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소(司馬昭, AD. AD. 211~265년) : 사마의의 아들, 진의 황제 사마염의 아버지
- 이름 : 사마소(司馬昭) - 진(晉)의 실질적 창업자
- 자(字) : 자상(子上)
- 시호 : 문제(文帝) - 황제로 추존됨
- 묘호 : 태조(太祖) - 진 왕조의 실질적 시조로 묘호 받음
- 출생 : 211년 / 낙양
- 사망 : 265년 9월 6일 / 하남
- 가문 : 사마씨(司馬氏) - 진나라 황실
【기원후 211년】
- 사마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
【기원후 239년】
- 239년 사마소(司馬昭)는 신성향후(新城鄉侯)에 봉해졌다. 후에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전임되었다.
【기원후 244년】
- 244년에는 정촉장군(征蜀將軍)으로서 조상(曹爽)을 따라 촉을 정벌하며 하후현(夏侯玄)을 보좌했다.
- 촉의 장수 왕평(王平)이 야습으로 사마소(司馬昭)의 진영을 공격했을 때, 사마소(司馬昭)는 누워서 움직이지 않았고, 왕평(王平)은 물러갔다. 사마소(司馬昭)는 하후현(夏侯玄)에게 “비의(費禕)가 험지를 점거하고 있어 진군해도 교전할 수 없고 공격도 불가능하니, 즉시 회군하여 추후에 다시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사마의(司馬懿)도 하후현(夏侯玄)에게 편지로 설득하자, 하후현(夏侯玄)은 결국 조상(曹爽)을 설득해 군대를 돌렸다.
- 전쟁 후 사마소(司馬昭)는 의랑(議郎)으로 좌천되었다. 《태평어람(太平御覽)》은 이 일을 사마사(司馬師)의 일로 잘못 기록했다.
【기원후 249년】
- 249년 사마의(司馬懿)는 고평릉지변(高平陵之變)을 비밀리에 모의했고, 정변 전날 밤에야 사마소(司馬昭)에게 알려주었는데, 사마소(司馬昭)는 매우 긴장했다. 고평릉지변(高平陵之變) 후, 조상(曹爽) 일가는 멸족되었고, 사마의(司馬懿)는 국정을 전권으로 장악하기 시작했다.
- 곡성지전(曲城之戰) 당시, 사마소(司馬昭)는 안서장군(安西將軍)으로서 낙곡(駱谷)으로 진군하여 강유(姜維)를 퇴각하게 만들었고, 구안(句安)이 항복했다. 이후 안동장군(安東將軍), 지절(持節)로 전임되어 허창(許昌)을 진수했다. 왕릉지란(王淩之亂) 때는 회북제군(淮北諸軍)을 통솔하며 군대를 이끌고 사마의(司馬懿)와 항(項)에서 만났다.
【기원후 251년】
- 251년 사마의(司馬懿) 사망 후, 그의 장자 사마사(司馬師)가 부군대장군(撫軍大將軍) 자리를 이었다. 동관지전(東關之戰) 때 사마소(司馬昭)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후(侯) 작위를 잃었다.
【기원후 254년】
- 254년 강유(姜維)가 농서(隴西)로 출격하자, 사마소(司馬昭)는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임명되어 장안(長安)에 주둔했다. 반란을 일으킨 신평강(新平羌)을 격파한 공로로 신성향후(新城鄉侯)에 다시 봉해졌고, 후에 위제(魏帝) 조방(曹芳)을 폐위시키고 조목(曹髦)을 옹립했다. 이 공로로 고도현후(高都縣侯, 병주 상당군 소속)로 진작되었고, 식읍이 2천 호 증가했다.
- 사마사(司馬師)가 군대를 이끌고 괵구검지란(毌丘儉之亂)을 진압할 때, 사마소(司馬昭)는 중령군(中領軍)을 겸임하며 낙양(洛陽)을 진수했다. 사마사(司馬師)가 군대를 돌릴 때 허창(許昌)에서 중병을 앓자, 사마소(司馬昭)는 문병을 갔고 위장군(衛將軍)에 임명되었다. 사마사(司馬師)가 사망한 후, 13세의 황제 조목(曹髦)은 사마소(司馬昭)에게 허창(許昌)에 남아있으라 명령하고, 상서(尚書) 부갈(傅嘏)에게 대군을 이끌고 낙양(洛陽)으로 돌아오게 하여 사마씨(司馬氏) 가문에서 권력을 빼앗으려 했다. 사마소(司馬昭)는 부갈(傅嘏)과 종회(鍾會)의 계책을 따라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낙양(洛陽)으로 돌아왔고, 조목(曹髦)의 권력 탈취는 실패했다. 이후 사마소(司馬昭)는 대장군(大將軍), 시중(侍中)으로 진위하고, 중외제군(中外諸軍)을 도독(都督)하며 상서사(尚書事)를 기록하여 국정을 보좌했다. 그는 전각에 올라갈 때 검을 풀지 않고, 신발을 벗지 않아도 되었다.
【기원후 256년】
- 256년에는 대도독(大都督)으로 진급하고 고도현공(高都縣公)에 진작되었으며 구석(九錫)이 더해졌고, 후에 3현의 식읍이 추가로 봉해졌다.
【기원후 256년】
- 256년, 사마소(司馬昭)는 조위(曹魏) 황제 조모(曹髦)와 함께 진동대장군(鎮東大將軍) 제갈탄(諸葛誕)의 반란을 평정했다. 사마소(司馬昭)는 군대를 이끌고 제갈탄(諸葛誕)을 정벌했다. 동오(東吳)는 문흠(文欽)과 전익(全懌), 전단(全端), 당자(唐咨), 왕조(王祚) 등을 파견하여 병력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고, 왕기(王基)의 포위망이 완성되지 않은 틈을 타 군대를 이끌고 수춘성(壽春城)으로 들어갔다. 사마소(司馬昭)는 위(魏)군 주력을 지휘하여 수춘(壽春)에 있는 약 18만 명의 오(吳)군과 반란군을 포위하고, 한편으로는 그들이 구원병이 올 것이라고 오해하게 만들어 식량을 아끼지 않게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군을 투항시키고 와해시켰다. 제갈탄(諸葛誕)의 부하들이 대거 항복했으며, 위(魏)군 방어 시설 공격을 위한 돌파 시도는 실패했고, 내부 갈등이 격화되었다. 제갈탄(諸葛誕)은 문흠(文欽)을 죽였고, 문흠(文欽)의 아들 문앙(文鴦)과 문호(文虎)는 사마소(司馬昭)에게 투항했다. 이어서 성 주변을 돌며 항복을 권하자, 성 안의 장수들은 문흠(文欽)의 아들들도 사면되는 것을 보고 모두 항복할 뜻을 가졌다. 사마소(司馬昭)는 성벽 위 수비병들이 활만 들고 화살을 쏘지 않는 것을 보고 공격 명령을 내렸고, 위(魏)군이 수춘(壽春)에 진입하자 호분(胡奮)이 전장에서 제갈탄(諸葛誕)을 베어 죽이며 전역은 끝이 났다. 이 전투에서 오(吳)군은 직접 전투에 참가한 병사만 해도 십수만 명이었고, 제갈탄(諸葛誕)의 18만 군대를 합하면 30만 명이 넘었는데, 이는 사마소(司馬昭)가 지휘한 26만 명을 초과하는 숫자였다. 게다가 위(魏)나라는 서쪽에서 촉(蜀)나라의 침공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소(司馬昭)는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를 이겨 전쟁에서 승리했다. 사마소(司馬昭)는 이 공로로 상국(相國)으로 승진했지만 받기를 거부했다.
【기원후 260년】
- 위(魏) 감로(甘露) 5년(260년) 4월, 위(魏) 황제 조모(曹髦)는 왕침(王沈), 왕경(王經), 왕업(王業) 등을 만나 분노하여 “사마소(司馬昭)의 마음은 길 가는 사람도 다 안다! 짐은 앉아서 폐위당하고 모욕당할 수 없다. 오늘 경들과 함께 직접 나가 토벌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궁인(宮人) 300여 명을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한 근신이 미리 사마소(司馬昭)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사마소(司馬昭)는 즉시 병력을 궁으로 들여 진압했다. 양측은 궁궐 안 동지차문(東止車門)에서 마주쳤고, 중호군(中護軍) 가충(賈充)이 남궐(南闕) 아래에서 군대를 이끌고 조모(曹髦)를 맞이했다. 가충(賈充)은 성제(成濟)에게 조모(曹髦)를 죽이도록 명령했고, 성제(成濟)는 창으로 조모(曹髦)를 찔러 살해했다. 후에 사마소(司馬昭)는 성제(成濟) 일족을 죄를 물어 주살했다. 사마소(司馬昭)는 조환(曹奐)을 옹립하여 위(魏) 원제(元帝)로 삼았다.
【기원후 263년】
- 263년 여름, 조위(曹魏)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마소(司馬昭)는 촉한(蜀漢)에 대한 최후의 전쟁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 전쟁을 통해 황제를 시해하여 생긴 불리한 영향을 만회하고자 했으며, 촉한(蜀漢) 정벌에 반대하는 장수 등돈(鄧敦)을 처형했다. 종회(鍾會), 등애(鄧艾), 제갈서(諸葛緒) 등을 파견하여 동, 중, 서 세 갈래 길로 한중(漢中)을 공격했다. 촉한(蜀漢)은 강유(姜維)를 중심으로 저항군을 조직하여 검각(劍閣)의 험난한 지형에서 종회(鍾會)의 군대와 대치했고, 종회(鍾會)는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등애(鄧艾)는 정예 병력을 이끌고 음평(陰平)을 넘어 부성(涪城)을 점령했고, 면죽(綿竹)에서 제갈첨(諸葛瞻)을 격살한 후 성도(成都)를 압박했다. 촉한(蜀漢)의 후주(後主) 유선(劉禪)은 항복했으며, 강유(姜維)는 이 소식을 듣고 부하들과 함께 종회(鍾會)에게 투항하여 촉한(蜀漢)은 멸망했다. 이는 삼국 통일의 서막을 열었다.
【기원후 264년】
- 위(魏) 원제(元帝)는 264년 5월 2일(경원(景元) 5년 3월 30일) 다시 조서를 내려 사마소(司馬昭)를 상국(相國)에 임명하고 진왕(晉王)으로 승진시켰다. 구석(九錫)을 더하고 그 지위를 제후왕(諸侯王)들보다 높게 하며, 상소할 때 신하를 칭하지 않고, 조서를 받을 때 절하지 않고, 천자의 수레와 의복으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했다. 곽태후(郭太后)는 이전에 세상을 떠났고, 사마씨(司馬氏)가 위(魏)나라를 대신할 세력은 이미 확고했다.
【기원후 265년】
- 265년 사마소(司馬昭)는 사망 후 숭양릉(崇陽陵)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아들 사마염(司馬炎)이 위(魏)나라를 대신하여 제위에 올라 국호를 진(晉)이라 칭했고, 역사에서는 서진(西晉)이라 부른다. 사마소(司馬昭)는 문제(文帝)로 추존되었고, 묘호는 태조(太祖)였다.
【가족 관계】
- 부친 : 사마의(司馬懿) - 조위의 실권자, 진의 시조로 추존
- 모친 : 선목황후(宣穆皇后) - 장춘화(張春華)
- 아내 및 첩 (妻妾)
- 정실 : 왕원희(王元姬) - 문명황후(文明皇后)로 추존
- 첩 : 이염(李琰) - 태시 3년(267), 수화(修華)에 봉해짐
- 첩 : 왕선(王宣) - 수용(修容)에 봉해짐
- 첩 : 서염(徐琰) - 수의(修儀)에 봉해짐
- 첩 : 오숙(吳淑) - 첩여(婕妤)에 봉해짐
- 첩 : 조정(趙珽) - 충화(充華)에 봉해짐
- 형제 (兄弟)
- 사마사(司馬師) - 진 경제(晉景帝), 생모(장춘화), 형, 무자 → 사마유가 후사로 입양
- 사마간(司馬榦) - 평원왕(平原王), 생모(장춘화)
- 사마량(司馬亮) - 문성왕(文成王), 생모(복부인), 팔왕의 난 중 한 명
- 사마주(司馬伷) - 무왕(武王), 생모(복부인), 진 원제의 조부
- 사마경(司馬京) - 청혜정후(清惠亭侯), 생모(복부인), 무후사
- 사마준(司馬駿) - 무왕(武王), 생모(복부인)
- 사마융(司馬肜) - 효왕(孝王), 생모(장부인)
- 사마륜(司馬倫) - 조왕(趙王), 생모(백부인), 팔왕의 난 주역, 일시적 즉위
- 아들 (子嗣)
- 사마염(司馬炎) - 생모(왕원희), 진 무제(晉武帝), 제위 계승
- 사마유(司馬攸) - 생모(왕원희), 제2황자 → 사마사의 양자, 제(齊)왕
- 사마조(司馬兆) - 성양애왕(城陽哀王), 10세에 요절
- 사마정국(司馬定國) - 요동도혜왕(遼東悼惠王), 3세 사망
- 사마광덕(司馬廣德) - 광한상왕(廣漢殤王), 2세 사망
- 사마감(司馬鑒) - 악안평왕(樂安平王)
- 사마기(司馬機) - 연왕(燕王), 사마경의 양자
- 사마영조(司馬永祚) - 악평왕(樂平王), 요절
- 사마연조(司馬延祚) - 요절 후 추봉, 악평왕(追封)
- 딸 (女兒)
- 경제공주(京兆公主) - 생모(왕원희), 곽덕(郭德, 또는 甄德)에게 출가, 아들 곽희(郭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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