게 했다. 처음에는 왕들을 봉했지만 봉국으로 가지 않고 수도에 머물며 황실을 보좌하게 했고, 나중에는 제왕들을 각자의 봉국으로 보내어 제군사(諸軍事)를 도독(都督)하게 했으며, 그 후에는 요해지를 진수하게 했다. 이러한 조치의 목적은 사족(士族) 중 야심가들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팔왕의 난(八王之亂)”은 이러한 정책이 오히려 중병을 쥔 제왕들 속에서 많은 야심가들을 양산했음을 증명했다.
  • 전국 통일 후, 사마염(司馬炎)은 조서를 내려 "모든 주군(州郡)의 병사를 철폐하고, 대군(大郡)에는 무리(武吏) 100명을, 소군(小郡)에는 50명을 배치한다"고 규정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각 주()에서 사건이 없는 곳은 병력을 철폐한다.
  • 자사(刺史)는 감사(監司)의 역할만 하고, 장군의 명호(名號)를 폐지하며, 병력을 지휘하지 않고, 병사를 지휘하는 교위(校尉) 관직도 겸하지 않는다.
  • 군민분치(軍民分治)를 실시하여, 도독교위(都督校尉)는 군대를 다스리고, 자사태수(刺史太守)는 백성을 다스린다.
  • 주군병(州郡兵)을 폐지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지방관이 민사에 전념할 수 있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역을 담당하는 과정(課丁)을 확대할 수 있었다. 병역은 한() 영제(靈帝) 광화(光和) 7(184) 이후 농민들의 가장 무거운 부담이었기 때문에, 이 부담을 면제하는 것은 생산력 회복에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모든 주군병(州郡兵)을 철폐함으로써 치안조차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영녕(永寧) 원년(301) 천하가 대란에 빠졌을 때 사태를 통제할 힘이 없었다.
  • 서진(西晉)의 황족과 귀족들은 모두 풍족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정치적 안정과 통일은 그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데 더욱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마음껏 향락을 즐기며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진 무제(晉武帝)가 앞장서서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모범을 보였다. 진서(晉書) 호귀빈전(胡貴嬪傳)에 따르면, “진 무제는 많은 후궁을 두었고, ()를 평정한 후에는 오왕(吳王) 손호(孫皓)의 궁녀 수천 명을 추가로 받아들였다. 이로써 후궁이 거의 만 명에 이르렀고, 총애를 받는 이들도 매우 많아 황제는 누구를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항상 양차(羊車)를 타고 마음대로 다니며, 연회와 침실에서 지냈다.” 사치와 낭비로 풍기는 날로 악화되었다.
  • 공경(公卿)과 귀유(貴遊)들도 따라서 부를 다투고 호화로움을 겨루었다. 대신 하증(何曾)은 매일 식사에 1만 전을 썼지만 여전히 젓가락을 댈 곳이 없다고 했고, 그의 아들 하소(何劭)는 반드시 사방의 진귀한 음식을 먹어야 했으며, 하루 식비가 2만 전이었다. 왕개(王愷)는 무제의 외숙이었는데, 당시 최고 부자였던 석숭(石崇)과 부를 과시하며 경쟁하고, 호화로움을 자랑했다. 이런 사치스럽고 타락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재물을 모으는 데 급급해졌고, 따라서 부패와 뇌물 수수가 일상화되었다. 당시 어떤 사람은 사치의 비용이 천재지변보다 더 심하다고 지적했는데, 그 해악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이는 간접적으로 그의 아들의 생활 태도를 형성했다. 진혜제(晉惠帝)에게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다고(천하가 흉년이라 백성들이 굶어 죽는다) 보고했을 때, 진혜제는 오히려 어찌 육미(肉糜, 고기죽)를 먹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기원후 282

  • 태강(太康) 3(282)에는 호구가 377만 호에 달했다. 진서(晉書) 식화지(食貨志)에는 ()를 평정한 후, 천하가 무사하고 부세가 공정하며, 백성들은 모두 자신의 생업에 안정하고 즐거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원후 290

  • 태희(太熙) 원년(290) 4월 기유일(516), 진 무제(晉武帝) 사마염(司馬炎)은 함장전(含章殿)에서 붕어했으며, 향년 55세였다.
  • 5월 신미일(612), 준양릉(峻陽陵)에 안장되었다. 그의 차자 사마중(司馬衷)이 즉위하여 진혜제(晉惠帝)가 되었다.
  • 그러나 1년 후, 황후 가남풍(賈南風)이 정변을 일으켜 조정을 총괄하던 대신 양준(楊駿)을 살해했고, 이어서 팔왕지란(八王之亂)’이 발생했다.
  • 건흥(建興) 4(316), 유연(劉淵)의 조카 유요(劉曜)가 장안(長安)을 공략하여 마지막 황제 사마업(司馬鄴)을 사로잡으면서 서진(西晉)은 멸망했다. 이는 사마염(司馬炎)의 사망으로부터 불과 26년 후의 일이었다.
 

가족관계

  • 증조부 : 사마방(司馬防)
    • 조부 : 고조 선황제 사마의(高祖 宣皇帝 司馬懿)
    • 조모 : 선목황후 장씨 장춘화(宣穆皇后 張氏 張春華)
      • 백부 : 세종 경황제 사마사(世宗 景皇帝 司馬師)
      • 백모(정처) : 경회황후 하후씨 하후휘(景懷皇后 夏侯氏 夏侯徽)
      • 백모(후처) : 경헌황후 양씨 양휘유(景獻皇后 羊氏 羊徽瑜)
  • 외증조부 : 왕랑(王朗)
    • 외조부 : 난릉후 왕숙(蘭陵侯 王肅)
      • 부황 : 태조 문황제 사마소(太祖 文皇帝 司馬昭)
      • 모후 : 문명황후 왕씨 왕원희(文明皇后 王氏 王元姫)
  • 황후(정후) : 무원황후 양씨 양염(武元皇后 楊氏 楊艶) (237~274)
    • 1황자 : 비릉도왕(毗陵悼王) 사마궤(司馬軌)
    • 2황자 : 황태자 사마충(司馬衷) (서진 혜제)
    • 황태자비(정후) : 혜문황후 가씨 가남풍(惠文皇后 賈氏 賈南風)
    • 황태자비(계후) : 혜헌황후 양씨 양헌용(惠獻皇后 羊氏 羊献容)
    • 3황자 : 진헌왕(秦獻王) 사마간(司馬柬)
    • 7황녀 : 평양공주(平陽公主)
    • 8황녀 : 신풍공주(新豊公主)
    • 9황녀 : 양평공주(陽平公主)
  • 황후(계후) : 무도황후 양씨 양지(武悼皇后 楊氏 楊芷) (259~292)
    • 16황자 : 발해상왕(渤海殤王) 사마회(司馬恢)
  • 황후(추존) : 효회태후 왕씨 왕원희(曉懷太后 王氏 王媛姬)
    • 17황자 : 예장왕(豫章王) 사마치(司馬熾) (서진 회제)
    • 황자 비(정후) : 회황후 양씨 양난벽(懷皇后 梁氏 梁蘭璧)
  • : 귀빈 좌씨 좌분(貴嬪 左氏 左芬)
  • : 귀빈 호씨 호방(貴嬪 胡氏 胡芳)
    • 11황녀 : 무안공주(武安公主)
  • 궁인 : 부인 이씨(夫人 李氏)
    • 9황자 : 회남충장왕(淮南忠壯王) 사마윤(司馬允) (272~300)
    • 15황자 : 오효왕(吳孝王) 사마안(司馬晏)
      • 황손 : 진왕(秦王) 사마업(司馬業) (서진 민제)
  • 궁인 : 부인 제갈씨 제갈완(夫人 諸葛氏 諸葛婉)
    • 13황자 : 여음애왕(汝陰哀王) 사마모(司馬謨)
  • 궁인 : 미인 심씨(美人 審氏)
    • 4황자 : 성양회왕(城陽懷王) 사마경(司馬景) ( ~270)
    • 8황자 : 초은왕(楚隱王) 사마위(司馬瑋) (271~291)
    • 12황자 : 장사여왕(長沙厲王) 사마예(司馬乂) (277~304)
  • 궁인 : 미인 진씨(美人 陳氏)
    • 11황자 : 청하강왕(淸河康王) 사마하(司馬遐)
  • 궁인 : 미인 조씨(美人 趙氏)
    • 18황자 : 대애왕(代哀王) 사마연(司馬演)
  • 궁인 : 재인 서씨(才人 徐氏)
    • 5황자 : 성양상왕(城陽殤王) 사마헌(司馬憲)
  • 궁인 : 재인 궤씨(才人 匱氏)
    • 6황자 : 동해충왕(東海沖王) 사마지(司馬祗)
  • 궁인 : 재인 조씨(才人 趙氏)
    • 7황자 : 시평애왕(始平哀王) 사마유(司馬裕)
  • 궁인 : 재인 정씨(才人 程氏)
    • 14황자 :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 궁인 : 보림 장씨(保林 張氏)
    • 10황자 : 신도회왕(新都懷王) 사마해(司馬該)
  • 아우 : 제헌왕(濟獻王) 사마유(司馬攸)
  • 아우 : 성양애왕(城陽哀王) 사마조(司馬兆)
  • 아우 : 요동도왕(遼東悼王) 사마정국(司馬定國)
  • 아우 : 광한상왕(廣漢殤王) 사마광덕(司馬廣德)
  • 누이 : 경조장공주(京兆長公主)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모우리(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모우리 (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 ( 牟義理 )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   【 1878 년 】 미국 오하이오주 벨빌 (Bellville) 근교에서 사무엘 모우리 (Samuel Mowry, 1850-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